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90%를 생각한다고 한다. 노동시장 구조개혁이 정치권 최대 화두가 되며 벌어지는 풍경이다.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을 가리지 않고, 또 보수와 진보 인사를 가리지 않고 온 세상이 "90%를 위한 노동 개혁"을 외치고 있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19일 "한국노총의 일부 과격분자들은 10%의 기득권자를 지키기 위해 고용 절벽 앞에 절망하는 청년과 비정규직의 눈물을 외면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새정치민주연합 이동학 혁신위원은 임금피크제 수용 필요성을 언급하며 "10%의 조직 노동은 우리 사회의 상위 10%가 되었고, 90%의 노동자 또는 노동 시장에 진입조차 하지 못한 자들은 거대한 사각지대가 되었습니다"라고 페이스북에 썼다.
90%를 위한 10%를 향한 채찍질. 정부-여당과 이 위원이 이처럼 10%의 조직 노동자들의 '이기주의'를 비판하며 내놓은 대책 방향도 임금피크제 수용을 통한 기업 부담 완화와 실업급여 등 고용보험의 보장성 강화를 통한 고용 불안 완화란 큰 틀에선 다르지 않다.
여기서 발견되는 한 가지 현상이 있다. 작금의 노동시장 구조개혁 논쟁이 임금피크제와 정규직 고임금 문제에 과도하게 집중돼 있다는 점이다. '조직 노동자가 장애물'이란 지적이 여야 양쪽에서 나오는 현상은 여기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그러나 정부의 개혁안은 매우 다층적으로 구성돼 있고, 치밀하게 설계돼 있다. 하나의 정책은 다른 정책으로 뒷받침되고, 하나의 개혁 목표를 위해선 여러 정책이 종합 활용되기 마련이다. 하나만 고른다고 골라지는 게 아니란 얘기다.
임금피크제는 홀몸이 아니다
특히 임금 피크제가 그렇다. 정부 안(案)에서 임금 피크제는 나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임금 피크제 옆에는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 요건 완화'가 세트로 묶여 있다. 이를 누군가는 알면서 모른 체 지나치고 있는가 하면, 누군가는 아예 모르는 것도 같기도 하다.
잠시 설명하면 이렇다. 임금 피크제를 법제화할 게 아니라면, 각 사업장의 '취업 규칙'들이 바뀌어야 임금 피크제 도입이 가능하다. 그리고 현행법에 따라 취업 규칙을 바꾸려면 대표 노조, 노조가 없다면 노동자 과반의 동의가 필요하다. 이를 요약해 '불이익 변경 요건'이라 부른다.
정부의 임금 피크제 도입안은 이 요건의 '완화'로 완성된다. 임금 피크제와 취업규칙 요건 완화를 노(그들이 말하는 조직 노동)·사·정 대화로 통 크게 합의를 보고, 각 사업장의 사장님들은 개별 노동자들의 동의 절차라는 번거로움 없이 임금 피크제를 도입할 수 있게 하자는 게 정부의 주장이다.
임금피크제 수용으로 90%가 입을 타격엔 관심 있나
10%를 향한 비판은 바로 이 지점에서 설득력을 잃는다. 우리가 상대하고 있는 정부 안은 일차 방정식이 아니라 이차 방정식이다. 임금 피크제와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은 함께 논의되고 있고, 따라서 취업규칙 이야기를 쏙 빼놓고 '임금 피크제는 90%를 위한 것이냐 아니냐'는 질문은 현재로썬 하나 마나 한 것이다.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 요건 완화로 '직격탄'을 맞게 되는 쪽은 어디인가. 김 대표와 이 위원이 함께 걱정하고 있는 '90% 미조직 노동자'들의 타격이 훨씬 클 게 분명하다. 조직 노동은 임금·단체 협상 체결권과 쟁의권을 조금이나마 확보해 두고 있다.
그러나 미조직 노동자들은 '노사정 대타협'에 따라 사용자가 취업규칙의 임금 항목뿐 아니라 해고, 징벌 조항들을 마구잡이로 변경하더라도 속수무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임금 피크제는 10%를 조준하는데,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 요건은 90%로 조준돼 있다는 얘기다.
따라서 조직 노동자들은 '대리 투쟁' 중이다. 의도했건 아니건 상황이 그렇다. 만약 조직 노동이 김 대표와 이 위원의 바람대로 '통 크게' 임금 피크제를 수용하면, 그 연쇄효과로 90% 미조직 노동자들은 취업규칙 개악 위기에 내몰릴 것이다. 김 대표와 이 위원 모두 이를 바라는 것은 아닐 거라고 믿는다.
한국노총, 밥그릇 싸움하나 대리 투쟁하나
10% 조직 노동에 대한 비난이 섣부른 이유는 이뿐이 아니다. 정부안에는 임금피크제뿐 아니라 △일반해고 요건 완화 △기간제 비정규직 사용 기한 연장 △파견 허용 업종 확대 등도 포함돼 있다. 이 같은 노동 시장 구조개편안은 '패키지'라는 것 또한 정부와 노사정위는 여러 번 강조했다.
노사정위가 한국노총의 복귀로 재가동된다면 조직 노동자들과 정부, 재계는 이 모든 안건을 놓고 대화를 벌이게 된다. 최종 개혁안에 무엇을 넣고 무엇을 뺄 것인가. 넣는다면 어떤 내용으로 넣고 뺀다면 언제쯤 다시 논의할 것인가 또는 아예 폐기할 것인가.
아직 결론이 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만약 조직 노동이 임금피크제 저지만 관철하고, 비정규직 확산으로 이어질 기간제 연장과 파견 확대를 내어 준다면. 이런 결과야말로 대공장·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 조직 노동은 '90%를 버렸다'는 비판을 피해갈 수 없을 것이다.
중요한 건 지금은 어떤 결과가 나올지 누구도 예측하지 못 하는 단계란 점이다. 정부는 칼을 뽑았다. 최경환 경제부총리는 19일 "노사정 대타협에만 매달릴 수 없다"면서 타협이 이뤄지지 않으면 정부 주도의 개편을 추진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밝혔다.
상황이 이런 만큼 진보 진영이 생각하는 '진짜 노동 개혁'이 무엇이냐와 별개로, 정부 안이 그것 그대로 관철될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 공격이야 말로 가장 좋은 수비란 말이 있지만, 수비 그 자체가 중요할 때가 있다. 지금이 그런 때라면, 10% 조직 노동에 해야 하는 채근은 '타협하라'가 아니라 '제대로 수비하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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