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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망하면 한국이 흥할까?

[유라시아 견문] 북경 : 제국의 터전

북경과 대도

내몽골에서 베이징(북경)으로 향했다. 고비 사막을 낀 내/외몽골에 견주면 거리가 훨씬 가까웠다. 밤기차를 타서 이른 아침에 도착했다. 오래된 길이었다. 지금은 철길이지만, 한창 때는 말이 달리던 길이다. 그 길을 따라서 몽골은 중원을 장악했다. 유라시아 제국을 건설할 수 있는 물적 기반을 확보했다.

만주족도 이 길을 따랐다. 내몽골에서 북경으로 내쳐감으로써 대청제국을 이룰 수 있었다. 중화인민공화국도 마찬가지다. 동북 3성(만주)과 내몽골에서의 승기가 결정적이었다. 애초 북경을 '大都(대도)'로 이름 짓고 처음으로 수도로 삼은 이도 쿠빌라이였다. 중원에서 보자면 동북으로 치우친 장소지만, 유목민이 보기에는 북방과 중원의 딱 중간이었다. 북경은 진정 제국의 터전이었던 것이다. 북경으로 가는 밤기차에서 북방의 1000년사가 복기되었다.

3년 만이었다. 날씨가 무척 화창했다. 5월의 하늘이 몹시 파랬다. 3년 전 베이징의 겨울은 스모그가 자욱했다. 환경에 신경을 쓰는 가 했더니, 특파원들 말씀으로는 그건 또 아닌 모양이다. 내가 운이 좋았을 뿐이다. 덕분에 드높은 창공을 바라보며 '제국'을 깊이 궁리해 볼 수 있었다. 사색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본디 중화 제국에서 하늘은 각별했다. 제국의 정통성이 '天命(천명)'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일찍이 경탄한 이는 라이프니치였다. 중화 제국을 규정해간 초월적 '천'의 관념에 감탄했다. 황제는 절대군주가 아니었다. 하늘에 의해 심판받는 존재였다. 관념으로 그치지도 않았다. 사관을 통하여 제도화했다. 사마천의 <사기> 이래 일관되었다. 역사 편찬이 갖는 의의가 변하지 않았다. 중화 제국이 연속성을 갖는 것도 천명이라는 발상과 사관의 존재 때문이었다.

그래서 서아시아였다면 '제국의 교체'라고 보였을 일들이, 동아시아에서는 동일 제국 안에서의 '왕조의 교체'로 간주되었다. 가령 로마 제국은 페르시아 제국을 계승했음에도 양자를 연속적으로 파악하지 않는다. 페르시아 제국은 '동양'으로, 로마 제국은 '서양'으로 표상되기 일쑤이다. 오스만 제국의 칼리프가 로마 황제를 자처했다는 사실도 곧잘 무시된다.

그에 반해 진과 한은 중화 제국의 연속으로 이해된다. 사관 때문이다. 사관이 체현하는 천명 때문이다. 천주 문명과 천명 문명이 갈라지는 분기점이기도 하다. 한쪽은 제국이 붕괴되고 신앙 공동체(중세)와 신념 공동체(근대)로 쪼개져가는 1000년사를 경험했고, 다른 한쪽은 제국을 끊임없이 복원해가는 1000년사로 나뉘었다. 20세기 100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제국의 탄생

세계 4대 문명권이라는 말이 있다. 정확한 표현이 아니지 싶다. 수전(논농사)에 기초한 장강 문명과 화전(밭농사)에 근거한 황하 문명은 엄연히 별개의 문명이었다. 즉 고대 문명은 5대 하천에서 비롯되었다. '5대 문명권'이 있었던 것이다. 그 가운데 양대 문명을 최초로 통일한 국가가 진나라였다. 황하 문명과 장강 문명을 통합했다. 가히 제국의 탄생이었다.

그러나 관건은 제국의 건설이 아니라 제국의 유지이다. 말 위에서 제국을 만들 수는 있지만, 제국을 경영할 수는 없는 일이다. 즉, 제국은 생산력이나 군사력만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사상'이 필요하다. 인간을 다스리는 기술, 인간의 마음을 사는 기술이 발전해야 한다. 그래야 복수의 공동체=국가들의 동의를 구할 수 있다. 한마디로 '德(덕)'을 실현해야 했다. 안정과 평화라는 공공재를 제공하고, 시장 확대와 물질문명의 발전을 촉진해야 한다. 그러면 문화도 융성해진다.

중화 제국의 남다름이 여기에 있다. 덕의 실현을 추구하는 사상 대국이었다. 제국 경영의 사상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난상토론 끝에 제자백가가 도달한 제국의 경영술은 일치했다. '無爲(무위)'이다. '무위'란 '(인)위'를 부정하는 것이다. '(인)위'는 힘에 의한 강제이다.

당시로서는 크게 둘이었다. 하나는 주술에 의한 강제, 즉 씨족 사회의 전통이다. 다른 하나는 무력에 의한 강제이다. 씨족 사회(원시 공동체)를 붕괴시키는 군사력, 즉 패도였다. 작은 공동체는 종교가, 큰 공동체는 완력이 지배하고 있던 것이다.

'무위'는 양자를 모두 거절하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무위'란 도가뿐만이 아니라, 유가도 법가도 공통된 지향이었다. 주술과 무력에 의거하지 않기, '사상'의 힘으로 제국을 다스리기. 철학 왕국, 인문 국가를 지향한 것이다.

공자는 이것을 인과 예로써 풀었다. 한비자는 법으로써 접근했다. 법가의 법치주의 또한 피지배자를 엄중하게 다스린다는 뜻이 아니다. 권력을 자의적으로 남용하는 지배자를 법으로 구속하자는 것이다. 법이야말로 지배자를 복종시키는 수단이었다. 그러하면 자연스레 신하도, 백성도 법을 따르게 된다. 법가가 추구한 '무위'이다.

法(법)은 Law(법칙)이 아니다. 물처럼 자연히 흐르는 것(水+去)이다. 복수의 공동체 간의 담을 허물고 벽을 부수고 소통의 물꼬를 트는 것이 법이다. 부족 사회나 씨족 국가를 넘어선 영역에서 통용되는 '만민법'인 것이다. 따라서 제국의 '법'이란 애당초 '국제법'에 가까웠다.

다만 문화의 여부와 정도에 따라 차등이 있었다. 이른바 화/이의 분별이다. 사람에게 군자와 소인의 구별이 있듯이, 국가에도 문명국과 야만국의 분별이 있었다. 하지만 차별만도 아니었다. 화/이의 분별이야말로 중화 제국이 늘 다른 문화와 문명을 포섭하는 복합 국가였다는 증거이다. 아니 화/이의 변증법이야말로 제국의 진화를 추동시키는 내적 동력이었다.

ⓒwikipedia.org

화/이의 변증법

한나라는 흉노로 고민했다. 무력이 부족해서만은 아니었다. 제도, 즉 문화가 모자랐다. 유목민을 포섭하는 원리를 미처 갖추지 못했던 것이다. 이것을 실현한 것이 당이다. 그래서 대당제국이라는 표현도 지나침이 없는 것이다.

그 이행 과정이 흥미롭다. 한과 수/당 사이에 소위 '5호 16국' 시대가 있었다. 변경에 있던 유목민들이 중원까지 내려와서 지냈던 시절이다. 이 난세에 마침표를 찍은 나라가 선비(탁발씨)의 북위였다. 북위는 유목 국가이면서 동시에 농경 국가이기도 했다. 투르크계의 흉노나 위구르와 달리 한나라의 문명을 적극 수용하고자 했다. 중앙 집권적 관료제를 확립하고 균전제도 도입했다. 복합 국가, 제국의 기틀이 다져진 것이다.

이러한 북위의 정책을 계승한 것이 수와 당이었다. 수도, 당도 북위의 장수가 만든, 즉 유목민이 세운 왕조였다. 그래서 수당 제국 또한 외연의 확대에 그치지 않았다. 외부에 있던 것이 내부화되는 과정, 즉 주변이 중심이 되는 화이변태의 과정을 밟았다. 수양제는 대운하를 건설했다. 남방과 북방의 문화가 뒤섞였다. 남방의 불교가 국교가 되고, 승려가 관료가 되었다.

실은 불교의 국교화를 가장 먼저 이룬 나라도 북위였다. 화/이를 융합시키는 복합 국가의 원조였던 것이다. 그래서 문화의 전파력도 한층 커질 수 있었다. 중원의 밖으로 수당의 제도가 널리 퍼져나갔다. 삼국 및 월남, 일본에 이르기까지 광역대의 중화 세계가 형성되어갔다. 전례가 없는 세계 시민주의도 만개했다. 당나라는 골수(骨髓)가 제국이었다.

대당제국의 해체 이후에도 제국의 이념은 사라지지 않았다. 농경 국가와 유목 국가, 중원과 북방의 통합은 중화 제국사를 규정한 핵심 과제였다. 이 과제를 한층 더 잘 계승한 쪽은 송나라보다는 거란이었다. 남송은 유목 국가적 성격을 거의 상실했다. 반면 916년 거란을 세운 아리츠아보키(耶律阿保機)는 제국을 복원하려 했다. 북방의 유목 세계에 농경 국가의 원리를 재차 도입하려 한 것이다.

물론 반발이 적지 않았다. 군사력의 우위에도 내부 분란으로 남송을 치지 못했다. 결국 거란은 무너졌지만, 제국 재건의 목표는 초원 세계로 더욱 확산되었다. 그리고 결국 중원으로 회귀했다. 몽골이 건설한 대원제국이 비상했다.

북방에서 제국의 하드웨어를 업그레이드하는 시도가 거듭되고 있을 무렵, 남방에서는 소프트웨어의 혁신이 한창이었다. 수당 제국의 열린 세계가 닫히면서 사상의 엄밀화와 질적 도약이 일어났다. '송학'의 등장이다.

불교를 품어낸 신유학이 탄생했다. 과거제도 본격화되었다. 지배자의 자격이 만인에게 개방되었다. 누구나 관료가 될 수 있고, 누구도 사대부가 될 수 있었다. 신분 사회에서 시민 사회로, 종교 사회에서 인문 사회로. 동방의 계몽주의가 출현한 것이다. 그 파장으로 가까이로는 정도전의 <불씨잡변>이, 멀리로는 스피노자의 <에티카>가 등장했다. 전 지구적 계몽화가 촉발되었다.

따라서 초원 제국을 세운 칭기스칸과는 달리 중원까지 통합한 쿠빌라이는 중국의 황제 노릇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북방의 대칸이 남방의 천자가 되기 위해서 남송에서 심화시킨 천명 사상에 순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당대의 주자는 끝내 이단으로 생을 마쳤으되, 몽골제국에서 주자학은 국학으로 격상되었다. 다국가, 다문명을 통섭하기 위해서는 성리학적 합리주의(=실학)가 아니고서는 제국 경영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과거제가 주변으로 확산된 것도 몽골을 통해서였다. 당장 고려에 과거제가 도입된 것도 몽골의 영향이다. 결국 그 과거제를 국가의 골간으로 삼아 조선이라는 문명 국가도 들어섰다.

이 세련된 소프트웨어는 몽골세계제국이라는 하드웨어를 통하여 중화 세계 밖으로도 수출되었다. 아랍으로, 유럽으로 널리 전파되었다. 결국 유라시아의 가장 서편에서도 절대군주의 목을 치는 하극상이 일어났다. 화에서 이로, 중원에서 주변으로, 동방에서 유라시아로, 중화제국의 이상이 확산된 것이다. 송학의 서진, 맹자의 세계화라고도 하겠다. 화/이의 변증법이 중화 제국의 경계를 넘어 유라시아의 사상과 제도의 근대화를 추동했던 것이다.

중국몽과 제국몽

지난 3년 사이 중국은 정권이 바뀌었다. 시진핑 체제가 들어섰다.

눈에 띄는 변화는 거리의 선전물이다. '사회주의 핵심 가치관'이 곳곳에 널려있다. 시진핑 시대의 국가 이데올로기쯤 되겠다. 열 두 개의 핵심 가치를 셋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국가의 목표로서는 '부강, 민주, 문명, 화해(조화)'가, 사회의 목표로서는 '자유, 평등, 공정, 법치'가, 개인의 목표로서는 '애국, 경업(敬業), 성신(誠信), 우선(友善)'이 꼽힌다.

사진을 찍어 카톡으로 전송했더니, 한 후배가 '자본주의 국가와 차이가 없네요.' 라고 답한다. 농이었지만 진을 담았다. 아니, 정답이었다. 좌/우의 시대는 일찌감치 지났다. 중국은 더 이상 좌고우면, 우왕좌왕 하지 않는다. '100년의 급진'을 뒤로 하고, '중국의 길'을 걷는다. 20세기의 東京(동경)과 21세기의 北京(북경) 사이의 결정적 차이이다. 중국은 끝끝내 '탈아입구'하지 않았다. 중심을 잃지 않고, 본연도 잊지 않았다. 자력으로 갱생했다. 근성이고 저력이다. 거듭 재귀했던 중화 제국도 결국 귀환하고 있다.

하여 중국에 필요한 것은 '서구화'도 '민주화'도 아니다.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를 '중화 제국 특색의 사회주의'로 더욱 진화시키는 것이다. 제국을 한층 더 적극적으로 재구축하고 재창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중국 특색의 '古今(고금)합작' 프로젝트라고도 하겠다.

혹여 중국에 자유민주주의가 도입된다면, 십중팔구 전국 시대가 재연될 것이다. 소수 민족이 독립하고, 한족도 지방별로 갈라설 것이다. 국민 국가를 萬國(만국)과 萬世(만세)의 표준으로 삼는 외눈박이라면 그것을 역사의 진보라고 여길지 모르겠다. '발전'과 '진보'는 난세를 가리(키)는 20세기의 최신 용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구한 중화 제국사의 시각에서 보자면 어디까지나 어지러운 시대에 그칠 뿐이다. 그래서 그러한 사태를 야기하는 정권은 결코 민의의 지지도 얻을 수가 없다. 천명에 기초한 정통성을 도무지 확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오래 지속될 리도 없다. 오히려 한반도와 동아시아, 세계 전체에 파국적 재앙만 선사할 것이다.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할 것도 없다. 대청제국의 말기를 잠시 상기해 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대청제국이 근대국가가 되고자 함으로써 천하대란은 더욱 극심해졌다.

돌아보면 국가 간 체제는 전형적인 난세의 논리였다. 독립과 평등이라는 허상이 세력 균형이라는 끊임없는 경쟁과 낭비를 구조적으로 강제했다. 그에 비해 중화 제국은 연비가 훨씬 뛰어난 체제이다. 자원 절약적이고, 환경 친화적이며, 생태적이다. 녹색 시대에 더욱 어울린다. 백번 양보해도 중화 제국의 실현이 태평성세의 충분조건은 아니었으되, 치세의 필요조건이었음을 부정하기는 힘들 것이다. 서방의 이론보다는 동방의 사론에 귀를 기울여야 하겠다.

천안문 광장에 서서 자금성을 바라보았다.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이 나라의 이름을 곰곰이 새겨본다. '중화 문명의 인민화'가 가능할 것인가? '인의예지의 공화국'이 들어설 것인가? 건국 100주년(2049년)이면 '중화 제국의 근대화'도 일단락될 것인가? 마침 천안문 일대로 또 다른 선전 포스터들이 보인다.

"中華文明 生生不息(중화문명 생생불식)." "大德 中國(대덕 중국)."

이 나라는 이미 元氣(원기)를 되찾고, 原理(원리)를 되살리고 있다. 오만한 자만심보다는 떳떳한 자부심이길 바란다. 왕도를 구현하고, 대덕을 발휘하는 나라로 거듭나기를 기원한다. 그래야 천하 또한 태평으로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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