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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조카 기다리며 1년…"사고 전날 통화 생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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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조카 기다리며 1년…"사고 전날 통화 생생"

[세월호 1주기] ③ 5살 지연이 삼촌 권오복 씨, 가족 아니란 이유로 지원 전무

제주를 향하던 여객선이 침몰해 300여명의 인명피해를 낸 세월호 참사가 오는 16일이면 1주기를 맞는다. 정부와 국회는 참사 이후 국가안전처를 신설하고 특별위원회를 설치해 각종 안전대책을 쏟아냈다. 정부는 안전사고 예방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지만 일반 국민들이 느끼는 안전체감도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세월호 유족들은 침몰사고 원인규명과 조속한 인양을 위한 정부의 전향적 자세를 요구하고 있다. 1년전 단원고 학생들이 당도하고자 했던 곳은 제주였다. <제주의소리>는 세월호 1주기를 맞아 여객선 안전운항을 점검하고 진도 팽목항을 찾아 유족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봤다. 편집자주.

글 싣는 순서
'세월호 참사1년' 제주서 여객선 직접 타보니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진도 팽목항의 눈물
③ "전날까지 통화했는데"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

▲ 지난 10일 진도 팽목항 방파제에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9명의 사진이 걸렸다. 이삿짐을 싣고 세월호에 올라 제주로 향하던 권재근씨와 아들 혁규 군의 사진이 애처로워 보인다. ⓒ제주의소리(김정호)
2014년 4월16일 오전 8시48분 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병풍도 북쪽 20km 해상에서 6586t의 세월호가 기울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바닷물이 덮쳤고 객실은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한윤지(당시 29세)씨와 아들 권혁규(6세)군은 딸이자 막내동생인 지연(5세)양을 살리기 위해 구명조끼를 입히고 등을 떠밀었다.

배는 더 기울었고 권양은 세월호 4층 자판기에 몸이 끼인 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렀다. 한 남성 승객이 가까스로 권양을 갑판 위에 다시 올려놓았다.

그 시각 현장에 도착한 해경은 승객들을 구조하기 시작했다. 해경 보트에 몸을 싣던 안산 단원고 박모(당시 17세)군은 물에 흠뻑 젖은채 갑판에서 울고 있는 권양을 목격했다.

박군은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무조건 어린이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난간에서 버티다 겨우 지연양을 가슴에 품은 박군은 그때서야 해경 보트로 몸을 내던졌다.

5살의 어린나이에 생사를 넘나든 지연양. 그날의 아픔을 가슴에 품고 1년째 울고 있는 이가 있다. 동생과 제수, 그리고 조카까지 마음 속에 담고 사는 권오복(61)씨 이야기다.

세월호 1주기를 앞둔 지난 10일 진도 팽목항에서 권씨와 만났다. 허름한 컨테이너 숙소 안에서 만난 권씨는 매우 수척한 모습이었다. 문 입구에는 약 봉지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 이삿짐을 싣고 세월호에 올라 제주로 향하던 일가족 중 딸 지연양만 구조됐다. 삼촌 권오복씨는 1년째 진도에 머물며 동생과 조카가 돌아오기 만을 기다리고 있다. ⓒ제주의소리(김정호)

권씨는 세월호 침몰후 진도체육관에서 7개월간 뜬눈으로 지냈다. 유가족들이 철수하자 권씨는 지난해 11월20일 팽목항으로 거처를 옮겼다. 개인적 용무로는 팽목항을 벗어난 적이 없다.


세월호 사고로 권씨는 동생 권재근(당시 51세)씨와 제수 한윤지씨, 조카 혁규군을 잃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지연 양은 현재 작은 고모인 권씨의 막내 여동생과 지내고 있다.

한윤지씨는 지연양이 구조된지 일주일만인 2014년 4월23일 세월호 선체 내부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다행히 시신을 수습했지만 권 씨 동생과 조카 혁규군은 아직도 실종상태다.

이들은 귀농의 꿈을 품고 제주에서 인생 2막을 시작하려던 참이었다. 재근씨는 2002년부터 6년간 제주에서 감귤농사를 짓다 베트남 출신인 윤지씨를 만나 서울로 거처를 옮겼다.

도시생활을 이어갔지만 꿈은 제주였다. 악착같이 일을 하며 돈을 모았다. 어려운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제주에서 감귤농사를 짓기 위해 차근차근 땅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제주에 있는 지인의 도움을 얻어 제주시 한림읍 한 마을에 집을 마련했다. 그해 3월 주소지를 옮기고 1톤 트럭에 이삿짐도 챙겼다. 2014년 4월14일은 제주로 향하기로 한 날이었다.

그 때, 서울 전셋집 처리에 문제가 생겼다. 재근씨 부부는 일정을 하루 늦춰 15일 저녁 세월호에 몸을 실었다. 이튿날 오전 제주로 향하던 세월호는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권오복씨는 세월호 침몰 전날 동생 재근씨와 전화로 나눴던 대화내용을 아직도 생생하게 떠올리고 있었다.

▲ 진도 팽목항에는 아직까지 돌아오지 못한 실종자를 기다리는 유가족들이 있다. 권오복씨는 세월호 침몰사고 이후 줄곧 진도를 지키고 있다. ⓒ제주의소리(김정호)

"동생이 배를 타던 15일 아침에 전화가 왔어. 귀농하기 전에 점심이나 먹자는 얘기였지. 그날 오후 다시 전화가 와서는 시간이 안된다고 하더라고. 여름휴가 때 내려오면 보자고…."


당시 재근씨는 전주를 거쳐 완도에서 배를 타고 제주도로 간다고 말했다. 권오복씨가 세월호 침몰사고를 뉴스로 접하면서도 동생 생각을 쉽게 떠올리지 못한 것도 이 때문이다.

"15일 저녁에 통화 하는데 안개로 배가 천천히 간다고 하더라구. '먼저 제주에 가서 자리를 잡아라. 나도 도시생활이 싫다. 몇 년안에 귀농하겠다'고 말했어. 난 완도배를 탄줄 알았지."

TV에서 구조된 지연양이 나올때도 미처 조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잠시후 누님의 아들이 다급하게 전화를 걸어왔다. 재근씨 부부가 인천항에서 배를 탔다는 내용이었다.

"오후 1시에 목포 한국병원에서 지연양의 보호자가 안 나타난다고 하더라고. 머리가 핑 돌았지. 가족들이 부랴부랴 모여서 차 한대로 내달렸지. 그후로 1년째 진도에 머무르고 있어."

생업까지 포기하며 진도 팽목항에서 동생과 조카를 기다리고 있지만 희생자와 1촌이 아니라는 이유로 생계지원을 단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정부는 이를 뒤늦게 파악하고 부랴부랴 친족에게도 지원이 이뤄지도록 후속절차를 밟고 있다. 실종자의 경우 1년이 지나 가(假)사망 처리후 추가로 가정법원에서 판결을 받아야 한다.

"형제들이 모든걸 포기하고 세월호에 매달렸는데 정부의 공식적인 지원은 없었어. 정부가 적극적으로 인양한다는 것도 선거용으로 밖에 들리지 않아. 인양을 못박아야 돼. 이제는…."

▲ 권재근씨 가족이 제2의 인생을 계획한 제주시 한림읍 한 마을의 집. 권씨 가족은 짐을 이 집으로 일부 내려보내고 서울에서 감귤농사에 필요한 더블캡 트럭을 구입해 마지막 짐을 싣고 제주로 향하기 위해 2014년 4월15일 저녁 세월호에 몸을 실었다. ⓒ제주의소리(김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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