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버지니아주 노폭주립대학교에서 27년 간 교수로 재직하며 평화와 통일 운동에 몸담았던 국제평화운동가인 김동수 교수의 북한 방문기를 마무리합니다.
김 교수는 남북 간 교류가 사실상 막혀있는 가운데 김 교수는 지난 4월 21일부터 28일까지 북한 어린이들을 지원하는 '코인 선교재단'(COIN Mission Foundation)의 폴 유 목사 부부와 함께 북한의 곳곳을 방문했습니다.
재미교포로 북한을 여러 번 드나들었던 김 교수는 북한은 스스로가 말하는 것처럼 "인민의 낙원"은 아니지만, 남쪽의 일부 사람들이 믿는 것과 같은 "생지옥"도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2015년 현재 북한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본 김 교수 방북기를 통해 북한의 실제 모습을 이해하고, 나아가 남북이 화해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마음의 고향<김동수의 북한 방문기>
오늘은 필자의 오랜 과거를 만나는 감격스러운 날이다. 필자의 간절한 소원을 풀어주기 위해 두 젊은 동포가 나서서 우리 일행을 데리고 필자의 70~75년 전 고향을 찾아가게 된 것이다. 필자는 유치원 시절부터 초등학교 3학년, 즉 1945년 해방되는 해까지 만주 봉황성(鳳凰城)에서 살았다. 봉황성은 필자의 어릴 적 감회가 깊이 서린 곳으로, 여기서 처음으로 어머니 품 밖의 세상을 알게 됐다. 봉황성은 단둥에서 심양(전 봉천)으로 가는 길 40Km 지점에 있는 중소 도시로, 위용과 풍치가 뛰어나 산악인들에게 잘 알려진 봉황산(鳳凰山)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봉황성은 오래된 전통 도시(그 때 일본인들은 ‘구시가’라 불렀다)인데 그 앞으로 작은 강이 흘렀다. 다리 너머에 있는 ‘신시가’지에는 주로 일본인들이 정착해 관사주택, 학교, 경찰서, 기차역, 일본신사, 우체국 등 현대 도시 시설이 있었다. 당시에는 도시와 철도길 주변 지역은 일본군이 지배하는 소위 만주국이었는데, 우리는 신시가지 안쪽에 거주했지만 주로 중국사람들(만주족)과 어울려 살았다.
필자가 다녔던 유치원, 교회, 초등학교, 우리 집 등은 지금도 눈 감고 찾아갈 수 있을 정도로 눈에 선한데, 막상 고속도로에서 나와 시에 들어가 보니 비슷한 곳을 찾을 길이 없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70년 만에 찾은 옛 고향이 그대로 있을 리 없다. 낯선 고층건물과 차량들로 가득한 풍광을 보며, 평생 꿈꾸던 고향이 다 사라지는 것 같은 참담한 순간을 맞았다.
한 노인의 도움으로 위치가 변하지 않았다는 봉황성 역전을 어렵게 찾았다. 기차역사는 큰 2층 건물로 바뀌었지만 앞의 광장을 보니 예전 생각이 떠올랐다. 아마도 75년 전 초봄이었으리라. 두렵지만 막연한 기대를 품고 있던 우리 일곱 식구가 그 낯선 역에 내렸을 때 우리를 처음 맞아준 환영객은 뜻밖에도 이곳의 일본 경찰서장이었다.
이 광장에서 두 마차에 나눠 탄 우리 식구는 그의 안내와 보호(?)를 받으며 어딘가로 향했다. 당시 어린 필자는 모든 것이 신기했지만 필자의 아버지, 평안도 시골에서 탄압을 피해 이곳 만주 교회로 온 중년 목사는 가슴을 졸였을 것이다. 이후 당국의 갖은 간섭과 탄압이 계속되면서 '혁명가 김예진'은 목사직을 면직당하고, 콩나물 공장을 차려 생계를 이어가는 신세가 됐다. 그 때 만주로 도망 온 청년 홍동근은 교회에서 '이상한 목사'를 만났다. 설교는 안하고 오르간을 타며 '그날'을 애타게 기다리는 목사와 깊게 교류하게 됐다.
봉황처럼 날아간 과거
1945년 8월 중순 일본이 항복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만주 전체는 큰 혼란과 불안에 휩싸였다. 아버지는 즉시 방안 높은 벽에 한문으로 '대한독립만세!', '자주해방만세!'를 써 붙이고 태극기를 그려 걸었다. 이 도시의 일본 민간인들은 일본군의 보호를 받으며 매일 화물차를 이용해 남쪽으로 피난을 떠났다. 이 와중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는데, 구시가의 중국인들은 거의 매일 밤 조선 사람 집을 약탈하고 주인을 죽이곤 했다.
한편으로는 시의 무슨 인민위원회라는 단체에서 친일파 10명을 공개 처형했는데 그중에 3명이 조선사람이었다. 조선사람 중에는 일본 군인 또는 형사 앞잡이로 중국인을 괴롭히고 착취한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앞으로 더 많은 친일파 조선 사람들이 처형당할 것이라는 이야기도 떠돌았다. 가혹하지만 죄과에 대한 심판이 내려진 것이다. 아버지는 동네 중국인들의 보호와 협조를 받으며 다른 조선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조선인거류민단'을 조직하고 단장으로 활약했다.
한 번은 멀리서 세 남자가 찾아와서 긴 이야기를 하다 떠났다. "조국 건설을 위해 함께 떠나자"는 부탁이었다. 목적지는 평양. 그러나 9월 중순 아버지는 평양이 아니라 백범 김구 선생을 위시한 임시정부 요인들이 돌아온다는 서울로 훌쩍 떠났다. 봉황성에 살던 다섯 자녀들은 어머니를 따라 몇 번에 나누어 슬며시 평양으로, 다시 서울로 왔다. 그것이 봉황성에서의 마지막이었다.
그런데 형이 아버지의 부탁으로 중요한 재산만 중국인 마차 3대에 나누어 싣고 안동 (지금의 단둥)으로 오는 길에 봉변을 당했다. 중국의 것은 돌 하나도 못 가져간다면서 중국 청년들이 모든 피난민을 약탈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형의 짐은 책밖에 없어서 매만 맞고 풀려났다. 그 많던 책은 신의주 제2교회 (한경직 목사 시무) 지하실로 향했다. 만주에서의 우리 집 과거는 온 살림과 함께 이렇게 마무리됐다.
아쉬운 마음에 우리 일행은 봉황산을 잠시 답사하기로 했다. 봉황산은 그 산맥이 봉황새가 날아가는 모습과 같다고 해 이름 붙여졌다. 입장권을 사고 장엄한 입문에 들어선 이후 다시 관람차 표를 사서 쉬운 등산을 했다. 화려한 2층 누각이 있는 광장에 이르러 희미한 옛날을 회상했다. 아마도 이곳이 예전에 중국인들이 제사를 지내고 축포를 쏘던 곳인 듯하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면 또 차표를 사고 관람차를 다시 타야 한다. 좀 더 높고 넓은 곳에 도착해 보니 멀리 케이블카가 준엄한 산 봉우리를 향해 올라간다. 그것도 두 번에 걸쳐 나누어 타는 모양이다. 그곳에 가면 가파른 바위를 깎아 만든 계단, 절벽에 선반처럼 얹어 낸 길, 바위 좁은 틈 사이의 길, 전부가 유리로 된 전망대, 구름 위로 오르는 산악 길 등 그야말로 환상적인 트래킹 코스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오를 수 없다고 판단하고 산 중턱에 앉아 우리의 따분한 신세를 위로했다. 이 장엄한 산과 광활한 땅이 한때 고구려 땅이라 생각하니 우리의 운명이 또한 처량하게 느껴졌다. 이 일대 남만주에는 우리 조상들의 유적이 널려 있고 특히 가까운 집안(集安)시에는 광개토대왕의 비문이 아직도 서 있다. 서로 싸우다 남에게 빼앗긴 우리 민족의 운명이 영광스런 우리 역사를 다 잃어버린 과거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음흉한 친절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북의 땅과 사람을 밖에서 다시 보기로 하고 압록강 상류로 약 반 시간 정도 올라갔다. 압록강 유람선착장이 있는 곳에서 우리는 유람선 대신 구명정을 입고 8인승 쾌속정으로 북쪽 땅과 섬 사이를 누비며 달렸다.
철조망은 없지만 여기저기 작은 초소가 서 있다. 분명히 누군가 우리의 동정을 살피고 있을 것이다. 파란 여자 감옥소 감시 초소가 보인다. 압록강은 지점에 따라 그 폭이 많이 다르고 그 안에 여러 크고 작은 섬들이 있는데 국경선이 애매해서 중국에 가까운 섬 중에서도 북의 땅으로 돼있는 경우가 있다. 어떤 섬은 실제 중국 땅에 붙어 있는데도 북의 섬이다. (일설에 의하면 오래전 조·중 지도자들이 백두산(중국의 장백산) 천지의 반을 중국 측에 주는 대가로 압록강의 무인 섬들을 넘겨 받았다고 한다)
배를 타고 가면서 우리는 많은 것들을 마주쳤다. 허름한 집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들, 강가에서 빨래하는 여자들, 배에서 일하는 사람들 등등. 그런데 배를 운전하는 중국인으로부터 사진을 찍지 말고 떠들지 말라는 주의를 받았다. 10m도 안 되는 거리에서 어떤 군인이 강가에 웃통을 벗고 앉아 담배를 피우며 쉬고 있다. 중국인이 무어라 외치고는 담배를 달라고 한다. 담배가 없는 우리는 조용히 바라만 봤다.
배는 다시 오른쪽 섬을 향했다. 이번에는 군인 세 명이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중국인은 또다시 담배를 주자고 한다. 본인이 담배가 있는데 저들에게 던져도 되느냐고 묻는다, 우리는 그러라고 했다. 그가 담배 한 상자를 던졌고 군인들 앞에 떨어졌다. 그런데 그 군인들은 본 척도 않고 그냥 이야기만 하고 있었다. 이것도 그들의 자존심인가?
중국인은 이번엔 군인들이 북조선 돈을 원한다며 우리의 의향을 물었다. 우리는 약간 이상하다고 느꼈는데 그 중국인은 오히려 우리가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알고 보니 이 쾌속정은 주로 남쪽에서 오는 손님들이 많이 사용하는데, 북쪽 동포에게 물건을 주려는 마음을 이용한 돈벌이였다. 북쪽 동포들은 철창 속의 희귀 인간처럼 구경거리가 되는 셈이고 애절한 동포애가 중국 사람들에게는 좋은 돈벌이의 기회가 되는 것이다. 북쪽을 돕는 소규모 외국 엔지오 단체들도 대부분 불가피하게 중국 상인들의 물건을 사주는 고객이 돼 있었다.
중·조 압록강 대교
우리는 압록강 하류 새 경제개발지역으로 향했다. 왼쪽에는 이성계가 회군하여 조선왕조를 설립하게 됐다는 위화도(威化島)가 있었다. 이 섬은 북의 경제특구로 지정됐으나 3층 건물들의 유령촌(?)이 들어섰을 뿐, 실제 별다른 진전이 없다고 한다.
좀 더 하류로 내려가면 북의 류초도를 지나 엄청 높고 하얀 다리의 위용이 나타난다. 이것이 바로 새로 건설된 '중·조압록강대교‘(中朝鴨綠江大橋)다. 이 대교는 3Km가 넘는 현대 아치형 골격으로 중국이 3000억 원 이상의 건설 비용을 들여 완성하였다는 새 다리다. 그러나 북에서 도로가 이 다리에 연결되지 않아 아직 개통되지 않은 상태이다.
또 하나의 다리, 1911년 일제가 대륙진출을 위해 건설했으나 6.25 전쟁 당시 미군의 대대적인 폭격으로 북쪽에는 교각만 남은, 일명 '압록강단교'(鴨綠江斷橋)는 중국의 관광상품이 되어 적지 않은 사람들이 다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지금의 '중·조우의교'(中朝友誼橋)는 너무 낡아 20톤 이하의 화물차만 서행으로 운행하고 있었다. 새 대교는 앞으로 북과 중국의 경제적 교류와 통상에 중요한 통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 다리에서 좀 더 내려가면 14만 제곱킬로미터가 넘는 북의 땅 (실은 중국 단둥 땅에 붙어 있다)이 나오는데 북이 2011년 말 중국과 합의했다는, '황금평·위화도 경제지대법'에 의한 황금평(黃金坪) 경제특구이다. 이 특구는 지리적 위치와 특성을 고려해 산업, 문화, 서비스의 '3대 기능'과 의류가공, 전자제품, 문화 콘텐츠, 현대식농업, 첨단상업·무역 서비스의 '5대 산업'을 집중 육성할 계획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법은 이 지역에 외국 법인이나 개인들의 투자를 허용하며 개발기업이 전체 면적의 토지를 임대받아 종합적으로 건설·경영하는 방식으로 개발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 장밋빛 경제특구 계획은 함경북도 나선(나주, 선봉) 경제특구 경험에 비추어 볼 때 크게 진전되지 않을 수 있다는 우려를 갖게 한다. 만성적으로 부족한 자본, 후진적 기술에다 현재 미국과 남쪽의 경제 봉쇄 및 군사적 위협이 있기 때문이다. 현재 북이 당하는 국제사회에서의 고립은 매우 심각하다. 풍부한 지하자원과 노동력에도 불구하고 자유로운 경제 개발의 길을 열기 어렵다. 더욱이 핵무기 개발 이후 북은 유엔의 제재와 감시로 인해 거의 모든 나라들과 금융관계나 경제교류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결국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출구는 중국의, 중국에 의한, 그리고 중국을 위한, 경제관계의 발전이다. 그것은 거대한 중국 경제의 종속적 하부구조에 편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넓고 편한 중조압록강대교는 이미 열려 있다. 그러나 위의 경제특구는 사실상 '황금평·위화도 100년 토지 임대사업'으로 진행되다가 어느새 세계적으로 유명한 상업자본가인 중국인들이 전부 집어삼킬지도 모른다. 착잡한 마음을 안고 숙소로 돌아왔다.
중국에 점점 의존하게 되는 북
다음날 아침 우리 일행은 동포들의 도움으로 대형 승용차를 대절해 심양공항으로 향했다. 봉황성을 지나고도 거의 4시간을 더 달렸다. 이 넓고 비옥한 만주 벌판, 특히 동북 간도 지방은 우리 선조들이 오랜 시간 살았던 우리의 땅인데, '간도협약'(間島協約)으로 빼앗겼다. 우리의 슬프고 잘못된 역사다.
지금 여기 사는 부지런하고 성실한 동포들은 모두 '조선족 중국인'이 되어 있다. 민족시인 윤동주도 '조선족 중국시인'으로 둔갑돼 있다. 중국의 소위 '동북공정'(東北工程)으로 우리의 고조선, 고구려, 발해 역사마저 중국 역사의 한 부분으로 왜곡·편입되고 있는 실정이다.
얼마 전 미국의 한 시사 잡지에서 "통일이 되어도 남한은 빈 깡통 북한 (the North, empty-handed)을 만나게 될 것이다"라는 글이 나왔는데, 북한이 희금석을 포함한 많은 지하자원의 채굴권을 50년 내지 100년간 중국에 팔아버렸기 때문이다.
한 보도에 의하면 북한의 대중국 의존도는 기존에 약 40%였으나, 5.24조치 이후 거의 90%로 상승했다. 민족의 자주와 주체성을 위해 고군분투한 북한이 결국 중국으로 팔려가는 불쌍한 신세가 되는 것은 아닐까? 더 슬프고 안타까운 사실은 이런 민족적 비운이 지난 몇 년간 남쪽 당국과 잔인할 정도의 단절과 대결, 위험한 수준의 적대감과 공격성으로 인해 더욱 강화됐다는 점이다.
물론 그 책임의 상당 부분은 같은 또는 더 높은 적대감과 공격성에 몰두한 북한 당국에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들에게는 선택의 자유나 실험의 여유가 없다. GDP로만 따지면 북한보다 46배나 높은 경제력을 자랑하는 남한 당국이 동족애를 가지고 북한을 조금이라도 돕는다면, 아니면 돕겠다고 기다리는 민간차원의 지원을 그냥 허용하기만 한다면 어떨까? 우리는 무거운 마음과 가벼운 가방을 지니고 인천으로 돌아왔다.
방문기를 마치며
본 필자는 지금까지 비판적이면서도 긍정적으로 북한을 보고 공정하게 소개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어떤 독자들은 이 방문기 역시 '좌파 종북세력'의 교묘한 선전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한이 완벽하게 나쁜 곳이라고 지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북한은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인민의 낙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일부 남쪽에서 믿고 있는 것처럼 '생지옥'도 아니다. 어렵고 힘들지만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그들 나름대로 삶의 의미와 목적을 통해 심지어 어떤 행복감도 가지며 힘차게 사는 곳이다. 무엇보다 말과 풍습, 인정과 모습이 어느 나라에도 비교할 수 없는 우리의 동족이다. 언젠가 같이 화해해야 할 우리의 형제자매들이다.
일반적으로 적대관계에서는 상대를 '악마화'하고 그에 따라 상대방에 대한 증오감과 혐오감을 강조하며 그것을 애국의 이름으로 정당화한다. 남한 공안 당국은 국민들이 그 악마 같은 '북한괴뢰도당'에게 현혹되지 않도록 늘 경각심을 세우라고 강요한다. 북과 접촉하거나 동조·인정·찬양·고무·협력하는 언행, 심지어 그런 생각조차 위험시하고 범죄시한다. 그런 통제가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는 길이고, 심지어 평화와 통일을 이루는 길이라 주장한다. 일부 보수 반공 기독교인들은 '화해의 사도'로 부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반목과 증오가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끝없는 미움과 싸움은 모두를 악마화하고 파멸하게 만든다. 어떠한 명분이나 주장으로도 북한을 영원히 미워하고 저주하는 것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이웃, 동족, 형제를 절대적 적으로 만드는 행위는 민족을 배반하는 사대주의자들만이 할 수 있는 범죄행위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명령에는 실리적 평화와 공생의 원리가 담겨 있다.
필자는 이번 방문을 통해 남과 북이 진정성과 선의에 기초한 신뢰를 회복하고, 화해와 사랑의 환경을 조성하는 것만이 평화통일을 이루는 유일한 길임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이런 방법이나 과정을 계속 억제하고 거부하는 것은 '국가 안보'가 아니라, 남북 분단을 영구 고착화하는 반민족적 범죄라고 본다. 어쩌면 수천 년 같이 살아온 동족 3분의 1을 완전히 소외시키고 국토의 약 55%를 영원히 잃어버리는 비통한 일이기 때문이다. 북쪽 입장에서도 동족의 3분의 2와 결별하고 국제적 고립 속에서 결국 중국 자치구 수준의 성(省)으로 종속되는 절대 위기다.
이 시대 우리 민족에 대한 최대 범죄는 이 분단을 정당화, 영구화, 절대화하는 모든 반통일 세력이다. 필자는 그 세력이 단순히 외세가 아니라고 본다. 북쪽만도 아니고 남쪽만도 아니라고 본다. 남과 북에서 실질적으로 화해의 가능성과 진전을 방해·통제·역행하려는 모든 극우·극좌·강경·보수 정치세력이라 할 것이다. 분단체제에서 혜택을 누리고 안녕과 이득을 보는 기득권 사대주의 세력이라 본다.
여기에 자유로운 해외동포들과 남한의 각성한 시민들이 맡아야 할 나라 사랑의 역사적 책임과 역할이 절실하고 중대하다. 우리 모두를 살리는 길은 결국 분단으로부터 오는 모든 갈등과 증오의 벽을 넘어 과감하게 모두를 위한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다. 기독교 성서가 분명히 지시하는 대로 "우리는 말이나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과 진실함으로 사랑합시다" (요한 1서 제3장 1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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