노동 유연성의 가속화? 유연 안정화?
태풍은 노동 시장의 '더 많은 유연성'을 겨냥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담화문에서 노동 시장의 유연성을 거듭 언급하며 노동 개혁을 미룰 수 없다고 강조했다. 노사정 합의문은 취업 규칙 개정을 통한 일반 해고 도입의 길을 열어두어 야당과 노동계의 극심한 반발을 사고 있다. 물론 일방적으로 유연성만 강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대통령 담화문에는 사회 안전망을 더 튼튼히 하겠다는 언급도 있었으며, 노사정 합의문에는 "사회 안전망을 획기적으로 확충"한다는 좀 더 적극적인 표현이 들어갔다. 이렇게 보면 현 정부의 노동 시장 정책 방향은 2000년대 중·후반 이래 유럽연합(EU)의 노동 시장 정책 방향인 '유연 안정성(flexicurity)'을 떠올리게 한다.
문제는 '유연성'과 '안정성'을 모두 강조했지만, 정부의 실제 정책은 유연성에서만 구체적이라는 점이다. 최근 정부가 제시한 노동 시장 개혁 방안인 일반 해고, 임금 피크제, 기간제 근로자의 사용 기한 연장, 파견 근로자 사용 영역 확대 등은 하나같이 노동 유연화를 가속화하는 조치들이다. 물론 그 중에는 임금 피크제와 같이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과제도 있다. 하지만 한국이 외환 위기 이후 지속적인 유연화로 이미 매우 유연한 노동 시장을 가지고 있음을 고려한다면, 이것이 과연 올바른 순서인지는 의문이다. 한국에서의 유연 안정성을 위해 더욱 시급한 '사회 안전망의 획기적인 확충'에서는 구체화된 정책으로 제시된 것이 지난달 발의된 고용 보험과 산재 보험 개정안 정도가 전부이다.
물론 이 두 가지 모두 노동자에게 매우 중요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특히 노동 시장 정책에서 고용 보험은 핵심적인 제도이다. 한국의 고용 보험은 실업 급여와 적극적 노동 시장 정책을 결합한 고용 관련 정책의 중추일 뿐 아니라, 유연 안정성의 확보를 위해서도 가장 중요한 제도이다. 따라서 고용 보험 개정안만이라도 제대로 된 내용들을 담고 있다면, 정부의 '유연하지만 안정적인 노동 시장'을 향한 진심을 어느 정도 믿어줄 수도 있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부의 개정안이 고용 보험의 가장 시급한 문제를 어느 정도라도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고용 보험의 해묵은 숙제, 사각지대
한국의 사회 보험 제도들이 대개 그렇지만 고용 보험 또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제도의 사각지대에 있다. 이번 개정안이 주로 다루고 있는 실업 급여를 중심으로 고용 보험의 사각지대를 살펴보자. 고용 보험의 사각지대는 ① 적용상의 사각지대, ② 급여 수급상의 사각지대, ③ 급여 수급 이후의 사각지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적용상의 사각지대는 제도적으로 적용 대상이 아닌 경우와 실질적으로 배제된 경우로 구분된다. 제도적으로 제외된 경우는 자영업자, 무급 가족 종사자, 공무원과 사립학교 교직원, 65세 이후 고용된 근로자, 단시간 근로자(주당 15시간 미만), 특수 형태 근로 종사자, 가사 근로자 등이다. 이들 중 공무원과 사립학교 교직원을 제외하면 대부분 일반적인 근로자보다 노동 시장에서 더욱 심각한 불안정을 경험하는 계층들로, 고용 보험 적용 확대나 다른 형태의 실업 보호 제도가 필요하다. 이들 제도적 비적용자와 달리, 일부 근로자들은 고용 보험의 적용 대상이지만 실질적으로 고용 보험에 미가입하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소규모 사업장에 종사하는 비정규직 또는 임시·일용직 근로자로 저임금과 고용 불안정 상태에 있다. 2015년을 기준으로 임금 근로자의 36%, 취업자의 53% 가량이 고용 보험의 적용상 사각지대에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둘째, 급여 수급상의 사각지대는 고용 보험 적용 대상이지만 실직 시 실업 급여를 수급하지 못하는 경우이다. 고용 보험 가입자라고 하더라도 실업 급여 수급을 위해서는 실직 전 18개월 내에 180일간 고용 보험 기여 이력이 있어야 하며(피보험단위기간 충족 조건), 실직 사유가 비자발적이어야 한다(이직 사유 조건). 기여 이력이 부족하거나 자발적으로 이직한 경우는 급여를 수급하지 못하는데, 2013년에 실직한 이들 중 약 69%가 실업 급여를 수급하지 못했다. 기여 이력에 대한 조건은 고용이 불안정하고 이직률이 높은 비정규직, 임시·일용직, 중소 영세기업 종사자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 자발적 이직에 대해 원천적으로 급여 수급권을 박탈하는 것 또한 선진국의 제도에 비해 지나치게 엄격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셋째, 급여 수급 이후에 발생하는 사각지대는 급여 수준과 기간의 문제이다. 실업 급여를 수급하더라도 그 수준이 지나치게 낮거나 기간이 짧다면 실직한 근로자의 생활 보장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다. 한국 실업 급여의 소득 대체율은 실직 전 소득의 50%를 기준으로 한다. 상한선(1일 4만3000원)이 낮아 많은 수급자가 실제로 50%를 받지는 못하지만, 하한선(최저 임금의 90%)의 작용으로 인해 50% 이상의 대체율을 적용받는 수급자도 많아 평균적으로는 50% 수준의 대체율을 보인다. 실직 전의 생활을 유지하기에는 부족한 수준이지만 그나마 하한선의 존재로 최소한의 수준은 유지하고 있다.
급여 수준보다 심각한 문제는 수급 기간이다. 한국 실업 급여(구직 급여)의 지급 기간은 가입 기간과 연령에 따라 90일~240일인데, 2013년 기준으로 약 절반이(47%) 4개월 이하, 89%가 6개월 이하에 해당한다. 이는 실업 급여의 실질 소득 대체율을 크게 떨어뜨려 실업자들이 자신의 상황과 숙련에 맞는 일자리를 찾을 수 있는 기회를 감소시킨다. 실업 급여 수급 기간의 소득 대체율만을 기준으로 볼 때는 국제적으로 아주 낮은 수준이 아니지만, 실직 후 1년 또는 5년간의 평균 대체율을 기준으로 비교하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저 수준이다.
고용 보험은 실업한 경우에 생활에 필요한 급여를 실시하여 근로자의 생활 안정과 구직 활동을 촉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이처럼 다수의 근로자가 제도의 밖에 있는 상황에서는 제도의 목적을 이룰 수가 없다. 더구나 제도의 밖에 있는 이들은 실업이 더 잦고, 실업으로 인한 소득 단절이 생활에 큰 위협이 되는 저임금, 비정규직, 임시·일용직 노동자와 영세 자영업자들이다. 많은 선진국과 달리 한국에는 조세로 뒷받침하는 부조 방식의 실업 관련 제도가 없고 오직 고용 보험 하나만 있는 상황인데, 고용 보험은 정작 이 제도를 가장 절실하게 필요로 하고 있는 이들을 외면하고 있다.
사각지대 늘리는 고용 보험법 개정안
그렇다면, 새누리당이 지난 달 '노동 개혁 5법'의 하나로 발의한 고용 보험법 개정안은 이와 같은 문제를 해소하고 있을까? 그렇지 않다. 사각지대를 줄이기는커녕 늘릴 위험마저 있다.
우선 적용상의 사각지대를 완화하기 위한 대책이 없다. 이와 관련된 조항은 65세 이후 새롭게 고용된 근로자를 적용 제외하던 것을 도급 계약의 반복 체결에 한해 포함한다는 것 하나다. 개선이라면 개선이겠지만 영향력은 거의 없다. 특수 형태 근로 종사자, 단시간 근로자, 가사 근로자 등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제도의 적용 대상이지만 실질적으로 제외된 경우나, 자영업자 및 고용 이력이 없는 청년 구직자와 같은 경우는 고용 보험법 개정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이기는 하다. 적용 대상이지만 실제로는 배제된 근로자의 문제도 법 개정으로 해결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들의 문제는 고용 보험법 개정과 별도로라도 우선적으로 다루어야 할 시급한 사안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개정안은 급여 수급상의 사각지대 문제를 오히려 악화시킬 것으로 보인다. 종전에 18개월간 180일로 되어 있던 기여 조건을 24개월 간 270일로 강화했다. 실업과 취업, 잦은 이직을 반복하는 상당수의 노동 시장 약자들이 추가로 실업 급여를 수급하지 못할 것이다. 개악이다. 자발적 실업에 대해 급여 수급권을 박탈하는 문제 또한 전혀 다루지 않았다.
급여 수급 기간은 120~270일로 일괄 30일 연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유일하게 개선이라고 할 만하다. 하지만 이렇게 되더라도 대다수 수급자는 6개월 미만의 급여를 수급하는 데 그친다. 부족하다. 급여의 소득 대체율을 종전의 50%에서 60%로 올리면서, 하한선은 최저 임금의 90%에서 80%로 낮춘다고 한다. 그런데 2014년 기준으로 급여의 50%를 받는 이들은 수급자의 5.5%에 불과하다. 상한선 적용자가 27.7%이고 하한선 적용자가 약 66.8%이다. 따라서 5.5%는 급여가 오른 대신 3분의 2는 급여가 깎였다. 조삼모사다. 아니, 깎인 쪽이 소득 하위자임을 고려하면 역진적 재분배다.
조기 재취업 수당은 폐지하겠다는 입장이다. 조기 재취업 수당은 실업 급여 수급자가 수급 가능 기간을 절반 이상 남기고 재취업하여 12개월 이상 취업을 유지하면 지급한다. 취업을 촉진하는 것이 목적인데, 실효성이 낮아 비판을 받아왔다. 그렇다고 폐지가 능사는 아니다. 단순히 폐지할 것이 아니라 실업 급여 수급일수를 남기고 취업한 경우 남은 수급 기간을 적립했다가, 또다시 실업했을 때 지급하는 방식으로 전환해야 한다. 현재는 일단 실업 급여를 수급하고 나면, 다음번 실직 시에는 실업 급여 수급 이후의 기여 이력만을 반영한다. 따라서 재취업 기간이 짧았던 실직자는 다시 실업 급여를 받기가 어렵다. 이런 제도는 반복적 실업을 경험하는 노동 시장 약자에게 불리하다. 그러나 이번 개정안에는 이와 같은 고려가 없이 그냥 조기 재취업 수당만 없앤다. 삭감이다.
정리하면, 개정안을 아무리 뜯어봐도 고용 보험의 사각지대에 대한 고민은 보이지 않는다. 꼭 필요한 제도 개선은 다루어지지 않았고(적용 대상 확대), 급여 수급의 사각지대는 악화시키고 있으며(기여 이력 강화), 급여를 올렸다는 주장은 조삼모사고(소득 대체율), 그나마 유일한 개선은 턱없이 부족하다(급여 수급 기간). 노동 시장의 더 많은 유연화를 향한 강력한 정책들은 잔뜩 올라왔는데, 고용 안정성을 개선하기 위한 대책은 없다. '유연하지만 안정적인 노동 시장'을 향한 진심은 발견되지 않는다. 오직 '더 유연한 노동 시장'을 향한 의지만 보일 뿐이다.
고용 안전망에 대한 총체적인 접근해야
한국의 노동 시장이 심각한 이중 구조를 가지고 있음은 널리 알려져 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격차가 크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격차가 크며, 아직도 노동법과 사회보험의 사각지대에 있는 비공식 고용의 비중이 높다. 정부는 노동 시장 이중 구조 문제를 빌미로 정규직에 대한 보호를 완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OECD에 따르면 한국의 정규직에 대한 고용 보호 지수는 2013년을 기준으로 2.17로 2.29인 OECD보다 낮아 34개국 중 22위에 불과하다. 이른바 '유연 안정성'의 대표 주자로 손꼽히는 네덜란드(2.94)나 덴마크(2.32)는 우리보다 한참 높은 수준이다. (사용자 단체에서는 해고 비용으로 퇴직금이 산정되지 않은 탓이라고 주장하지만, 퇴직금이 퇴직 연금으로 전환되어 가고 있음을 고려하면 해고 비용보다는 노후 보장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한국에서 '유연하지만 안정된 노동 시장'을 추구하고자 한다면 우선 필요한 것은 고용 안정성 강화이다. 이를 위해서는 고용 보험의 사각지대 축소가 급선무다. 의무 적용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사용자의 의무 회피로 사각지대에 있는 노동자들을 위해, 사회보험료 지원 사업 확대 등의 지원 방안과 기여 회피 사업장에 대한 적발 강화 및 영세 사업장에 대한 고용 관계 파악 등의 관리 방안이 함께 필요하다. 특수 형태 근로 종사자, 단시간 근로자, 가사 근로자와 같이 근로자성이 분명함에도 고용 보험에서 적용 제외된 이들을 포괄하는 법 개정이 요구된다.
고용 보험의 적용 범위를 확대하려고 노력하더라도, 영세 자영자나 청년 구직자, 그리고 비공식 고용 노동자와 같이 사회보험 방식의 제도로 포괄하기 어려운 계층은 사각지대에 머무를 가능성이 크다. 실업 급여 수급 기간을 늘린다 하더라도 이 기간이 지나 수급 자격을 잃은 실직자는 발생할 것이며, 이들은 방치해두면 빈곤으로 추락한다.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조세로 지원되는 실업부조 형태의 제도가 필요하다. 이는 노동 시장의 이중 구조화가 심각하고, 사회보험의 사각지대가 크며, 공공 부조제도인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포괄 범위가 좁은 한국의 현실에서는 필수적이다.
관대한 실업 급여 정책은 근로 유인을 약화시키고 도덕적 해이를 초래한다는 우려가 있을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적극적 노동 시장 정책 강화로 대응할 수 있다. 실업 급여의 수급을 통해 생활을 지원하는 한편, 각각의 실직자에게 맞는 직업 훈련 및 구직 프로그램을 통해 재취업을 지원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실업 급여의 수급 기간을 줄이는 효과뿐 아니라, 각각의 개인들이 자신의 상황과 숙련에 맞는 일자리를 찾도록 함으로써 경제 전체의 효율성을 증진시키는 효과가 있다. 진정한 노동 시장의 개혁이다.
사회적 연대가 필요하다
'해고는 죽음이다'라는 외침에 대해 한 쪽에서는 '나도 좀 죽어보자'라고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상대적으로 안정된 일자리를 가진 이들은 고용 불안에 시달리는데, 다른 쪽에서는 아무리 애를 써도 안정된 일자리를 가져볼 수 없는 이들이 존재하는 우리의 현실에 대한 신랄한 풍자다. 사회 안전망의 미비로 일자리를 잃으면 생존의 위협을 받는 것도, 일자리가 없어 사실상 실망 실업 상태에 있는 수십만의 청년 구직자도 우리의 현실이다.
언뜻 우리 사회의 이중 구조와 그로 인한 균열을 보여주는 듯한 농담이지만, 이 이야기 속에는 우리가 연대할 수 있는 지점이 어디인지가 드러난다. 우리 사회에서 고용에 대한 불안은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있는 이든 현재 직장이 없는 이든 누구나 경험하는 문제다. 그리고 유연화의 시대에서 고용 안정성은 어느 특정한 이들의 상황을 개선해서 해소되는 것이 아니다. 노동 시장 전반을 고려한 총체적 고용 안전망의 구축이 필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여기서 사회 전체가 연대할 목표가 나올 수 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청년 구직자와 고령 근로자가, 근로자와 자영자가 함께 연대하여 고용 보험료 인상이든, 총체적인 고용 안전망 강화를 위해 필요한 복지 증세든 함께 목소리를 낼 수 있다면, 정치권이 이를 외면하기는 어렵다. 때마침 대통령도 유연하지만 안정적인 노동 시장을 '말'하고 있지 않는가. 고용을 매개로 한 사회적 연대가 진짜 '노동 개혁'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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