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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아프리카의 '따거' 중국, 한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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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아프리카의 '따거' 중국, 한국은?

[유라시아 견문] 반둥 : 위대한 유산

반둥 가는 길

반둥 가는 길은 수월치 않았다.

자카르타의 교통 체증은 원체 악명이 높다. 한 번 가보지 못했어도 귀에 익었을 정도이다. 한 친구는 자카르타에서 반둥까지 15시간이 걸렸다는 '무용담'을 들려주었다. 다행히 韓人(한인)들의 온/오프라인 네트워크는 넓고도 촘촘했다. '카톡(카카오톡)' 망을 두 번 거치자 지인의 지인을 통해 자카르타와 반둥을 오고가는 기차표를 미리 구할 수 있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인도네시아로 향했다.

반둥행 당일도 가뿐했다. 출발 2시간 전, 느긋하게 숙소를 나섰다. 그러나 오산이었다. 기차가 떠나고 15분이 더 지나서야 감비르(Gambir) 역에 도착했다. 택시에서 꼬박 두 시간 반을 갇혀 있었던 것이다. 10여 킬로미터를 꼼짝달싹하지 못한 구간이 화근이었다. 반대편 도로가 원활한 것을 보면 출근길 때문만은 아니지 싶었다. 다급한 마음에 택시 기사에게 정황을 물었지만, 알아들을 수 없는 인도네시아 말이 되돌아 왔을 뿐이다.

병목 지점에는 웅장한 이슬람 사원이 자리했다. 인파와 차량이 빼곡하여 일대가 마비 상태였다. 무언가 중요한 종교 행사가 있었던 모양이다. 모스크의 기도 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어난 새벽만 해도 경건하게 하루를 시작하는 듯하여 기분이 좋았더랬다. 이제는 그저 원망스러울 뿐이다. 반둥행이 불발되었던 지난 번 기억이 불길하게 떠올랐다.

석사 논문의 소재가 반둥 회의였다. 중국 외교부 자료관에 가서 저우언라이가 즉석에서 수정하고 보완했던 육필 원고까지 필사하는 정성을 들였었다. 그럼에도 정작 반둥에는 가보지 못했다. 가려고는 했었다. 현장에서 생동감 있게 읽고자, 각종 사료들을 짊어 싸고 비행기에 올랐었다.

그러나 경유지였던 나리타 공항에서 발이 묶였다. 자카르타로 출국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여권 만료 기간이 5개월 남았다는 것이다. 6개월 미만이면 입국이 안 된다는 사실을 그때서야 처음 알았다. 망연하고 자실했다. 툴툴 인천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2009년 4월, 꼭 6년 전 이맘때의 일이다. 반둥과는 영 인연이 없는 것인가, 속이 타들었다.

다행히 반둥 가는 기차는 여럿이었다. 더 다행히 좌석표도 남아 있었다. 덤으로 뜻밖의 인연도 맺었다. 내 옆자리에 앉은 분이 반둥 회의 기념행사의 관계자였다. 게다가 대전에서 1년 간 연수한 경험도 있던 행정 관료였다. 다시금 아시아가 하나의 생활 세계가 되고 있음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그분도 반둥에 직접 가보고 싶다는 한국인이 반가운 눈치였다. 시종 현장 상황을 확인하는 전화로 분주했지만, 틈틈이 블랙베리 핸드폰에 저장된 5년 전 사진들을 보여주며 친절한 설명까지 베풀었다. 푸른색 한복을 입고 김치를 시식하고 있는 사진에는 광대 웃음이 터졌다.

한국 생활 중에 가장 그리운 것은 겨울에 내리는 눈이라고 했다. 태어나서 처음 본 눈이었고, 또 마지막 눈이었다. 한국에서 가장 부러웠던 것은 대중 교통망이라고 했다. 지하철과 버스 노선이 훌륭하게 갖추어져 있다며 엄지손을 치켜세웠다. 방금 전에 곤욕을 치렀던 나로서도 격하게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앞 차를 놓치고 겨우 이 열차를 탄 것이라며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그러자 그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 또한 알라의 뜻이라고, 그 덕에 우리도 만난 것이라고.

내가 읽던 <자카르타 포스트>의 1면에는 조코 위도도(일명 '조코위') 대통령의 양편으로 시진핑 주석과 아베 총리가 나란히 앉아 있는 아시아-아프리카(AA) 정상 회담 사진이 실려 있었다. 힐끗 쳐다본 그가 왜 한국의 대통령은 안 왔냐고 물어왔다. 중남미 순방 중이라는 대답이 궁색했다. 그래서 AALA 협력을 증진하시나 보다고 농을 보태었다. 헌데 그가 진심으로 알아듣고 다시 엄지손을 세웠다. '훌륭한 지도자군요!' 순간 이 '세월'에 저 편으로 날아가 버린 분에 대한 울화가 치밀었지만 꿀꺽 삼켜 버렸다. 외국인에게, 더구나 한국서 연수까지 했다는 현지 관료에게 내 나라 대통령을 욕하고 싶지는 않았다.

위로가 된 것은 창밖 풍경이었다. 기차는 점점 오르막을 올랐다. 논과 밭 대신에 산과 숲이 눈에 들었다. 이 산과 저 산을 잇는 아찔한 다리도 여럿이었다.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산세가 일품이었다. 하늘은 낮아지고 구름은 가까워졌다. 기차에서 내리자 상쾌한 나무 냄새가 훅 끼쳐왔다. 과연 AA 회의를 열기에 모자람이 없는 장소로구나. 역전에 도열하고 있는 노란색 택시들마저 그 이름이 'AA TAKSI'였다.

▲ 1955년 아시아-아프리카 반둥 회의 박물관. ⓒ이병한

왜 반둥이었나

산책을 하거나 자전거를 타기에 제격이었지만, 첫 기차를 놓치는 바람에 여유가 없었다. 기술과학부 국장 모하마드 일미(Mohamad Ilmi) 씨와 작별 인사를 나누자마자 곧장 약속 장소로 내달렸다. 숙소에 짐도 풀지 못하고, 옷도 갈아입지 못했다. 헐렁한 반바지 차림으로 AA 회의 박물관장을 만나러갔다. 도저히 늦을 수는 없었다. 겨우겨우 마련된 자리였다.

첫 메일에는 답이 없었다. 그래서 석사 논문을 팔았다. 영문 요약본을 보내며 재차 만남을 청했다. 이번에는 답신이 왔다. 행사 준비로 너무 바빠 인터뷰를 사양한다는 내용이었다. 마지막으로 박사 논문의 일부를 보냈다. 반둥 회의의 후속물이라고 할 수 있는 AA 작가 회의와 가네포(GANEFO)에 관한 내용이었다. 특히 가네포는 수카르노가 주도했던 대안적 스포츠 대회였다. 첫 개최지 역시 인도네시아였다. 마침내 승낙이 떨어졌다. 한 시간 정도 차를 마시자고 했다.

첫 대면부터 예상이 어긋났다.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보라색 차도르를 걸친 단아한 중년 여성이었다. 사각 진 은테 안경을 꼈음에도 온화한 인상을 덮지는 못했다. 아직도 인도네시아 이름으로는 성별 감식이 잘 되지 않는다. 응당 남성이려니, 선입견이 깨진 것이다. 의외이기는 그 분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50대 언저리의 희끗한 연구자일 것으로 짐작했단다. 피차 어색한 긴장이 풀리자, 나는 오래 묵혔던 질문들을 쏟아냈다.

왜 반둥이었나? 6년째 품고 있던 궁금증이다. 그처럼 획기적인 국제회의라면 통상 수도에서 열리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왜 자카르타가 아니고 반둥이었나? 날씨와 경치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다. 자바 섬의 서쪽에 자리한 반둥은 자카르타에서 180킬로미터 거리이다. 아주 멀지 않은 편이다. 35도를 오르내리는 자카르타에 비하면 해발 780미터에 자리한 반둥은 연중 20도 안팎을 유지하는 '봄의 도시'이자 '꽃의 도시'이다. 여기에 화산 온천도 즐길 수 있다. 그래서 휴양지로도 유명하다. 자카르타에서 만난 교민들도 주말 여행으로 반둥을 자주 찾는다고 했다. 그럼에도 기후와 관광 때문이라고만 하기에는 성에 차지 않는다. 또 다른 이유는 없었을까?

그럼, 왜 4월 18일이었을까? 그녀가 되물었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당황했다. 장소가 궁금했던 것이지, 날짜를 궁리해 본 적은 없었다. 독립기념일은 8월 17일이다. 빈약한 인도네시아 현대사 지식을 아무리 복기해보아도 마땅한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녀는 어리둥절해 있는 나를 이끌고 1955년 4월의 반둥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반둥 회의는 그 개막일부터 외교적 숙고의 산물이었다. 그 해 라마단이 시작되는 날이 4월 24일이었다. 24일 이후라면 아랍 국가 정상들이 참석하기 어려워진다. 그리고 늦어도 23일까지는 회의를 마쳐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반면 반둥회의 성사까지 공헌이 다대했던 버마의 우누(U Nu) 총리는 4월 16일까지 자국에 머물러야 했다. 중요한 불교 기념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 국가의 정상들이 출발할 수 있고, 이슬람 국가 수반들이 귀국할 수 있는 적절한 날짜로서 4월 18일부터 23일이 회의 기간으로 설정된 것이다.

그런데 그게 또 다가 아니었다. 탁월한 외교적 수완가였던 수카르노는 AA 회의를 사시 눈으로 치켜보고 있던 미국도 염두에 두었다. 개막 연설을 통해 미국의 식민지 시절을 상기시킨 것이다. 1775년 4월 18일은 미국 역사에서도 중요한 날이다. 미국 독립 혁명의 시위를 당긴 폴 리비어가 한밤중에 말을 타고 보스턴에서 콩코드까지 질주했던(Midnight Ride)날이다. 시로도, 영화로도 재현되었을 만큼 유명한 일화라고 한다. 즉 AA 회의 또한 유럽의 식민 통치에서 가장 먼저 벗어난 미국의 독립 혁명을 계승하고 있음을 은연중에 표방한 것이다. 그래서 4월 17일도 아니고 4월 19일도 아닌, 4월 18일이 개막일로 최종 낙찰된 것이다.

반둥은 수카르노 본인과도 연이 깊었다. 반둥은 네덜란드가 통치하던 시절부터 중요한 도시였다. 1920년대에는 수도를 바타비아(자카르타)에서 반둥으로 옮길 것까지 고려했다. 그래서 대대적인 도시 재건축이 단행되었다.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아르데코(Art Deco)풍 건물들이 대거 들어섰다. 식민지 근대성이 만개하는 유럽풍 도시로 변모한 것이다. 그래서 '열대의 유럽'이나 '자바의 파리'라는 별칭도 생겼다. 응당 교육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인도네시아 현대사를 이끌어간 주요 엘리트들을 배출했다. 그들이 학생으로서, 독립운동가로서 성장한 곳이 바로 반둥이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반둥 공대 출신의 수카르노이다. 1921년 입학했고, 전공은 토목공학이었다.

수카르노는 도시와 건축의 힘을 잘 이해했다. 도시 공간의 재정비를 진두지휘했다. 독립기념탑과 붕카르노 경기장 등 1960년대 수도 자카르타를 재탄생시킨 주요 건축물도 그의 아이디어에서 비롯되었다. 반둥회의 준비 또한 그가 총설계자 역할을 맡았다. 중앙 모스크가 자리한 중심가는 아시아 아프리카 광장이라고 이름을 고쳤다. 고급호텔들이 많았던 'Great Eastern Road' 또한 아시아 아프리카 거리(Jalan Asia Afrika)라고 명칭을 변경했다.

▲ 인도네시아 반둥의 아시아 아프리카 광장. ⓒ이병한

당시 반둥 시 관계자들은 수카르노의 독단에 불만이 컸다고 한다. 반면 수카르노는 법률가와 행정가를 신뢰하지 않았다. 서류에 의존하는 그들은 좀체 영감이 없다고 불평이었다. 혁명과 정치는 영감을 불어넣는 예술이라는 것이 '교도 민주주의'의 창시자, 수카르노의 지론이었다. 자카르타와 반둥은 그가 도모하는 혁명을 공간적으로 구현하는 작품 공간이었다.

이 '극장 국가'의 노하우를 전수받은 인물이 김일성이다. 그는 1965년 반둥 회의 10주년 기념식에 참가하여 자카르타와 반둥을 둘러볼 수 있었다. 그리고 북조선으로 돌아가서 평양 개조에 나섰다. 그래서 들어선 것이 모란봉 경기장(1969년)과 주체사상탑(1982년)이다. 실제로 수카르노와 김일성은 막역한 사이였다. 독립기념탑의 꼭대기에 있는 황금 횃불은 북조선이 선물한 것이다. 수카르노는 1960년대 중반 새로운 세계 질서의 주축으로 자카르타-하노이-베이징-평양을 호명했었다.

AA 거리에는 '자유의 집(Gedung Merdeka)'도 있다. 이 건물이 처음 들어선 것은 1895년이었다. 네덜란드 고위 인사들의 고급 사교장이었다. 1926년 개보수 이후로는 반둥을 대표하는 건축물이 되었다. 주말마다 대규모 연회가 열렸다. 일본군이 점령했을 때는 '야마토 회관'으로도 불렸다. 독립 이후에야 비로소 '자유의 집'이 된 것이다. 1955년 반둥회의를 개최한 역사적 장소가 바로 이 곳이다. 반둥회의 25주년을 기념한 1980년부터는 '아시아 아프리카 회의 박물관'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 박물관의 운영을 책임지고 있는 분이 바로 내 앞에 앉아계셨다.

수카르노는 반둥 회의를 일종의 축제로 기획했다. 각국 대표단과 반둥 시민들이 교감할 수 있는 이벤트를 준비했다. AA 거리에서 '자유의 집'까지 100여 미터를 걸어서 입장하도록 한 것이다. 29개 신생 국가의 정상들이 반둥 시민들의 환호 속에 '자유의 집'으로 들어서는 스펙터클을 연출한 것이다. 시민들은 각국의 정상들을 직접 보고, 악수를 나누고, 사인을 받고, 사진도 찍을 수 있었다. 이 '반둥 행진'은 훗날 반둥 회의의 상징이 되었다.

당시 인도네시아에서 발간된 화교 신문 <동방일보>를 보노라면 수카르노를 제외한 3대 스타로 네루와 나세르, 저우언라이가 꼽혔다. 저우언라이는 단연 외모가 돋보였던 모양이다. 그의 두텁고 진한 눈썹에 여성들이 시선을 때지 못했다고 한다. 연한 회색빛 정장 차림도 화제를 모았다.

나세르는 아랍 세계의 젊은 혁명가로 주목받았다. 37세의 건장한 청년이 군복을 차려입고 등장했다. 탄탄하고 다부진 그의 육체야말로 이집트 독립의 상징이었던 셈이다. 네루는 세련된 몸짓으로 각광을 받았다. 여느 지도자처럼 손만 흔들며 입장을 한 것이 아니라 'Merdeka(자유)'을 앞장서 외쳤다고 한다. 그가 선창하면, 반둥 시민들이 'Merdeka, pak!'(Freedom, sir!)으로 화답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묶었던 사보이 호만(Savoy Homann) 호텔은 지금도 그날의 환희를 기억하고 있다. 144호 객실은 '네루 룸'이고, 244호는 '수카르노 룸'이며, 344호는 '저우언라이 룸'이다. 반둥에서 기념행사가 열릴 때마다 각국 정상들은 자국의 건국 영웅들이 묶었던 방에서 하루 밤을 머물게 된다.

▲ 인도네시아 반동의 자유의 집. ⓒ이병한

위대한 유산

2015년 4월 24일. 반둥에 다시 'Merdeka'가 울려 퍼졌다. 60년 전 행진을 재연하는 퍼레이드가 펼쳐졌다. 언젠가부터 국제 회의장 풍경은 살벌해졌다. 바리게이트로 담을 쌓고, 밖에서는 시위가 벌이지기 일쑤이다. 그러나 반둥은 전혀 딴 판이었다. 새 판이었고, 살 판이었다. 흡사 마당극처럼 보이기도 했다.

지도자와 시민이 하나가 되어 '안녕! 안녕! 반둥'(Halo! Halo! Bandung!)을 합창했다. 수카르노와 만델라를 추모하는 연대의 날(Solidarity Day) 콘서트는 더없이 흥겨웠고, 우정의 날(Friendship Day)에 열린 AA 민속 축제는 한없이 다채로웠다.

ⓒ이병한

ⓒ이병한

ⓒ이병한

그 화합의 현장들은 실시간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전송되었다. 인도네시아 방송국들은 물론이요, 알 자지라와 CCTV도 위성으로 생중계했다. 어린 학생들의 손에도 핸드폰이 쥐어 있었다. 시시각각 셀카를 찍어 페이스북과 트위터를 통해 친구들과 공유했다. 그 순간 반둥은 인도네시아의 허브이자, 아시아-아프리카의 메카처럼 보였다. 같은 시간 BBC는 아프리카 난민의 유럽 유입을 근심하는 방송을 내보내고 있었고, CNN은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를 검토하고 있었다. 반둥 시민이 세계 시민으로 화하는 역사적 현장으로부터 영미권 매체가 소외되어 있는 것 같았다.

60년의 세월만큼 주역들의 얼굴도 바뀌었다. 이번에는 네루 대신 시진핑이 선창을 맡았다. 그가 'Merdeka'를 외치면, 반둥 시민들의 합창이 아시아 아프리카로 메아리 쳤다. 시진핑의 옆자리에는 인도네시아의 현직 대통령 조코위가 있었고, 중국의 영부인 펑리위안의 옆자리에는 수카르노의 딸이자 전직 대통령 메가와티 여사가 자리했다.

실은 조코위의 개막 연설 이후부터 인도네시아의 외교가 친중 노선으로 전환되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분분했다. 그는 작금의 불공정하고 불평등한 세계 질서를 비판하면서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 아시아개발은행을 적시했다. 이들 기구를 통해 세계의 주요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생각이야말로 낡은 것이라고 성토했다.

그러면서 더 공정하고 더 평화로운 세계 질서의 예시로 거론한 것이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이었다. 게다가 만찬 연회장에도 조코위와 시진핑은 같은 색깔의 바틱(Batik)을 입고 등장하여 이목을 더욱 집중시켰다. 의상의 색상은 우연이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조코위의 신세계 질서와 시진핑의 신형 국제 관계는 깊이 공명하는 듯 보였다.

이에 화답하듯 시진핑은 재차 보따리를 풀었다. AA 회의에 참여한 저개발 국가들의 거의 모든(97%) 수입 품목에 대하여 관세를 철폐하기로 했다. 중국 시장을 대폭 개방하여 발전도상국들의 수출 신장을 돕겠다는 뜻이다. 향후 5년간 양 대륙 10만 명에게 무상 교육과 직업 훈련의 혜택을 제공할 것이라고도 했다. 어떠한 정치적 조건을 달지 않는 원조도 지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당장 인도네시아에는 자카르타-반둥-시레본(Cirebon)-수라바자(Surabaja)를 잇는 860킬로미터 고속철도의 자금과 기술을 제공하는 선물을 안겼다. 고속철도가 완성되면 자카르타-반둥은 현재의 세 시간에서 한 시간으로 단축된다. 새 기차역 주변으로는 저우언라이 기념공원도 들어설 것이다. 2005년, 반둥 50주년을 기념하여 각국이 선물했던 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테할레가(Tehallega) 공원 옆자리이다. 벌써 AA의 수목들이 무성한 '더불어 숲'을 이루고 있었다.

ⓒ이병한

그간 반둥 담론은 크게 두 갈래였다. 하나는 새로운 아시아-아프리카의 출발점으로, 식민 통치에서 벗어난 유색 인종 국가들의 최초의 대륙 간 회합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환호가 오래 가지는 못했다. 현실주의적 시각에서 냉소와 냉담이 퍼져갔다. 새로운 제도를 창출하지 못한 실패한 기획이었다는 것이다. 환희도 냉소도 아닌 새 시각이 등장한 것은 새 천년 이후이다. 반둥의 유산을 '힘의 이동'이 아니라, '패러다임의 이동'으로 자리매김하자는 것이다. 나도 이 견해에 한 표를 던진다. 20세기보다는 21세기를 예비하는 미래파들의 조숙한 회합이었다.

미-소가 유럽의 양분을 담합했던 얄타 체제(1945년)는 과거사가 되었다. 미-일이 동아시아의 분단을 획책했던 샌프란시스코 체제(1952년)도 낡은 것이 되었다. 그에 반해 반둥 회의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아니 갈수록 생명력을 발하고 있다. G20와 브릭스, AIIB 등의 동시적 등장은 제도적 변화를 통해 반둥 정신이 만개하는 시대로 진입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하여 미국에서 중국으로, 서구에서 동방으로, 북에서 남으로 권력이 이동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다. 물론 권력이 이동하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머지않아 중국이 미국을 넘어서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아시아가 구미를 능가하는 것도 시간문제이다. 다만 중국이 미국을 흉내 내고, 동방이 서구를 복제하고, 남이 북을 답습하면 진정한 변화라고 하기가 힘들다. 그리하여 패러다임의 전환이 중요한 것이고, 그래서 반둥의 유산이 더욱 돋보이는 것이다.

반둥이 선언한 '평화 공존 5원칙'은 저우언라이가 말한 네 글자, "求同存異(구동존이)"로 요약된다. 화합을 지향하되, 차이 또한 인정한다는 것이다. 규모와 체제의 다름에도 불구하고 상생하고 공존하는 길을 찾는다는 것이다.

돌아보면 문명화와 근대화, 그리고 민주화로 이어진 20세기의 지배 이념들은 차이를 좀체 인정하지 않는 배타적인 이데올로기였다. 그래서 줄기차게 '체제 전환'을 요구했다. 문명화를 강요하고, 근대화를 이식하고, 민주화를 선동했다. 독점적이고 독선적이었다. 제국이 식민지를 농락하고, 강대국이 약소국을 겁박하는 覇道(패도)의 구호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반해 반둥 회의는 일찍이 和而不同(화이부동)으로 구현되는 대동 세계를 염원함으로써 당대의 G2(미국, 소련)는 물론이요 장래의 대국(중국, 인도, 인도네시아 등)마저 규율하는 선견지명을 발휘했던 것이다. 위대한 유산이다.

2055년, 반둥 회의 100주년을 상상해 본다. AA의 주요 국가들도 건국 100주년을 통과했을 시점이다. 무릇 창업 이래 삼대(三代)는 지나야 새 국가의 전성기가 열린다. 그때 인도네시아는 중국과 인도를 잇는 아시아의 대국으로, 21세기 판 'G7'이 되어있을 공산이 크다. 세계 4대 인구 대국이자, 세계 3대 민주 국가이며, 세계 최대의 이슬람 국가이고, 아세안의 대표 국가이다. 무엇보다 '반둥'이라고 하는 시대정신과 상징 자본을 담지하고 있는 소프트파워 강국이다. '적도의 대국', 인도네시아의 향로를 조망해 볼 필요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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