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출장을 다녀오던 길이었다. 해가 동산 위로 떴다. 길가엔 개나리가 활짝 폈다. 산 중턱엔 진달래가 꽃망울을 터뜨렸다. 라디오 뉴스엔 진해 벚꽃이 한창이랬다. 찬 기운을 느꼈지만 창문을 열어놓았다. 아침을 머금은 봄 내에 코가 간지러웠다.
"어느 나라 다녀오세요?"
점잖은 말투의 운전사는 일흔 넘어 보였다.
"베트남요. 하노이 들어갔다 다낭 거쳐 호찌민에서 오는 길입니다."
봄기운을 즐기는 여유가 깨져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아 그래요. 저도 몇 해 전 베트남 다녀왔어요."
운전사의 목소리는 축축했다. 봄 구경에 집중하고 싶었지만, 예의상 무슨 일로 다녀왔느냐 물었다.
"전투를 한 마을에 갔어요. 제가 베트남전쟁 참전용사, 아니 참전군인입니다. 변한 게 없더라고요. 벌써 사십년도 더 지났는데. 그곳에 가니 눈물이 나더라고요. 죽은 사람들 생각에."
"동료들이 많이 전사한 모양이죠?"
인생의 황혼을 맞은 '베트남 참전용사'가 하는 믿거나 말거나 무용담을 들을 생각을 하니 기분이 상했다.
내 군대 시절 뭐 빠지게 고생했던 이들은 포상휴가 한번 가기 힘들었다. 요령과 눈치에 통달했던 뺀질이들은 외박·면회·휴가를 밥 먹듯 했다. 'Imported from Australia' 도장이 살덩이에 찍힌 사병용 소고기는 전시용이지 시식용이 아니었다. 새로 나온 건빵, 전투식량, 가루 주스는 맛 본적 없다. 죄다 유통기한이 도래했거나, 지난 지 오래된 것들이었다. 제대해 만나면 빡세게 군 생활 한 친구들은 군대 이야기를 별로 하지 않았다. 밑도 끝도 없는 무용담은 뺀질이들 차지였다.
"전우도 죽었지만, 그 때문만은 아니었어요. 우리가 죽인, 아니 제가 죽인 베트남사람들이 생각나서 울었…."
운전사의 목소리에 물이 고였다.
"이른 아침 우리 소대가 매복을 나갔지요. 한번 나가면 종일입니다. 분대별로 흩어져 죽 때리다가 해가 져야 귀대하죠. 우리나라처럼 베트남 사람들도 산으로 나물을 캐거나 나무열매를 따러옵니다. 그러면 분대끼리 무전기를 때립니다. 여자 한 명이면 '식사 추진, 식사 추진, 1인분'이라고 하죠. 하하하!"
웃음소리에 힘이 없었다.
"남자 한 명이면 뭐라 그러죠?"
내 말투에 역겨움과 지겨움이 묻었다. 봄날을 즐기러 창문 밖으로 눈을 돌렸다.
"남잔 보고 후 바로 쏩니다. 작전구역에 무단으로 침입했으니까요. 베트콩인거죠. 하지만 여자는 안 쏘고 기다립니다. 매복지점 바로 앞까지. 그리곤 …."
백미러에 비친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덮치죠. 강간합니다. 집단으로 윤간합니다. 그럼 다른 매복조에서 무전을 막 때립니다. '너네만 먹냐. 이쪽으로 배달하지 않으면 우리가 먹으러 간다'고요. 소대장이 있지만 제지를 안 합니다. 못합니다. 사병들이 더 고참이고 에무식스틴을 가졌잖아요."
"… …"
책에 찍힌 문자를 보는 거랑 당사자의 목소리로 직접 듣는 거랑 충격의 세기는 달랐다. 숨을 쉴 수 없었다. 동물의 세계에도 집단강간이 있던가. 그런 생각을 한 때였다.
"식사가 끝나면 어떻게 하는지 아세요. 그냥 쏴 죽입니다. 증거를 없애야 하니까. 중대엔 베트콩을 사살했다 보고하죠. 맨날 있던 일은 아니지만 잊을 수 없어요. 그래서 그 현장에 가서 기도를 하고 싶었어요. 용서해 달라고. 이런 이야기를 어떻게 가족에게 할 수 있겠어요. 전우들을 만나도 할 수 없죠. 배척당합니다. 저도 고엽제 회원이지만 거기선 이런 이야긴 안 해요."
"채명신 장군이 그랬다면서요. '100명의 베트콩을 포기하더라도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하라'고."
물론 채명신이 쇼를 했음을 잘 안다. 질문 아닌 질문이었다.
"군대 안 갔다 오신 모양이네. 장군들 하는 말 믿는 걸 보면. 하하하."
전방 사단 전투지원중대 예비역 병장, 이런 말을 내뱉을 틈 없이 택시는 집에 닿았다.
베트남 사람들은 한국을 좋아한다. 한국의 경제성장을 부러워한다. 국가와 국민이 합심하여 경제를 발전시킨 모델로 한국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 드라마와 가요는 대인기다. 한국이 누리는 경제적 풍요와 정치적 자유, 문화적 풍요로움에 관심이 많다. 베트남 젊은이들을 만나면 내가 모르는 한국 연예인 이름을 줄줄 댄다. 베트남 정부가 교육 과정에서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증오를 심어놓지 않은 탓이다.
역사박물관에 가면 미국군과 한국군이 저지른 양민학살을 다룬 코너가 있다. 하지만 그것을 오늘의 미국인·한국인과 연관시키진 않는다. 한국군이 자행한 양민학살 이야기를 꺼낼라치면 과거는 과거고 현재가 더 중요하단다. 전쟁범죄 역사를 잊은 건 아니다. 기억하되 처벌이나 배상을 요구하지 않는다.
베트남전쟁 이후 처음으로 한국군 주둔지역에서 발생한 양민학살의 피해자들이 공식 행사를 위해 며칠 전 방한해 활동 중이다. 한 명은 1966년 2월과 3월 모두 1004명이 죽은 빈안사 학살에서 어머니와 여동생을 잃었다. 다른 한 명은 1968년 2월 주민 74명이 희생된 퐁니·퐁넛마을 학살에서 어머니와 남동생·언니·이모·조카 등 가족 다섯 명을 잃었다. 당시 여덟 살이던 이 피해자는 창자가 배 밖으로 튀어나온 지도 모른 채, 한 쪽 엉덩이가 날아가 걸을 수 없던 오빠를 대신해 엄마를 찾아 걷고 또 걸었다.
이들은 7일 저녁 7시 서울 견지동 조계사 안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장에서 베트남전을 다룬 '하나의 전쟁, 두개의 기억' 이재갑 사진전 리셉션 행사에 참가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대한민국 월남전 참전자회'와 '대한민국 고엽제 전우회' 등 베트남전 참전군인단체들이 "조작된 (내용의) 행사이기 때문에 이를 개최해선 안 된다. 좌시하지 않겠다", "좌경화된 반국가적인 일부 세력들이 민간인 학살 피해자의 증언이라는 근거도, 증거도 없는 연극을 자행하려 한다. 인생 단축할 각오로 그들의 음모를 분쇄하겠다"며 행사를 실력으로 저지하겠다고 나섰다.
불교 조계종은 "베트남전 관련 단체들의 항의 등으로 시설 파손 및 정상적 업무에 막대한 차질이 예상돼" 대관 신청을 취소함으로써 행사는 열리지 못하게 됐다. 초청자인 평화박물관은 6일 경찰에 베트남 방문단 등에 대한 '신변보호 요청'을 했다.
일본제국주의가 한국을 식민지 지배하면서 우리 민족을 강간하고 학살한 것이 역사적 사실이듯이 한국군이 베트남에 가서 양민학살이라는 전쟁범죄를 저지른 것도 지울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인터넷에서 '한국군의 베트남 학살 SOUTH KOREAN TROOPS MASSACRE IN VIETNAM'을 검색하면 수많은 자료가 나온다.
한국 정부는 30만 명 넘는 군대를 베트남에 보냈다. (미국군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외국군이었다. 한국군은 자체적인 지휘명령권을 보유했다. … 서구와 베트남의 연구자들은 한국군이 수천 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다고 밝히고 있다. 학살 피해자의 다수는 여성과 어린이였다. 몇몇 마을을 찾아갔는데, 목격자들은 한국인들이 저지른 진절머리 나는 잔악상을 기꺼이 회상해주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베트남전쟁은 공산주의와 싸운 영광스러운 행위로 찬양받아왔다. 1968년 미라이 마을에서 504명을 학살한 범죄에 대해 윌리엄 캘리 중위를 기소한 미국정부와 달리 한국정부는 베트남에서 자국 군인들이 저지른 행위를 한 번도 공개하지 않았다. 한국군은 영웅으로 귀환했다.
국영방송인 KBS는 (2000년) 2월 몇몇 참전군인을 인터뷰한 삼십 분짜리 다큐멘터리를 방영했다. 신분 보호를 위해 얼굴을 가린 이들은 정당한 이유 없는 살해행위에 대해 말했다. "마을 수색 중 딸과 있는 젊은 남자를 발견했다." 참전군인은 비통스럽게 말했다. "중대장이 내개 일곱 살이나 여덟 살로 보이는 딸애 옆에 서 있는 남자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그러자 중대장이 둘 다 죽여버렸다."
미국의 대표적 시사주간지 <뉴스위크>에 2000년 4월 9일 실린 기사다. 위키피디아 영문판은 "베트남전쟁 중 한국군이 저지른 학살들"이 일어난 지역을 거명한다. 빈안, 빈호아, 빈타이, 디엔니엔, 고자이, 하미, 퐁니, 퐁냣, 떠이빈, 빈수안 ….
검은 재킷, 검은 치마를 입고 검은 구두를 신은 박근혜 대통령은 (2013년 9월) 9일 베트남의 국부 호찌민 전 국가주석의 묘소 앞에 섰다. … 조화엔 한글과 베트남어로 '대한민국 대통령 박근혜'라고 쓰인 빨간 리본이 달려 있었고, 박 대통령은 조화 앞으로 다가가 허리를 90도 가까이 굽혀 리본의 끝을 조화에 붙였다. 베트남식 헌화 예절에 따른 것이다.
그러곤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는 적군의 수장이었던 호찌민 전 주석의 시신이 안치된 묘소 안쪽으로 들어가 목례를 했다. 묘소 안에서도, 밖에서도 박 대통령의 표정은 엄숙했다. 말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박 대통령의 '엄숙한 침묵'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베트남 사람들은 한국에 베트남 전쟁에 대해 얘기를 일절하지 않는다. 박 대통령의 헌화와 참배는 행동으로 보여준, 그 자체가 강한 화해의 제스처다." …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과거에 대한 한국과 베트남의 성숙한 입장과 잘못된 역사인식에 갇혀 있는 일본과 자연스럽게 비교가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 (쯔엉떤상 국가주석과 정상회담 후 박대통령은) 호 전 주석이 1945년 독립투쟁을 시작할 때부터 사용했던 작은 나무책상과 침대, 책과 시계 등이 보존돼 있는 거소도 둘러봤다.
2013년 9월 10일자 <중앙일보> 기사다. 일본에서 독도를 일본 땅이라 주장하는 교과서가 많이 채택됐다고 한국 언론들이 난리다. 독도는 역사적으로나 실효적으로나 한국 땅이다. 역사적 진실을 바꿀 수 없다. 독도가 한국땅인 것처럼 베트남전쟁 당시 일어난 한국군에 의한 양민학살도 역사적 진실이다. 양심적인 참전군인들의 증언은 말할 것도 없다. 해외 자료를 보면, 한국군이 베트남에서 양민을 학살했다는 증거가 독도는 한국 땅이라는 증거보다 훨씬 많다.
독도가 한국땅이라는 주장은 한국·북한·중국이 가장 열렬하게 지지한다. 하지만 일본을 좋아하는 미국과 유럽 정부들의 공식 입장은 독도는 분쟁지역이지 한국 영토가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군의 학살행위에 대한 미국 정부의 공식입장은 찾기 어렵지만, 한국군과 같이 일했던 미국군들의 아래와 같은 회고담은 쉽게 찾을 수 있다.
미국군이 저지른 미라이 학살은 한국군의 잔학행위와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 어느 날 그 (한국군) 부대는 베트콩 게릴라들을 체포했다. 남자 몇 명과 여자 한 명이었다. 한국인들은 사슬로 베트콩들을 묶었다. 그리고 남자 게릴라들 앞에서 한국 군인들은 여자 게릴라의 생식기를 잘라냈다. 그러자 남자 게릴라 한 명이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연인이었다. 물론 남자 게릴라들도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당했다.
박근혜 정부의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잘못된 과거에 대해 한국은 일본보다 "성숙"하다고 말했지만, 과연 그럴까. 한국정부와 한국인 다수 역시 "잘못된 역사인식에 갇혀 있기"는 일본과 비교해 다를 바 없다. 역사인식에서 일본보다 진정 성숙하려면 대한민국의 역사에 피해자의 아픔과 더불어 가해자의 잔인함도 존재했음을 잊어선 안 된다.
그렇지 않다면, 박근혜 대통령이 한국민을 대표해 호찌민 묘에 헌화하고 그 시신에 목례를 한 행위는 정직한 '화해의 제스처'가 아니라 비열한 '정치적 쇼'가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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