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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4명이 부른 304명 이름…세월호, 모두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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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4명이 부른 304명 이름…세월호, 모두의 삶

[고잔동에서 온 편지]<20·끝> 고잔동에 보내는 편지

304명. 이름을 부르는 데만 16분이 걸렸다. 304명의 시민들이,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이들의 이름을 나지막이, 천천히 불렀다.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2014년 4월 16일에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그 날 이후 내 삶은 어떻게 달라졌는지.

그래서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아 시민 304명의 인터뷰를 담은 영상 304개의 이름은, 전부 '세월호, 모두의 이야기'다.


그렇게 호명된 '국민 304명'의 1주기였던 4월을 지나 이제 5월이 왔지만, 여전히 해결된 것은 없다. 아직도 유족들은 '내 자식 죽은 이유를 알려 달라'며 길바닥에 있고, 그들이 '쓰레기 시행령'이라고 부르던 특별법 시행령은 유족들의 반대 속에 통과돼 공표를 앞두고 있다. 자식들의 기일에 거리로 나선 유족을 향해 "이제 사랑하는 가족 품으로 돌아가라"고 막말을 내뱉던 경찰은 추모집회 주최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표적 수사에 돌입했다. 그러는 사이,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단원고 학생의 아버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자신의 생일, 어버이날이었다.

'100퍼센트 대한민국'을 외치며 출범한 정부가 여론 분열을 이용해 유족들을 고립시키는 동안에도, 세월호 참사를 '나의 이야기'로 기억하고 여전히 아픔을 함께 나눠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프레시안> 세월호 참사 1주기 특별기획 '고잔동에서 온 편지' 마지막 편은, 이들이 '고잔동에 보내는 편지'다.

'세월호 모두의 이야기' 프로젝트에 참여한 활동가 6명을 만나 영상 제작에 얽힌 이야기들을 들었다. 인터뷰는 좌담 형식으로 지난달 20일 이뤄졌다.
인터뷰 참가자(가나다순)

고찬호(촬영 감독/영상제작자), 박근우(총괄 팀장/사회적 기업 '프로젝트 노아' 대표), 박성현(기획/안산 복지관네트워크 '우리 함께' 사무국장), 이규연(편집 감독/영상제작자), 정혁(인터뷰어), 천우연(인터뷰어/문화기획자)

나의 세월호, 모두의 세월호

이 프로젝트를 처음 제안한 박성현 씨는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 지원 등을 위해 출범한 안산지역 10개 복지관의 네트워크인 '우리 함께' 사무국장이다. 지난해 참사 이후, 사회 전반은 물론 안산 지역 공동체조차도 분열되고 붕괴되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봤다. 죽음의 원인도 찾지 못했는데, 사람들은 너무 쉽게 '돈 얘기'를 꺼냈고 그것을 무기로 유가족들을 몰아쳤다. 혹자는 '이젠 지겨우니 그만 좀 하자'고 했다.

"그렇게 사회적으로 너무 많이 훼손된 세월호를, 우리 생활 속에서 꺼내고 이야기해 보자"는 것이 이번 기획의 시작이 됐다. '희생자 가족들만의 세월호'가 아닌, '모두의 세월호'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세월호 피로감' 얘기를 해요. 그런데 살다 보면 이런 참사는 내 가족, 나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남의 얘기'로만 자꾸 인식되다 보니 세월호 참사를 자꾸 정치화하고, 타자화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세월호 가족들이 보통 사람과 다른 외계인들이 아니잖아요. 이상한 사람들이 아니라 정말 큰 아픔을 가진, '우리의 이웃'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게 프로젝트의 출발이었어요. 그래서 남의 얘기가 아닌 내 이야기로 어떻게 풀어갈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모두가 '나의 세월호'를 이야기하는 영상을 기획하게 됐어요." (박성현/기획자)

▲(왼쪽부터) 박성현 기획자, 정혁 인터뷰어, 고찬호 촬영감독. ⓒ프레시안(최형락)

그게 출발이 돼, 서로 얼굴도 몰랐던 18명이 순식간에 모였다. 각자 다른 직업, 다른 삶을 살아오던 이들이 뜻에 공감해 기꺼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한 달 남짓의 인터뷰 작업 끝에, 304명을 만나 304개의 인터뷰 영상을 촬영했다. 서울, 안산, 인천, 정선, 원주, 광주와 아이들이 닿지 못한 수학여행지인 제주까지. 10여 개 도시를 매일 같이 돌아다니는 강행군이었다.

'세월호'라는 단어를 떠올리기만 해도 괴로운 사람들. 중간 중간 터지는 눈물 때문에 인터뷰는 여러 번 끊겼고, 찍는 사람이나 말하는 사람이나 함께 울었다.

"슬픔엔 바닥이 없는 것 같아요. 이게 바닥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밑에 또 있고, 그 밑에 또 있고…" (박성현/기획자)


'작년 4월 16일, 사고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어땠나요?' 첫 질문은 언제나 이렇게 시작했다. 그 질문이 사람들을 2014년 4월 16일, 그날로 소환한다.

"그렇게 질문을 던지면…사람들의 표정이 변해요. 그 때부턴 '생각하는' 게 아니라 '느끼기' 시작해요. 대부분 희생자들과 아무 연고가 없는 사람들이지만, 그 사건에 대한 상처와 아픔이 다들 있는 거죠. 그런데 꺼내지 못하고, 각자의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던 얘기들이었던 거예요. 그걸 보면서, 확신이 생겼어요. 이 사건은 절대 그냥 묻힐 수 없는 사건이구나. 사람들 모두가 세월호가 침몰하는 걸 봤고, 구조하지 않은 걸 알고 있으니까…이게 제대로 해소되지 않는 한, 이 상처는 유족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계속 남겠구나." (정혁/인터뷰어)

"1년이 지났지만, 각자 개개인의 아픔들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 아픔들을 대신 전달하는 역할이어서 오히려 이 작업이 감사했어요. 하루에 수십 명 씩 말도 안 되는 스케줄로 촬영했지만, 그래도 보람 있는 작업이었어요." (고찬호/촬영 감독)

고잔동에 보내는 편지…304명이, 304명에게


매번 촬영 말미엔, 인터뷰에 응해준 시민들에게 희생자들의 이름을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살아 있는 304명이, 한 순간에 생을 다한 304명을 불렀다. 인터뷰어가 명단을 내밀자, 한 시민은 "아이들의 이름이 이렇게 예뻐요?"라며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백발의 할머니가 손녀뻘인 희생자에게, 희생 학생들보다 앳된 중고등학생들이 '형, 누나'들에게. 얼마 전 엄마가 되었다는 직장인이, 자신의 딸과 이름이 같은 단원고 희생자에게.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목소리로 그들의 이름을 불렀다.

그렇게 이 프로젝트의 마지막 영상, '세월호 304'가 세상에 나왔다.

"인터뷰 끝나고 마지막에 부탁을 드리면, 다들 힘들어 하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정말 소중하고 따뜻하게 이름을 불러주셨어요. 304명이란 숫자는 아무 것도 설명해주지 않지만, 304명의 이름은 다른 의미, 다른 숙제를 주잖아요. 사소하게는 나와 같은 이름일 수도 있고, 내 아이나, 가까운 이들과 같은 이름일 수도 있고." (정혁/인터뷰어)

"생각해보면, 이름은 그렇잖아요. 아이 이름을 지어줄 때 얼마나 애틋하고 행복한 마음이에요. 우리 엄마는 내 이름을 지을 때 또 어땠을까. 이 작업을 하면서, 누군가의 이름을 정말 따뜻하게 부르는 사람이 되고 싶다…그런 생각을 했어요." (천우영/인터뷰어)

▲(위에서 시계방향으로) 박근우 총괄팀장, 이규연 편집감독, 천우연 인터뷰어. ⓒ프레시안(최형락)

프로젝트 총괄팀장을 맡은 박근우 씨(사회적 기업 '프로젝트 노아' 대표)는 "영상이 상영되는 16분의 무게가 너무 컸다"고 했다.

"이름만 불러도 16분이 걸려요. 정말 많은 사람들이 한 순간에 목숨을 잃었구나…그 무게가 너무 큰 것 같아요. 저희는 그렇게 소중하게 부르는 목소리를 기록하는데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지금 이 순간에도, 유족들은 우리가 원하는 건 돈이 아니라, 진실이라고 끊임없이 얘기하고 있잖아요. 지금 그 분들한테 위로가 되는 건, 우리 시민들이 당신들의 아픔을 잊지 않았고, 당신들의 고통이 우리의 아픔일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걸 영상을 통해서 전달하고 싶었어요. 정치적 견해, 성별, 연령, 지역, 교육 경험의 차이를 떠나서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아파하고 있다고. 아직도 광화문은 전쟁 중이지만, 자신의 정치적 견해와 상관없이 304명의 죽음 앞에 누가 슬퍼하지 않을 수 있냐고." (박근우/총괄 팀장)

ⓒ김정민

편집을 담당한 이규연 씨는 "이번 프로젝트로 영상 작업에 대한 관점이 달라졌다"고 했다.

"작업을 끝내고 마지막에 희생자 304명 명단을 자막으로 넣는데, 혹여나 오타가 있을까봐 마음을 졸였어요. 고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니까…그래서 촬영 감독이랑 저랑,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면서 명단을 확인하는데, 어느 순간 목이 매여서 진행이 안 되더라고요.

저는 처음엔 304명 이름을 모두 부르는 것에 회의적이었어요. 10년 넘게 영상 일을 해오면서, 영상은 시간으로 승부를 보는 것이고 많은 이들이 이걸 보는 게 목표인데, 영상 문법으로만 보면 304명 모두를 부르는 것은 효과가 없다고 생각한 거죠. 10분 넘게 이름만 나오는데, 사람들이 중간에 꺼버리지는 않을까…. 그런데 제가 잘못 생각했던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영상 효과보다는 기록의 의미, 진정성의 의미가 큰 데, 내가 살면서 영상을 허투루 했구나이 작업은 끝났지만, 앞으로 영상 일을 할 때 어떤 것을 중심에 둬야 할지 생각이 많이 바뀐 것 같아요." (이규연/편집 감독)

이름을 불러주세요, 더 늦기 전에


안산 '우리 함께'는 이번 인터뷰 영상을 시작으로 '늦기 전에 0416-안아주세요'라는 캠페인을 진행할 예정이다. "우리 이웃인 세월호 가족을, 여러분의 가족을 더 늦기 전에 안아주고 사랑한다고 이름을 불러 달라"는 취지라고 했다. 그렇게 서로를 다독이며, 지역 공동체 회복을 준비한다고 했다. 3년이 걸릴지 5년, 10년이 걸릴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는 없지만, 세월호 참사를 유족들만의 문제가 아닌 '모두의 고통'으로 아프게 기억하고, 따뜻하게 보듬고 나아가야 한다고 활동가들은 믿는다.

"안산에서 일하면서 1년 동안 받은 질문이 있어요. 정말 이 참사 때문에 슬프다고, 어떻게 도울 수 있겠냐고. 저는 가장 쉬운 일은 분향소에 가는 거라고 생각해요. 유족들은 지금도 우리 아이가 저렇게 예쁘게 살아있었는데, 너무 어이없게 죽었다는 걸 잊지 않고 기억해 달라고 얘기하고 있어요. 가서 눈 맞춰 달라고, 우리 아이 기억해 달라고 말씀하시고…

기억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나아간다면, 각자의 삶 속에서 여러 다른 '세월호들'을 만났을 때, 침묵하거나 가만히 있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어떻게 보면 개인이 할 수 있는 가장 어려운 노력일 수 있어요. 하지만 손가락을 밖으로 돌리지 않고 나와 내 생활에 돌린다면, 우리 사회 속의, 내 안에서의 '세월호들'을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해요.

희생자 형제자매들이 자주 그런 얘기를 해요. 절대 이 세상이 한꺼번에 바뀔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고. 그래도, 자기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이 조금 씩 변화하는 것만으로도 희망을 본다고. 그 아이들에게 가장 많이 배워요. 정말 끔찍하고 슬픈 일이 일어났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역할을 이제 하면 되는 구나…. 그 노력들 중 한 걸음을 이번에 뗀 것이라고 생각해요." (박성현/기획자)

ⓒ프레시안(최형락)

'세월호 모두의 이야기'엔 참사 이후, 희생된 아이들을 향한 시민 304명 각자의 약속과 다짐도 담겼다.

"나중에 아저씨의 아이가 컸을 때는…그런 일이 절대 발생하지 않는 세상으로 조금 더 갈 수 있게 아저씨가 열심히 할게."

4월이면 곧 아빠가 된다며 인터뷰 내내 많이 울었던 '별이 아빠'는, 지난 4월 16일 딸 별이를 만나 아빠가 됐다.

지난 3월부터 두 달간 진행했던 세월호 1주기 특별기획 '고잔동에서 온 편지' 연재를 마칩니다. <프레시안>의 세월호 참사 관련 보도는 계속됩니다. 지금까지 연재된 '고잔동에서 온 편지'는 1주기 특별판에서 광고 없이 볼 수 있습니다. (☞특별판 바로가기)

- 세월호 1주기 특별기획, 고잔동에서 온 편지


1부. 아이들의 빈 방

<1> "세월호 1주기, 아빠는 잇몸이 주저앉았다"

<2> "월요일 점심 카레라이스 기다리던 소녀는 왜…"

<3> "교복 입은 긴 머리 소녀 보면 숨도 못 쉬겠어요"

<4> "남들이 잊어도, 엄마가 심장에 새길게"

<5> "이모에서 엄마 된 지 8년, 듬직했던 우리 큰아들…"

<6> "제주도행 배에서 뭐 할지 상상하던 아들이…"

<7> "아프다고 수술받는 것도 죽은 딸한테 미안해요"

<8> "아들이 조립한 컴퓨터도 그날, 작동을 멈췄다"

<9> "'거위의 꿈' 부르던 보미 목소리가 듣고 싶어요"

<10> "우리 강민이 옷, 죽을 때까지 입을 거예요"

<11> "다시 벚꽃 피면, 엄마는 어쩌면 좋지…"

<12> 아이들의 빈 방에 놓인 어른들의 숙제

2부. 아직 4월 16일을 사는 사람들

<13> 304개의 꿈…그래도, 기록이 말하겠지요

<14> "세상 밑바닥 본 1년…아직 손 내밀고 있어요"

<15> "텅 빈 급식실, 애써 웃는 아이들이 안쓰러워요"

<16> 세월호 유족의 '트라우마 리와인딩'

<17> 기억은 침몰 않게…"망각의 바다서 꺼내줄게"

3부. 4월 17일을 준비하는 사람들

<18> "세월호 싸움, 져도 지는 게 아니다"
<19> "아이 잃은 엄마 아빠들, 밥은 먹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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