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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삽질 군대', 위대한 길을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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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삽질 군대', 위대한 길을 만들다

[달리는 철도에서 본 세계] <4> 2000년 넘게 이어진 아피아 가도

지난 회에 고대 그리스에서 중세의 오스트리아까지 달려왔는데 이번엔 다시 고대로 돌아가 보자. 이렇게 앞으로 갔다가 다시 뒤로 가는 걸 철도에서는 스위치백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높은 산을 오르내리는 산악 열차의 운행 방식으로 쓰인다. 한국에도 영동선의 통리-나한정 구간에서 73년간 스위치백 시스템으로 운행된 노선이 있었는데 터널이 새로 뚫리면서 지난해 6월 27일 대전발 동해행 화물 열차를 마지막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 지난 편 바로 가기 : <스타워즈>의 고향에서 시작한 고대 그리스인의 철도)

철도는 인공적인 하드웨어인 선로로 이어진 길이다. 원래의 자연에 사람들이 자주 다녀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길이 아니라 목적의식적으로 만들어진 길이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목적의식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사회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었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이런 것을 사회 기반 시설이라고 부른다. 사회 기반 시설 혹은 사회 간접 자본은 사적인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공적 소유를 원칙으로 한다. 공공을 뜻하는 영어 '퍼블릭(public)'의 라틴어 어원은 '푸베스(pubes)'다. pubes는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란 전제 하에 자신만의 이해관계를 벗어나 사회 전체에 대해 각성된 시민의식(maturity)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민영화 또는 사유화를 뜻하는 '프라이버타이제이션(privatization)'이라는 말이 박탈을 뜻하는 라틴어 '프리바투(privatus)'에서 왔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민영화는 다수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것들을 소수의 전유물로 만드는 것이며 이것은 사회 구성원들의 권리와 이익을 박탈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사회 기반 시설을 뜻하는 영어 단어 인프라스트럭처(INFRASTRUCTURE)의 어원은 기초, 토대, 하부 구조란 의미의 라틴어 인프라(INFRA)다. 기초나 토대는 사람이 인공적으로 건설해야 한다. 이렇게 인공적으로 건설된 구조물을 스트룩투라(STRUCTURA)라고 부른다. '사회적 필요에 따라(INFRA) + 인공적으로 건설된(STRUCTURA)' 것이 바로 '인프라스트룩투라'라고 명명된 사회 간접 자본이다. 이 인프라스트룩투라가 활짝 꽃핀 곳은 고대 로마였다. 고대 그리스 문명의 뒤를 이은 로마 문명은 서양 문명의 모든 기초를 품은 씨앗이라 불린다. 많은 역사가들이 저마다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로마가 고대 서양 문명의 축으로 부상한 배경과 이유를 들고 있지만,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말처럼 고대 로마를 잘 설명하는 것도 없다. 로마는 바로 이 '길'을 통해서 시작됐고 완성됐다. 로마인들은 길의 중요성을 간파했다. 기원전 세계 문명에서 유일하게 하드웨어로서 건축물을 소유한 로마 사회는 압도적 힘으로 주변을 재패했다.

한국에서 한동안 로마 열풍을 이끌었던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에서 중요하게 다뤘던 주제 중의 하나도 바로 이 길이다. 이 책은 열린 사회와 갇힌 사회를 나누는 기준으로서 길에 대해 말한다. 길을 놓으면 그 처음과 끝은 아무 의미가 없어진다. 어떤 길이든지 시작하는 지점이 종착점이 되고 종착점이 또 시작점이기도 하다. 길이 품고 있는 지역의 모든 것은 평등하게 길로 수렴된다. 길을 연다는 것은 누군가 이 길을 통해서 들어올 수 있으며 또 이 길을 통해 미지의 공간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외부 세력의 침입이 두렵거나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지 않은 사회는 길을 열 수가 없다.

자연계의 길이 인공적인 길로 진화했고, 현대에 와서는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네트워크가 세계를 연결하고 있다. 이제 길은 소통의 중요한 물리적 수단으로 자리 잡아 어떤 사회가 열린 사회인지 닫힌 사회인지 가늠하는 잣대로까지 기능한다. 현대 국가의 지도자들이나 정부가 길이나 네트워크를 대하는 태도를 보면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위하는지, 협소한 당파적 이익을 챙기는지 알 수 있다. 고대 로마의 '길'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 주는 시사점이다.

▲ 로마의 아피아 가도를 알리는 도로 표지판 ⓒ박흥수

로마의 길과 끊긴 경의선 철도

2002년 2월 12일, 단절된 지 52년 만에 처음으로 경의선 열차가 임진강 철교를 넘어 새로 만들어진 도라산역에 도착했다. 2000년 9월 18일 경의선 복원 공사를 시작한 지 1년 5개월 만에 얻은 결실이었다. 분단의 아픔을 가슴에 안은 실향민을 태운 열차는 꽉 막혀 있던 남쪽의 육중한 철문을 열고 힘차게 기적을 울리며 세월의 강을 넘었다. 2002년 2월 20일에는 경의선 연결을 통해 남북 철도 복원에 힘을 기울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을 도라산역으로 불렀고, 부시 전 대통령은 레일 받침용 콘크리트 침목에 평화의 길을 알리는 서명을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임기 말인 2007년 5월 17일에는 그동안의 남북 철도 연결 사업이 열매를 맺었다. 경의선과 동해선에서 남북 철도 연결 구간 시험 운행이 동시에 이루어져 남과 북의 승객들을 태운 열차가 분단의 장벽을 뚫었다. 같은 해 12월 11일에는 2007년 제2차 남북 정상 선언에 따라 56년 만에 첫 정기 화물 열차편이 개성공단으로 가는 원자재를 싣고 군사 분계선을 넘었다. 이후 매일 한 차례씩 정기 화물 열차는 남과 북을 이어놓은 철로 위를 달렸다. 비무장 지대를 사이에 두고 적대적 대치를 지속했던 남과 북은 경의선이 복원된 딱 그만큼 화해의 손을 잡을 수 있었다.

경의선 복원 공사에서 제일 먼저 지뢰 제거 작업이 시작됐다. 적과 아군, 군인과 민간인,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터져 '눈 없는 살인자'라 불리는 지뢰가 제거되어 안전한 길이 되었다. 철도 노선 주변에 주둔하던 군부대가 이전하고 중무장한 채 총부리를 겨누는 대신 서로 필요한 물건을 싣고 달렸다. 길을 열고 소통의 장이 열리면 전쟁과 그만큼 멀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때부터 개성을 넘어 평양과 신의주, 베이징과 베를린과 파리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첫 관문이 열렸다는 희망이 생겼다.

경의선 남북 연결 구간 열차 승무를 맡았던 철도공사 서울기관차 승무 사업소의 경의선 담당 기관사들은 자신들이 보고 만난 북한의 모습과 사람들에 대해서 신나게 이야기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오래가지 않았다. 새로 등장한 이명박 정권은 '좌파 정권' 10년의 그림자를 걷어내겠다며 경의선 운행을 중단시켰다. 서울기관차 승무 사업소의 개성행 사업조는 슬그머니 사라지고, 담당 기관사들은 경부선이나 장항선의 다른 노선으로 배치됐다. 군사분계선의 철문이 닫히고 남과 북은 다시 철천지원수가 됐다. 길이 막힌 대가로 돌아온 것은 전쟁에 대한 위협이었다. 연평도와 황해도 해안의 남과 북의 대포들은 서해바다를 사이에 두고 불을 뿜었다. (☞ 관련 기사 : 한국 철도의 운명, 외국 자본 손아귀에 들어간다)

▲ 한국전쟁 때 폭파돼 움직이지 않는 비무장지대 안 경의선 장단역 증기 기관차. 보존 처리 작업을 거쳐 2009년 임진각(경기도 파주시) 안 전시장으로 옮겨졌다. 사진은 옮겨지기 전 모습. ⓒ연합뉴스

2013년 봄. 남과 북의 불신과 갈등은 더욱 깊어져 당장 내일이라도 전쟁이 날 기세다. 철길이 끊기고 개성공단이 폐쇄되고 도로가 차단되고 희미하게나마 이어진 직통 전화선조차 불통이다. 남과 북을 연결했던 든든한 동아줄이 점점 가늘어져 실타래처럼 아슬아슬하게 흔들리고 있다. 소통이 중단될수록 서로 의중을 알 수 없고, 갈등을 조장해서 이익을 얻는 집단의 입지만 강화될 뿐이다. 어쩌다가 한반도가 수많은 무고한 생명들을 놓고 벌이는 인질극의 한복판이 되었는지 안타깝기만 하다.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의 강점으로 외부의 문화를 스스럼없이 차용한 후 자신들의 것으로 동화시켜 사회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은 점을 뽑았다. 일찍부터 일본의 1번 국도라고 불리는 도쿄-교토 간의 도카이도(일본 동해) 노선 등 많은 길을 놓고, 외부의 문화를 쉽게 받아들이는 일본의 문화적 특성을 로마와 비슷한 것으로 격상시키려는 의도가 있다는 지적도 있지만, 일본인으로서 정체성을 자랑스러워하는 작가이기에 자신의 생각을 글로 녹여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테다. 어쨌든 로마는 길을 빼놓고서는 말할 수 없는 문명이다.

사실 로마는 제국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다. 팍스 로마나는 지금의 팍스 아메리카나처럼 곳곳에 파병을 했다. 로마 중심의 세계 질서를 위협하는 카르타고나, 대량 살상 무기를 숨겨두었다고 의심되는 갈리아족 같은 '악의 축'들을 제거하기 위한 원정을 수시로 시도했다. 고대 로마 가도들은 이 원정을 신속하고 과감하게 수행하게 도왔다. 로마에 도전하는 세력들을 번개처럼 응징할 수 있는 기동타격대는 잘 닦인 로마 가도를 통해서 적들이 미처 상상할 수 없는 시간에 로마의 군사력을 보여줬다.

2000년 넘게 이어진 로마의 길, 아피아 가도에 가다

지난해 10월 이탈리아 철도를 조사하려고 로마에 갔다. 로마에 도착한 날은 토요일이어서 공식 일정이 없었다. 새벽부터 서둘러 파리 외곽의 저가 항공사 전용 보베(Beauvais)공항을 이륙했지만, 기내에 응급 환자가 발생했다. 로마 참피노(Ciampino) 공항에서 의료진이 긴급 출동해 환자를 이송할 때까지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겨우 공항을 빠져나와 로마 도심 테르미니 중앙역 근처의 호텔에 체크인을 하니 이미 늦은 오후였다. 호텔에서 쉬겠다는 일행을 뒤로하고 로마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는 테르미니역으로 나왔다. 로마는 다른 유럽의 대도시들과 달리 지하철 노선이 1호선과 2호선, 단 두 개의 노선으로 운행된다. 시내 곳곳에 유적들이 너무 많아 유적 보호를 위해서 지하철을 건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두 개의 노선은 로마 시내를 X자로 운행하는데, 유일한 환승 지점이 테르미니역이다. 당연히 유동 인구도 많을 수밖에 없는 역이다.

▲ 로마 지하철 테르미니역, 로마 시내 유일한 환승역이다. ⓒ박흥수

로마의 날씨는 10월 중순임에도 반팔이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햇살이 따가웠다. 이 따가운 햇살 아래 전 세계에서 온 여행자들, 관광 가이드들, 상인들, 현지인들, 소매치기들이 한데 어우러져 토요일 오후를 달궜다. 유럽의 상당수 중앙역들이 그렇듯이 테르미니역도 한쪽이 막힌 채 역사가 선로를 ㄷ자 형태로 품고 있다. 역사 밖 광장에는 로마 주변 각지로 운행되는 버스 터미널이 있다. 이 터미널을 지나면 트램과 자동차들이 다니는 큰길이 나오는데 이 큰길을 건너면 로마 시내를 관광할 수 있는 투어버스 전용 정류장들이 있다.

서울을 비롯한 한국의 많은 시티 투어 버스처럼 로마 관광버스들은 티켓을 끊으면 버스를 운행하는 시간 동안 운행 노선 어디에서나 자유롭게 타고 내리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콜로세움이나 진실의 벽 같은 유명 관광지를 순회하는 노선을 비롯해 여러 종류의 노선이 있고 각각의 노선에 따라 정류장도 일정 간격 떨어져 있다. 나는 모든 다른 투어 노선들을 팽개치고 고대 로마 가도인 아피아 가도를 달리는 투어버스를 찾았다. 몇 번의 물음 끝에 초록색의 지붕이 없는 예쁜 2층 버스를 발견했다. 내가 찾던 아피아 가도 투어버스였다.

버스 2층에는 로마의 따가운 햇살을 피해 지붕이 있는 운전석과 조수석에 나란히 기사와 안내양이 앉아 있었다. 언제 출발하느냐고 물으니 20분 후에 출발하는 막차고, 중간에 내리면 다음 차는 없으니 돈이 아깝거나 시간 여유가 있으면 다음날 와서 타라는 충고를 들었다. 그러나 내일이란 없는 조사단 일정에서 친절한 충고에 따를 형편은 못됐다. 알았다는 말과 함께 버스에서 내려 근처의 기념품 판매소에 가서 생수를 샀다. 보통 0.5리터짜리 한 통에 1.5~2유로 하는 생수를 1유로에 판매 중이라고 가게 밖에 커다랗게 써놓았던 것을 봐뒀었다. 생수를 사들고 다시 버스로 돌아와 거금 10유로를 내니 안내양이 빨간색 이어폰과 작은 안내 팸플릿을 줬다. 우측통행하는 곳에서는 오른쪽에 앉으라는 일반론을 따라 빈 좌석 중에 맘에 드는 오른쪽 편 좌석에 앉았다. 로마의 햇살에 달궈진 의자가 엉덩이를 데웠다.

▲ 로마 테르미니 중앙역 인근의 아피아 가도 순환 버스 정류장에서 대기 중인 버스. ⓒ박흥수

사람들이 떠드는 사이에 깜빡 졸았던 잠을 떨쳐 버리고 눈을 떴다. 솔로와 커플인 관광객이 더 타서 모두 네 명의 승객을 태운 버스는 서서히 로마의 오후를 달리기 시작했다. 주변의 다른 투어버스들이 빈틈없이 관광객을 싣고 다니는 모습을 보면서 가장 인기 없는 노선의 버스를 탄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지만, 그 의미만큼은 남다르다는 자만심으로 로마 시내의 모습을 감상할 준비를 했다. 카르타고의 로마 원정군 사령관 한니발은 온갖 고생 끝에 로마 근처에 당도하고도 결국 로마 입성을 포기하고 돌아갔다. 로마를 간절히 보길 원했던 한니발에 비하면 나는 그보다는 훨씬 운이 좋고 행복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알프스를 넘는 고행도, 코끼리도 없이 느긋하게 2층 버스 의자에 기대고 비행기 기내 서비스 때 챙겨놓은 땅콩을 입 안에 던져 넣으며 눈앞에 펼쳐지는 로마를 감상하는 호사를 누리고 있으니.

버스는 로마의 유명 유적지 몇 곳을 스쳐 지나 외곽으로 빠졌다.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에 위치한 아피아 가도의 정문인 '포르타 산 세바스티아노'(Porta San Sebastiano)를 벗어나자 도심과는 다른 한적한 길이 나왔다. 버스가 속도를 낼수록 상쾌한 바람이 몸을 기분 좋게 두드렸다. 탈 때 받은 이어폰을 좌석에 설치된 구멍에 꽂고 언어를 영어로 선택했다. 일부 투어버스는 한국어 서비스가 지원되지만, 이 아피아 가도 투어 버스는 1세계 언어들만 제공했다. 오디오 안내 서비스를 굳이 듣겠다기보다는 무엇이든 제공받은 것은 사용해보는 버릇이 있어 여차하면 벗어버릴 요량으로 이어폰을 착용했다. 생각과 달리 영어 설명이 남자 성우 목소리의 느끼함만 빼면 의외로 간결하고 쉬워서 한국 유치원생 정도의 영어 실력을 갖고 있는 나도 이해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을 관통하는 아피아 가도의 정문인 '포르타 산 세바스티아노' ⓒ박흥수

아피아 가도를 따라 달리는 로마 외곽의 변두리 길은 고대의 길을 재현한 것이 아니라 그 길 자체였다. 고개를 돌려 버스가 달려온 길을 돌아보았다. 기원전에 놓인 돌들이 햇빛을 받아 반들반들 빛나고 있었다. 이 길을 따라 로마의 자랑인 군단 병사들이 행군했다. 기마병을 앞세운 붉은 망토의 집정관이 탄 마차가 지나고, 그 뒤를 군단의 주력인 중무장 보병들이 백인대장을 앞세워 걸었다. 또 뒤를 이어서 경 보병들과 군무원들이 따르는 모습을 상상했다. 고대의 길은 수많은 역사를 간직한 채 그 위에 또 새로운 사람들의 발걸음을 받아들이고 있다. 수천 년 이어져 온 길에, 카이사르가 원정을 나섰던 그 길에 내가 서 있다는 사실에 가슴 속에서 묵직한 무엇인가가 솟구쳤다.

로마인들은 아피아 가도를 가도의 여왕이라고 불렀다.

당대의 저술가 스타티우스가 남긴 기록을 보면

Appia teritur regina longarum viarum
아피아 테리투르 레지나 론가룸 비아룸
"아피아 가도는 도로의 여왕이다"라는 찬양 글귀가 보인다.

이는 경인선을 달리는 최초의 기차를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던 사람들이나 철도의 웅장함을 노래한 시인처럼 당시 아피아 가도가 연 새로운 세상에 대한 칭송이었다.

▲ 아피아 가도. 2000년 넘게 지속된 고대 로마의 인프라 스투룩투라이다. ⓒ박흥수

아피아 가도는 기원전 312년에 로마가 건설한 최초의 가도다. 훗날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대명제를 만들게 한 첫 출발지가 바로 아피아 가도다. 로마에서 이탈리아의 남쪽, 장화 모양의 이탈리아 지도에서 발목 쪽에 위치한 로마의 뒷굽 쪽에 있는 브린디시까지 연결하는 540Km의, 한국으로 치면 경부선에 해당하는 노선이라고 볼 수 있다. 아피아 가도가 만들어진 뒤 기원전 220년에는 집정관이었던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가 플라미니아 가도를 착공한다. 로마에서 북쪽으로 나아가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 종착지인 리미니까지 340Km의 노선으로 아피아 가도에 비해서 짧은 구간이지만, 평지로 이루어진 아피아 가도와 달리 산악 지역인 플라미니아 가도의 공사가 훨씬 어려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플라미니아 가도는 경의선이라 볼 수 있겠다.

아피아 가도와 플라미니아 가도가 연결되면서 이탈리아는 남북을 관통하는 초현대식 첨단 도로를 갖게 됐다. 이 두 가도의 효용성이 입증되면서 본격적인 도로 건설에 나서 주요 간선과 지선들이 탄생했다. 오늘날의 영국을 말하는 브리타뉴까지 포함한 유럽과 북아프리카와 중동에 걸친 로마 가도는 간선만 8만 km에 이르고 지선까지 합하면 15만 km에 이르는 엄청난 인프라스트룩투라였다. 현재 유럽의 독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스페인, 스웨덴, 폴란드, 터키 등 긴 철도 운영 노선을 가진 나라들의 철도 운행 킬로미터를 모두 합한 길이와 맞먹는다.

로마 가도를 예외로 한다면 19세기까지도 인류는 근대적 의미의 길을 갖지 못했다. 길은 비만 오면 진창이 되어 걸을 수가 없었다. 소나 말이 진흙밭에서 허우적거리고 수레바퀴는 속수무책으로 갇혀 있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전천후에도 이용할 수 있는 도로가 생긴다는 것은 사회가 혁명적으로 도약하는 기반이 마련되었다는 의미다. 가도는 도시의 한 복판을 관통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그만큼 도로 접근성을 높여 주어 가도를 품고 있는 도시들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켰다.

▲ 아피아 가도변의 로마 시민들과 관광객들. 아피아 가도는 2000년 넘게 단단한 돌들로 다져진 길이다. ⓒ박흥수

로마 가도의 제1목적은 군용이었다. 이 때문에 건설은 당연히 군대의 몫이었다. 고대 로마 제국의 힘의 원천이었던 군사력은 집정관이 이끄는 군단 병력을 핵심으로 했다. 이 군단 병력의 주력은 중무장 보병이었다. 중무장 보병은 전투 시에 맡는 역할이었고, 일상적인 경우에는 비무장 공병이 더 맞는 말일 수도 있다. 로마군은 따로 공병을 두지 않았다. 도로 건설에서 이동 시의 숙영지 조성까지 모두 병사들이 맡아서 했다. 시오노 나나미조차 "로마군은 곡괭이로 이긴다"는 말을 소개한다. 로마군의 일상이 주로 '삽질'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일부 병약한 고위층 자녀분들을 제외한 한국의 수많은 의무 징집병이 군 복무를 마친 뒤 삽질만큼은 확실히 터득해 오는 것을 보면 시대와 국경을 초월해서 군대와 삽질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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