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탄저균 전문가가 아니다. 그래서 조심스럽다. 그렇지만, 내가 접한 내용을 알릴 필요를 느낀다. 탄저균의 위력(?)이 너무 과장돼 전해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탄저균이 미국 본토로부터 민간 배송업체를 통해 오산 미군기지에 배달됐다는 소식이 나오자, 대다수 언론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탄저균 100kg이 공중에 뿌려지면 100만 명에서 300만 명이 목숨을 잃고, 치사율도 95%에 달한다" 한마디로 1메가 톤급 핵폭탄을 능가하는 살상력을 지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가공할 추정의 출처는 어디일까? 필자가 찾아본 바로는 1993년 미국 의회의 기술평가국이 발간한 '대량살상무기 위험 평가 보고서'였다. 이 보고서에선 워싱턴에 투하된 1메가톤의 수소폭탄이 50만~190만 명을 살상하는 반면에, 항공기로 100kg의 탄저균을 워싱턴에 살포할 경우 100만~300만 명을 살상할 수 있다는 주장이 담겨 있다.
이 보고서가 새삼 주목을 받은 때는 9.11 테러 직후 미국에서 발생한 탄저균 테러 사건이었다. 탄저균이 들어 있는 우편물을 열어본 미국 시민 22명이 감염돼 5명이 사망한 것이다. 그러자 미국 언론은 93년 의회 보고서를 인용해 탄저균을 집중 조명했고,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테러와의 전쟁'에 이어 '대량살상무기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특히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와 북한을 세균 무기 위협국가로 지목해 맹비난을 퍼부었다. '악의 축' 발언의 전조였던 셈이다.
미국의 탄저균 소동은 고스란히 한국에도 전해졌다. 일부 언론과 전문가들이 북한의 세균 무기 보유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워싱턴보다 인구밀집도가 높은 서울의 경우 10kg의 탄저균으로 "서울시민 수백만 명을 죽일 수도 있다"는 보도를 쏟아냈다.
옴진리교의 경우
탄저균이 실전에서 대량으로 사용된 사례는 아직 없다. 또한 살상 실험을 할 수도 없다. 이에 따라 정확한 살상력을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다만 두 가지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나는 1979년 소련의 스베르로브스크 탄저균 유출 사고다. 군사용 생화학 시설이 있던 이곳에서는 약 800억 개의 탄저균 포자가 유출되었다고 한다. 이 가운데 약 40억 개가 공기 중으로 퍼져갔다. 이로 인해 65명의 주민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또 하나는 95년 도쿄 지하철 사린 가스 살포로 악명이 높은 옴진리교의 경우이다. 옴진리교 광신도들은 사린 가스 살포 2년 전에 도교 건물 옥상에서 탄저균을 살포했다고 한다. 그런데 사망자는 고사하고 감염자도 없었다고 한다. 일본 정부가 이러한 사실을 파악한 것도 사린 가스 살포 사건 연루자들을 심문하는 과정이었다고 한다.
탄저균의 살상력에 대해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의 가상 실험 결과도 주목할 만하다. 이 연구소가 발간한 2001년 연례 보고서에 그 내용이 상세히 담겨 있다. 가상 실험 조건은 앞서 언급한 스베르로브스크의 탄저균 유출 사고 때와 유사한 탄저균 유형과 양이 도쿄의 중심가에 살포될 경우로 상정했다. 약 800억 개의 탄저균 포자가 살포되고 이 가운데 약 40억 개가 호흡될 수 있다고 가정했다. 또한 지상 15m에서 15분 간격으로 남서풍이 초당 약 4.5m 속도로 부는 도쿄 중심부의 대규모 쇼핑몰에서 탄저균 살포가 이뤄진 것으로 상정했다.
정교한 컴퓨터 실험 결과, 수백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할 것이라는 일반적인 평가와는 달리 2~3만 명이 탄저균 포자에 노출되고, 이 가운데 실제로 감염된 수는 300명 정도 될 것으로 예측했다. 또한 감염자의 생존 여부는 의료 처치에 달려 있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구소련의 탄저균 유출 사고와 옴진리교의 탄저균 테러 시도, 그리고 SIPRI의 실험 결과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탄저균의 살상력이 훨씬 덜하다는 평가도 가능케 한다. 이를 근거로 해외 일부 전문가와 연구소는 탄저균 등 생물무기를 핵무기와 동급으로 취급하는 것은 과학적인 근거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치사율이 95%라는 단정적인 보도에도 신중해질 필요가 있다. 가령 미국의 탄저균 테러 사건을 보더라도 22명의 감염자 가운데 사망자는 5명으로 치사율은 약 23% 정도로 나온 바 있다.
과도한 공포심의 후폭풍
물론 이러한 내용을 소개한 취지가 '탄저균이 별거 아니다'라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필자가 앞선 글들에서 주장한 것처럼, 미국의 탄저균 반입은 한국의 검역 주권 침해이자 생물무기금지협약(BWC) 위반에 해당되는 중대 사안이다.
다만 탄저균에 대한 과도한 공포심 조성이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점은 지적하고 싶다. 가령 누군가에 의해서 탄저균이 살포되었다고 가정해보자. '10kg에 수십만 명 사망, 치사율 95%'에 머리에 입력되어 있다면, 탄저균 그 자체보다 그 공포심 때문에 더 큰 재앙에 직면할 수도 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