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가 전쟁터 무서워하니, 어찌 일인자가 되겠나?

[로마의 일인자 ②] 로마의 일인자, 한국의 일인자

로마(고대 로마)는 도시 국가에서 출발해 인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대제국으로 성장했습니다. 공화정 체제와 기독교 제국의 시작을 알렸고, 유럽과 아프리카 문명, 동양과 서양 문명의 교류를 이끌었습니다. 로마의 라틴어와 법률 체계는 지금도 서양 문명의 근간을 이루고 있습니다. 비잔틴 제국(중세 로마)을 포함하면 무려 2000년이나 유지된, 인류사에 유례를 찾기 힘든 다민족 국가였습니다.

로마 읽기는 그래서 비단 서양뿐 아니라 동양에서도 오래도록 이어져왔습니다. 수많은 이야기와 영웅을 낳았습니다. 많은 분이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김석희 옮김, 한길사 펴냄)를 기억할 겁니다.

고대 로마를 다룬 역작이 새로 나왔습니다. <가시나무새>로 우리나라에서도 큰 사랑을 받은 호주(오스트레일리아)의 작가 콜린 매컬로(1938~2015년)가 무려 20년에 걸쳐 총 7부작으로 쓴 '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즈 중 <로마의 일인자>(강선재·신봉아·이은주·홍정인 옮김, 교유서가 펴냄)가 주인공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1993년에 출간된 바 있으며, 이번 책은 새로운 번역서입니다.

총 3권으로 구성된 이 책은 7부작 '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즈의 1부입니다. 로마가 비틀거리는 공화정을 지나 전제 군주 체제로 입성하기까지 약 100년의 시간을 추적한 전체 시리즈 중, 마리우스가 로마 공화정의 중심에 오르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독재자 카이사르가 출현하기 전, 피 튀기는 정쟁의 소용돌이의 시작을 알리는 이야기입니다. 대하 드라마를 보는 듯한 박진감이 책 전반에 넘칩니다.

이 거대한 시리즈를 쓰기 위해 콜린 매컬로는 엄청난 양의 사료를 뒤져야 했습니다. 건강을 잃을 정도였습니다. 당시 출간되자마자 영미권의 베스트셀러에 올라 큰 화제를 모으기도 했던 이 시리즈를 독자 여러분께 친절히 안내해드리기 위해 <프레시안>이 교유서가와 공동으로 기획해 이 책을 먼저 읽은 세 분의 독후감을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앞으로 두 편의 서평은 모두 로마를 통해 오늘날 한국을 읽는 글입니다. 먼저, 두 번째 서평자 강희용 새정치민주연합 부대변인은 이 책이 말하는 '시대정신'의 의미를 현대에 맞게 짚고, 오늘날 위기에 처한 한국을 되살리기 위한 시대정신은 무엇인지, 이를 정치권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정리했습니다. 도시공학 박사이자, 문단에 정식으로 등단한 시인이기도 한 강 부대변인은 특히 야권 지도자를 향해 전선에 직접 뛰어들어 시민권을 확산한 마리우스의 과감함을 닮아야 할 때라고 강조합니다. 2100년 전 로마의 이야기가 현대 우리 사회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지금 알아봅니다.

로마의 일인자

① 로마의 탄생, 촌놈과 몰락 귀족이 손잡다

로마의 일인자, 한국의 일인자

역사에서 인물의 명멸은 일정한 법칙을 보여준다. 이 법칙에 작동하는 상수는 시대 흐름이다. 시대 흐름은 인물들의 개별 의지와 무관하면서도 당대 민중의 의식과 행동의 총합이자 당대 과학기술, 문화적 역량 및 경제력의 투영이다. 그만큼 도도하다. 물론 변수는 개별 인물들의 통찰력이다.

시대 흐름과 통찰력이 만나 시대정신을 이룬다. 시대정신은 역사와 인물이 명멸하는 법칙을 보여준다. 보통 시대정신은 사후적 평가인 경우가 많다. 그 시기가 지나면 누구든 알 수 있는 흔한 이야기일 수 있다. 이는 역사가 혹은 기록자의 몫이기도 하지만, 통찰력을 갖추지 못한 자들의 뒤늦은 한탄과 뒤섞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역사는 오로지 통찰력으로 인류의 진보와 시대정신의 갈구를 채워준 선구자들을 기억할 뿐이고, 그들을 일인자로 세워 왔다.

콜린 매컬로의 <로마의 일인자>는 2000년 전 이야기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현실과 맞닿아있다. 시대의 흐름, 권력의 변화 속에서 무수한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시대 흐름과 통찰력을 겸비한 자만이 새로운 체제의 주역이 되며, 그렇지 못한 자는 과거의 말라비틀어진 낡은 기득권을 움켜쥐려다 쓸쓸히 퇴장한다.

카이사르 가문이 연명하기 위한 선택은 비장했다. 두 아들과 두 딸을 통해 가문의 영광을 이어가겠다는 아비의 욕망은 30살 터울의 정략 결혼으로 이어진다. '순수 결혼'이란 권력의 욕망 앞에 부질없을 뿐이다. 당사자들 역시 권력의 욕망 앞에 사랑을 내세운 결혼 따윈 안중에도 없다. 그런 점에서 기원전 110년 전 그들의 욕망은 2015년 대한민국의 욕망과 그리 다르지 않다.

▲<로마의 일인자>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신봉아·이은주·홍정인 옮김, 교유서가 펴냄. ⓒ프레시안

카이사르의 장녀 율리아는 이 책의 주인공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결혼한다. 카이사르의 욕망은 장녀의 결혼을 통한 신진 부호 세력 가이우스 마리우스를 통해 생명을 연장한다. 혈통과 계급 중시 사회에서 미천한 가문의 마리우스를 선택한 것은 카이사르의 오랜 경륜으로부터 나온 통찰이면서 권력을 이어가고자 하는 욕망의 편린이기도 하다.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이미 원로원 절반의 의석을 사고팔 수 있을 정도의 재력과 능력을 겸비하고 있었다. 혈통의 부족을 재력과 능력으로 채우고 남았던 것이다. 카이사르의 결단이 마리우스를 택했다. 마리우스는 이 결혼으로 술라와 동서지간이 되며, 훗날 로마의 종신 독재관 카이사르의 고모부가 된다.

마리우스는 로마의 속주였던 아프리카의 알제리 일대에서 벌어진 유구르타 왕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출전하였다. 그곳에서 그의 인생을 바꾼 여성 점술가 마르타(Martha)를 만난다. 마르타는 마리우스에게 앞으로 일곱 번이나 집정관에 뽑힐 것이라 예언하였다. 귀족 출신이 아닌 마리우스에게는 놀라운 예언이었다. 마리우스는 그녀에게 아내의 조카 카이사르가 로마 최고의 일인자가 될 것이라는 예언도 듣게 된다. 물론 이는 작가의 상상력이 가미된 것이지만, 이야기 전체를 관통하는 동아줄 역할을 한다.

마르타의 예언은 마리우스에게 여러 인간적, 정치적 관계를 형성함에 있어 기준점 역할을 했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혈통을 극복하고 쟁취해야 할 권력에 대한 의지를 곧추세우는 추임새 역할도 하였다. 마리우스는 아프리카에서 돌아와 자신의 상관이었던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의 조롱과 억압을 뒤로 하고 집정관에 출마하여 차석으로 당선되었다. 집정관(consul)은 임페리움(imperium)을 지닌 로마의 최고위 직이다.

집정관 마리우스는 취임하자마자 로마 역사에 길이 남을 개혁 조치를 취한다. 원로원 회의의 반대를 물리치고 로마 역사상 최초로 시민 군대를 조직했다. 시민 군대의 탄생은 귀족들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이듬해 벌어진 게르만족과의 대치에서 전통 귀족 세력인 카이피오의 군대와 신진 세력인 나이우스 말리우스 사이에 벌어진 갈등으로 정점을 찍었다. 결국 두 부대는 게르만족에 완패했다.

이 사건은 오히려 마리우스가 추진했던 군대 개혁의 당위성에 힘을 실었고, 귀족 세력의 배타성이 로마에 어떤 위기를 몰고 오는 지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위기의 로마'가 강하고 유능한 지도자를 갈구하고 있을 때, 마리우스의 존재는 더욱 빛났다. 로마의 일인자 마리우스는 3선의 수석 집정관으로 선출되었고 기원전 100년까지 6선의 집정관직을 지낸다.

마리우스의 개혁 정책은 더욱 과감해졌다. 이탈리아 출신 노예들을 해방시켜 군의 보조 세력으로 육성함과 동시에 평시에는 이들을 도로와 운하 등 공공 사업에 투입하여 사회적·경제적 발전에 이바지하도록 기회를 주었다. 마리우스는 그들의 노동력을 착취가 아니라 노동으로 사회에 기여할 기회를 주고 이에 상응하는 시민권을 부여하고자 했다.

마리우스의 정당한 대우 정책은 보다 강력하고 사기충천한 군대를 만들었다. 마침내 섹스티아이 전투와 베르켈라이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는 배경이 되었다. 전쟁 중에 5선 집정관이 된 마리우스는 군대에서 전역한 장병들의 정착을 지원하는 개혁 정책도 추진했다. 이는 단지 퇴역 장병들을 위한 위문 차원의 정책이 아니라 당시 귀족들이 과점하고 있었던 토지 제도에 대한 개혁이기도 했다. 마리우스는 퇴역 장병들을 유사시 동원 가능한 예비군으로 편성하되, 이들을 통해 부재 지주들의 토지를 활용하고 이를 팍스 로마나(Pax Romana)의 전초기지로 삼는 구상을 추진한 것이다.

기원전 101년, 마침내 6선의 집정관이 된 마리우스는 계급과 출신에 상관없이 누구나 인정하는 '로마의 일인자가 되었다. 토지와 국가권력을 적절히 배분하고 효율성을 중시하는 마리우스의 태도는 귀족들에게는 질시와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은 이미 마리우스의 편이었다. 마리우스는 보편적 시민 권리의 확대라는 시대적 요구를 꿰뚫어보았고, 이를 당당하게 실천해낸 시대정신의 선구자였다.

<로마의 일인자>에서 등장인물들이 주고받는 편지를 엿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특히 장인 카이사르가 아프리카에 파견된 사위 마리우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한 편의 잘 정리된 보고서와 같다. 마리우스가 없는 로마의 원로원과 포룸 로마룸 등 주요 기관의 정치 상황과 권력 관계의 변화, 그리고 변방의 외적들과 군사적 움직임 등을 세세하면서도 정확하게 묘사하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또 마리우스의 상관이자 경쟁 관계에 있던 집정관 메텔루스에 대한 로마의 평판과 정보에 자신의 애정 어린 판단을 덧붙이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은 자신의 사위이자 미래 로마의 지도자로 성장할 젊은 마리우스에게 정치적으로 올바른 판단과 진로 모색에의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행간 곳곳에는 어쩔 수 없는 인간적 미안함과 따뜻함이 묻어난다. 카이사르의 둘째 딸 율릴라가 술라에게 쓴 강렬한 구애 편지는 마치 다른 사람의 연애편지를 훔쳐본 듯 가슴을 뛰게 만든다. 뛰어난 문체와 절절한 감정 표현이 압권이다.

콜린 매컬로는 독자들을 위해 '마스터스 오브 로마 가이드북'을 만들었다. 기원전 로마의 지도를 손수 그린 매컬로는 가이드북을 통해 인명과 지명, 제도와 생활 측면에서 자칫 독자들이 낯설기 쉬운 로마의 오브제를 그대로 전달하고 있다. 사실 매컬로는 <가시나무새>로 명성을 얻었지만, 역사 소설가로 그 치밀한 고증과 소설적 재구성으로 뛰어난 작가였다. 우리 시대에 만나기 어려운 매우 드문 작가정신의 발로를 이 책을 통해 유감없이 보여준다. 방대한 자료 수집과 상상력 넘치는 재구성으로 <로마의 일인자>는 역사와 소설, 소설과 역사의 경계를 넘나들며 둘을 양립하는 대업이 되었다. 사실 이것만으로도 <로마의 일인자>를 읽는다는 것은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가 담지 못했던 거대한 역사적 흐름을 짚어내는 거장의 통찰과 집념을 온전히 마주하는 일이다.

▲ 2100년 전 마리우스는 보편적 시민 권리의 확대를 시대정신으로 관철해 로마의 일인자가 되었다. 오늘날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이를 실현할 의지를 가진 이는 있는가. ⓒ연합뉴스

여의도 한 자락에 있는 사람으로서 마리우스가 자신의 태생적 한계를 딛고 권력과 명예를 쟁취하는 과정을 자연스럽게 주목하게 된다. 귀족 출신도 아닌 마리우스가 로마의 일인자로 부상한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로마의 대의와 이익을 위해 전방의 최전선에서 목숨을 내건 크고 작은 전쟁을 직접 지휘했기 때문이다. 로마 원로원은 비록 그가 로마가 아닌 전쟁의 현장에 있었지만 그를 지지하고 선출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아프리카 전투와 게르만족과의 전투를 직접 지휘하면서 로마의 지배적 지위를 확고하게 지킨 그에게 로마는 주저 없이 '로마의 일인자'라는 호칭을 부여했다.

얼마 전 새정치민주연합의 혁신위원회는 마지막 기자 회견을 통해 문재인 당대표와 안철수를 비롯한 전직 당대표에게 살신성인의 자세로 험지에 출마할 것을 권고하였다. 그 배경을 두고 여러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핵심은 문재인 당대표나 안철수 전 대표의 결단이다. 두 전·현직 대표는 야권의 유력한 대선 주자로 어느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독보적인 정치적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바로 짧은 시기에 고도의 정치적 압축 성장을 이뤄온 점이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그들의 정치적 경륜과 경험은 여전히 부족하다거나 미흡하다는 평가가 뒤따르고 있다.

역대 '한국의 일인자'들은 여야 없이 모두 냉혹한 선거 현장에서 이기거나 패하는 과정을 거치며 성장했다. 현장의 역사는 지거나 이기는 것 둘 중의 하나다. 그렇지만 이겨도 승리의 역사를 축적하지 못하거나, 져도 패배의 역사를 이겨내지 못한다면 아무리 많은 전투 경험도 의미가 없다.

돌아보건대 마리우스가 집정관으로 처음 선출되기 직전 그는 속주 아프리카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정벌에 주저 없이 나섰다. 집정관이 되어서도 게르만족의 침략으로부터 이탈리아 동맹들을 구하기 위해 직접 창을 들고 선두에서 지휘했다. 마리우스의 개혁은 시대정신에 입각했고, 로마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었다.

마리우스의 권위는 오로지 현장에서 발휘되었으며, 전투의 현장에서 쌓아 온 승리의 관록들이 그의 권력을 7선의 집정관으로 이끌었다. 2000년이 지난 지금, 마리우스는 한국의 일인자가 되고자 하는 그들에게 묻는다. '시대의 진보를 이끌 개혁의 동력, 그 찬란한 권력은 어디에서 만들어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