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선거철이다. 지금 정치권에서는 선관위 선거구 개편 논의가 있은 후로 의석 수 계산과 총선 후보 선정 방식을 둘러싼 논의가 한창이다. 야권에서는 특히 이대로는 총선필패라는 위기의식 하에 혁신위를 가동하는 한편, 신당 창당 움직임으로 국정 감사철이 무색할 정도이다.
현재 우리나라 제1 야당의 당명은 '새정치민주연합'이다. 이 당명을 제대로 알고 있는 국민이 얼마나 될까 궁금해진다. 2000년대부터 현 야당의 이름을 거슬러 살펴보면 당 이름 하나 숙지하는 것도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2000년에 '새정치국민회의'가 '새천년민주당'으로 개편되었고, 이후 '친노' 세력을 중심으로 '열린우리당'이 창당되었고, 2007년 대선을 앞두고 '대통합민주신당', 2008년 '통합민주당', '민주당', 그리고 2011년 '민주통합당'으로 개편되고 2014년 안철수 의원의 새정치연합과 합당하여 오늘의 '새정치민주연합'이 창당되었다. 불과 15년 사이에 예닐곱 번 당명이 바뀌었다. '통합'과 '민주'라는 단어가 앞뒤로 바뀐 경우도 있다. 한 정당의 연속성이 평균 3년이 되지 않는 셈이다.
정당이란 일차적으로 그 기대 수명이 당 리더의 수명에 의존하지 않아야 한다. 이렇게 될 때 최소한 연속성을 지닌 정치 조직으로 정의될 수 있다. 우리의 경우 당 리더가 바뀌거나 선거철을 전후로 당의 명칭이 변경되어 왔다. 그러다 보니 정당으로서의 정체성이 취약할 수밖에 없다. 2~3년이 멀다하고 선거를 앞두고 후보 또는 정치 세력이 합종연횡하고 이에 따라 정당이 해체되고 흡수, 통합되는 것을 반복해 왔으니, 1987년 민주화 이후 사반세기가 지났지만 여전히 '정당 정치'라는 말이 무색하다.
정당의 수명이 짧다보디 정당의 정체성을 규정할 만한 농익은 정책들이 만들어지기 힘들다. 그러다 보니 정치는 부정(네거티브)의 이미지로 각인된다. '비효율적인 정치', '정치 부정', '정치 무관심', 더 나아가 '정치 혐오'라는 말이 이를 반영한다. 실제로는 인구 대비 국회의원의 수가 충분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정치 불신이 깊어 국회의원을 늘리자는 주장이 공감을 얻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혁신' '비상대책위원회' 또는 당명에 접두사로 붙는 '새'라는 용어는 너무 자주 거론되다보니 단어의 실체적 의미가 지닌 무게감을 상실한 지 오래다.
그렇다면, 왜 정당이 국민의 신뢰를 받는 공적인 정치 실체로 자리 잡지 못하는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은 다양하게 제기될 수 있다. 나는 정당의 공천 시스템에 근원적인 문제가 있다고 본다. 정당 내 권력 다툼이나 계파 갈등은 결국 '4년제 비정규직' 국회의원의 공천을 둘러싼 문제로 귀결된다. 공천을 둘러싼 문제를 정당 내에서 자체적으로 해결하지 못하자 제1야당은 외부 위원을 구성하여 당내 혁신의 돌파구를 마련하고 있으며, 여당 대표는 100% 오픈 프라이머리를 주장하고 나섰다. 외부위원들이 제시하는 공천 룰이나 오픈 프라이머리로 후보를 선출하는 시스템이 마치 '공정'한 것인 양.
오늘날 대의제 민주주의는 고대 그리스에서 실현된 직접 민주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이름만 공유할 뿐 근원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우리는 흔히 인구 규모가 커진 오늘날은 사람들이 광장에 모여 직접 투표로 의사 결정을 하는 방식이 맞지 않기 때문에 우리를 대신할 대표를 뽑아 의회로 보내는 대의제 민주주의 방식을 채택한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2500년 전에 고대 그리스 아테네 도시국가에서 발명된 '민주주의'의 핵심 이념은 평등한 정치 참여이며 이를 위한 제도적 장치가 바로 '추첨(또는 제비뽑기)'이었다. 병역, 납세, 부모 부양 등의 일정 의무를 충족시킨 아테네 시민이면 누구나 공적인 영역인 정치에 복무하고자 할 경우 추첨 통에 본인의 이름을 넣고 제비뽑기로 뽑힐 자격을 얻는다. 즉, 기본적인 시민의 의무를 다한 사람이면 누구나 피선거권자가 될 수 있는 자격이 동등하게 주어지는 것이다.
지금의 대의제 민주주의에서는 민주주의의 평등 이념을 실현하는 추첨 제도는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면서 우리는 단지 인구 규모의 문제 때문에 간접적으로 대표를 선출할 뿐 마치 고대 그리스와 본질상 동일한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지금의 국회의원 선출 방식은 시민들의 동등한 참여를 거의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시스템이다. 당내 공천위원회를 두고 공정한 심사를 거쳐 후보를 선출한다고는 하지만 대권이나 당권을 장악하는 정치 세력과 계파의 이해관계에 따라 후보를 선출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리고 어떤 공천 심사도 잡음 없이 지나가는 경우는 없다. 이를 방지하려는 자구책으로 도입한 오픈 프라이머리는 오히려 정당의 존재기반인 당원의 참여를 배제하는 결과를 낳는다.
공천의 잡음을 없애는 가장 공평한 방법은 무엇일까? 제비뽑기다. 고대 아테네의 방식을 빌리자면, 당원 가운데 기본적인 시민(또는 당원)의 의무를 충족시킨 당원이면 누구나 추첨 통에 자신의 이름을 넣고 당의 후보로 선출될 수 있는 평등한 기회를 부여받도록 하는 것이다. 전문성의 문제를 거론한다면, 당내에서 후보 선출 기준을 정하기 나름이다. 가령, 진성 당원 몇 년 이상, 구체적인 상임위 분야에서의 당원 활동 몇 년 이상, 또는 전문성 평가에 대한 자격 조건을 규정하면 된다. 이보다 더 공평한 방법이 있을까?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했다. 지금 정치에 대한 전반적인 불신과 무관심이 깊어지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정치가 일반 시민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영역으로 인식되지 않고 '그들만의 리그'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현재와 같은 당내 공천이나, 선거 공탁금, 전략 공천, 오픈 프라이머리 등의 제도는 국회의원의 사회적 대표성을 왜곡시킨다.
고소득자, 고학력자 또는 전직 판검사 또는 변호사 출신으로 국회의원의 사회 경제적 배경이 편향되는 것은 공적인 정치의 영역이 엘리트 계층에 의해 독점되고 있는 현상을 여실히 보여준다. 지난 대선에서부터 '경제 민주화'가 정치권의 당면 과제로 대두했다. 제1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의 첫 번째 강령은 집중된 정치, 경제 권력을 분산시켜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한다는 것이다.
정치권이 '경제 민주화'를 강조하는 만큼 과연 정치권력은 분산되어 있는가? 정치는 공적인 영역이며 누구나 참여할 수 있도록 공평한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경제 권력의 분산만이 아니라 정치 영역에서도 민주주의의 '평등' 이념을 실현한 '민주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 첫걸음으로 자격 요건을 갖춘 당원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당의 후보로 선출될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되는 '제비뽑기'를 시도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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