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이 있으나 다가가기 어려웠던 섬들. 강화 바다 민간인통제구역 안의 섬에도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9월의 섬학교(교장 강제윤. 시인, 섬여행가)는 제42강으로, 인천시 강화군 민통선 안의 섬 중 하나인 <주문도>로 갑니다.
제약이 많은 민통선 안의 섬이었던 까닭에 주문도는 오히려 난개발의 바람에서 비껴나 있었습니다. 그 덕에 풍요로운 갯벌이 살아 있습니다. 갯벌은 어미의 품처럼 부드럽습니다. 그 갯벌의 품안에 백합조개와 농게와 고둥과 낙지 같은 생물들이 살아갑니다. 그 갯벌의 정취를 느끼고 그 갯벌에서 나온 백합조개도 맛보러 갑니다.
또 주문도에 남아있는 아주 오래된 한옥교회도 찾아갑니다. 1923년 전통한옥에 서양식 건축이 접목되어 지어진 교회건물이 한없이 멋스럽습니다. 아주 진귀한 체험이 될 것입니다. 이 나라 섬의 원형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초가을 섬으로 초대합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강제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9월의 섬 <주문도>에 대해서 들어봅니다.
"우리는 서 있거나 앉아 있거나 누워 있지 않을 때는 늘 걷는다. 그러나 어디로 걸어가고 있는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우리는 이미 목적지에 도착한 셈이다. 한 걸음을 디딜 때마다 우리는 현재의 순간에 도착할 수 있고, 정토 혹은 신의 왕국에 들어설 수 있다." (틱 낫한)
바다는 지구 최대의 산소 공장
강화 외포리에는 두 개의 여객선 선착장이 있다. 하나는 석모도행 전용 선착장이고 또 하나는 주문도와 볼음도, 아차도 항로의 선착장이다. 이 바닷길에도 카페리가 다닌다. 작은 섬으로 가면서도 사람들은 자동차에 대한 미련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철부선 갑판은 뭍에서 싣고 가는 자동차들로 빼곡하다. 철부선이 허허바다로 나간다. 끝없이 넓고 큰 허허바다.
지구상의 모든 녹색식물은 낮에는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산소를 배출한다. 산소 덕으로 인간은 숨 쉬고 살아갈 수 있다. 나무는 산소의 중요한 생산자다. 그러나 지구 최대의 산소 공장은 숲이 아니다. 바다다. 바다는 지구 산소의 80% 이상을 생산해낸다. 우리가 바다위에 떠서 살지 않는다 해도 바다는 우리 생존에 필수적인 공간이다. 바다에서 남조류, 녹조류 등의 식물 플랑크톤과 함께 산소의 대부분을 만들어내는 것은 규조류다. 황해바다의 물빛은 흐리고 탁하다. 해양 오염과 남획으로 물고기들이 사라져가는 것은 안타까워하면서도 우리는 정작 바다의 죽음이 몰고 올 생명계 전체의 파국에 대해서는 무심하다.
우리는 슬픔의 후예다!
주문도는 볼음도, 아차도, 말도, 네 섬을 아우르는 강화군 서도면의 중심 섬이다. 면의 행정기관이 모두 주문도에 있다. 서도면은 네 섬을 다 합쳐도 인구 650명에 지나지 않는 작은 면이다. 주문도에만 그중 절반인 300여 명이 산다. 작은 섬에 초·중·고 세 개의 학교가 다 있다. 다행이다. 학교가 있는 한 섬은 희망이 있다. 섬은 주민들 80%가 개신교 신자다. 섬에는 두 개의 교회가 있다. 어느 한 종교가 다수를 점하면 섬은 그 종교의 왕국이 된다. 종교의 자유는 있어도 있는 것이 아니다. 헌법은 정교일치를 허용하지 않고 있지만 법은 멀고 삶은 가깝다. 섬의 모든 일상이 교회를 중심으로 돌아가는데 누구든 교회와 등지고 살기란 쉽지 않다. 그 순간 그는 외톨이가 될 것을 각오해야 한다.
누군가는 교회가, 종교가 너무 세속적이지 않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천만에! 종교가 세속화 됐다는 비난은 부당하고 근거 없다. 어떤 종교가 세속을 떠나 존재할 수 있겠는가. 종교란 신들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 인간을 위해 있지 않은가. 모든 종교는 본질적으로 세속적이다. 그러므로 종교가 초세속적이라고 믿는 것이야말로 환상이다. 이 섬의 중심은 서도중앙교회(옛 진촌교회)다. 교회는 1923년에 건립된 건물을 가지고 있다. 한옥에 서양식 건축양식을 접목시킨 교회건물은 세련되고 기품 있다. 예배당 실내는 절의 법당 같다. 처음 기독교를 받아들인 섬 주민들의 마음은 절과 교회를 분별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통스런 현실을 벗어나 피안에 이르게 해준다면 그것이 절이든 교회든 무슨 상관이랴.
섬은 작고 농토는 비좁지만 이곳에서도 벼농사를 짓고, 고추와 참깨, 옥수수와 콩, 마늘 등의 밭농사를 지어 끼니 거르는 사람 없이 살아간다. 그렇게 사람들은 물이 있고, 부쳐 먹을 땅 한 조각만 있으면 아무리 먼 바다 깊은 산속이라도 찾아들어 살았다. 그렇게 수 천 년의 삶을 이어왔다. 외부의 침략자들, 왜구와 해적들의 노략질과 탐욕스런 관리들의 수탈을 견디며 끝끝내 살아남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가 슬픔의 후예다. 우리는 모두가 고난의 후예다. 슬픔과 고난을 견디고 살아남은 자들의 후예다. 그 모진 세월을 견디고 살아남기란 진실로 희귀한 일이다. 살아남은 자들의 후예로 살아 있다는 것은 마침내 기적 같은 일이다. 살아 있는 것이 기적인 삶이여! 기적 아닌 삶이란 세상 어디에도 없다.
고향도 잊어버리고
바닷가 오막살이, 할머니집 마당에는 옥수수가 말라가고 있다. 곡식들은 햇볕을 받아 마를수록 여물어간다. 사람 또한 그렇다. 할아버지는 3년 전에 이승을 하직하셨다. 바다가,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딸 둘, 아들 둘을 키워냈지만 할머니는 혼자다. 혼자 남은 할머니는 차돌처럼 단단해지셨다. 혼자 남은 할머니의 유일한 의지처는 교회다. 할머니가 교회에 다니면서도 제사를 모시는 것은 양다리가 아니다.
할아버지가 떠나신 뒤 할머니는 배 부리던 어구들 태워 없애느라 고생이 많으셨다. 할머니에게는 더 이상 쓸모없게 된 어구들이었을 테지만 아쉬운 일이다. 어업의 한 역사가 허망하게 불태워져버렸다. 처마 밑에는 할아버지가 쓰셨을 대나무 낚싯대들이 끼워져 있고, 옛날 쓰던 물지게도 벽에 걸렸다. 부엌 아궁이에는 가마솥이 놓여있다.
"할머니 겨울에는 불 때고 사세요?"
"보일러를 못 했시다."
"오히려 잘 되셨네요. 기름 값도 비싼데."
할머니는 손을 젓는다.
"매워서, 연기 땜에 맵고, 비 많이 오면 물 나고 말도 못해."
왜 아닐까. 오랫동안 구들을 손보지 않아 고래가 막혔을 것이다. 그런 아궁이에 환풍기 없이 불을 때면 부엌은 순식간에 연기로 가득 찬다. 집이 바다 바람을 피해 저지대에 지어졌으니 큰 비라도 오면 아궁이에는 물이 고이기도 하겠지. 부엌 뒤란에는 장독대가 있다. 장독마다 간장, 된장 등이 한 가득이다. 변소도 물론 재래식. 불을 때고 난 재로 변을 묻어 두었다가 거름으로 내니 냄새가 나지 않는다.
"올핸 배추도 쪼끔 심어야 싱깐. 배추 많이 심어서 머해요. 작년에도 다 담가 놓곤 가질러 와야 하는데 안 오니깐 다 내다 버리느라 혼낫시다. 봄에 다 버렸지, 시어져서 못 먹어. 다들 회사 다니고 바쁘니깐 못 왔지."
할머니는 가지러 온다는 보장도 없는 자식들을 위해 김장김치와 된장을 담는다. 김치는 시어터져서 버렸고, 장은 몇 년째 장독대에서 묵어간다. 김장배추를 적게 심겠다고 말은 하지만 할머니는 올 가을에도 어김없이 넉넉하게 김장을 하고 메주를 띄울 것이다. 할머니는 어미인 것이다. 어미는 여든 셋, 얼굴엔 여망 꽃이 피었다. 고양이 한 마리가 그늘을 찾아가 늘어진다.
"쥐가 하도 들끓어 싸서 어젯저녁에 다른 집서 잠깐 데려다 놨는데 안가고 있시다. 밥 달라기에 밥 줬더니 밥 먹고."
고양이는 할머니 집이 편하고 좋은 것이다.
"할머니는 고향이 어디세요?"
"고향? 없시다."
"강화세요?"
"그랫시다."
"강화 어디신데요?"
"잊어버려서 모르갓시다."
할머니는 섬으로 시집와서 60년 넘는 세월 동안 친정에는 가보지도 못했다. 옛날 섬에서는 다들 그렇게 살았다. 이제 할머니도 남은 날이 많지 않다. 할머니마저 떠나고 나면 이 집은 폐허가 되고 할머니의 삶을 지탱시켜준 물건들은 모두 불태워지고 말 것이다. 삶의 흔적들이 아주 사라지고 나면 삶을 '증거' 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한때 삶이 깃들었던 물질들, 죽은 육신과 함께 아주 사라지고 나면 삶은 또 어디로 가서 머물게 되는 것일까 .
어미 품처럼 부드러운 펄, 영혼까지 빨아들인다
주문도 대빈창 해변 갯벌 바다에 저녁이 온다. 밀물의 시간이다. 저 넓은 갯벌은 순식간에 다시 바다가 될 것이다. 갯벌은 바다생물들의 중요한 서식지인 동시에 오염물질을 정화해 주는 지구의 콩팥이다. 갯벌은 펄 갯벌과 모래 갯벌, 펄과 모래가 뒤섞인 혼합 갯벌 등으로 다양하다. 황해는 밀물과 썰물의 차가 매우 크다. 해안가에는 펄이 다수를 점하고 있지만 먼 바다로 가면 모래가 많다. 강화 주변의 바다 속은 펄 갯벌이 대부분이지만 덕적도나 연평도, 대청도, 백령도로 가면 대부분 모래 갯벌이다. 육지 가까운 해안은 펄이 많고 먼 바다로 갈수록 모래가 많은 데는 이유가 있다.
황해에는 오랜 세월 중국과 한국의 강에서 쓸려 내려온 모래와 펄 흙으로 채워져 왔다. 황해는 조수 간만의 차이가 매우 큰 바다다. 해안가로 밀물이 들어올 때 가벼운 모래와 펄들이 떠서 밀려든다. 해안 가까이 갈수록 밀물의 미는 힘이 약해진다. 보다 무거운 모래알은 일찍 가라앉고 더 가벼운 펄들은 해안 가까이 밀려온다. 밀물과 썰물이 교차되는 순간 바다는 잠시 정지상태에 들어간다. 그때 펄들이 가라앉는다. 그래서 서해안 가까이에는 펄 갯벌이 많은 것이다. 이 대빈창 갯벌은 수천, 수만 년 들고 난 밀물과 썰물이 만든 펄이다. 바다가 수만 년 동안 만들어낸 갯벌을 사람은 한순간에 황무지로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나그네는 섬에서 나고 자랐지만 바닷물에 들어가거나 모래밭을 맨발로 걷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펄에는 기꺼이 맨발에 맨 몸으로 들어간다. 펄은 어미의 품처럼 부드럽고 따뜻하다. 펄은 사물을 빨아들이는 힘이 있다. 그래서 농발게와 고둥과 조개와 개불과 낙지와 꼬막이 모두 펄의 속살 깊이 틀어박혀 산다. 펄은 몸만이 아니라 영혼까지 빨아들인다. 밀물은 순식간에 대빈창 갯벌을 다시 바닷물로 덮어버린다. 밀물 드는 갯벌에 와서야 우리는 비로소 바다가 하나의 생명체임을 실감한다. 이 황혼녘에도 바다는 저렇게 일렁이며 살아 움직이지 않는가.
섬학교 제42강, 9월 5(토)∼6(일)일, 주문도 및 강화 답사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9월 5일(토)>
07:00 서울 출발(뱃시각에 대야 하니 출발시각 엄수 바랍니다. 0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섬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42강 여는 모임
-강화 외포항 출항
-주문도 도착
-점심식사(주문도 백합탕백반)
-주문도 걷기(5km)
선착장-면사무소-저수지-서도중앙교회(옛 진촌교회)-진말-농로-앞장술-서도초중고교-저수지-선착장
-마을 둘러보며 자유롭게 놀기
-저녁식사 겸 뒤풀이(생선회와 섬밥상)
-자유시간 및 취침(다인실)
<9월 6일(일)>
07:00 기상, 아침산책
-아침식사(섬밥상)
-대빈창 해수욕장에서 놀기(갯벌 조개잡이 혹은 솔밭 그늘에서 휴식)
-점심식사(섬밥상)
-주문도 출항
-강화 외포항 도착
-외포시장 장보기
-서울 향발. 제42강 마무리모임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가벼운 등산복/배낭/등산화, 풀숲에선 반드시 긴 바지), 모자, 선글라스, 스틱, 무릎보호대,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멀미약,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승선용 신분증을 꼭 지참하세요(지참하지 않으면 승선할 수 없습니다).
▷섬학교 제42강 주문도 참가비는 21만원입니다(왕복교통비, 1일 숙박비, 5회 식사비 겸 뒤풀이, 강의비, 운영비 등 포함). 이 답사는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으며, 기상 악화로 섬 체류가 연장되는 경우 추가비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참가신청과 문의는 홈페이지 www.huschool.com 이메일 master@huschool.com 으로 해주십시오. 전화 문의(050-5609-5609)는 월∼금요일 09:00∼18:00시를 이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공휴일 제외).
▷참가신청 하신 후 참가비를 완납하시면 참가접수가 완료되었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내드립니다. 회원 아니신 분은 회원 가입을 먼저 해주십시오(▶회원가입 바로가기). ▶참가신청 바로가기
▷섬학교 카페 http://cafe.naver.com/islandschool 에도 꼭 놀러오세요. 섬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섬 여행을 떠나기 전에 강제윤 교장선생님이 쓴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섬을 걷다> <걷고 싶은 우리 섬> <어머니전> 등 섬 답사기를 참고하면 섬 여행의 의미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로 등단했습니다. 서남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뭍으로 이주해 살다 성인이 된 뒤 다시 고향 섬으로 돌아가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보길도 시절에는 하천 정비를 명목으로 보길도의 숲과 하천을 파괴하려는 시도를 막아냈고,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파괴하고 대형 댐을 건설하려는 토목세력에 맞서 33일간 단식으로 섬을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2005년 보길도를 떠난 뒤에는 한국의 모든 유인도(500여 개)를 걸어서 순례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8년째 섬들을 걷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300여 개의 섬을 걸었고 여전히 섬을 걷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섬을 걷다> <통영은 맛있다>, 한겨레에 <섬에서 만나다>를 연재했습니다.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걷고 싶은 우리 섬> <통영은 맛있다> <어머니전>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자발적 가난의 행복>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섬학교를 열며>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다로부터 왔습니다. 지구 최초의 생명이 바다에서 잉태됐듯이 우리 또한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바다에서 생명활동을 시작합니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 바다를 보면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평온함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바다, 그래서 프랑스어 ‘어머니[mère]’에는 ‘바다[mer]’가 들어 있고 한자의 ‘바다[海]’에는 ‘어머니[母]’가 들어있습니다. 원초적 기억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기원을 암시해 줍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바다. 우리가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실상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런지요.
바다나 강, 호수 등의 물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를 섬이라 합니다. 한국에는 4,400여 개의 섬이 있습니다. 그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500여 개, 나머지는 무인도입니다. 한국은 ‘섬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섬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섬들이 소개되고 몇몇 섬들이 피서지나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섬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섬들은 척박함과 절해고도의 고독과 유배지, 그도 아니면 현실도피적인 낭만의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섬은 여전히 먼 곳으로만 느껴집니다. 수만 리 먼 나라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바로 우리 곁의 섬들을 멀게만 느끼는 것은 왜일까요. 단지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닙니다. 심리적 거리감이 더 큰 요인입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육지 중심의 사고에 기인한 바 큽니다. 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육지 사람들은 섬사람들을 ‘섬놈’이라 부르면서 멸시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조선왕조의 폐쇄적인 해양정책에 잇닿아 있습니다. 본래 우리의 인식은 육지 중심의 편협한 틀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옛날 이 땅의 사람들은 바다를 이용해 세계와 소통했습니다. 세계로 향하는 통로로 기능했던 바다가 단절의 바다로 전락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입니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을 추종해 적극적인 ‘공도(空島)’정책을 폈습니다. 섬과 바다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바다와 섬은 육지보다 더욱 활력 넘치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문명교류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되면서 바다와 섬은 점차 잊혀지고 버림받은 공간이 됐습니다.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이후에도 섬은 유배지로 이용되면서 고립이 심화됐습니다.
해양왕국이었던 백제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바다와 섬을 기반으로 세계와 소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976년 거문도의 장촌마을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외딴 섬처럼 보이는 거문도가 실상은 고대부터 국제해상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2000년에는 흑산도의 읍동마을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국제해양도시의 흔적들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고려시대 예성강 입구에 있던 벽란도는 개경에 출입하는 외국인들이 통관 절차를 밟던 국제무역항이었습니다.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는 바다와 섬을 통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까지 소통했습니다. 이 땅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언제나 그 중심에는 바다와 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이 좁은 것은 알면서도 우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 줄은 잘 모릅니다. 오랫동안 좁은 땅에 갇혀 살면서 몸도 마음도, 시야도 폐쇄적으로 변해버린 까닭입니다. 섬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넓은 바다의 주인공인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섬에서 바라보면 대륙 또한 바다에 둘려 쌓인 큰 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지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충분히 크고 드넓습니다. 섬은 한없이 넓은 바다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섬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개방성과 열린 사고를 되찾기 위한 최적의 사유공간입니다. 물론 섬은 숙명적으로 외롭습니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이나 슬픔마저도 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해학과 가락이 있습니다. 섬에서는 슬픔도 가락을 타면 흥이 됩니다.
오랜 세월 섬들은 제각각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 왔습니다. 곁에 있는 섬도 같은 섬은 없습니다. 하지만 외래문물의 유입으로 많은 섬들이 원형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멀지 않은 시간에 이 나라 많은 섬들이 사라질 것을 예감합니다. 이미 많은 섬들이 육지와 연결되었거나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리가 놓이면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끝내는 소멸해 버릴 섬들, 섬의 풍경들. 더 늦기 전에 섬으로 가야 할 이유입니다.
몇 년째 걷기 열풍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존재’[動物]인 사람이 걷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걷기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본능의 회복운동입니다. 걷기는 길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바 큽니다. 길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한자 ‘길道(도)’자는 辵(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신영복 선생님은 "辵(착)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수)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道)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한 길의 정신을 구현하기에 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섬은 어느 곳보다 걷기 좋은 공간입니다. 아직까지 ‘섬길’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많은 걷기 길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섬은 부러 돈 들여 걷기 길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섬들은 그 자체로 최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섬에서는 사람이 안심하고 걸으며 사유할 수 있습니다. 섬길을 걷는 일은 분명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 될 것입니다. 섬으로 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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