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27일 오스트리아 고속도로에서 헝가리를 벗어나 유럽으로 탈출하려던 난민들이 무더기로 냉동트럭에서 죽은 시체로 발견되었다.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다. 그 숫자는 무려 71명이었다. 2015년에만도 유럽에는 약 30만 명에 가까운 난민이 유입되었다. 그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은 1만5000명에 이른다고 한다. 알려지지 않은 숫자를 감안하면 더 많을 것이다. 사람의 목숨이 다만 숫자로만 헤아려질 수 있는가?
이들은 시리아를 탈출한 사람들로 추정된다고 한다. 왜 난민이 발생하는가. 가뭄과 흉작으로 먹을 것이 없어 죽어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전쟁과 테러로 국가 간 갈등으로 정치적 희생물이 된 사람들도 있다. 물론 신앙과 신념 문제로 난민이 된 사람도 있지만 이는 또 다른 문제이다.
국가 간 경제 불평등은 역사 이래 단 한 번도 개선된 적이 없는 현상이고, 어쩌면 우리의 역사 자체가 집단 간 불평등을 내재한 체제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현상이 곧 당위적 사실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거창하게 보편적 인류애를 말하지 않더라도 같은 인간으로써 누구는 죽음으로까지 치닫는 가난에 허덕이고, 그 어느 소수의 집단은 넘쳐나는 부와 윤택함에 지쳐가고 있다면 이는 분명 바꾸어야 할 현실임에는 틀림이 없다.
경제적 불평등은 결코 국가 간의 문제가 아니다. 가난한 국가에서도 소수의 집단과 그 안에 속한 사람은 부자나라의 부자와 별반 다르지 않은 풍요를 누린다. 부자나라의 가난한 사람들도 그 가난 때문에 죽음과 같은 삶으로 고통 받는 것은 변함이 없다. 경제적 불평등은 국가의 문제가 아니라 부를 독점한 집단, 다른 사람의 죽음과도 같은 고통에 무심한 그들 때문에 생겨난다. 그들의 우아함과 윤택함이 다른 사람의 죽음을 딛고 누리는 것이라면 우리는 기꺼이 그러한 풍요로움을 거부해야하지 않을까.
핵심은 국가가 아니라 불평등과 특권을 조장하는 집단과 사회의 문제이며, 이를 방치하고 부추기는 체제의 문제이다. 현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모두 경제를 둘러싸고 일어난다. 그것은 국가 사이에서는 말할 것도 없지만, 한 집단과 사회에서도 또는 개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정치권력은 말할 것도 없지만, 심지어 과학과 기술, 학문과 예술 영역에서도 결정적인 상수 가운데 하나는 경제 문제이다. 이를 부정할 사람이 있을까? 경제 문제와 무관하게 일어나는 정치적, 사회적 현상은 없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가장 내적이며 실존적 영역에서도 이 문제는 상수로 작동한다. 인간이 해결해야할 가장 기본적인 문제는 경제를 둘러싸고 일어난다. 이는 개인에서도, 공동체와 사회에서도 그러하며, 심지어 국가와 국제적 문제에서는 더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
자본주의 체제가 보편화된 현대 사회에서는 경제위기는 끊임없이 되풀이 될 것이며 부의 집중 현상은 가속화될 수밖에 없다. 한 사회의 기득권 집단은 끊임없이 이렇게 추동해갈 것이다. 그들의 집단 이익과 집단 경제를 드높이기 위해 그들의 모든 권력과 수단을 활용할 것이다. 그에 따라 그런 권력을 가지지 못한 집단과 개인은 결국 그 하위 집단으로 종속될 것이다. 한 사회가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사회가 되려면, 그리고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요건은 경제에 달려있다.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는 경제적 불평등을 벗어나야 하며, 인간다운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경제적 기반이 보장되어야 한다.
우리 사회는 어떤가? 노동개혁을 부르짖지만 그 개혁이 실은 하위 90% 사람들끼리 밥그릇을 나눠먹으라는 개혁임을 누구나 알고 있다. 귀족노조가 문제라고 연일 그들끼리의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 이른바 "귀족 노조"와 대기업 정규직이 하청업체 사람들이나 다른 비정규직, 용역업체 노동자 보다 더 나은 임금을 받는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이 그 자체로 부수어야할 과도함일까. 그들이 받은 임금이 부당한 것일까. 그들의 임금을 줄이면 나의 삶이 더 윤택해지는가.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문제는 극심하게 양분화 되는 부의 불평등과 경제적 독점에 있다. 자산소득을 중심으로 돈이 돈을 낳는 체제를 만들고 이를 유지하려는 그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흔히들 상위 1%에 부가 집중되었다고 생각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그러한 독점과 특권을 가능하게 하는 그 아래의 집단 역시 문제이기는 마찬가지이다. 거칠게 일반화해서 이를 상위 10% 집단이라고 하면, 이들에게 집중된 소득과 특권은 어떠할까. 단순히 소득 비율만 살펴봐도 이런 사실은 확연히 드러난다. 동국대 김낙년 교수는 2014년 <한국의 개인소득 분포, 소득세 자료에 의한 접근>이란 연구 보고서를 통해 소득집중도를 산출하여 이 문제를 밝혔다. 이에 따르면 2010년 우리나라의 소득 상위 10% 집단의 소득집중도는 48.05%로 프랑스의 32.29%보다 현저하게 차이가 나며, 흔히 소득불평등 정도가 아주 심하다고 생각하는 미국보다도 더 높았다. 미국의 소득불평등 정도는 우리보다 1.7% 정도 낮은 46.35%였다.
굳이 이런 수치를 동원하지 않아도 일반인들이, 90%에 이르는 보통 사람들이 어떤 경제적 상황에 놓여있는지는 너무도 잘 경험하지 않는가. 지난 9월 2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새누리당 대표인 김무성 의원이 "노동조합이 쇠파이프를 휘두르지 않았더라면 우리나라는 (국민소득) 3만 달러가 됐다"고 발언했다고 한다. 또한 "노조 가입자 수는 10%에 불과하지만 영향력은 막대하다"고도 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집권 여당의 대표란 사람의 인식수준에 대해 말문이 막힐 지경이다. 그는 그 전에도 복지를 늘리면 국민이 나태해진다면서 국민 전체를 상위층을 위해 노동해야하는 머슴 취급하기도 했다.
노동조합 활동은 국민의 기본 권리에 속한다. 이 수치가 10%에 불과하다는 것은 그 자체로 엄청나게 불공정한 일이다. 우리 사회의 불공정과 불평등을 넘어서지 않으면 우리에게도 사회적 죽음과 사회적 악은 현실이 될 것이다. 나는 우리 사회의 지배층이 이 사회를 양분화하고, 그들의 독점적 특권과 경제적 풍요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그들 이외의 집단을 갈등으로 몰아간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자각하고 우리가 이에 맞서지 않으면 우리 사회의 안정이란 불가능하다. 우리 삶의 영역을 옥죄고 우리를 노예로 몰아가는 모든 제도와 정치, 그런 집단과 사람에 저항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 체제에 갖혀 허덕이게 될 것이다. 가장 훌륭한 노예는 자신이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노예이다. 노예의 문제는 다른 노예를 혐오한다는 데 있다. 자각하지 못하고 연대하지 못하는 노예야 말로 최고의 노예가 아닐까. 무엇을 해야 하는가? 여하튼 우리를 억압하는 세력에 저항하지 않으면 우리는 노예의 삶으로 내몰릴 뿐이다. 내 존재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저항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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