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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조각 났다…이를 주워야 했다"

[윤효원의 노동과 세계] 월남 패망인가, 베트남 해방인가

베트남 수도 하노이다. 거리에 나가면 1975-2015이라 쓰인 네온사인을 쉽게 볼 수 있다. 정확히 40년 전 자본주의자가 이끈 베트남 공화국은 무너져 사라졌다. 공산주의자가 이끈 베트남 민주 공화국은 승리해 오늘날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 됐다. 40년 전 오늘, 민족 해방은 달성됐고, 계급 해방이 멀지 않은 듯 했다.

미국과 한국은 '자유'를 위해 파병했다고 우겼다. 그러나 역사는 냉전 체제의 국제 정치에서 자유(freedom)라는 수식어가 반공·독재·부패·억압에 다름 아니었음을 증명한다. 제3세계에서 '자유'는 제국주의 외세의 지원과 강압 없이는 버틸 수 없는 식민주의의 연장이었다.

그런 체제는 끝나야 했고, 끝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체제의 명줄을 잇기 위해 군대를 파병한 것은 국가의 자랑이 아니라 수치였다. 베트남 전쟁은 범죄였다.

베트남 해방 40년. 그 동안 베트남은 계급 해방을 달성하고 평등과 민주의 나라가 되었는가. 오늘 베트남이 갖고 있는 고민과 과제는 무엇인가.

영국 언론 <가디언> 인터넷판 4월 22일자에 닉 데이비스 기자가 쓴 열 쪽에 달하는 장문의 기사, '베트남 40년: 공산주의의 승리는 어떻게 자본주의 부패에 굴복했나'를 번역해 두 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소제목은 역자가 달았다. (☞기사 원문 보기)

▲정확히 40년 전 베트남공화국은 무너졌다. ⓒ윤효원


1968년 2월 이른 아침 베트남 중부 전투가 광기 수준에 이르렀다. 한국군이 하미(Ha My) 마을을 쓸어버린 것이다. 다낭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대나무집과 논이 오밀조밀하던 마을이었다. 한국군은 공산주의자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미군과 함께 싸우던 청룡부대 소속이었다.

몇 주 동안 한국군은 농민과 그 가족들을 미군이 "전략촌"이라 부른 비좁은 구역으로 몰아넣었다. 공산 게릴라를 위한 거점과 식량을 없앨 수 있길 바랐다. 하지만, 감금 상태를 혐오한 농민들은 농사를 지으려 전략촌을 탈출해 하미 마을로 돌아왔다.

마을에 들이닥친 한국군은 한 시간도 안 돼 잠에서 막 깬 촌민들을 몰아붙여 작은 집단으로 나누었다. 조직적으로 발포해 135명을 살해했다. 한국군은 집과 시체를 불태웠고, 불도저로 밀어버렸다. 진실 역시 여러 해 동안 묻혔다.

승리자가 아닌 패배자가 만든 이야기

지금은 학살 증언비가 있다. 30년이 지나 진정한 반성을 위해 찾아온 청룡부대원들이 세운 것이다. 그런데 뭔가 잘못됐다. 기념비는 집처럼 크고 화려한 지붕으로 장식돼 있다. 공동묘지 두 개와 살해당한 어른과 아이의 이름을 새긴 큰 묘비는 있는데, 왜 죽었는지 설명이 없다.

마을사람들에 따르면, 증언비가 처음 세워졌을 땐 묘비 뒷면에 그날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분명히 새겨져 있었다. 발포와 피, 불타는 살, 모래 위의 시체들을 기억하는 글귀도 있었다. "아비와 어미의 몸이 산산조각 잘라져 불태워지는 걸 보는 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아이와 아기가 자지러지게 울며 기어가 죽은 어미의 젖을 빠는 걸 보는 건 얼마나 참혹스러운가…"

하지만, 공식 행사가 열리기 전 한국 외교관들이 마을을 방문해 증언비 글귀에 불만을 제기했다. 베트남 관리들은 한국 외교관들에 맞서는 대신, 연꽃이 새겨진 판으로 비 뒷면을 덮으라 명령했다. 당시 하미 마을을 연구하고 있던 한국인 인류학자 권헌익은 마을사람이 하는 말을 기록했다. 진실을 부정하는 건 "학살의 기억을 학살하는" 두 번째 학살이다.

더 강력한 무기를 들고 돌아온 미국과 그 동맹국들

왜 베트남은 이러한 타협을 하였을까? 왜 전쟁의 승리자가 패배자가 만든 전쟁 이야기를 허용하는 걸까?

마을사람들의 답은 간단하다. 한국은 베트남 경제에서 가장 큰 투자국의 하나다. 학살 글귀를 감추는 대가로 지역 병원 설립 지원을 약속했다. 베트남 당국은 동의했다. 저항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십년 전, 1975년 4월 30일 전쟁이 끝난 이래 지금까지 베트남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올해 초부터 베트남을 한 달 여행하면서 양쪽의 농민, 지식인, 학술 연구자, 참전군인들을 만나 이윤을 좇는 권력자들이 베트남 인민에게 강요해온 수많은 거짓과 타협을 알아봤다. 미국은 전쟁의 원인과 수행을 거짓으로 설명하는 데 성공했다. 군사적 대립에서는 졌지만, 미국과 그 동맹국들은 더욱 강력한 무기, 즉 돈을 갖고 돌아와 베트남 사람들이 선택하지 않은 길을 강요하고 있다. 지금 가장 큰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베트남 지도자들이다.

"진심으로 나는 공산주의자다"

아흔 살인 응우옌 하오 뚜는 하노이의 밝고 아름다운 아파트에 산다. 그녀는 유창한 불어와 엉성한 영어로 젊은 처녀 시절 강력한 적 둘을 어떻게 쳐부쉈는지 새처럼 재잘거린다. 2차 대전이 끝났을 때 식민지에서 손 떼기를 거부한 건 프랑스였다.

1946년 스물한 살 때 뚜는 정글로 가 게릴라 투쟁에 동참했다. 산(酸)과 초석(硝石), 알콜을 섞어 화약을 만드는 것이 주특기였다. "밀림에서 정말 행복했다. 폭탄에 넣을 가루로 뻥하고 우리 꿈을 이룰 수 있었다."

꿈은 단순히 외국 침략자를 몰아내는 민족주의적인 게 아니었다. 꿈은 구체적으로 공산주의적이고 혁명적이었다. 뚜는 유치원 교사였던 아버지를 프랑스인에게 빼앗겼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일곱 살이었던 뚜는 감옥에 있는 아버지에게 음식을 가져다주곤 했다.

"나는 베트남을 차지하려는 모든 사람을 증오했다. 마음으로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뚜의 가족은 안락한 생활을 하던 중간 계급이었다. 하지만 1930년대 그녀의 집은 지하 베트남 공산당을 위한 회합 장소로 쓰였다. 그녀는 맑스와 레닌을 읽은 것과 열여섯 살 때 프랑스인들이 친구 하나를 어떻게 처형했는지를 기억했다. "심으로 나는 공산주의자다."

레 남 퐁은 뚜와 나이가 거의 같다. 열일곱 살이었던 1945년 프랑스와 싸우려 사병이 되었다. 전쟁에서 삼십 년을 보냈고, 북베트남 육군 중장까지 올라 미국군의 무기를 파괴하는 데 중심 역할을 했다. 어느 포근한 저녁 그의 안락한 집 밖에 앉아 망고를 깎으면서 자기의 혁명 동기를 말했다.

"사회주의? 물론이지. 모든 싸움의 목적은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고, 자유와 독립과 행복을 얻는 거였어. 프랑스와 미국에 대항해 싸우던 첫날부터 우리는 이미 우리가 만들고 싶은 사회를 가슴에 품었지. 사람이 다른 사람을 착취하지 않는, 공정하고 독립되고 평등한 사회."

▲<가디언>의 인터넷판 기사 화면. ⓒ가디언


뇌물과 폭력으로 세워진 남베트남

이 지점에서 미국의 자기 설명에 대한 설명과 갈라지기 시작한다. 미국판 설명은 1954년 프랑스가 패배했고, 미국군이 북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의 탈취 위협으로부터 남베트남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개입하게 되었다.

하지만, 현실은 프랑스가 베트남 전역에서 인민을 소외시켰다는 점이다. 더욱 중요한 점은 갈라진 두 개의 국민은 없었다는 사실이다. 1954년 베트남군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와 서방 동맹국들은 남부 거점에 대한 권력을 고집했다. 제네바 국제조약에서 합의된 바는 1956년 국민 전체를 대표하는 새 정부를 수립하는 선거까지 남베트남과 북베트남이 임시로 나눠져 있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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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는 만약 선거가 이뤄졌더라면 베트남인 80%가 호찌민과 새로운 사회주의 사회에 표를 던졌을 것이라고 후일 인정했다. 이는 우리가 만난 베트남인들의 말과 일치하는 바다.

미국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대신 악명 높은 CIA 간부 에드워드 랜스데일을 통해 뇌물과 폭력을 능란하게 써가며 사이공에 가톨릭 정치인 응오 딘 디엠을 수반으로 하는 새 정부를 설치했다. 그는 독재자에다 족벌주의자였고, 반공에 친미주의자였다. 1955년 10월 랜스데일은 남베트남에서 선거를 조작해 디엠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전국 선거는 취소됐다. 이제 "임시" 분단은 두 개의 나라로 나뉜 베트남에서 남베트남은 북베트남 침략의 수동적 희생자라는 가식의 외피로 전락했다.

2차 대전 때보다 더 쏟아 부은 폭탄

프랑스 전쟁에 돈을 댔던 미국은 남베트남 육군에 기꺼이 돈을 퍼부었고, "자문관"이라는 외피를 씌운 1만6300명을 파병했다. 1965년 3월엔 전투병을 보냈다. 1969년 전투가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미국은 55만 명을 파병했다. 여기에 남베트남군 89만7000명, 한국과 동맹국에서 파병된 수천 명을 더해야 한다. 하버드 의대와 워싱턴 대학의 연구에 따르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사망자 수는 380만 명에 달했다.

영국 특파원 제임스 캐머런은 미국의 행위를 "국제적 품위에 대한 공격으로 구역질나고 터무니없다"고 묘사했다. 1965년 쓴 글에서 전쟁으로 흘러간 경로를 돌아봤다. "신중을 기하지 않았고 서툴고 잔인하고 경솔했다. 서방은 점점 더 실수를 저질렀고 허둥댔다. 자신들이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처음부터 그들의 주장은 상투적이고, 결코 사실을 좇은 적이 없었다."
폭력의 기억은 엄청난 공격을 당한 사람들에게 아직도 남아 있다. 지금은 많은 베트남 사람들이 호찌민이라 부르는 사이공의 작은 집에서 공산당 게릴라였던 이는 자신의 밀림 캠프에 떨어지던 미군의 폭격과 자신과 동료들이 어떻게 비좁은 여우 굴로 숨었는지를 기억했다. "우린 쌀로 만든 도수 높은 술이 있었다. 그걸 마시면 독해 눈물이 나올 정도다. 우린 '어머니 땅의 눈물'이라 불렀다. 술을 마시면 두려움이 없어졌다."

미국은 2차 대전 중 연합국이 독일과 일본에 사용한 것보다 많은 폭탄을 베트남에 떨어뜨렸다. 네이팜탄도 떨어뜨렸다. 희생자들의 피부에 달라붙어 살을 태웠다. 백린(白燐)은 뼈를 녹였다. 파편 폭탄에서 나온 쇠 구슬과 철 조각은 사방으로 날아갔다. 에이전트오렌지 4300만 톤을 포함해 독성 화학물질 7300만 톤이 뿌려져 식물을 죽였고 노출된 사람들에게 질병을 안겼다.

잘린 다리만 남은 아들

미국의 하노이 폭격은 역사적 오명을 남겼다. 민간인으로 가득 찼던 하노이는 자체 방어 공군력이 없었다. 당시 여덟 살이었던 한 여인은 음속의 두 배로 날던 F-111 폭격기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등에 나뭇가지를 덮어 어설프게 위장했던 걸 기억했다. 대공 포대에 근무했던 한 남자는 성과 없던 밤샘 방어 작전을 마치고 집으로 가니 폭격으로 마을이 통째 사라진 걸 보았다. 그의 아들이 남긴 건 흉터로 확인한 잘린 다리뿐이었다.

미국의 지상 공격도 강력했다. 메콩 삼각주의 한 마을에서 예순 후반의 농부는 황토로 지은 집에 평화롭게 앉아 기억을 더듬었다. 그녀의 엄마는 미군 헬리콥터가 굉음을 내며 다가오는 걸 보고 도망가는 실수를 범했다. 미사일을 맞은 엄마의 몸은 야자수 나무 앞에서 산산조각 났다. "엄마를 모아야 했다. 이를 주워야 했다." 남자 형제 셋은 헬리콥터 기관총에 맞아 죽었다. 지금도 그녀는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다. 헬리콥터 소리 같은 것을 들으면 공포에 떤다.

▲겁에 질린 아이들. ⓒAP


"움직이는 건 뭐든 죽여라"

미국인 다수는 미 라이(My Lai) 마을 주민에 대한 악명 높은 학살이 특별하고 드문 사건이었다고 믿는다. 하지만, 2001년 6월 언론인 닉 터스는 미국국립문서보관소에서 다른 그림을 찾아냈다. 비밀에 붙여진 대책팀이었던 베트남전쟁범죄위원회(Vietnam War Crimes Working Group) 관련 자료를 발견한 것이다. 미국 육군은 미군이 저지른 학살과 살인, 강간이 300건이 넘었음을 입증했다.

당시 터스는 베트남을 방문했다. 그가 쓴 책 <움직이는 건 뭐든 죽여라>에는 중부 고산지대 촌마을에서 여자와 어린이 스무 명이 살해된 사건의 현장을 찾으려 애쓰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현지인을 따라 나선 길에 동일한 좁은 지역에서 학살을 기록한 증언비를 다섯 개나 추가 로 발견했다.

"건초더미에서 바늘을 찾는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내가 찾은 것은 바늘더미였다." 그는 "끈적이들"(gooks, 동남아시아인을 비하하는 모욕적인 표현)의 목숨에 대한 인종적 무관심, "사살" 숫자를 올리라는 상부의 압박, 농촌 지역이 "무차별 포격 지대"로 갖는 성격이 결합되어 "민간인에 대한 살해가 광범위하고 일상적으로 이뤄졌으며, 이는 미군 지휘부의 정책 때문"라고 결론지었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투옥되어 학대를 받았다. 1970년 미국 의원단이 악명 높은 꼰 다오 감옥을 방문했다. 거기엔 남녀 무리가 "호랑이 우리"에 족쇄를 찬 채 갇혀 있었다. 굶주리고, 두드려 맞고, 고문당하면서 곤충을 먹어 연명하고 있었다. 이런 사실이 알려져 소동이 벌어졌지만, 감옥은 끝내 폐쇄되지 않았다.

☞2회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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