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저균 소동으로 미국의 이중성이 도마 위에 오른 가운데, 미국이 한국전쟁 당시 광범위한 세균전을 벌였다는 보고서 전문이 공개됐다. 영화감독 임종태 씨가 입수해 <연합뉴스>를 통해 공개한 '니덤 보고서'가 바로 그것이다.
한국전쟁 때 미국이 세균전을 감행했다는 의혹은 끊임없이 제기되어왔지만, 미국 정부는 '공산주의자의 프로파간다'라며 한사코 부인해왔다. 그런데 <연합뉴스>가 '니덤 보고서'를 인용해 보도한 것에 따르면, 세균전 의혹을 뒷받침할 만한 광범위한 내용이 담겨 있다.
이 보고서의 공식 명칭은 '한국과 중국에서의 세균전에 관한 국제과학위원회(ISC)의 사실 조사 보고서'이다. 영국의 생화학자인 조지프 니덤이 단장을 맡아 '니덤 보고서'로 불리기도 한다. 보고서에는 세균 투하 지역 비행지도와 이 작전에 투입된 미군의 자필 진술서 등이 소상히 담겨 있다. 더구나 미국 공군이 일제가 생체실험을 자행해 악명이 높았던 731부대로부터 세균전 기술을 건네받아 북한과 중국을 상대로 사용했다고 추정할 수 있는 내용도 담겼다.
미국, "현장 조사하자"…속내는?
한국전쟁이 한창이었던 1952년 니덤 보고서가 발표되면서 공산 진영은 미국의 야만성과 불법성을 부각시키는 소재로 적극 활용했다. 그러나 미국은 니덤 보고서의 분석을 신뢰할 수 없다고 맞섰다.
그런데 필자가 찾아낸 미국 중앙정보국(CIA) 비밀문서를 보면, 주목할 만한 내용을 발견하게 된다. 이 문서는 미국의 심리전략위원회(PSB)가 작성해 1953년 7월 7일 알렌 덜레스 CIA 국장에게 보고된 것으로, 2006년 3월 미국의 정보공개법에 의해 비밀 해제됐다. 보고서의 제목은 '세균전 의혹에 대한 공산주의자의 이용'이다.(☞원문 보기)
당시 미국 정부는 세균전에 관한 공산 진영의 공세가 계속되자, 유엔에 현장 조사를 요구했다. 니덤 보고서의 내용을 현장 조사를 통해 검증하자며 맞불을 놓은 것이다. 그런데 CIA 보고서를 보면, 이러한 제안은 미국의 프로파간다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내용은 이렇다.
"미국은 현장 조사 제안을 선호하고 있지만, 미국의 정책은 실제 조사를 선호하고 있지 않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현장 조사 위원회가 불가피하게 미 8군의 준비나 작전(예를 들어 화학전)을 알 수 있게 되어, 그것이 공개되면 우리에게 심리적이고 군사적인 차질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미국은 공식적으로는 현장 조사를 주장하고 있었지만, 내심으로는 자신의 군사 작전 차질을 이유로 이를 선호하지 않고 있었던 셈이다. 특히 미 8군의 작전 가운데 화학전을 예를 든 것이 주목된다. 미국이 한국전쟁 당시 세균전뿐만 아니라 화학전을 벌였다는 정황 증거로 읽힐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CIA 문서에는 여러 가지 주목할 만한 내용이 담겨 있다. 미국의 저명한 과학자들에게 ISC 보고서를 반박해 달라고 요구했다거나, ISC 보고서 작성에 참여한 과학자들을 포섭해 자신의 보고서에 오류가 있었다고 발표하게 하는 것 등이 이에 해당된다. 그런데 CIA 요구에 대해 미국 과학자들이 꺼렸고, ISC 참여 과학자들 포섭에도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자 CIA는 반격 카드를 꺼내 들려고 했다. 펜실베이니아 대학 심리학과 교수이자 <소련의 과학> 저자인 콘웨이 저클(Conway Zirkle)를 섭외하는 것이었다. 그를 섭외하려고 했던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ISC 보고서의 전면적인 재검토를 돕게 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CIA가 소련의 세균전 활동에 관한 일부 정보를 갖고 있다"며 소련의 세균전 의혹을 제기해 맞불을 놓겠다는 것이었다. CIA 보고서에선 이를 두고 "유용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심리전략위원회는 저클 교수를 덜레스 CIA 국장에게 추천하면서 "그와 같은 위상을 갖고 있는 사람이 (미국의 세균 의혹을 담은) ISC 보고서는 소련의 기만 공세에 불과하다고 공격한다면, 앞으로 바람직한 영향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미국은 진실을 밝혀야
한국전쟁을 둘러싼 비밀과 의혹은 시간이 흘러 구소련 등 관련국들의 비밀문서가 공개되면서 상당 부분 진실이 밝혀졌다. 그러나 여전히 의혹으로 남아 있는 것들도 있다. 미국의 세균전 의혹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이건 과거의 일만은 아니다. 최근 오산 공군기지에 살아 있는 탄저균이 배달돼 비밀리에 실험한 것이 드러났다. 그런데 실험의 목적이 무엇이었고, 언제부터 이런 실험이 있었으며, 탄저균 이외에 보틀리눔과 같은 다른 세균 실험은 없었는지 등에 대한 의문에 대해 미국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다.
미국은 생화학무기 개발 의혹을 들어 일부 적성 국가들을 '악마화'하곤 한다.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북한, 이란, 이라크를 '악의 축'이라고 부른 게 대표적이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시리아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정당화할 때에도 아사드 정권의 화학무기 사용 의혹을 핵심 근거로 내세웠다.
그런데 정작 타자에게 엄격하게 들이대는 잣대가 자신에게는 한없이 느슨해지곤 한다. 미국이 이러한 이중성에 안주할수록 생화학무기를 비롯한 대량살상무기 확산을 막는 일은 더욱 요원해지고 만다. 이는 거꾸로 미국 스스로 솔선수범하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출발점은 60년 넘게 의혹으로 남아 있는 한국전쟁 세균전의 진실을 스스로 밝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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