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주머니 속에 손바닥 만한 '삐라'를 늘 넣고 다닙니다. '대북 삐라를 보고 탈북을 결심했었다'던 그는 남풍이 부는 날이면 풍선에 '삐라'를 실어 남몰래 북한에 띄웁니다.
탈북자 출신으로, 현재 북한동포직접돕기운동 대북풍선단장을 맡고 있는 이민복 씨. 언론에 잘 알려진 그의 주력 사업은 대북전단 살포지만, 남한 정착 초기엔 탈북자 인권 운동에 매진했습니다. 그는 '국가 정보기관 폭력 피해자'였습니다.
세간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입니다. 지난 회 주인공 1970년대 대성공사 가혹행위 피해자 김관섭 할아버지에 이어, 이번에는 1990년대 피해자 이민복 단장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네 나라 거쳐 왔는데…" 폭행에 추행까지
1995년 2월 18일, 김포공항에 내렸습니다. 목숨을 건 탈출이었습니다. 북한을 떠난 뒤 네 국가를 경유해 돌고 돌아온 길, 이제 고단한 여정은 다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정체 모를 세 명의 남자가 공항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남한에 온 걸 환영합니다"
환영 인사는 짧은 이 한마디가 다였습니다. 세 남자는 그의 팔을 붙들고 척척 걸어가더니, 공항 앞에 대기시켜놓은 차 안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한 시간가량을 달려 서울 시내 어딘가에서 내렸습니다. 이미 중국, 러시아 공안기관을 드나들었던 그는 이곳이 탈북자들을 신문하는 곳임을 직감했습니다.
도착하자마자 쉴 틈도 없이 끌려간 곳은 건물 지하의 어느 조사실. 문이 열렸습니다. 열댓 명이 앉아있었습니다. 그중엔 안기부와 기무사 직원도 있었고, 관상쟁이도 있었습니다. 인사를 꾸벅하자, 반말부터 날아왔습니다.
"야 이 새끼야. 여길 왜 왔어. 북한이 싫으면 북한에서 싸울 것이지."
"아닙니다. 북한 사람들도 반항하고 있습니다. 북한 정치범수용소 수감자만 20만 명입니다. 여기(남한) 학생들은 말 한마디 잘못한다고 잡혀가지 않습니까? 북한 정부는 대중정치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을 막 잡아가진 않습니다. 그런데도 20만 명이 정치범이라는 건 여기(남한)보다 더 반항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탈북 자체도 반항입니다. 저는 저와 제 가족의 목숨을 걸고 왔습니다."
따박따박 대답을 하고 있자니, 뒤에서 '끼익'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덩치가 산 만한 남자가 들어왔습니다.
"나는 총책임자 서진하다. 이 새끼야, 묻는 말에만 대답해!"
이 말을 끝으로 천장이 빙글 돌았습니다. 귀싸대기를 세게 얻어맞은 탓이었습니다.
"제가 여태 묻는 말에만 대답하지 않았습니까."
"뭐이 새끼가?"
서진하는 이번엔 멱살을 잡아 올렸습니다. 주먹을 위로 말아쥐더니 명치 쪽으로 있는 힘껏 내리꽂았습니다. 그는 바닥을 굴렀습니다. 서진하는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그의 바지춤을 잡았습니다.
"네놈이 임질이 있나 확인하겠다"
열댓 명이 보는 앞에서, 그는 바지며 속옷이며 홀딱 벗겨졌습니다. 서진하는 그의 성기를 훑어보더니, 여기저기 만지기도 했습니다. 수치스러움에 눈물이 날 뻔했지만, 꾹 참았습니다.
'김관섭' 이후 20년, 달라진 것 없었다
"분위기가 아주 살벌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북한 보위부, 소련 보호감호소와 똑같았어요. 반말하고 고함치고, 때리고, 옷 벗기고. 겁주고 욕보여서 기를 죽이고 보는 거죠."
1화~4화의 주인공이자 대성공사 고문 피해자 김관섭 할아버지가 귀순했던 해는 1974년이었습니다. 워낙 엄혹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이민복 단장이 귀순한 건 그로부터 21년 후였습니다. 시간이 흘러도 대성공사 내 가혹행위는 그대로였습니다. 20년 넘도록 끔찍한 관행이 이어져 왔던 셈입니다.
"(대성공사) 밖에서는 민주화가 이뤄지고 있었지만, 안은 바뀐 게 없던 모양이었어요. 군사 정권 때 습성이 그대로 남은 거죠. 정보기관 안을 감시할 사람이 없으니 폭력이 아주 비일비재했죠."
'모욕주기'식 조사는 다행히 첫날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이어진 수용 생활은 감옥 생활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처음 열흘 정도는 침대와 화장실만 덜렁 있는 독방 안에 온종일 갇혀있었습니다. 밥도 방 안에서 조사관들이 날라다 주는 것만 먹었습니다. 자유롭게 움직이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했지만 방 밖으로 나갈 수 없었습니다. 복도에는 헌병이 서 있었습니다. 문 밖에선 어디선가 '퍽퍽' 맞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대성공사 나가서도 협박, 폭행… "제 인간성은 파괴됐어요"
입소 후 6개월 만에야 지옥 같던 대성공사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러나 나가서도 그는 '자유의 몸'이 될 수 없었습니다. 민간 사회에 정착하고 지내던 어느 날, 집에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네, 이민복입니다."
"너 왜 신문사에 글을 올리나."
"언론의 자유가 있지 않습니까."
"아직 정신 못 차렸구먼. 한번 죽어볼래?"
전화는 뚝 끊겼습니다. 며칠 전 그가 신문사에 보낸 기고가 화근이었습니다. 남북관계에 관한 글로, 딱히 정부에 문제 될 게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협박 전화'의 목적은 한 가지였습니다. 무슨 일이든 다 정보기관의 승인을 받고 하라는 것.
한 차례 경고 전화면 끝나겠거니 했지만, 착각이었습니다. 대성공사 퇴소 후 그의 담당 형사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선생님, 저와 함께 안기부에 가주셔야겠습니다."
지금 안기부에 가면 당할 일은 훤했습니다. 형사는 '제가 죽는다'며 제발 한 번만 가달라고 통사정을 했습니다. 1997년 2월 12일, 하는 수 없이 내곡동에 있는 안기부 청사로 갔습니다. 안기부 직원이 손님방으로 그를 안내했습니다. 높이가 무릎 께까지 올라오는 낮은 탁자가 있었습니다. 탁자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 초조하게 기다렸습니다. '끼익'. 방문이 열렸습니다. 덩치 큰 남자가 들어왔습니다. 대성공사 입소 첫날, 그를 욕보였던 서진하였습니다.
그에게 다가온 서진하는 발로 탁자를 쳤습니다. 그대로 뒤로 밀려난 탁자는 그의 무릎을 퍽 하고 쳤습니다. 무릎을 감싸 쥘 새도 없이 그를 일으켜 세운 서진하는, 대성공사 입소 첫날처럼 가슴이며 배며 사정없이 두들겨 팼습니다.
"대성공사에서 눈을 뜰 때마다 서진하의 눈을 뽑아버리고 싶었어요. 그렇게 악감정을 만들게 하면 안 됩니다. 이 나라에 온 사람에게 어떻게 이런 폭력을 쓸 수가 있습니까. 저는 목사가 무척 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어요. 전 이제 인간성이 파괴됐습니다. 사람답지 못한 대접을 북한에서도 받고, 남한 와서도 받아서 인간다움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를 통일역군으로 대해달라"
'이건 아니다' 싶었습니다. 대성공사 안에서나 밖에서나 감옥이 따로 없었습니다. 아무리 간첩 의심이 든다 해도, 인격체를 대하는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탈북자들을 찾아다녔습니다.
다른 탈북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자신과 마찬가지로 가혹행위를 당한 이들이 많았습니다. '북한에 있는 가족을 버리고 도망친 인간쓰레기', '국적이 없으니 화장하면 아무 문제 없다'는 등 폭언은 기본이었습니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다며 조사관에게 구둣발로 채인 사람, 북한에서 배운 격술 시범을 시켜 동작을 했다가 '시키는 대로 했다'는 이유로 몽둥이찜질을 당한 사람, 안마 요구와 같은 모욕적인 행위를 강요당한 이도 있었습니다.
이들과 함께 1998년 12월 탈북자 인권단체 '자유북한인협회'를 꾸렸습니다. 탈북자들이 자율조직을 꾸린 건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기독교 신자였던 그는 1970년대 한국 앰네스티 창립을 주도한 윤현 목사를 찾아 '인권 운동'의 노하우를 배웠습니다.
윤현 목사의 조언에 따라, 우선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을 찾았습니다. 이 단장을 포함해 9명이 원고가 되어 국가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하기로 했습니다. 변호사들은 각오를 단단히 하라고 했습니다. 국가를 상대로 한 소송은 '계란으로 바위 깨기'라고 했습니다. 여론을 호의적으로 이끌어내야 유리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소장을 제출하기 전에 기자들도 불러 모았습니다. 1999년 1월 15일 서울 카톨릭회관에서 '자유북한인(탈북자) 인권침해 방지 및 생활 정착을 위한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안기부의 탈북자 인권침해 사례를 공개했습니다. 9명의 원고를 포함한 탈북자들은 "우리 탈북자들을 통일역군으로 대하고 폭행, 폭언을 중지하라"고 촉구했습니다.
탈북자들이 자발적으로 안기부의 행태를 언론에 공개하고, 국가배상소송을 낸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처음 터져 나온 탈북자들의 문제 제기는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안기부는 즉각 성명을 냈습니다. "탈북자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반말을 하는 등 거친 행동이 있을 수는 있지만 구타 등 가혹행위는 하지 않았다", "정착지원금을 적게 받은 일부 탈북자들이 불만을 터뜨리는 것"이라며 사건을 축소하려 들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소송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2심까지 갔지만 법원은 결국 '증거 부족'으로 소를 기각했습니다. 법정 싸움에선 졌어도 여론전을 통해 성과를 얻었습니다. 탈북자 정착지원시설인 '하나원'이 그해 7월 개원했습니다. 하나원 체제로 전환되면서 지하실, 독방이었던 대성공사 수용 기간은 예전에 비해 줄어들었습니다.
"탈북자 주제에, 너 잘못하면 직업 뺏는다"
변호사들의 말대로였습니다. 국가, 특히나 정보기관을 상대로 벌이는 투쟁은 쉽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탈북자들이란 산들바람에 꺾이는 갈대처럼 국가 앞에서 약하기 그지없는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탈북자들은 남한에 와서 부당한 일을 겪어도 감히 말을 못했습니다. 안기부가 굉장히 힘이 있었거든요. 직업을 쥐어주고 외국 보내는 걸 국정원이 다 통제했어요. 여권 발급을 잘 안 해주는데, 해준다 해도 단수 여권만 줬어요. 그러니 다들 얻어터지고도 눈치만 보고 있었죠."
용감한 사람 몇 명만 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같이 단체를 꾸리고 탈북자 인권운동 전면에 섰던 이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다 떨어져 나갔습니다. 특히 공사에 다니거나 공직에 있던 사람들은 "국가 녹 먹는 사람이 국가를 공격하느냐"는 압박을 받았습니다. 한때 동지였던 탈북자들은 어느새 적으로 돌아섰습니다. 활동가 수가 줄어들면서 탈북자 인권 운동은 예전과 같은 활기를 잃었습니다. 이제 이들의 활동을 기억하는 이도 많지 않습니다.
"아쉬워도 이해는 해요. 어쩔 수 없죠. 탈북자들이 남한에 잘 살려고 온 거잖아요. 그런데 나라에서 '탈북자 주제에 너 잘못하면 직업 뺏는다'고 개입하고 협박을 하니 버틸 수 있나요."
"국가가 탈북자들 때린 건 몰라요. 환영만 한 줄 알지."
이 단장은 "사람들이 저를 대북 삐라 날리는 사람으로만 알지만 탈북자 인권 문제를 들고 최초로 싸운 사람"이라고 자랑스럽게 얘기합니다.
"남한 사람들은 국가가 탈북자들을 때린 건 몰라요. 귀순용사들 왔다고 환영만 한 줄 알지. 유우성 씨 사건 정도 돼야 조금 심각한가 보다 하고 알죠. 법원이 간첩 의심 받는 사람한테 그냥 무죄를 주지 않았을 겁니다. 제가 겪어봤으니 알잖아요? 그럴 만도 해요. 국정원이 아직도 옛날 습성을 못 버렸어요. 때리면 다 되는 줄 아는 겁니다."
언론에서 '이민복'이라는 이름을 접했던 분들이라면, 기사를 읽고 고개를 갸웃할 수도 있습니다. 대북 전단 살포 활동과 탈북자 인권 운동이 서로 충돌하는 지점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풍선 날리는 일은 '우쪽'이 좋아하고, 인권 운동은 '좌쪽'이 좋아하는 일입니다. 그는 모든 문제를 '진실'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저는 좌우를 떠나서 진실 그 자체를 존중하는 사람입니다. 세상 모든 문제를 그렇게 보려고 합니다. 북한이 싫어 남한에 왔지만, 여기서도 북한 같은 일이 일어났어요. 제가 당했지 않습니까. 사실은 사실대로 말해야죠."
* 이 기사는 미디어 다음과 공동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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