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다녀왔다. 한국냉전학회가 출범했다. 말석에서 발표할 기회를 얻었다. 학회일이 6월 25일이었다. 올해는 마침 해방/분단 70주년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2015년 '6.25'에 닻을 올리는 냉전학회가 '뜻 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곰곰 따져보니, '뜻밖'이라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릴 것 같다. 70년 전, 북과 남이 지금까지 해후하지 못할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상상을 불허하는 세월이 일흔 해나 쌓인 것이다. 문자 그대로, 積弊(적폐)이다. 적폐 중의 으뜸이다.
서울에 있는 동안 인사동에 머물렀다. 아침마다 북촌과 서촌을 산책하는 재미가 호젓했다. 느긋하게 차를 마시며 출근길 시민들을 지켜보았다. 묘했다. 완전한 이방인도 아니요, 그렇다고 당장 이곳에 속해 있는 내부인도 아닌 처지이다. 생활의 보금자리를 나라 밖에 꾸린 지 5년째이다. 한국 또한 낯설게 보게 된다. 과연 이 나라를 견문한다면, 어떤 소재와 주제로 글을 쓸 것인가. 결론은, 결국은, 분단이었다. 분단이야말로 한국과 북조선, 한반도를 이해하는 최종 심급이었다.
다만 분단의 실체가 무엇인가에 대한 관점은 일정한 교정이 불가피해 보인다. 남북 간의 대결, 이념과 체제의 대결, 혹은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이라는 시각은 피상적이다. 틀린 말은 아니되, 정곡을 찌르지 못한다. 70년의 시간만큼이나 관성적이고 타성적이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이 다시금 요청된다.
나는 갈수록 분단의 심층으로서 전통과의 단절을 뼈아프게 새기고 있다. 한반도의 허리가 끊어짐으로써 남과 북 공히 역사로부터 골절, 탈골되었다. 뿌리를 상실하고, 중심(=중도)을 잃어버렸다. 전통의 근대화에 실패한 것이다. 그래서 우왕좌왕 맹목적인 근대화로 치달았다. 무릇 난세에는 극단이 승한다. 좌와 우가 끝내 분열하고 만 기저이기도 할 것이다. '극단의 세기'에 적응하는 방편을 두고 남과 북은 끝내 등을 졌다.
북은 强兵(강병)으로 치달았다. 남은 富國(부국)으로 내달렸다. 남과 북 공히 속도전을 벌이며 20세기형 근대 국가를 추구했다. 결국 북은 군사 국가, 武人(무인) 정권이 되었고, 남은 기업국가, 小人(소인) 천하가 되었다. 문인=군자를 제일로 쳤던 조선과는 아득한 새 나라가 제각기 들어서고 말았다. 조선 문명과는 너무나도 상이한 두 국가가 조선의 적통을 자처하며 반목하고 갈등하는 풍경이 70년째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20세기의 역설이다.
하기에 북과 남의 통일 또한 남과 북의 재회에 그치는 일만은 아니지 싶다. 부디 아니어야 할 것이다. 再活(재활) 운동이 절실하다. 전통과의 재접속, 전통의 혁신, 전통의 근대화가 긴요하다. 남과 북이 합류하고 협동할 수 있는 첩경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남북 각자의 적폐와 누습을 해소하고, 자기 부정과 자기 상실로 점철된 근대화의 상처 또한 치유해야 할 것이다.
20세기 독립 국가 만들기에 좌우합작이 필요했다면, 21세기 통일 국가, 문명 국가 만들기에는 '고금(古今) 합작'이 긴절하다.
가지 못한 길
나는 거듭하여 1894년 동학 운동을 돌아본다. 청일 전쟁으로 천하가 무너지던 해, 조선의 開闢(개벽) 또한 좌초되었다. 결국 개조(북)와 개혁(남)으로 척을 지었다. 남북 분단의 심층 또한 신/구 간 분단에 바탕 할 것이다. 그럴수록 더더욱 東學(동학)을 되새기고 곱씹는다.
동학은 西學(서학)을 배타하지 않았다. 서학을 되감아 치는 회심이 발군이었다. 전통을 내다버리지도 않았다. 儒學(유학)의 민중화를 꾀했다. 사대부의 교양과 일상을 전 인민에게 널리 보급하는 동방형 민주화 기획이었다. 國學(국학)으로 함몰되지도 않았다. 신세계와 신세기로 열려 있었다. 고금 합작의 원조이고 원형이었던 것이다. 서학과 국학의 분단 체제를 허물고, 구학과 신학의 분단 체제를 극복하는 동아시아학이 지향해야 할 덕목을 상당 부분 내장하고 있었다. 반추할수록 굉장하고 신통하다.
1894년의 좌절로 동학이 단절된 것만도 아니지 싶다. 망각되었다고 하는 편이 더 적실할 것이다. 특히나 일본이나 미국, 유럽이 아닌 대륙행을 선택했던 이들의 행보와 행적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들이 타지와 타국에서 쓰고 남겼던 기록들이 한글과 한문을 아울러 산적하다. 다만 온당한 대접을 받지 못했을 뿐이다. 연구가 부족하고 부실하여, 정당한 평가를 누리지 못한 것이다. 그간의 판단 기준과 잣대가 원체 '근대'에 편향되어 있던 탓이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이는 법이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것, 보지 못하는 것이 산더미이다. 그 사각지대에 20세기가 허락하지 않았던 가지 못한 길, '조선의 근대화'가 어렴풋 자리한다.
그러나 시세가 변하고 있다. 시절이 크게 달라지고 있다. 난세가 끝물에 접어들었다. '장기 20세기'가 황혼을 지나고 있다. '반전 시대'의 초입에 진입했다. 동과 서가 뒤집어진다. 미국과 중국의 역관계가 뒤집어진다. 해양과 대륙의 세력 균형도 뒤집어진다. 오해는 삼가자. 동방이 서양을 지배하는 시대가 열린다는 뜻이 아니다. 동서의 역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동과 서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재균형'의 시대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돌출했던 유럽도 유라시아의 일원이 되어간다. 중국, 인도, 이슬람의 유라시아 3대 문명권에서도 집합적 네오 르네상스의 기운이 여릿하다.
한반도의 (재)통일 또한 이 네오 르네상스의 물결 속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통일 운동 또한 점점 더 문명사적 지평에서 전개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의 근대화'를 복기할 때이다. 100여 년 전, 기미독립선언서(1919년)만 해도 조선 문명의 주체성과 보편성을 계승하는 면모가 역력했다. 민족의 독립과 세계의 평화(=태평천하)를 동시에 염려했다.
해방기 백범의 <나의 소원>은 조선 문명의 마지막 메아리였다. 그가 염원하던 문화의 힘이야말로 중화 문명, 인문 국가, 대동 사회를 지향했던 조선의 근대화에 방불했다. 김구가 소싯적, 동학에 입문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탈조선화와 탈주체화의 선봉에 섰던 이승만과 김일성과는 根性(근성)이 다른 인물이었다. 기민한 혁명파보다는 우직한 재건파였다.
하여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2019년부터 해방 100주년이 되는 2045년까지를 21세기형 동학 운동을 재개하는 기간으로 삼을 만하다. 고려 말의 성리학이 새 조선의 기틀이 되었던 것처럼, 조선말 동학을 계승하고 보완해서 통일 국가의 헌장으로 삼아도 좋겠다. 해방(1945년)은 도둑처럼 왔으되, 통일(20??년)만은 만반으로 준비할 일이다. 30년 대계, 마스터플랜을 세워야 한다.
나의 소원
2015년 6월, 서울은 온통 어지러웠다. 역병으로 야단법석, 아수라장이었다. 얄궂게도 역병을 덮은 것은 나라님의 몽니였다. 배신을 운운하며 심판을 하령했다. 낯이 뜨거운 살풍경이었다. 지도자부터가 좀체 어질지 못하다. 그 어질지 못한 여인을 지배자로 선택한 국민들 또한 몹시 어리석었다.
민주주의라는 미명 아래 민중과 시민에 아부하고 아첨하는 근대적 편견은 서둘러 떨치는 편이 낫겠다. 비단 한국만도 아니다. 1987년 전후에 민주화된 아시아의 주요 국가들, 대만(타이완), 태국(타이), 필리핀을 아울러 살펴도 오십 보 백 보이다. 거버넌스가 엉망진창이다. 군자를 키워내는 小學(소학)과 大學(대학)에 소홀할 때, 민주주의는 순식간에 '소인들의 난장판'으로 전락한다. 해탈(=극기복례)을 방기한 해방의 정치가 공공 영역을 사사롭고 삿된 투석장으로 변질시킨다.
역시나 제도보다는 '사람이 먼저'이다. 민주화 언 30년, 사람을 키워내는 시스템이 총체적으로 붕괴되었다. 소학은 소학(국민 교육)대로, 대학은 대학(엘리트 교육)대로 왜곡과 굴절이 극심하다. 그래서 민중은 민중대로, 지도자는 지도자대로 집합적 역량이 현저히 떨어졌다.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가 질적으로 나빠진 근본적 까닭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어설픈 개인주의, 설익은 자유주의가 나라의 밑둥을 송두리째 허문다. 시민의 권리는 결코 천부적이어서는 안 된다. 평생 학습이 필히 수반되어야 한다. 貪瞋癡(탐진치)를 떨쳐내지 못한 범부들의 투표가 동시대는 물론 미래까지 갉아먹기 때문이다.
20세기 근대 문명의 파탄과 민주주의를 별개인 듯 생각해서도 곤란하다. 깊이 결부되어 있다. 직시하고 직면해야 한다. 제발 태초부터 자유롭다는 '근대인' 흉내일 랑 그만 거두고, 오래된 경세와 경륜의 지혜에 마음을 열고 귀를 기울일 때이다. 心學(심학)의 수양과 實學(실학)의 수련 없이 아무나, 함부로, 주권자가 될 수 없다. 모두가 군자가 되는 대동 사회, 만인이 보살이 되는 극락 세계야말로 동방형 민주 국가의 출발이기 때문이다. 그래야 '역전 시대'가 아니라 '반전 시대' 또한 열릴 것이다.
징후는 이미 여럿이다. 중국은 유교를 재발견하고 있다. 인도는 요가를 세계화하고 있다. 이슬람은 율법으로서 자본주의를 교정하려 든다. 유라시아 곳곳에서 옛 물결이 새로 일고 있다. 한반도의 재통합 또한 이 새 물결을 거스르며 일어날 수 없을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여태 새 술을 담을 새 부대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새 판을 짜는 새 거점이 부족하고 부실하다. 단지 구체제의 와해만이 또렷할 뿐이다. 서울에 머무는 동안 불거진 '문학 권력' 사단을 보며, 이른바 '87년 체제'를 산출했거나 87년 체제의 산물이었던 진지들이 도처에서 붕괴하고 있음을 새삼 실감치 않을 수 없었다.
德壽宮(덕수궁) 돌담길을 오래 따라 걸었다. 덕수, 라는 뜻을 깊이 되새긴다. 마을마다, 유적마다, 한글에 가려진 한문 이름을 들추어 곰곰이 따져보는 버릇이 생겼다. 그 오래된 명명 속에는 여전히 옛 사람들이 꿈꾸었던 문명과 이상과 가치가 녹아들어 있다. 귀국하면 그 뜻을 받들어 새로이 잇는 일에 매진하고 싶다. 그래야만이 남북의 통일 또한 민족의 재통합이자 동방 문명의 갱신으로써, 지구촌에 공공재를 제공하는 범인류적 사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끝내 한국은 견문으로만 그칠 수가 없었다. 어느덧 소원하고 기도하고 있었다. 결국은 내가 돌아갈 현장이고 살아갈 터전이기 때문이다. 애착이 남다르다. 내가 태어나서 자란 이 나라에, 내 부모님이 살았고, 내 조상들이 먼저 살다 가신 이 땅 위에, 德(덕)이 오래도록 넘쳐흐르는 '仁義禮智(인의예지)의 공화국'이 들어서기를 간절히 염원한다. 그래서 후세와 후대에게도 아름다운 강산과 품격 있는 국가를 떳떳하게 물려주고 싶다.
긴장의 끈을 늦추지 말 것을 다짐하며, 다시 한국을 떠났다. 견문을 계속 이어가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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