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철이 쓴 그리스 기행문 <문명의 배꼽, 그리스>(리더스북 펴냄)를 읽으며 전작주의 독서법이 떠올랐다. 지은이가 그리스로 여행을 떠나기로 마음먹은 데는 청년 시절 알게 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영향이 컸다고 말해서다. 사람마다 일상을 떨쳐버리고 여행을 떠나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런데 특정한 작가의 작품을 읽고 크게 감동해 전작주의 독서를 하게 되고, 결국에는 그가 살던 나라에 여행 가는 일은 흔하지 않다. 물론, 그 작가를 전공하는 사람이라면 가능하겠지만, 교양인 수준에서는 흔치 않다는 뜻이다. 이번 책이야말로 전작주의 독서의 가장 훌륭한 예가 아닌가싶다. 지은이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어느날, 단골 책방의 서가를 둘러보던 그 청년은 <예수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다>(고려원 펴냄)라는 책에 시선이 꽂혔습니다. 이름도 낯선 니코스 카잔차키스, 이 그리스 작가의 책을 산 청년은 콩닥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단숨에 읽어버립니다. 작은 불씨가 큰 산을 태우듯, 책을 읽어가면서 그의 가슴에는 점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불이 일었습니다. 마침내 그 뜨거운 불길이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버렸습니다.
벌써 20년이 훌쩍 넘은 이야기입니다. 그 불도장 같은 강렬함은 지금까지도 생생합니다. 아니 갈수록 더욱 강렬해지면서 지천명의 나이가 되기 전에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나라 그리스를 속속들이 들여다보게끔 이끌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이십대의 청년이 가슴에 새긴 꿈을 나이 오십을 앞두고 실현한 긴 여행의 기록입니다."
▲ <문명의 배꼽, 그리스>(박경철 지음, 리더스북 펴냄). ⓒ리더스북 |
그리고 여행기를 쓰면서 적절한 대목에 카잔차키스의 말을 삽입했다. 예를 들자면 이렇다. 지은이는 코린토스의 "거의 유일한" 그리스 유적인 아폴로 신전을 찾아간다. 이 유적을 찾아간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 건축이나 미적 가치로는 새삼스러울 바 없지만, 경관과 조화를 이루는 부분에서는 "실로 경탄을 금할 수 없는 곳 중 하나"라 평한다. 그러면서 백과사전식 정보와 지은이가 현지에서 느낀 바를 말한 다음, <영혼의 자서전>(안정효 옮김, 열린책들 펴냄)의 한 대목을 인용한다.
"그가 말했다.
아폴론은 세상의 조화와 아름다움을 꿈꾸고, 초연한 형태로 그것들을 이해한다네. 개체성으로 몸을 숨기며 그는 현상들의 광포한 바다 한가운데 꼼짝하지 않고 조용히 자신 있게 서서, 꿈속에서 열망했던 큰 놀음을 즐기는 것이지. 그래서 나는 이곳에 올 때마다, 나 자신이 이룩한 제신들의 신비주의적 계보에서 현재를 가장 단순하고 가장 통렬하게 표현할 길을 찾곤한다네."
이 책을 읽다보면 모든 글은 노골적인 인용과 은밀한 표절의 결과이구나 싶다. 여행지에서 느낀 바를 이야기할 때 지은이는 카잔차키스의 글을 인용한다. 그렇지만 유적지에 얽힌 역사를 장황하게 설명할 때는 특별히 출전을 밝히지 않는 대목이 많다. 결국 글을 쓰는 사람은 남의 글을 탐욕스럽게 읽은 사람들이라는 뜻이 아닐까. 하긴, 벤야민은 남의 글만 인용해 글을 쓰고 싶다는 말을 했으니, 새삼스러울 바도 없는 듯하다.
지은이가 이 여행기를 열권까지 쓰겠다고 기염을 토한 것을 보니, 아마도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김석희 옮김, 한길사 펴냄)를 염두에 둔 듯싶다. 기행문의 형식을 빌려 그리스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예술을 교양 수준에서 말해보겠다는 의지일 터다. 이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지은이가 택한 방법은 공간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것이다. 한 공간은 마치 지층과 같다. 각기 다른 역사가 켜켜이 쌓여있으니 말이다. 그곳에 가면 서로 다른 역사의 흔적이 남아있다. 더욱이 찾아간 곳이 그리스이지 않던가. 유적을 중심으로 신화와 역사, 그리고 예술을 한꺼번에 말하기 안성맞춤인 곳이다. 물론, 그러다보니 그리스에 대한 통사적 지식이 없는 이들에게는 헷갈리는 대목도 있고, 여행기에 어울리지 않게 너무 사전적인 지식이 튀어나오는 대목도 있는 것은 흠이다. 필력 좋기로 소문난 박경철이라 이 정도라도 해냈구나 여기면 될 성싶다.
여행기를 빙자한 그리스 문명사를 계획했다면, 더욱이 시오노 나나미를 의식한 '혐의'마저 있다면, 지은이가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의식을 설정하지 않았을 리 없다. 이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왜 하필 그리스였을까'가 된다.
"그리스 이전의 서구는 야만의 땅이자 야만의 시간이었다. 그런데 이 정지해버린 야만의 땅에 갑자기 한줄기 번개가 들이치고 문명의 불꽃이 점화되었던 것이다. 처음 이곳 그리스로 떠나올 때부터 가졌던 가장 본질적인 질문 가운데 하나가 다시금 떠올랐다. 왜 하필 그리스였을까?
남북으로 뻗고 동서로 가로지르는 산맥으로 경계 지어진 200여 곳의 폴리스가 허구한 날 피 튀기는 전쟁을 벌이다가, 서로 빼앗을 것이 떨어지면 떼 지어 바다로 나아가 해적질이나 일삼던 땅에 새로운 문명이 태어난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문명의 조건이 비옥한 대지에 넘치는 인구와 풍요 같은 것들이라면 그리스는 정확히 그 반대의 땅이다. 여름 내내 비 한 방울도 구경하기 어렵고, 허기와 갈증으로 쩍쩍 갈라지는 땅, 전체 강수의 99퍼센트가 불과 한두 달 사이에 쏟아지며 애써 개간한 밭들을 휩쓸어 가버리는 저주받은 땅, 오직 살갗을 태울 듯이 작열하는 태양 그리고 해류와 폭풍이 수시로 변덕을 부리는 바다만을 가진 땅. 이곳에서 찬란한 서구 문명이 일어섰다니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
이 대목을 읽으며 나는 지은이의 도전이 일정한 성과를 보였으면 싶었다. 우리 사회에 <로마인 이야기>가 너무 비판 없이 수용된 데에 대한 거부감 때문이다. 그 책은 한마디로 왜 로마는 제국으로 성장했으나, 일본은 그러하지 못했느냐는 문제의식으로 쓰였다. 로마역사를 바라보는 시오노 나나미의 시각은 다분히 제국주의적인 면이 있다. 이런 점을 의식하며 읽어야 하는데, 전혀 그러지 못한 점은 큰 문제다. 말하자면, 그리스 이야기가 <로마인 이야기>에 대한 해독제가 된다면, 말 그대로 균형 잡힌 독서로 이끌지 않겠는가 기대한다는 말이다.
<문명의 배꼽, 그리스>는 펠로폰네소스 반도가 배경이다. 코린토스와 스파르타를 톺아보고 있다. 여행기로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마사토니시 섬에 있다는, 헬레네와 파리스가 떠날 배를 묶어 놓았다는 쇠막대다. 정말, 그 때 쓰였던 쇠막대일까 싶어 웃음이 절로 난데다 신화가 역사가 된 장면의 한 상징이라 싶었다. 교양 문명사로서 공감하며 읽은 부분은 자신의 역사를 증언할 그 무엇도 남아 있지 않은 스파르타에 대한 지은이의 해석이었다. "진중했으나 획일성이라는 척박한 토양을 취했기에 문명의 씨앗이 잉태될 수 없었다"는 말은 오랫동안 곱씹어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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