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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그날, 유승민 '숙청'은 예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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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그날, 유승민 '숙청'은 예고되었다

유승민, 야권에 가장 위험한 정치인이 됐다

2011년 6월 24일, 당대표 경선 기호6번 유승민이 연단에 섰다.

"존경하는 우리 대구경북의 시도민 여러분, 당원 동지 여러분, 티케이의 아들 유승민입니다!"

'티케이(대구경북)의 아들'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모습에서 새누리당의 한 당직자는 전율을 느꼈다고 했다. 대구경북의 대표 정치인이 되고자 하는 꿈이 유승민에게 있었다. 그런데, 역시 대구경북을 주요 기반으로 하는 박근혜 대통령에 의해 그는 사실상 숙청을 당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누구는 "배신의 정치"라고 하던데, 유승민은 정말 배신의 정치인일까?

유수호 전 국회의원을 부친으로 둔 유승민은 2세 정치인이다. 1998년 이회창 전 총재를 만난 후 KDI 교수를 그만두고 야당(한나라당)을 택했다. 김대중 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는 글을 국책연구기관 교수가 쓴다는 게, 영 어색했던 모양이다. 당시 심한 압박을 받았다고 한다. 보수정당을 택한 것은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유승민 본인도 "당시 KDI에서 야당을 택한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고 했다.

유승민은 월급도 없는 여의도연구소장직을 맡아, 자기 차 몰고 출퇴근하면서 이회창 총재를 도왔다. 유승민과 박근혜 대통령의 인연은 지난 2000년부터 시작한다. 그때 박 대통령을 처음 만났다고 했다.

보궐선거로 당선돼 2년 차 국회의원이었던 박 대통령은 지명직 부총재를 주겠다는 제안을 거부하고, 고집을 부려 부총재 경선에 나서게 됐다. 박 대통령이 도덕책을 읽듯 또박또박 연설문을 읽는 모습을 본 유승민의 첫인상은 "저분은 연설하는 것도 되게 특이하네"였다.

2002년, 이회창의 핵심 경제 참모로 대선을 치른 유승민은, 대선 패배에 대한 책임감을 깊이 느꼈다고 한다. 이른바 '차떼기' 파동으로 감옥에 간 정치인들을 면회하며 시간을 보내던 중, 노무현 당시 대통령 탄핵 정국 속에서 한나라당 대표직을 맡은 박 대통령의 '호출'을 받았다. 유승민은 세 번을 고사했다고 한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삼고초려 끝에 그를 비서실장으로 영입했다. 당시를 회상한 유승민은 "저는 비서실장 체질이 아닌데. 가방도 잘 들 줄 모르고"라고 했다. 그는 자신이 "까칠하다"는 평가를 받는다고도 했다. 그는 "제 성격이 그렇다. 줄도 잘 못 바꾸고, 그래서 어려움도 많이 겪었다. 별로 순탄치 못했다"고 했다. 안 맞는 옷으로 여겼지만 그는 어찌 됐든 박근혜 대표 비서실장직을 수행했다. 그 과정에서 낡은 정치가 아닌, '국민을 위한 정치'를 내세웠던 박 대통령과 뜻이 맞았다고 했다.

2005년 박 대통령은 비서실장 유승민을 대구에 보내 지역구 국회의원으로 변신시켰다. 핵심 측근의 재보선 승리로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한 방 먹은 셈이 됐다. 박 대통령 입장에서는 측근에 대한 '배려'로 볼 수 있었겠지만, 유승민의 입장에선 "당수의 뜻"에 따라 위기에 처한 당을 구하기 위해 전장에 뛰어든 사례일 수 있다. 유승민은 2011년 <프레시안>과 인터뷰(☞바로가기 "한나라당, 노선 확 바꿔야")에서 "정치하면서 아버지(유수호 전 의원) 어머니의 음덕을 본 것은 굉장히 크다. 그러나 지역구는 아버지 지역구와 다르다. 아버지는 대구 중구에서 정치를 하셨고 저는 대구가 광역시가 되기 전에는 대구가 아니었던 곳 (대구 동구을)에서 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저는 정치인 2세라는 생각을 안 한다. 지역구를 그대로 물려받지 않아서 그런 것 같고, 또 아버지는 서민적이고 스킨십도 좋고 용기도 있는 분인데, 저는 스타일이 많이 다르다"고 했다.

그는 '유승민 정치'를 강조해왔다. 따지고 보면 유승민은 박근혜에 대한 '의리'가 있었던 정치인이었다. 그는 '유승민의 정치'를 잠시 접고, 박 대통령의 인간적인 매력에 끌려 2007년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저격수도 마다치 않았다.

그가 열심히 뛴 이유는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동지' 박근혜에 대한 의리였을 것이다, 둘째, 이회창의 참모로 대선에 실패했다는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박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또 실패했다. 두 번의 패배였다.

이후 절치부심한 유승민은 지난 2011년 당대표 경선에 나서면서 '유승민의 정치'를 가동했다. 그는 당시 홍준표 대표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친박계의 표가 분산되지 않았던 게 주요 요인이었지만, 유승민은 표 때문에 박 대통령을 무작정 '숭배'하지 않았다. 다른 친박과 분명 다른 모습이었다.

유승민은 당시 인터뷰에서 박 대통령을 "동지"라고 표현했다. 그는 "정치라는 게 가치를 함께 하는 것 아닌가. 뜻이 같으면 같이 가는 것 아닌가. 저는 동지라고 생각한다. 저는 그분과 기본적인 신뢰가 있다. 내년 대선 때까지 그분을 돕겠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고 했다. 상명하복식의 친박계 분위기에서는 감히 내뱉을 수 없는 발언이다.

유승민은 박 대통령을 "동지"로 생각했지만, 박 대통령은 유승민을 '신하'로 여겼던 것 같다. 이 지점이 결별의 씨앗이었던 셈이다.

▲ 자신의 의원회관에 앉아 있는 유승민 원내대표 ⓒ프레시안(최형락)

보수의 화두. 이 부분에 있어 유승민의 생각은 명확하다. 그는 2011년, 당대표 경선을 앞두고 "우리나라는 (양극화 등) 모든 게 고착화됐다. 이 문제를 그대로 두면 공동체가 유지가 안 되고, 보수 정당이 설 땅도 없어지게 된다. 저는 보수가 완전히 변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걸 좌클릭이다, 좌파 포퓰리즘이다, 민주당 흉내 내기다 이렇게 비판하는데, 그런 것 전혀 신경 쓸 필요 없이 민생 문제와 관련해서는 노선을 확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새누리당 원내대표 당선 후 첫 교섭단체연설에서 했던 '신보수 선언' 연설이나, 8일 원내대표직을 사퇴하며 내놓은 '사퇴의 변'과 맥이 다르지 않다. 요컨대 그는 일관된 정치 철학을 고수했다. 안보는 보수, 경제는 진보. 유승민의 정치를 요약한 말이다.

"보수가 '무통증' 병에 걸린 보수라면, 그 보수가 무슨 놈의 대단한 가치가 되겠나. 그런 부분은 지금 상황에서 제가 박 전 대표와 공감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제가 파격적인 정책 주장을 하면 박 전 대표가 반대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박 전 대표와 모든 정책에 대해 100% 같으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가는 방향이 중요한 것이다."

결국 갈 길이 달랐던 셈이다. 다른 것을 알고 '친박'으로서 존재해 왔었던 셈이다. '유승민의 정치'는 그의 발언 곳곳에 드러난다.

그는 "2세 정치인"이라는 말을 싫어했고, 누구의 덕으로 국회의원이 됐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보수 정치인으로서, 그것이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계파 수장의 생각과 다를지언정, 옳은 것은 옳다고 말해왔다. 오늘 같은 '숙청'은 예고돼 있었는지 모른다. 유승민은 지금까지 '유승민 정치'를 한 것이었고, 변한 것은 2012년 대선 당시 내놓았던 각종 경제민주화 공약을 사실상 폐기해온, 박근혜 대통령이었던 셈이다. 누가 배신의 정치인인가. 판단은 독자들의 몫이다.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정권이 하루아침에 무너지지 않은 것은, 남재희, 김종인, 윤여준과 같은 여권 내 합리적 인물들을 찍어내지 않고 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권이 잘못된 길을 갈 때, 목소리를 냈다. 물론 그렇다고 그들은 찍혀 나가지 않았다. 지금 야당 정치인들이 유승민 원내대표 '숙청'에 대한 논평을 앞다퉈 내놓고 있다. 확실해졌다. 유승민은 진보 진영 입장에서 가장 위험한 정치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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