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이란 핵협상이 잠정 타결되면서 미국과 이란은 관계 정상화에 한 발 더 다가서게 됐습니다. 이로써 2009년 오바마 정부 출범 당시 미국과 미수교국이었던 미얀마, 북한, 이란, 쿠바 네 나라 중 북한을 제외한 세 나라가 미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했거나(2012년 미얀마), 관계정상화의 과정에 들어섰습니다. 쿠바의 경우 지난해 말 수교 협상을 시작했습니다.
미국과 북한이 70년 가까이 적대 상태에 있다는 것은 단지 두 나라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한반도가 속해 있는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에 매우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인입니다. 북한의 핵 및 미사일 위협을 빌미로 미국이 한미일 삼각 군사동맹의 결성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논란이 되고 있는 종말단계고고도미사일(사드: THAAD)의 남한 도입은 삼각 군사동맹 구축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나아가 사드 도입이 현실화된다면 중국의 반발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고, 한중 관계는 물론 미중 관계도 악화될 것이 분명합니다. 안보는 미국에, 경제는 중국으로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한국으로서는 진퇴양난의 곤경에 빠져 있는 셈입니다. 지금 한국 외교는 중대한 시련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위기 상황에 대한 외교 당국자의 현실 인식은 한심하다 못해 넋이 빠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한국 외교의 사령탑인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지난 3월 30일 재외공관장회의 개회사에서 미국의 사드 도입 요구와 중국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참가 요구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곤경에 처한 한국의 외교 상황을 미국과 중국으로부터 "러브콜을 받는 축복"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나아가 박근혜 정부의 외교는 "고래를 길들인 새우"라고 자화자찬 했습니다. 현재 한국의 외교 현실은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의 형국인데 외교 책임자의 인식은 정반대인 것입니다. 한마디로 '거대한 착각'에 빠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외교 관료들뿐만 아니라 여야의 주요 정치지도자들도 한국의 안보외교 상황이 엄중하다는 현실을 모르거나, 아니면 외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란 핵협상 타결과 북핵 문제
지난 2일 잠정 타결된 이란 핵협상의 골자는 이란의 핵개발을 평화적 목적에 맞춰 현 수준에서 크게 감축하는 대가로 미국 등 서방의 경제제재를 푼다는 것입니다. 최종 타결 시한은 오는 6월말이며, 공화당 등 미 국내 강경파와 이스라엘 등 중동지역 동맹국의 강력한 반대라는 변수가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오바마 대통령이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를 자청해 이번 협상을 이란 핵무기 개발을 저지할 수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라고 강조하는 등 강력한 의지를 보이고 있어 최종 타결의 가능성은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란 핵협상이 타결되자 국내에서는 당연히 '그럼 북핵은?'이라는 질문이 제기됐습니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미국이 북핵 협상에 나설 가능성은 높지 않다고 말합니다.
한동대학교 김준형 교수는 "오바마 정부의 대북정책이 '전략적 인내'와 '적대적 무시'를 넘어서, 미·일 동맹 강화와 지역 MD(Missile Defense)를 구축하는 것에 북핵을 활용하는, 이른바 '전략적 활용'단계로 넘어간 것 아닌가 싶다"라고 진단했습니다.
세종연구소 백학순 수석연구위원 역시 "(북핵 문제에) 미국과 중국이라는, 강대국 정치가 결합됐다"면서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이 증가되는 것이 미국의 대(對)중국, 대(對)러시아 전략에서 수단적인 측면의 가치를 갖게 됐다"고 분석했습니다. 북한 핵 능력의 증대가 미국의 대중, 대러시아 봉쇄정책의 빌미가 되고 있다는 것이죠. <프레시안>의 다음 기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미국이 이란 핵협상에 적극 나선 이유
미국 정부는 이란 핵협상을 '핵무기 확산 저지'라는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지만, 이는 진실의 일면에 불과합니다. 핵협상 타결을 통해 오바마 정부가 내심 원하는 것은 이슬람국가(IS) 격퇴를 비롯해 시리아 내전, 예멘 내전 등 중동의 산적한 갈등을 푸는 데 이란의 협력을 얻는 것입니다. 여러 번 말씀드린 대로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아랍의 군사적 맹주였던 후세인 정권이 몰락한 반면 이라크에 시아파 정권이 들어서면서 이란의 중동 지역 내 영향력이 크게 확대됐기 때문입니다.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 레바논의 헤즈볼라,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그리고 예멘의 후티 반군 등도 이란의 동맹세력입니다.
'핵무기 확산 저지'라는 미국 정부의 공식 목표는 사실 대단히 위선적인 것입니다. 우선 2백기 정도의 핵무기를 보유한 것으로 알려진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아무런 문제제기를 하지 않고 않습니다. 파키스탄의 핵무기 개발도 아프간전쟁 등의 핵심 동맹국이라는 이유로 묵인해 주었습니다. 인도의 핵무기 보유도 중국 견제를 위해 용인했습니다. 반면 핵무기가 없었던 이라크 후세인 정권, 그리고 핵무기 개발을 포기한 리비아 가다피 정권을 무자비하게 제거했습니다. '핵무기 확산 저지'는 미국 외교의 최우선 과제가 아닙니다. 만일 그렇다면, 핵 보유를 선언한 북한과 어떤 식으로든 협상에 나서는 것이 맞습니다. 미국이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나름대로의 세계전략이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 외교의 최대 목표는 유라시아 대륙에 패권국가, 또는 긴밀한 정치경제공동체가 형성되는 것을 저지하는 것입니다. 이는 지정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영국의 헬포드 존 맥킨더가 내세운 명제, 즉 "유라시아대륙의 심장부(하트랜드)를 지배하는 국가가 세계의 자원과 국민을 지배하게 된다"에 따른 것으로 20세기초 이래 세계의 패권국가였던 영국과 미국이 확고하게 지켜온 대외정책의 원칙입니다. 이 원칙은 '분할 지배(divide and rule)'에 의해 집행됩니다. 유라시아 국가들이 하나로 뭉치는 것을 저지하는 것입니다. 우크라이나 사태는 바로 이런 목적을 위해 미국이 초래한 것입니다. 유럽의 기술과 러시아의 자원이 결합해 평화로운 경제공동체가 탄생하는 것을 한사코 막겠다는 것이죠.
동아시아에서는 엄청난 경제강국으로 떠오른 중국이 지역 패권 국가가 되는 것을 막으려 합니다. 2012년 독재국가 미얀마와 수교한 것은 중국 포위 전략의 일환입니다. 일본과의 군사협력을 심화하는 것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경제력이 바닥 난 미국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강화된 미일 군사동맹에 한국이 참여할 것을 강요하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지난 2009년 시작된 오바마 정부의 '아시아로의 회귀(Pivot to Asia)' 전략의 핵심은 바로 이것입니다.
미국은 자신의 세계전략을 위해 화전(和戰) 양면 전술을 구사합니다. 쿠바와의 수교 협상은 과거 자신의 뒷마당이었던 중남미에서의 고립을 탈피하고 이 지역에서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한 고육지책입니다. 중남미에는 미국에 군사적 위협이 되는 나라가 없기에 이런 평화전술이 가능합니다. 1970년대 이후 자신의 주도로 전쟁의 도가니가 됐던 중동지역에서는 이란과의 화해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이란의 협력을 얻어 중동지역을 안정시키겠다는 것이죠. 물론 복잡다기한 중동의 온갖 문제들이 미국과 이란의 협력만으로 해결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오바마 정부는 이란을 우군으로 만들어 중동지역의 안정을 꾀하는 한편 미국의 군사력과 외교력을 대중국, 대러시아 봉쇄에 동원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동북아 역사에서 배워야 할 것
한미일 삼각군사동맹에 참여하라는 미국의 요구는 갈수록 노골화되고 있습니다. 취임 후 첫 동아시아 순방길에 오른 애슈턴 카터 미 국방부 장관은 8일 <요미우리신문> 인터뷰에서 "(한-일 간) 협력에 의한 잠재적 이익이 과거의 긴장이나 지금의 정치보다 중요하다"면서 한국을 압박했습니다. '과거사 문제 따위'는 잊어버리고 한미일 군사동맹에 본격 참여하라는 것이죠.
현재 미국의 압박은 5.16 군사쿠데타 직후 케네디 정부의 한일 국교 정상화 압력을 떠올리게 합니다. 당시 케네디 정부는 중국 공산정권의 팽창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박정희 정부에 대해 한일 국교 정상화를 압박했습니다. 그 결과 한국은 식민지 지배의 원천적 불법성을 비롯해 독도 문제, 징병징용 문제, 위안부 문제 등 과거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채 굴욕적인 국교정상화를 했습니다. 철저하지 못했던 과거사 처리가 오늘날 한일 관계의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
또한 한국은 1965년부터 베트남전에 전투병력을 보내 약 5천명의 희생자를 냈고, 베트남 양민 약 5천명이 학살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베트남전쟁이 강대국 미국의 일방적이고 비도덕적인 무력 개입이란 사실은 전 세계의 상식입니다. 그러나 최근 베트남전 당시 어린이였던 희생자들의 한국 방문에 대한 베트남전 참전 병사들의 거센 반응에서 드러난 것처럼, 이제 우리는 가해자의 편에서 또 다른 역사전쟁을 겪고 있습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굴욕적 한일 국교정상화와 베트남전 참전이 말해주는 것은 미국의 요구에 일방적으로 순응하는 것이 한국의 국익에 반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실제로 미국은 19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받는 대신) 일본의 한국 지배를 용인했고, 해방 후에는 친일 관리와 경찰들을 그대로 등용해 친일 세력의 발호를 도왔습니다. 또한 20세기 전반 내내 일본과 함께 중국에 대한 경제적 착취에 동참했습니다.
또 하나, 남북 관계가 미중 관계에 미치는 영향에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는 6.25전쟁을 남과 북 사이의 전쟁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미국과 중국의 군사대결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북한 대 남한의 전쟁이었으나 한 달도 안 돼 북한 대 미국의 전쟁으로(1950년 7월 남한의 작전지휘권 이양), 1950년 10월 중공의 참전 이후에는 미국과 중국이 전쟁의 주역이 됐습니다. 나아가 6.25전쟁은 미국의 군사주의화(미 국방비의 3배 이상 증액을 요구한 국가안보회의 비밀문서 NSC-68이 1950년 4월에 작성됐고 이후 6.25가 터지면서 이 요구가 정당화됐음), 그리고 20년 이상 계속된 미중 극한 대립의 결정적 빌미가 됐습니다. 이후 미국은 베트남전쟁 패배의 충격을 벗어나기 위해 역사적인 미중 화해에 나섰지만, 중요한 것은 남북 관계가 미중 관계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점입니다.
평화의 전령이 될 것인가, 전쟁의 하수인이 될 것인가
남북 관계가 미중 관계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점은 현재에도 유효합니다. 바로 미국이 북한 핵 및 미사일 위협을 빌미로, 실상은 중국을 겨냥한 군비 강화 및 군사동맹 강화를 밀어붙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북 관계가 개선되고 북핵 문제가 해결돼야 미중 화해의 길이 열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남북 관계는 얼어붙을 대로 얼어붙어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6자 회담은 2007년 이후 9년째 열리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남북 관계가 개선되지 않으면 북핵 문제 해결도,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도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남북 관계 개선을 위한 출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한반도의 진로에 방향타를 쥔 정치지도자들이 현 상황을 모르거나, 아니면 외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는 김준형 교수의 지적대로 국내정치적 목적을 위해 대외정책을 희생시켰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 최근에는 국내정치변수가 국제정치 및 대외정책에 더 큰 영향을 끼친다. 이는 동북아 역내 6개국들도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 이를 감안하더라도 한국은 그 정도가 매우 심하다. 발칸반도와 함께 지정학적 저주라 불리고, 분단 현실 속에서 결코 바람직하지 않음에도, 한국의 경우에는 단순히 국내 정치가 대외정책에 영향을 끼치는 정도를 넘어 국익보다는 국내 정치권력의 필요를 위해 이용한다."
김 교수는 이어 "우리는 '중재자'의 역할을 마다하고 '방화자'의 역할만 하고 있다. 우리 미래의 기회가 될 수 있는 새로운 유라시아시대의 '허브'는커녕 스스로 고립을 자처하는 '섬'이 되는 외교"를 펼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앞에 말한 윤병세 장관의 '넋 빠진' 발언 외에도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의 '사드 도입 적극 추진',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의 '천안함 폭침 북한 소행' 발언 등은 다분히 국내정치용이라는 혐의가 짙습니다. 유승민 원내대표는 '국민의 안전'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한국의 첨단무기 도입은 동북아 군비경쟁을 격화시킬 뿐입니다. 김대중 정부 때 미사일방어체계(MD) 도입을 권하는 미국에 대해 "남북관계를 개선해 MD가 필요하지 않도록 만들겠다"는 천용택 당시 국방장관의 대답이 올바른 해법입니다. 한편 문 대표의 천안함 발언은 '종북 숙주' '친북 정당'이라는 항간의 비판을 잠재우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이 많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진실 여부에 논란이 많은 천안함 침몰에 대해 이렇게 단정적으로 결론내리는 것은 위험합니다. 남북 관계에도 이롭지 않습니다.
현재 대부분의 여야 정치인들은 남북 관계나 안보, 대외정책 등에는 별 관심이 없는 듯 보입니다. '안보는 미국에 맡기고, 경제에만 신경 쓰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집권을 위해서는 경제가 승부처라는 것이죠. 많은 국민들도 그리 생각하는 듯합니다. 경제나 민생,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남북 관계나 안보의 문제는 경제, 민생과는 차원이 다르게 중요한 문제입니다. 경제는 더 잘 사느냐 덜 잘 사느냐의 문제이지만, 안보는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한반도는 물론 동북아의 평화와 안정에 중대한 변화가 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에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는 정치인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거대한 착각' 속에 빠진 한국 외교, 문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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