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수 교수의 북한 방문기를 연재합니다. 김 교수는 평안남도 덕천 출신으로 미국 버지니아주 노폭주립대학교에서 27년 간 교수로 재직하며 평화와 통일 운동에 몸담았던 국제평화운동가입니다.
남북 간 교류가 사실상 막혀있는 가운데 김 교수는 지난 4월 21일부터 28일까지 북한 어린이들을 지원하는 '코인 선교재단'(COIN Mission Foundation)의 폴 유 목사 부부와 함께 북한의 곳곳을 방문했습니다.
재미교포로 북한을 여러 번 드나들었던 김 교수는 북한은 스스로가 말하는 것처럼 "인민의 낙원"은 아니지만, 남쪽의 일부 사람들이 믿는 것과 같은 "생지옥"도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2015년 현재 북한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본 총 7편의 김 교수 방북기를 통해 북한의 실제 모습을 이해하고, 나아가 남북이 화해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김동수의 북한 방문기>
반기독교 정치풍토에서의 예배
방문 다섯째 날, 오늘은 주일(일요일)이다. 필자에게 이날은 어디에 있든 교회에 가는 날이다. 우리는 설렘을 가지고 평양 봉수교회를 찾아갔다. 봉수교회는 1980년도 초부터 해외 기독학자들의 끈질긴 설득과 압력의 덕(?)으로 세워진 첫 교회다.
당시 우리가 접촉했던 북의 학자들은 "인민의 필요서열로 봐서 아직 교회를 건설할 단계가 아니다"라고 변명했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대부분인 우리는 그것은 종교의 자유가 없다는 실증을 전 세계에 보여주는 것이라 반박했었다.
결국 북 당국은 1988년 9월 평양 보통강변 건국동 (구 봉수동)에 이 교회를 건립했다. 같은 해에 장충성당도 건립했다. 그 후 1992년 김일성 주석이 어머니 강반석(성도명)을 따라 다녔다는 칠골교회를 재건했다. 김일성주성의 외가쪽은 강량욱목사(외삼촌)를 위시하여 모두 진실한 기독교 집안이라는 것은 다 알려진 사실이다.
오전 10시 50분경 우리는 현대식 2층 석조구조의 예배당에 들어섰다. 이 건물은 2006년도 경 남쪽 장로교 (통합측) 남선교회가 지원하여 개축한 봉수교회 새 건물이다. 안에는 정면에 커다란 십자가, 강단과 네 개의 의자가 있었고 오른편으로는 성가대, 그 앞에 그랜드 피아노가 있었다. 남쪽 어느 중소교회와 별다를 바 없지만 장식이나 구호가 없는 간단한 예배처소였다. 그런데 전에 비하면 외국의 방문객이 별로 없고 교인 수 (120명 정도)나 성가대원 수(28명)도 약간 감소한 듯했다. 미국 장로교단 선교부 총무였던 김인식 목사가 참여해서 무척 반가웠다.
"빛나고 높은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주 예수의 얼굴..." 은은하고 감미로운 찬양의 선율로 시작한 예배는 전형적인 개신교 예배형식을 따랐다. 잠시 후 한 여신도의 성경봉독과 손철민 목사의 설교가 시작됐다. 이 역시 전형적이고 평범한 목사의 설교였다. 광야의 외침도 아니고 혁명의 나팔소리도 아니었다. 그러나 100여 년 전 '동양의 예루살렘' 이라며 아시아의 기독교 거점이라 불렸던, 하지만 지금은 반기독교 정치세력의 본거지인 평양에서 주일 예배를 본다는 감격은 컸다.
한편으로 필자의 마음은 설교에 집중하지 못하고 여러 착잡한 분단 현실에 방황했다. 남쪽의 기독교인 중 많은 사람들은 이런 교회가 다 '가짜'이고 '정치적 쇼'라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십자가 밑에서 성경을 읽고, 찬송을 부르고, 같이 기도하고, 말씀을 선포하고, 헌금을 바치고, 축도를 하는 순수 예배행위가 다 가짜일까?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간절한 심령으로 찬양하고 기도하는 북의 믿음의 형제들 모습, 왜 순수한 신앙양심을 가지고 바라볼 수 없을까?
자본주의적 성장제일주의 우상 앞에서 온갖 분쟁과 부패와 탐욕에 빠진 일부 남쪽 교회의 현실을 정의의 신 여호와는 어떻게 판단할까? 또한 일체의 행동이 감시 통제되는 북한 사회구조 속에서 '지하교회'의 비밀활동과 확산을 역선전하는 저의는 무엇일까? 남쪽 교회들이 정치권력을 이용하고, 이용당하고, 야합하는 추태를 무어라 변명할 것인가?
이 예배에서 가장 감명을 주는 부분은 성가대의 찬양이었다. 독창, 여성 5중창, 합창 모두 음악적으로 훌륭하고 영적 은혜로 풍성했다. 그런데 필자에게 가장 큰 감동을 준 음악순서는 동행한 유은녀 사모의 독창이었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할렐루야" 전날 밤부터 몸이 몹시 아픈데도 불구하고 기어코 나와서 직접 피아노를 치면서 유 사모는 천사의 소리로 찬양을 선사했다. 아마도 그녀는 이 순간을 위해서 오랜 세월을 불안과 아픔과 외로움 속에서 지내왔을 것이다.
김인식 목사의 축도로 예배를 마치자 교인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예전처럼 손에 손을 잡고 "우리 다시 만나 볼 동안"의 작별 찬송이 없다. 물론 점심이나 친교의 시간도 없다. 목사님들과 사진을 찍고 아쉬운 작별을 한다.
북에서는 대부분의 사회주의국가에서처럼 기독교 교회는 있으나 전도나 주일(교회)학교가 없다. 길에서 우연히 러시아 정교로 보이는 교회 건물을 목격했으나 아마도 그들의 활동도 제한되어 있을 듯싶다. 포교가 금지당하는 종교는 종교의식이 있든 없든 최대의 탄압을 받는 셈이다.
사실 해방 이후 북에 공산세력이 집권함에 따라 한국기독교는 가톨릭이나 개신교를 막론하고 상당한 핍박을 받았다. 이후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6.25 동란 전후로 그들에 의하여 모든 교회가 폐쇄되고 수많은 교회지도자들이 남과 북에서 순교 당했다. 그런 연유로 인해 급격하게 남에서 성장한 기독교는 북의 공산세력을 극도로 증오하게 되고 반공의 가장 강력한 정신적 보루가 됐다. 많은 보수 기독교인들에게 북은 "하나님이 진멸할 사탄의 세력"이고 따라서 당연히 "미워해야 할 원수"가 되었다.
인민공화국의 혁명전통
오후 3시부터 호텔에서 손님들을 위한 특강 2개가 마련됐다. 김철수사범대학 정기풍 교수가 와서 공화국의 이념, 역사, 정치, 경제, 군사, 통일 등에 관한 전반적인 내용을 조리 있게 설명했다. 물론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지만 필자는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국가와 민족을 생각하는 그의 진지한 태도와 열정을 그냥 존중하고 싶어서였다. 동조하지 않으면서도 신념에 찬 사람을 존경할 수 있다.
그는 수령론부터 강의를 시작했다. 북에서는 김일성 주석은 위대한 지도자일 뿐 아니라 절대적인 존재이고 그에 대한 충성과 사랑은 가히 종교적이다. 따라서 그를 이은 후계자의 권위와 존엄도 절대적이다. 32년 전 일이다. 필자를 포함한 미국 동포교수단이 처음 방문했을 때 당시 황장엽 중앙당 비서를 만나 환담하며 그의 주체사상을 토의한 바 있었다. 그리고 용감하게도 우리는 그 당시 부상하고 있던 김정일 비서의 후계설을 비판적으로 논평하였다. 그는 주체사상 이론을 넘어 "인민이 원한다면" 그럴 수 밖에 없다는 (좀 구차한?) 답변을 강변하고 같이 시원한 냉면을 나누었다.
3세대 후계를 설명하는 정기풍 교수는 "혁명전통의 계승"이라고 규명하고 이는 나라의 자주성 유지를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특히 김정은 제1비서는 강성국가 건설을 위해서 선군정치 (인민군을 모든 사회활동과 통일 위업의 본보기로 내세우는 정치)를 계승한다고 한다. 인민의 혁명전통이 반드시 한 가문의 권력독점으로 계승되는 것일까?
북의 통일정책
그의 통일 전망은 좀 더 현실적이고 다소 낙관적이었다. 정 교수에 의하면 북의 통일정책은 일관적이고 합리적이다. 즉 외세 없는 자주, 무력행사를 배제한 평화적 방법, 사상과 이념과 제도를 초월하는 전 민족 대단결이다. 이것은 이미 7.4 공동성명을 통해서 남북이 합의한 3대 통일원칙이고 그 후 6.15 공동선언, 10.4선언이 더 발전적인 합의를 도출한 것이다. 다만 이를 실행하지 않는 것이 문제이다.
정 교수는 북은 미국과 평화협정을 원하고 남과 평화적인 교류를 바라지만 미국과 남쪽은 북에 대해서 계속 국제적 압력과 경제적 봉쇄와 위협적인 전쟁연습을 강행하므로 늘 불안과 고통에서 투쟁하고 있다고 한다. 자주적 생존을 위해 국가 총예산의 약 3분의 1을 군비로 사용해왔지만, 이제는 핵무기 개발로 어느 정도 국방의 기반이 성취돼서 앞으로는 경제발전에 집중할 수 있고 인민의 문화생활 증진을 위해 자원을 사용할 여유가 생겼다고도 말했다. 핵무기 개발로 남북대화가 단절되었다는 남쪽의 주장과는 대치되는 입장이다.
적대상황에서 부정적인 원인을 추구한다면 끝없는 '달걀과 닭의 순위 또는 인과관계'에 고착될 수 있다. 문제는 이 악순환의 고리를 어떻게 창의적으로, 그리고 혁명적으로 탈피하느냐하는 용단에 달렸다고 하겠다. 정 교수는 앞으로 중요한 혁명적 과제의 하나는 헐벗은 산을 덮을 나무 심기 운동이라고 밝혔다. 북의 산은 거의 다 민둥산이다. 경작지 확장을 위해 조성한 벌목지가 홍수 때마다 농산물 생산에 큰 피해를 주고 있다. 경제실패의 원인인지 결과인지 따질 필요 없이 지극히 불행한 현상이다.
2시간 반이 흐른 후 두 번째 강의가 있었다. 조국통일연구원 실장인 김현철 교수가 통일문제에 대해서 간단한 강의를 이어갔다. 김 교수는 겸허한 학자적 인상을 풍기며 예리한 전문가의 입장에서 그의 견해를 토로했다. 그는 먼저 북의 핵은 어느 누구를 표적 삼기보다 방위수단으로서 '자존을 위한 보험'이라고 규정했다. 남한은 미국의 '핵우산'으로 보호를 받지만 북은 반대로 미국의 계속적인 위협과 도발적 시위로 항시 전쟁위기에 노출돼있다는 것이다. 생존을 위해 막대한 대가를 치르면서 부득이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이 논리는 여러 해 전 북의 한 기관원과의 토론에서 들은 말과는 대조되는 입장이다. 그 당시 '제네바 합의' (1994년 북한 핵 문제 해결을 위해 북과 미국이 서명한 기본합의서)를 파기하고 비밀리에 핵무기 개발을 추진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리의 도전에 그는 그렇지 않고 또 그럴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전쟁을 원한다면 남조선에 재래식 무기로 결정적 타격을 줄 목표물이 얼마나 많습니까? 남쪽 해안에 원자로가 널려 있습니다"
하지만 그 예언은 아주 빗나갔고 종래 핵폭탄이 나왔다. 그러나 필자는 이 상반되는 두 가지 주장이 결국 약자의 입장에서 평화를 보장받기 위한 공통된 최종 방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 교수는 진지한 태도로 북이 진정 평화를 원한다고 밝혔다. 평화는 통일의 필수 방법인 동시에 최종 목표이기 때문이다. 그는 남과 북이 최소한 6.15 합의 시절의 교류 수준이 다시 이뤄지길 바란다고 개인적인 소원을 술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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