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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과 미국 군사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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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과 미국 군사주의

[주간 프레시안 뷰] 중국과 군사 대결 강화하는 미국

"한국전쟁은 미국을 이전과는 전혀 다른 국가로 변모시키는 결정적 계기였다. (전쟁 이후) 미국은 해외에 수 백 개의 상설 군사기지를 두고 국내에 대규모 상비군을 갖춘 영구적인 안보국가가 됐다. (…) 후에 애치슨은 한국전쟁이라는 위기가 "나타나 미국을 구했다"고 말했다. 이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NSC 68이 최종 승인됐고, 의회에서 미 국방비의 4배 증액이 통과하게 됐음을 말한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미국의 방대한 해외 군사기지와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국내 군산복합체가 미국의 세계적 지배력의 원천이 된 결정적 계기는 2차 대전이 아니라 한국전쟁이라는 점이다. (…) (건국 이후) 평화 시 미국인의 생활에서 군사력이 중요한 요소였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NSC 68이 (소련 공산주의 위협에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대규모 군비 증강을 선언한 이후 (미 대외정책에서) 군사력의 역할에 대한 오랜 논란은 종지부를 찍었다. 이후 워싱턴의 주류 정치권에서 미 군사력의 핵심적 역할에 대한 의문은 단 한 번도 제기되지 않았다."

미국의 한반도 문제 전문가인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학 교수가 2010년 출간한 <한국전쟁(The Korean War: A History)>에서 지적한 내용입니다. 오늘로 발발 65주년을 맞는 6.25전쟁은 한반도 주민의 삶에 엄청난 고통과 변화를 준 것만큼이나 미국의 대외정책과 미국인의 삶에도 근본적 전환의 계기였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말해 그것은 미국이 군사주의 국가로 변모했다는 것입니다. 국제사회의 거의 모든 문제들을 미국의 군사력으로 해결하겠다는 것이 미 군사주의의 요체입니다. 미국은 6.25를 계기로 영구적 군사주의 국가가 됐고, 탈냉전 이후 지금까지도 미국의 군사주의는 변화하지 않고 있습니다.

1991년 1차 이라크전쟁을 시작으로 1990년대 중반 유고슬라비아 내전에 무력 개입해 유고연방을 해체시켰고, 2001년 9.11테러 이후에는 대중동 지역을 민주화 하겠다며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단행해 이 지역을 전쟁의 불바다로 만들었습니다. 이라크에서는 지난 해 6월 이슬람국가(IS)의 모술 장악을 계기로 3차 이라크전쟁이 시작됐습니다. 또한 아프간, 리비아, 시리아, 예멘, 파키스탄 등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전쟁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또한 오바마 정부는 2009년 아시아 회귀(Pivot to Asia)를 선언한 이후 동아시아에서 중국과의 군사 갈등을 키워가고 있습니다. 나아가 유럽에서는 우크라이나 사태를 계기로 러시아와의 핵무기 대결에 한발 한발 다가서고 있습니다.

1990년대 초반 탈냉전의 분위기를 타고 남북 화해의 움직임을 보였던 한반도는 2002년 부시 정부 주도에 의한 제네바 합의 파기와 2008년 이후 남한 보수 정부의 대북 적대시 정책으로 다시 갈등과 대결의 장으로 바뀌었습니다. 특히 강화된 미일 군사동맹이 중국에 대한 군사적 대결을 강화하면서 한국은 그 하위 파트너로 끌려들어가고 있습니다. 65년 전 한반도에서 일어난 6.25전쟁은 미국 군사주의화의 결정적 계기였습니다. 이제 한반도의 남과 북이 화해와 평화를 이루지 못한다면 한반도는 다시 한 번 강대국(미중) 간 군사 대결의 희생양이 될지도 모르는 형국입니다.

"한국전쟁이 나타나 미국을 구했다"

미 국가안보회의 문서 NSC 68은 6.25 직전인 1950년 4월에 작성된 극비 문서입니다(1975년에 기밀 해제). 트루먼 정부가 이 문서를 작성한 계기는 1949년 8월 소련의 원폭 실험 성공과 10월의 중국 공산 정권 수립입니다. 소련의 원폭 개발로 미국의 핵무기 독점이 깨지고, 중국에 거대한 공산 정권이 태어나자 미국의 대외정책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게 된 것입니다. 세계에 대한 미국의 지배력이 중대한 도전에 직면했기 때문입니다. 미소 군사 대결의 선봉장이자 냉전의 전사로 악명을 떨친 폴 니츠 주도 하에 6주간의 준비 끝에 마련된 NSC 68은 소련 주도의 세계 공산 혁명을 막기 위해서는 미국의 군사력을 대폭 증강해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하지만 2차 대전이 끝난 지 만 5년도 되지 않은 시점에서 대규모 군비 증강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명백한 군사적 위협이 없는 상황에서 미 의회와 국민을 설득할 마땅한 명분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2차 대전 당시 8백만에 이르렀던 미 육군의 병력은 1948년 55만으로 줄었습니다. 1945년 8월까지 1천척의 전함과 340만의 병력을 자랑했던 미 해군은 15개월 후 전함 3백척, 병력 49만으로 감축됐습니다. 예산도 5백억 달러에서 60억 달러로 급감했습니다. 공군에 전투기, 폭격기 등을 납품했던 미 항공산업의 매출액은 1944년 160억 달러에서 1947년에는 12억 달러로 쪼그라들었습니다.

NSC 68이 요구하는 대규모 군비 증강을 정당화할 명분이 절실한 상황에서 때마침 6.25전쟁이 터진 것입니다. 트루먼 정부는 즉각 북한의 남침을 소련의 세계 적화 시도로 규정하고 전쟁에 뛰어듭니다. 전쟁 발발 불과 열흘만인 7월 5일 경기도 오산 북방에서 미 스미스대대가 북한군과 첫 전투를 치를 만큼 전격적인 개입 결정이었습니다. 미 지도부는 6.25가 NSC 68을 정당화하는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나아가 6.25를 미국에 대한 소련의 군사적 위협의 증거로 제시하면서 대규모 군비 증강에 나섭니다(당시 NSC 68은 극비문서였음을 감안하시기 바랍니다).

6.25를 계기로 미국의 대소련 봉쇄는 중대한 변화를 겪습니다. 봉쇄의 수단이 정치, 경제, 외교에서 군사력으로 바뀐 것입니다. 즉 당초 봉쇄정책의 창시자인 조지 케난은 독일, 일본 등을 경제적으로 재건하고 소련의 대외 팽창을 외교적 수단으로 저지하는 신중한 방법을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NSC 68 작성을 주도한 애치슨과 니츠는 미국의 압도적 군사력에 의한 소련 봉쇄를 추진합니다. NSC 68에 의한 소련 봉쇄를 '군사화한 봉쇄(militarized containment)'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애치슨 등이 봉쇄정책의 군사화를 추진한 데는 국내적 요인도 작용했습니다. 2차 대전의 종결과 함께 전쟁 특수가 사라지면서 미국 경제가 불황 국면에 접어들었기 때문입니다. 미국 경제의 회생을 위한 자극제가 필요했고, 이들은 '군사화한 봉쇄'를 통해 소련을 압박하는 한편 국내 경제를 되살리려 한 것입니다. 6.25를 계기로 미국은 군사력으로 세계를 지배하려는 전쟁국가, 군수 생산으로 국내 경제를 유지하는 전쟁경제의 나라가 된 것입니다.

동아시아에서의 30년전쟁과 데탕트

미국은 한국전쟁에 이어 베트남전쟁에도 개입해 베트남이 통일되는 1975년까지 동아시아 지역에서 전쟁을 계속합니다. 미국은 중공(중국 공산정권)의 팽창을 저지한다는 목표 아래 동아시아 전쟁을 계속했지만 이는 사실 오판이었습니다. 1979년 중국-베트남전쟁이 보여주듯이 중국과 베트남은 결코 한 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1960년대 중반 표면화된 중소분쟁에서 드러난 것처럼 소련과 중국도 세계 공산 혁명을 위해 한데 뭉친 동맹세력이 아니었습니다.

1968년 1월 베트콩의 테트(구정대공세)를 고비로 미국의 베트남전쟁 승리 가능성은 사라졌습니다. 같은 해 3월 존슨 대통령이 차기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고, 그해 말 대통령에 선출된 닉슨은 1969년 베트남전쟁의 패배로 실추된 미국의 위신을 회복하기 위한 외교 전략에 나섭니다. 미국은 세계 최강의 군사력으로도 베트남이라는 조그만 나라를 굴복시키지 못함으로써 향후 전 세계에서 수많은 도전에 직면할 것이 분명해졌기 때문입니다. 닉슨은 핵무기 통제협상 등 소련과의 데탕트(평화공존)에 나서고 공산 중국과는 관계를 정상화합니다. 중국을 미국 편으로 끌어들여 소련을 견제하려는 것이었죠. 베트남전쟁의 패배가 가져온 미국 대외정책의 중대한 변화였습니다.

하지만 닉슨-키신저 콤비가 추진했던 데탕트는 1970년대를 넘기지 못하고 그 수명을 다합니다. 미국의 정치경제계에 포진한 막강한 전쟁세력이 공산권과의 평화공존 정책을 좌초시켰기 때문입니다. 닉슨 사임(1974년 8월) 직후인 1975년부터 키신저 주도의 대소 군비 통제 협상은 삐걱거리기 시작했고, 1979년 아프간 사태를 계기로 미소 관계는 대립 국면으로 돌아섭니다. 미국의 지배 계층은 '군사력만으로는 세계를 지배할 수 없다'는 베트남전쟁의 뼈아픈 교훈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은 것입니다.

아프간전쟁에서 시작된 미국의 영구전쟁

흔히 1차 아프간전쟁(1979-1989년)은 1979년 12월 소련군의 아프간 침공에서 시작됐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는 정확한 것이 아닙니다. 아프간 전쟁은 1979년 6월 당시 카터 대통령의 안보보좌관이었던 브레진스키의 비밀 개입 결정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브레진스키는 소련의 약한 고리인 중앙아시아 지역 이슬람 세력의 봉기를 자극함으로써 소련을 무너뜨리려 했고 이를 위해 1979년 중반부터 아프간의 반소 이슬람 세력에 대한 은밀한 지원을 추진합니다. 이후 소련군의 아프간 침공을 계기로 '중동 지역에서의 미국의 핵심 국익에 대한 군사적 대응'을 천명한 카터 독트린이 발표됐고 이후 레이건 정부에서 아프간에서의 대소 비밀 전쟁이 계속됩니다. 미군이 직접 개입했던 베트남에서의 처참한 패배를 경험한 미국은 이후 현지 무장세력을 전면에 내세우고 중앙정보국(CIA)과 미 특수부대 등이 배후에서 은밀한 지원을 하는 대리전(proxy war)의 형태로 전쟁을 계속합니다.

CIA 역사상 최대 규모의 작전이라는 평가를 받는 1차 아프간전쟁에서 미국은 30억 달러의 전쟁 자금과 스팅어 지대공 미사일 등 첨단무기들을 이슬람 무장세력에게 제공함으로써 결국은 소련의 아프간 철수 그리고 소련 해체와 냉전 종식이라는 숙원을 달성합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10만 이상의 이슬람 무장세력을 양성해냄으로써 이들은 1990년대 이후 세계 안보의 최대 골칫거리가 됩니다. 한때 미국의 동맹세력이었다가 90년대 이후 적으로 돌아선 오사마 빈 라덴이 대표적 사례입니다. 빈 라덴은 1980년대 미국의 지원을 받아가며 아프간전쟁에 참전할 무슬림 전사들을 모집하고 후원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1991년 1차 이라크전쟁 이후 미군이 이슬람 최고 성지(메카, 메디나)가 있는 사우디아라비아에 주둔하기 시작하자 미군 철수를 요구하며 일련의 대미 테러를 주도했고, 급기야 9.11테러를 저지릅니다. 빈 라덴은 결국 미국에 의해 제거됐지만, 미국은 1990년대 이후 아직까지도 자신의 전략적 목적을 위해 이슬람 무장세력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보스니아 내전과 코소보 독립 등 유고슬라비아 사태와 아제르바이잔 등 구소련 공화국에서의 이른바 '색깔혁명', 그리고 최근의 리비아 내전, 시리아 내전에도 미국의 지원을 받는 이슬람 무장세력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또한 미국은 2003년 이라크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림으로써 중동지역에서 이슬람국가(IS)를 비롯한 이슬람 무장세력이 활개 칠 수 있는 결정적 계기를 만듭니다. 후세인 정권은 이슬람 무장세력과는 대립관계인 세속 정권입니다. 또한 1991년 1차 이라크전쟁 이후 핵개발을 포기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후세인이 9.11테러 세력과 공모 관계이며 핵개발을 시도했다는 이유로 그를 제거합니다. 후세인의 이라크가 중동지역의 군사적 맹주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이슬람 원리주의에 반대하는 후세인이 제거됨으로써 이슬람 무장세력은 세력을 더욱 확장할 수 있게 됐습니다. 또한 수니파 국가 중 최대 군사력을 가졌던 그가 제거되고 이라크에 시아파 정권이 들어섬으로써 같은 시아파인 이란의 영향력이 강화됐습니다. 이제 중동지역의 평화와 안정은 이란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할 정도가 됐습니다.

미중, 미러 군사대결의 시대로

2009년, 이라크전쟁 반대와 모든 핵무기 철폐를 공언한 버락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지난 70년간 계속된 미국의 군사주의가 끝날 수도 있겠다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헛된 기대였습니다. 2003년 시작된 2차 이라크전쟁은 2011년 명목상 끝났지만 지난해 6월 모술 함락을 계기로 3차 전쟁에 돌입한 상태입니다. '핵무기 철페' 약속으로 노벨 평화상을 외상으로 수상한 오바마는 핵무기 철폐는커녕 미 핵무기의 유지 개선을 위해 3천억 달러 이상의 예산을 배정했습니다. 이제까지 그가 이룩한 평화 업적은 미국에 전혀 군사적 위협이 되지 않는 쿠바와의 관계정상화뿐입니다. 이란과의 핵협상을 통한 관계정상화를 시도하고 있지만 과연 성공할지는 두고 봐야 합니다.


▲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AP=연합뉴스

오히려 오바마는 2009년 '아시아 회귀(Pivot to Asia)'를 선언하면서 중국과의 군사적 대결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지난해에는 우크라이나 쿠데타를 배후 조종하여 내전 상태로 몰아넣고 그 책임을 러시아에 뒤집어씌우면서 핵대결마저 불사하고 있습니다.

아시아 회귀는 한마디로 말해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중국을 봉쇄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미국은 (1) 태평양의 미 해군력을 증강하고 (2) 센가쿠/댜오위다오 영토분쟁 등에서 일본 편을 들며 (3) 일본의 군사대국화 용인 및 미일 동맹 강화를 추진하고 (4)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통해 중국을 경제적으로 고립시키려 합니다.

지난 5월 이후 미국은 남중국해 스프래틀리군도(난샤군도) 영유권을 둘러싼 중국과 베트남 및 필리핀 등 인접국 간의 영토분쟁과 관련해 중국과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항해의 자유를 내세우며 중국을 압박하는 미국에 대해 중국은 강력 반발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한 외교전문가는 최근 미국 외교 잡지 <포린 폴리시>에 기고한 글을 통해 "오늘날의 중국은 더 이상 미국의 협박이나 공갈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시진핑 체제 하의 중국은 워싱턴이 대결적 자세를 취하면 취할수록 더욱 강경 대응할 것이며 이것이 바로 중국 외교의 새로운 현실"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미국의 군사적 압박에 물러서지 않고 맞받아치겠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 미국의 외교전문가 존 페퍼는 문제의 핵심은 항해의 자유가 아니라 미국이 남중국해를 비롯해 태평양 전체의 제해권을 장악해 중국의 해양 진출을 막느냐 여부라고 지적합니다. 중국은 적어도 남중국해 등 자국 근해에서 군사적 행동의 공간을 확보하려 하는 반면 미국은 이를 한사코 막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또 미중 갈등의 근원은 미국의 핵무기 개선 작업, 미일 동맹 강화 및 대일 첨단무기 수출, 한국의 미사일 방어망 참가 등 미국의 대중 군사 포위라고 말합니다. 한마디로 말해 미국은 지금 동아시아에서 '군사력으로 무장된 평화(armed peace)'를 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페퍼는 중국은 이미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결성 등을 통해 미국의 지경학적(geo-economic) 포위망을 뚫어냈으며 다음으로 지전략적(geo-strategic) 포위망을 돌파하려 하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나아가 오로지 군사력만으로 이를 저지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고 지적합니다.

(☞바로 가기 : Asia: On the Rocks)


한편 유럽에서 미국은 1987년 미소 중거리미사일협정(INF)에 의해 철수했던 핵탄두 탑재 순항미사일을 재배치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러시아가 먼저 INF를 위반했다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미국과 독일, 프랑스 등 유럽 동맹국들은 올해 초부터 이 문제를 논의하고 있습니다만, 유럽 국가들은 내심 핵무기 재배치를 반기지 않고 있습니다. 유럽 땅에서 핵전쟁의 가능성을 높이는 조치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1980년대 초 독일 이탈리아 등 유럽에서는 미국의 중거리 핵미사일 배치에 반대하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반핵시위가 벌어진 바 있습니다.
(☞바로 가기 : Cold War Resurgent: US Nukes Could Soon Return to Europe)

중국 및 러시아에 대한 미국의 강경 대응을 주도하는 세력은 누구일까요? 존 페퍼는 최근 미국이 발표한 4.25억 달러 규모의 해상안보계획은 백악관이나 펜타곤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존 매케인 등 의회 강경 세력이 주도한 것이라며 오히려 오바마는 수세에 몰려 있다고 말합니다. 1950년대 공화당이 '누가 중국을 잃었는가?'라는 공세로 민주당을 압박했듯이 이번에는 '누가 남중국해(또는 우크라이나) 잃었는가?'로 민주당을 공격할 채비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함께 미 대외정책의 강경선회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이 군사주의에서 벗어나기는 아직 시기상조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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