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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몽돌해변 또는 ‘바다의 오아시스’ 풀등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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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몽돌해변 또는 ‘바다의 오아시스’ 풀등에서

8월 섬학교, 송이도에서 환상의 여름휴가 2박3일

호젓한 섬에서 나만의 여름휴가-.
외국의 어느 휴양 섬 못지않은 곳이 한국에도 적잖이 있습니다. 전남 영광의 송이도도 그중 한 곳입니다. 8월 섬학교(교장 강제윤. 시인, 섬여행가)는 제41강 <여름휴가특집>으로, 8월 7일(금)부터 9일(일)까지 2박3일간 전남 영광의 보석 같은 섬 송이도에서 진행됩니다. 푸른 바다와 흰 몽돌해변, 방에 누워서도 일출을 볼 수 있는 해변 숙소. 들물 때면 숨어있다 썰물 때면 드러나는 수십만 평의 모래평원인 풀등. 풀등에서 백합과 바지락과 맛조개를 직접 캐는 갯벌체험을 합니다.

섬의 트레일도 걷고 숙소 앞 해변에서 해수욕도 하고, 해변 정자나무 그늘 아래서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면서 쉬기도 합니다. 또 송이도 어선이 잡아온 여름 보양식 민어로 만든 민어회와 민어탕은 물론, 꽃게잡이 배에서 꽃게를 사다 즉석에서 해주는 요리도 맛볼 수 있습니다. 이번 여름 송이도 섬학교는 트레킹은 적고 쉬고 노는 일정이 많습니다. 트레킹을 위주로 하실 분들은 신중히 선택하시고, 그저 한가롭고 평화롭고 맛있는 휴가를 원하시는 분들은 서둘러 신청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름휴가특집>은 늘 일찍 마감이 되곤 하기 때문입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송이도는 오랜 세월 황금어장이었던 칠산바다의 중심 섬이다. ⓒ섬학교

강제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8월의 섬 송이도에 대해서 들어봅니다.

“애인 있어봐야 신경만 쓰이제”

안마도에서 영광으로 가는 배를 탔다. 나그네는 중간 기항지 송이도에 내릴 것이다. 여객선에는 오늘도 뭍에서 들어온 꽃게 활어차가 한 자리 떡 차지하고 서 있다. 어제 안마도에 들어갈 때 봤던 같은 차다. 꽃게 차를 모는 청년은 안마도가 고향이다. 광주의 도매상에서 일한다. 고향 사람들이 잡는 꽃게를 팔아주기 위해 매일 배를 타고 안마도에 온다. 요즈음 안마도에서만 하루 1~2톤의 꽃게가 쏟아진다. 청년은 매일 안마도와 노량진수산시장을 오간다. 낮에 안마도에 들어가 꽃게를 수집한 뒤 저녁 내내 차를 몰아 노량진까지 갔다가 밤을 새워 다시 내려온다. 잠을 자는 것은 영광에서 배를 타고 안마도로 들어가는 두 시간이 전부다. 그래도 청년은 피곤한 줄을 모른다.
"아직 젊어서 끄떡 없어요. 두세 시간 자도 서너 달은 괜찮아요."
청년의 삶이 다부지다.

꽃게 차 옆 승합차에서는 낚시꾼 부부가 회를 뜨고 매운탕을 끓여 점심을 먹고 있다. 소주도 한 잔 곁들인 선상파티. 봉고차의 짐칸을 평상으로 개조했다. 언뜻 보기에 오십대 후반이나 됐는가 싶은데 둘 다 65세 동갑내기 부부란다. 아이들 다 키워놓고 부부는 둘만의 시간으로 여유롭게 보낸다. 남편은 아직 건축 일을 해서 바쁘지만 틈이 나면 차를 끌고 전국 각지를 여행하고 낚시도 한다. 먹고 자는 것은 모두 봉고차에서 해결한다. 겨울철에는 한 곳에 자리 잡고 일주일 동안 낚시를 하면 놀다 가기도 한다. 부부끼리도 맘이 맞아야 돌아다닐 수 있는데 아내도 낚시광이고 둘이 성격도 맞는다.
"애들 결혼하고 직장 다니고 둘이 사는 디 이게 낙이요."
산전수전 다 겪었을 남자가 행복하게 웃는다.
"낚시도 하고 구경도 하고 나이 먹어서 이게 젤이요. 부부 둘이 다니는 게 젤로 좋아. 애인 있어봐야 신경만 쓰이제."
'신경 많이 써' 본 듯한 고수의 깨달음이다.

이불과 냄비까지 훔쳐가는 관광객들

송이도는 안마도와 달리 마을이 동향인 영광 방향으로 형성되어 아침이 빠르다. 마을 바로 앞은 흰 갯돌해변이다. 검은 갯돌밭은 더러 있어도 흰 갯돌밭은 희귀하다. 송이도는 1km 달하는 흰 갯돌해변과 마을 뒤 안 바다의 넓은 풀등으로 인해 유명세를 탔다. 여름철이면 제법 많은 피서객들이 몰려드는 것은 그 때문이다. 섬에는 어로를 하면서 부업으로 민박을 치는 집도 여럿이다.

어민회관 2층 '콘도'민박에 들었다. 꽃게잡이와 슈퍼를 겸하는 집에서 마을의 위탁을 받아 '콘도'를 관리한다. 콘도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이부자리나 냄비 하나 없이 깨끗하다. 일부러 다 치워놨다고 한다. 여름에 차를 가지고 온 피서객들이 이불과, 냄비, 그릇까지 싹쓸이 해가 버려서 어쩔 수 없는 일이란다. 한번은 아래층 회의실에 이불 10채를 놔뒀는데 그것마저 다 털어갔다. 끝에서 끝까지 걸어도 1시간이면 충분한 섬까지 죽어라 차를 끌고 들어오는 심사는 무엇이며 돈도 되지 않는 이불이나 냄비까지 털어가는 고약한 도둑질은 또 무엇일까. 그럴수록 섬사람들도 뭍사람들도 서로가 서로에게 야박해진다. 이처럼 작은 섬에는 차량의 출입을 통제하는 것도 방법이겠다. 섬 주민들이야 차가 들어와서 득 될 것이 없으니 통제하는 걸 반대할 까닭이 없지만 차량을 실어야 이익이 큰 여객선 회사의 욕심 때문에 차량 반입 금지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관계자 외 출입금지."
마을 안길 끝자락쯤에 폐교가 된 법성초등학교 송이분교장 건물이 있다. 2008년 9월 1일자로 문을 닫았다. 풀도 많이 자라지 않은 학교 운동장은 아직 단정하다. 금방이라도 아이들이 뛰어나올 것 같다. 관계자들은 언제쯤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어쩌면 내내 돌아오지 못하고 저 건물도 마침내 낡아 스러져 갈 것이다. 교문 입구의 비자나무에는 열매가 익어서 떨어져도 주어가는 사람 하나 없고 구기자 열매는 익어도 따 먹을 아이들이 없다. 아이들이 떠나간 학교는 새들이 사라진 숲처럼 적막하다. 새들이 사라진 것이 숲의 위기라면 아이들이 사라진 것은 섬의 위기다. 하지만 섬의 위기를 걱정하는 정책당국자들은 없다. 오히려 아이들이 적게 남은 학교는 어서 폐교 시키지 못해서 안달이다.

▲숙소 바로 앞, 국내에 한 곳뿐인 송이도 흰 갯돌해수욕장 ⓒ섬학교

갯돌 밭에 말리던 송이도 굴비


폐교 뒤편 숲이 마을의 당산이다. 팽나무 고목들이 여러 그루 늘어선 산길. 아랫당과 윗당이다. 햇살이 뜨겁다. 그래도 땡볕에 있다가 나무 그늘 아래로 들어서면 서늘하다. 찬 기운이 속까지 식혀준다. 가볍게 불어오는 미풍에서 풀내음이 난다. 길가에는 익모초들도 한창 꽃을 피워 올렸다. 그 쓰디쓴 익모초도 꿀은 달다. 그래서 나비와 벌들이 익모초 꽃에도 날아들어 꿀을 딴다. 꿀과 꽃은 식물들의 번식 전략이다. 모든 꽃은 식물의 성기다. 붙박이라 직접 교미를 할 수 없는 꽃들은 곤충이나 새들을 통해 간접 성교를 한다. 활짝 벌린 꽃들의 성기에 코를 처박은 나비들. 그래서 어떤 꽃들은 곤충 암컷의 생식기 모양의 꽃을 피워내기도 한다. 수컷들이 찾아와 교미를 시도하려는 순간 꽃가루받이가 이루어진다.

풀숲에서 먹이를 뜯던 흰 염소 두 마리가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산길 오르는 나그네를 응시한다. 경계의 눈빛은 아니다. 산길의 끝에 자리한 팽나무 고목 세 그루는 윗당이다. 팽나무들은 수호신처럼 산중턱에서 마을을 굽어 살펴보고 지켜왔다. 윗당 아랫당이 섬의 큰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이라면 바닷가 작은 마을을 지키는 것은 '큰 할매' '작은 할매' 팽나무들이다. 지금은 어느 당목에도 더 이상 당제를 지내지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당나무는 여름이면 시원한 그늘을 주고 마을을 굽어 살핀다.

송이도에도 예전에는 4개의 마을이 있었다. 외미와 야은골, 큰말, 작은말. 큰말 작은말은 위아래 동네로 여전하지만 외미와 야은골 사람들은 큰말로 이주되면서 폐촌이 되었다. 30년 전쯤 안보상의 이유로 독립가옥들이 철거되면서 마을이 사라진 것이다. 섬들을 다니다 보면 그렇게 사라진 마을이 부지기수다. 현대판 공도정책이었다. 그리 오래전 이야기가 아니다. 그렇게 고향을 잃은 실향민들. 그들은 더 이상 폐허가 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

칠산어장의 중심인 칠산도는 송이도의 새끼섬이다. 칠산어장에 조기 군단이 회유하던 시절 송이도 앞바다도 해마다 봄이면 수천 척의 배들이 찾아왔다. 아랫당 부근 김종운 노인댁에 들어서니 동네 할머니들 몇 분이 앉아 떡을 나눠 자시고 있다. 김 노인도 무안 지도에 살던 아버지를 따라 송이도로 이주해와 어장을 하고 살았다. 안마도와 달리 송이도 사람들은 일찍부터 어로활동을 했다. 그래서 섬에는 부자들이 많았다. 그 무렵 송이도의 250세대 거의 전부가 안강망 배로 조기잡이를 했다. 파시가 서지는 않았지만 송이도는 조기의 천국이었다.

송이도에서도 굴비를 만들었다. 간통에 간질을 한 송이도 굴비는 덕장이 아니라 흰 갯돌 밭에서 말렸다. 잡아온 조기를 생으로 파는 것보다 굴비를 말려 파는 것이 이익이 훨씬 컸다. 칠산어장에서 조기가 사라지면서 송이도의 어업도 쇠퇴했고 인구도 급격히 줄었다. 지금은 16척의 배가 꽃게와 민어, 농어 등을 잡는다. 섬에는 48호가 주소를 두고 있지만 고정으로 거주하는 집은 32호 정도다. 나머지는 집을 놔두고 어장 철에만 들락거린다. 그래서 겨울이면 젊은 사람들이 떠나고 섬은 노인들만 남아 외롭다. 김 노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할머니들은 마당 구석에서 머리에 염색을 한다. 미장원이 없으니 염색약을 사놨다가 서로가 염색을 해준다. 모처럼 머리를 검게 물들인 할머니들 처녀들처럼 신바람이 났다.
"아따 이제 시집가면 되겄다."

섬에 약샘이 있다고 들었다. 예전에 육지 사람들도 찾아와 마시고 위장병도 고치고 피부병도 고쳤다는 샘이다. 밀물 때는 바다에 잠겼다가 썰물이면 나타나는 해안가 용천수. 마을의 북쪽 해안 길을 따라 가며 찾으려다 결국 찾지 못했다. 산길의 중간쯤일까. 시누대숲이 있다. 부분적으로 대숲이 있다면 사람이 살던 집터 일 가능성이 크다. 대숲 쪽을 계단이 나있다. 사람이 살던 터가 확실하다. 전에는 몇 집이 살았었지만 지금은 모두 떠나가 마을은 흔적도 없이 숲에 먹혀버렸다. 그나마 남아 있는 것은 우물이다. 방치된 지 오래된 우물이지만 물은 맑고 가득 고여 있다. 우물 아래로 작은 옹달샘 같은 물이 흐른다. 손으로 떠먹기가 어렵다. 어쩌지 고민을 하다 돌아보니 질경이들이 널렸다. 질경이 잎으로 물을 받아먹는다. 시원하고 단물이 온 몸으로 퍼진다. 수류화개. 내 안에 물이 흐르고 꽃이 핀다.

‘바다의 오아시스’ 풀등

갑자기 환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아침이었다. 창밖이 벌겋게 불타올랐다.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방안에 누워서 보는 일출이다. 서해 일몰, 동해 일출이란 고정 관념일 뿐. 서해에서도 해는 뜨고 동해에서도 해는 진다. 영광 쪽 산들을 벌겋게 물들이는 아침노을. 대지는, 바다는 밤새 해를 기다렸을 것이다. 아침잠이 많은 나그네가 일출을 본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잠이 덜 깬 눈을 부비며 고갯길을 넘는다. 물이 빠지는 썰물 때다. 풀등이 모습을 드러냈을 것이다. 고갯마루를 넘으니 송이도의 상수원 댐으로 들어가는 철문이 굳게 잠겨 있다. 이각도 앞까지 물이 빠져 풀등의 모습이 다 드러났다. 언뜻 펄 갯벌처럼 보이지만 풀등은 약간의 펄이 섞인 모래평원이다. 이 거대한 풀등이 골재로 파헤쳐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펄이 섞이지 않았다면 진즉에 모래 채취로 사라지고 없을 것이다. 바다 생태계에 다행스런 일이다.

신발을 벗고 맨발로 걸어 들어가도 빠지지 않는 모래밭. 밀물 때면 물에 잠겨 있다 썰물이면 모습을 드러내는 모래밭. 대이작도 풀등보다는 모래에 펄이 많이 섞여 있지만 넓이는 그에 못지않다. 과거에는 이 풀등 때문에 조난사고도 잦았다. 풀등은 송이도의 특산물인 동백하, 새우의 산란장이기도 하다. 겨울에는 맛조개와 대합이 많이 나는 조개밭이기도 하다. 풀등에는 한때 지주식 김 양식장을 했던 흔적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더 이상 김발을 하지 않는 풀등에는 잘려나간 말뚝들이 촘촘히 박혀서 옛 시절을 증언하다. 새우와 조개와 게와 고동과 물고기들의 부화장. 풀등은 바다 생물들의 자궁인 동시에 무덤이다. 오늘 장대 한 마리는 제가 놀던 모래밭에서 선채로 열반에 들었다. 이제 저 물고기는 한때 제 먹이가 되었던 미생물들의 먹이가 될 것이다. 그렇게 제 생을 버리고 다른 생으로 부활할 것이다.

▲‘바다의 오아시스’ 풀등. 환상적인 무늬의 거대한 사막 같다. ⓒ섬학교

섬학교 제41강, 8월 7(금)∼9(일)일, 송이도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8월 7일(금)>
08:00 서울 출발(뱃시각에 대야 하니 출발시각 엄수 바랍니다. 07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섬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41강 여는 모임
-영광 도착
-점심식사(영광굴비백반)
-계마항 출항
-송이도 도착
-숙소 도착, 방 배정(몽돌해변 바로 앞, 바다 전망이 좋은 콘도형 민박, 다인실)
-송이도 흰 몽돌해변에서 놀기
-저녁식사 겸 뒤풀이(송이도 앞바다에서 잡은 여름 보양식 민어회와 민어탕)
-자유시간 및 취침

<8월 8일(토)>
07:00 기상, 아침 산책
-아침식사(송이도 섬밥상)
-송이도 걷기(5km)
큰마을-작은마을-양골-큰데기-무장등-큰마을
-점심식사(송이도 섬밥상)
-풀등 갯벌체험: 큰마을-풀등(왕복 4km)
(풀등을 거닐거나 백합, 바지락, 맛조개를 캐보거나)
-자유시간(해변에서 놀거나 마을 산책하거나 낮잠 자거나)
-저녁식사 겸 뒤풀이(송이도 어선에서 사온 꽃게찜과 꽃게탕)
-자유시간 및 취침

<8월 9일(일)>
07:00 기상, 아침 산책
-아침식사(송이도 섬밥상)
-송이도 해변에서 해수욕 혹은 자유롭게 쉬기
-송이도 출항
-영광 도착
-늦은 점심(백합죽)
15:30 서울 향발
*9일 송이도에서 나오는 뱃시각이 유동적이므로 일정이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환상의 여름휴가, 송이도 2박3일> 답사지도 Ⓒ섬학교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가벼운 등산복/배낭/등산화/모자, 풀숲에선 반드시 긴 바지), 모자, 선글라스, 수영복, 책, 스틱, 무릎보호대,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멀미약,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승선용 신분증을 꼭 지참하세요(소지하지 않으면 승선할 수 없습니다).

섬 여행을 떠나기 전에 강제윤 교장선생님이 쓴, <섬택리지> <섬을 걷다> <걷고 싶은 우리 섬> <어머니전> 등 섬 답사기를 참고하면 섬 여행의 의미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섬학교 제41강 답사 참가비는 31만원입니다(왕복교통비, 2일 숙박비, 8회 식사비 겸 뒤풀이, 강의비, 운영비 등 포함). 이 답사는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으며, 기상 악화로 섬 체류가 연장되는 경우 추가비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참가신청과 문의는 홈페이지 www.huschool.com 이메일 master@huschool.com 으로 해 주십시오. 전화 문의(050-5609-5609)는 월∼금요일 09:00∼18:00시를 이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공휴일 제외). 회원 아니신 분은 회원 가입을 먼저 해주십시오(▶회원가입 바로가기). 사전예약 관계로 7월 31일까지 참가신청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섬학교 카페 http://cafe.naver.com/islandschool 에도 꼭 놀러오세요. 섬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숙소의 방 안에서 맞이한 일출 ⓒ섬학교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로 등단했습니다. 서남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뭍으로 이주해 살다 성인이 된 뒤 다시 고향 섬으로 돌아가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보길도 시절에는 하천 정비를 명목으로 보길도의 숲과 하천을 파괴하려는 시도를 막아냈고,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파괴하고 대형 댐을 건설하려는 토목세력에 맞서 33일간 단식으로 섬을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2005년 보길도를 떠난 뒤에는 한국의 모든 유인도(500여 개)를 걸어서 순례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8년째 섬들을 걷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300여 개의 섬을 걸었고 여전히 섬을 걷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섬을 걷다> <통영은 맛있다>, 한겨레에 <섬에서 만나다>를 연재했습니다. <섬택리지> <걷고 싶은 우리 섬> <통영은 맛있다> <어머니전>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자발적 가난의 행복>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섬학교를 열며>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다로부터 왔습니다. 지구 최초의 생명이 바다에서 잉태됐듯이 우리 또한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바다에서 생명활동을 시작합니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 바다를 보면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평온함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바다, 그래서 프랑스어 ‘어머니[mère]’에는 ‘바다[mer]’가 들어 있고 한자의 ‘바다[海]’에는 ‘어머니[母]’가 들어있습니다. 원초적 기억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기원을 암시해 줍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바다. 우리가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실상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런지요.

바다나 강, 호수 등의 물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를 섬이라 합니다. 한국에는 4,400여 개의 섬이 있습니다. 그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500여 개, 나머지는 무인도입니다. 한국은 ‘섬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섬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섬들이 소개되고 몇몇 섬들이 피서지나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섬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섬들은 척박함과 절해고도의 고독과 유배지, 그도 아니면 현실도피적인 낭만의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섬은 여전히 먼 곳으로만 느껴집니다. 수만 리 먼 나라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바로 우리 곁의 섬들을 멀게만 느끼는 것은 왜일까요. 단지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닙니다. 심리적 거리감이 더 큰 요인입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육지 중심의 사고에 기인한 바 큽니다. 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육지 사람들은 섬사람들을 ‘섬놈’이라 부르면서 멸시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조선왕조의 폐쇄적인 해양정책에 잇닿아 있습니다. 본래 우리의 인식은 육지 중심의 편협한 틀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옛날 이 땅의 사람들은 바다를 이용해 세계와 소통했습니다. 세계로 향하는 통로로 기능했던 바다가 단절의 바다로 전락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입니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을 추종해 적극적인 ‘공도(空島)’정책을 폈습니다. 섬과 바다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바다와 섬은 육지보다 더욱 활력 넘치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문명교류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되면서 바다와 섬은 점차 잊혀지고 버림받은 공간이 됐습니다.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이후에도 섬은 유배지로 이용되면서 고립이 심화됐습니다.

해양왕국이었던 백제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바다와 섬을 기반으로 세계와 소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976년 거문도의 장촌마을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외딴 섬처럼 보이는 거문도가 실상은 고대부터 국제해상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2000년에는 흑산도의 읍동마을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국제해양도시의 흔적들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고려시대 예성강 입구에 있던 벽란도는 개경에 출입하는 외국인들이 통관 절차를 밟던 국제무역항이었습니다.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는 바다와 섬을 통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까지 소통했습니다. 이 땅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언제나 그 중심에는 바다와 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이 좁은 것은 알면서도 우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 줄은 잘 모릅니다. 오랫동안 좁은 땅에 갇혀 살면서 몸도 마음도, 시야도 폐쇄적으로 변해버린 까닭입니다. 섬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넓은 바다의 주인공인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섬에서 바라보면 대륙 또한 바다에 둘려 쌓인 큰 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지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충분히 크고 드넓습니다. 섬은 한없이 넓은 바다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섬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개방성과 열린 사고를 되찾기 위한 최적의 사유공간입니다. 물론 섬은 숙명적으로 외롭습니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이나 슬픔마저도 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해학과 가락이 있습니다. 섬에서는 슬픔도 가락을 타면 흥이 됩니다.

오랜 세월 섬들은 제각각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 왔습니다. 곁에 있는 섬도 같은 섬은 없습니다. 하지만 외래문물의 유입으로 많은 섬들이 원형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멀지 않은 시간에 이 나라 많은 섬들이 사라질 것을 예감합니다. 이미 많은 섬들이 육지와 연결되었거나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리가 놓이면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끝내는 소멸해 버릴 섬들, 섬의 풍경들. 더 늦기 전에 섬으로 가야 할 이유입니다.

몇 년째 걷기 열풍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존재’[動物]인 사람이 걷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걷기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본능의 회복운동입니다. 걷기는 길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바 큽니다. 길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한자 ‘길道(도)’자는 辵(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신영복 선생님은 "辵(착)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수)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道)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한 길의 정신을 구현하기에 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섬은 어느 곳보다 걷기 좋은 공간입니다. 아직까지 ‘섬길’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많은 걷기 길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섬은 부러 돈 들여 걷기 길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섬들은 그 자체로 최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섬에서는 사람이 안심하고 걸으며 사유할 수 있습니다. 섬길을 걷는 일은 분명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 될 것입니다. 섬으로 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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