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버스(Air Bus)
서울서 뵌 몇몇 분들이 경비 충당을 여쭈었다. 남북으로, 동서로, 여비가 만만치 않을 것이라며.
여기서 세세한 내역을 공개할 것은 없겠다. 다만 예상하는 것보다는 훨씬 저렴하게 다닌다. 단연 저가 항공사 덕분이다. 기내식을 비롯해 부속 서비스를 줄임으로써 항공비의 거품을 거두었다. 착한 가격의 비행기들이 아시아를 촘촘하게 엮어가고 있는 것이다. 바지런하게 품을 팔아 온라인을 뒤지면 파격적인 액수의 월척을 낚을 수도 있다. '유라시아 견문'에 나설 수 있었던 만용 또한 이러한 시대적 흐름의 반영이라고 여긴다. 10년 전만 해도 감행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저가 항공사의 대표 주자로 '에어 아시아'를 꼽을 수 있다. 수년째 선두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아시아의 하늘(Air ASIA)이라는 이름부터 상징적이다. 거점은 말레이시아이다. 이 또한 우연만은 아니지 싶다. 경영진의 사업적 수완 못지않게 지리-문명적 소산이라고 보이기 때문이다.
말레이시아는 동남아시아의 내륙부와 해양부를 잇는 가교적 위치에 자리한다. 아세안의 남과 북을 잇는 허리인 셈이다. 게다가 이슬람 국가이다. 이슬람 세계와도 밀접하게 접속되어 있다. 그래서 동아시아는 물론이요, 남아시아와 서아시아까지 연결망이 뻗어나갈 수 있었다. 왕년의 말라카가 해상(海上) 무역의 왕국이었다면, 오늘의 말레이시아는 천상(天上) 교통의 허브인 것이다. 에어 아시아가 쿠알라룸푸르와 직항으로 연결하는 아시아의 도시만 여든 곳을 넘는다.
그 뒤를 인도네시아가 바짝 쫓고 있다. 올해 파리에서 열린 에어쇼에서 가장 큰 손으로 등극한 항공사가 인도네시아의 '가루다(Garuda)'였다. 보잉 787을 60대나 구입한 것을 비롯하여 지갑을 활짝 열었다. 향후 10년간 250대의 비행기를 더 구입할 계획이라고 한다. 2억 명이 넘는 인구가 수 천 개의 섬에 분산되어 살고 있는 국내 환경이 항공 산업 발전에 유리한 조건이 되고 있다.
특히 라마단이 지나고 맞이하는 최대의 명절 이둘 피트리(Idul Fitri)는 항공 업계의 최대 성수기이다. 자카르타 등 대도시에 거주하고 있는 수백만 명의 인도네시아 인들이 고향을 방문하거나 여행을 떠나기 때문이다. 올해 에어 아시아는 이 기간에 맞추어 90대의 특별 여객기를 투입하여 1만6000명의 여행객을 더 소화했다.
인도네시아의 토착 저가 항공사 라이온 에어(Lion Air) 또한 50대를 추가 편성하여 맞불을 놓았다. 이처럼 항공사 간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표 값은 더욱 떨어질 것이고, 가격이 저렴해질수록 저가 항공을 이용하는 승객들은 더욱 늘어날 것이다. 게다가 인도네시아 역시 세계 최대의 이슬람 국가이다. 메카 순례에 나서는 무슬림 여행객들 또한 날로 증가할 것임에 틀림없다. 국제선도 갈수록 분주해질 것이다.
실제로 지난 10년간 아세안의 저가 항공사들은 8배 이상 성장했다. 2004년 2500만 승객을 소화한 것에 견주어 작년에는 2억 명을 돌파했다. 같은 기간 기존의 항공사들이 1억8000만에서 2억6000만으로 증가한 것에 비하면 비약적인 발전이다. 앞으로 3년 안에 저가 항공사들의 점유율이 대형 항공사들을 뛰어넘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아세안의 통합과 저가 항공사의 성장이 공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올해 말 아세안 경제 공동체가 출범하면 이 추세는 더욱 가팔라질 것이다. 6억 규모의 동남아 단일 시장이 등장한다. 인구로만 따지면 북미의 미국, 남미의 브라질, 유럽의 독일을 합친 것과 맞먹는다. 공항마다 이미 아세안 창구가 따로 설치되어 '아세안 시민'들은 상호 무비자로 오간다. 육지와 바다를 경계로 나라와 나라를 가르던 장벽들이 현저히 낮춰지고 있는 것이다.
이미 쿠알라룸푸르, 자카르타, 방콕, 싱가포르 등은 저가 항공사들이 가장 분주하게 드나드는 허브 공항이 되었다.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저렴한 가격으로 더 자주 이동하게 될 것이다. 그럴수록 비행기 또한 국가와 국가를 잇는 이동수단이라기보다는 도시와 도시를 네트워킹하는 미디어에 가까워진다.
말 그대로 하늘을 주행하는 버스(AIR BUS)처럼 보이는 것이다. 'Now, Everyone Can Fly'라는 에어 아시아의 모토야말로 '하늘길의 민주화' 선언이다.
하늘의 비단길
아세안의 번영은 아시아의 번영과 연동한다. 동남아는 중화 세계, 인도양 세계, 이슬람 세계의 교차로이기 때문이다. 파리 에어쇼 개최에 앞서 보잉사가 전망한 향후 항공 시장의 판도 또한 아시아와 중동이 주도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유럽과 북미의 비중은 그만큼 줄어든다.
실제로 보잉사의 2010년대 주문 장부를 보노라면 아시아의 비중이 압도적이다. 그리고 그 절반 이상이 인도네시아, 인도, 태국(타이), 말레이사아 등의 저가 항공사에 집중되어 있다. 2013년 이미 세계 10대 저가 항공사 가운데 다섯 자리를 아시아 회사들이 차지했다. 앞으로 20년간 아시아에서만 1만3000대의 민항기 수요가 더 있을 것이라고 한다. 2034년이면 한 해 1만5000대의 비행기가 아시아 역내를 운행하며 도시와 도시들을 거미줄처럼 엮어갈 것이다. 비행기 생산보다는 19만 명이 더 필요할 것으로 보이는 조종사들의 수급을 더 걱정해야 할 판이다.
동북아도 예외가 아니다. 당장 한국만도 제주항공의 약진이 눈에 띈다. 김포와 김해를 제주와 이음으로써 960%라는 기록적인 성장을 구가했다. 나아서 인천-홍콩, 부산-홍콩, 인천-나고야/오사카/도쿄로 이어지는 국제선도 선보였다. 양대 항공사를 잇는 업계 3위의 입지를 굳힌 것이다.
그러자 대한항공도 진에어를 출범시켰다. 저가 항공으로 인천을 제주, 홍콩, 마카오, 방콕, 치앙마이, 세부, 비엔티안(라오스), 오키나와, 삿포로, 나가사키 등과 연결한다. 특히 진에어가 선보인 서울-괌 5시간 구간은 중소형 비행기가 갈 수 있는 최대 거리로 가장 인기 있는 노선이 되었다. 향후 중국 서부와 북아시아, 중앙아시아의 물적-인적 연결망이 더욱 긴밀해질 것을 감안한다면, 한국의 저가 항공사 또한 성장 잠재력이 상당하다고 하겠다.
중국도 뒤질 리가 없다. 대륙의 여행객은 이미 세계 관광 산업의 지형도를 바꾸어 놓았다. 지구촌 어디를 가도 유커(旅客)를 만날 수 있다. 중국은 지금도 82개의 신(新)공항을 건설 중이며, 앞으로 예정된 것만해도 100개가 넘는다. 연평균 7%의 승객 증가율을 감안하면, 10년 안에 중국이 세계에서 가장 큰 항공 시장이 될 것임이 분명하다.
그간에는 주로 동방항공과 남방항공 등 국영 항공사가 항공 업계를 이끌었다. 그러나 이미 항공사 출범의 진입 장벽을 낮추는 제도를 마련했다. 저가 항공사의 등록 절차를 간소화하고, 공항 이용료를 인하하고, 오래된 공항들을 저가 항공사 전담으로 재편하는 등 다양한 방안을 강구했다. 가령 상하이의 춘추항공(春秋航空)은 상하이-홍콩 간 편도 항공권을 10만 원대에 제공함으로써 성공을 거두었다. 티베트항공은 '불교 여행'을 특화시킨 상품으로 인도와 동남아 노선을 야심차게 개척 중이다. 내년(2016년)이면 중국에서도 저가 항공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30%대로 늘어날 전망이다.
남아시아서도 변화의 바람이 분다. 인도인들도 국내 여행마저 기차보다는 저가 항공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올해 여론 조사에서 응답자의 67%가 기차 대신에 비행기를 선택한 것이다. 가격차는 크지 않은데 비하여, 시간은 크게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인도 또한 2034년까지 연평균 7% 대로 비행기 승객이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앞으로 1300여대의 비행기가 더 필요하다는 뜻이다.
이처럼 저가 항공사의 비약적 발전과 함께 새 천년의 하늘길은 전혀 새로운 지도를 그려가고 있다.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를 발명한 이래 지난 세기의 항공로는 주로 대양을 건너 대륙을 잇는 것이었다. 유럽에서 대서양을 지나 아메리카로, 동아시아에서 태평양을 지나 북미로, 남아시아에서 인도양을 지나 유럽으로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수많은 아시아계 디아스포라들이 양산되었다.
이제는 딴 판이고 새 판이다. 태평양과 인도양을 건너는 대신에 아시아 대륙 역내를 순환하고 순회하는 흐름이 강해지고 있다. 남-북 간 이동에서 남-남 간 이동으로의 전환이다. 대양을 횡단하던 원거리-장거리 노선을 대신하여 유라시아 대륙을 통과하는 단거리-근거리 노선이 촘촘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럴수록 비행기의 꼴도 변해간다. 대양을 갈랐던 대형 항공기보다는 중소형 항공기의 수요가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먼 거리를 드물게 이동하기보다는, 짧은 거리를 더 자주 이동한다고 하겠다.
이 또한 1990년대 이래 '세계화'의 역설이다. 미국으로 유럽으로 향했던 지난 세기의 일방통행이 동-서 간 남-북 간 쌍방향으로 전환되고 있다. 일방로가 순환로가 되어간다. 하늘길도 탈균형에서 재균형으로 반전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만 하더라도 1992년 한중 수교를 기점으로 태평양과 아시아로의 이주 노선이 판이하게 바뀌었을 것이다.
사업과 여행, 유학과 결혼 등 다방면에서 역내 인구의 환류(還流)가 여실하다. 이제 아시아 어느 나라, 어느 도시를 가도 한국인 교민들을 만날 수가 있다. 이념과 체제의 '가치 동맹'을 내세우며 가까운 이웃과 척을 지던 시대가 저문 것이다. 20세기형 '동지애'보다는 왕년의 '이웃애'야말로 21세기에 더욱 어울리는 친밀성이라고 하겠다.
하여 새 천년의 실크로드 또한 육로와 해로의 복원과 재건에만 있지 않다. 하늘에도 새로운 실크로드가 비단처럼 깔리고 있다. 지금 나는 이 천상의 비단길을 따라서 캄보디아로 향하고 있는 중이다. 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안에서 한 차례 경유하는 번거러움은 있으되, 가격 경쟁력에서 월등한 베트남의 저가항공사 비엣 젯(Viet Jet)을 이용하고 있다. 두 시간 후면, 프놈펜에 도착한다. 아시아는, 유라시아는, 갈수록 가까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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