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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인 줄 알면서 영원처럼

5월 섬학교는 ‘신들의 정원’ 홍도

5월 섬학교(교장 강제윤. 시인·섬여행가)는 신안의 홍도입니다. 섬학교 정기 답사는 매월 첫 주말이지만 본격적인 행락철에 연휴인 관계로 붐비는 날을 피해 5월 3(일)∼4(월)일까지 양일간 1박2일 여정으로 잡았습니다.

홍도의 명성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드물 것입니다. 명성 그대롭니다. 명불허전이지요. 홍도는 한국의 계림이고 한국의 하롱베이입니다. 홍도 주변을 수놓은 기암괴석들은 마치 신들의 정원처럼 신비롭습니다. 270여 종의 상록수와 170여 종의 동물들이 살아가는 홍도는 섬 전체가 천연기념물입니다. 한마디로 보물섬이지요.

석양녘이면 섬의 절벽은 홍의를 입은 것처럼 붉게 물듭니다. 그래서 옛날에는 홍의도라 했었고 지금은 또 홍도입니다. 홍도의 주산 깃대봉에 이르는 아름다운 숲터널 길과 깃대봉 산정에서 펼쳐지는 다도해 풍광은 선경을 방불케 하지만 유람선을 타고 돌아보는 풍경이야말로 홍도 여행의 백미입니다. 남문바위, 시루떡바위, 독립문바위, 병풍바위, 만물상, 슬픈여, 일곱남매바위 등 기암괴석마다 깃들어 있는 이야기를 듣다보면 홍도 여행은 그야말로 전설적 여행이 될 것입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큰 바다 한가운데 있어 홍도의 하늘과 바다는 청보석처럼 푸르다. ⓒ섬학교

섬학교 제38강은 2015년 5월 3(일)∼4(월)일, 1박2일로 가히 ‘신들의 정원’이라 할 홍도를 찾아갑니다. 강제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5월 답사지인 홍도에 대해서 들어봅니다.

관광업에 기대 사는 섬

큰 바다로 나오자 쾌속의 여객선이 가뭇없이 흔들린다. 새벽잠을 설치고 승선한 여객들. 여객들 대다수는 잠에 빠졌다. 잠보다 좋은 멀미약은 없다. 1970년대 이후 홍도는 주민 대다수가 관광업에 기대고 산다. 주민 400여명이 사는 작은 섬에 봄,가을 행락철 주말이나 여름 휴가철이면 하루 1,000명이 넘는 외지인이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룬다. 하지만 이때만 피하면 한가로운 홍도를 만끽할 수 있다. 그래서 유명 관광지인 섬들은 성수기를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홍도에는 1구와 2구 두 개의 마을이 있다. 관광업의 중심은 1구. 여객선이 닿지 않는 2구 마을은 관광업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2구 마을 주민들은 어로를 해서 1구의 횟집에 물고기를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 소득이 높은 1구 마을 주민들이라 해서 애환이 없지 않다. 아이들 교육을 위해 가족들은 일찍부터 이산의 아픔을 겪는다. 아이들이 많은 집은 광주로 서울로 세 집, 네 집 살림까지 감수한다. 흐르는 계곡물이 없어 오랜 세월 빗물과 지하수 관정에만 의존했던 홍도는 만성적인 물 부족에 시달렸었다. 하지만 근자에 해수담수화 시설이 완공되면서 홍도의 물 문제도 해결 됐다.

▲기암괴석으로 유명한 홍도는 최고의 동백섬이기도 하다. ⓒ섬학교

스님바위인 동시에 마리아바위인 무인도


홍도를 찾는 여행객들은 대부분 관광 유람선을 탄다. 홍도의 기암괴석이 연출하는 극상의 풍경에 이르는 길은 오로지 유람선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홍도는 섬 자체가 문화재다. 천연기념물 170호. 이즈음 홍도의 산비탈은 온통 원추리 꽃 천지다. 물속은 맑고 투명해 10미터 깊이까지 환히 들여다보인다. 여행객들에게는 풍경일 뿐인 선창가 부근 바다가 아이들에게는 물놀이 천국이다. 다이빙 시합을 하며 아이들 셋이 일시에 바다로 풍덩 뛰어든다.

유람선은 느리게 섬을 돌며 관광객들에게 사진 찍을 시간을 배려해 준다. 유람선 선실에는 무선인터넷까지 설치되어 있다. 유람선 선장은 방송을 통해 여행객들의 안전을 당부한다.

“잘 보씨오. 가족 관광 왔으께 갈 때까지 조심, 조심, 조심이요. 그리고들 절대 바다에 쓰레기 버리지 마씨요잉. 자연은 우리 것이 아니고 우리 후손들 것을 빌려 쓰는 것잉께.”

거문도 백도와 백령도 두무진 해상처럼 홍도 바다에는 기이한 형상의 바위와 동굴들이 즐비하다. 풍경은 감탄을 자아내기 충분하다. 하지만 여독에 지친 유람선 승객들 절반은 의자에 기대 잠을 자거나 졸다 깨다 유람을 반복한다. 유람선이 주전자바위 부근을 지나자 늙은 관광 안내원이 사진 찍을 준비를 하라고 일러준다. 주전자는 손잡이가 없다. 안내원의 해석이 기발하다.

“왜 손잡이가 없냐. 있으면 육지 사람들이 들고 갈까봐 우리가 짤러 부렀소.”

홍도의 바위들도 저마다 신화와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홍도33경이 모두 신화의 무대이고 전설의 고향이다. 저 시루떡바위가 홍도13경이고 저 주전자바위는 14경이다. 두 바위는 곁에 있어서 같은 전설을 남겼다. 신들의 시대, 서해의 용왕이 충성스런 신하들을 위해 주연을 베풀었는데 그때 남은 시루떡과 술을 담았던 주전자가 굳어져 시루떡바위와 주전자바위가 됐다. 친절한 용왕이 있어서 섬사람들을 지켜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전설을 잉태했을 것이다. 시루떡과 술주전자는 바다의 수호신 용왕이 있다는 명확한 증거가 아닌가! 증거가 있으니 섬사람들의 해신에 대한 믿음은 깊어지지 않을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홍도18경, 부처님바위 앞을 지나는데 마이크를 든 늙은 안내원이 또 한마디 툭 던진다.

“쩌그 바위는 스님이고 마리아바위요. 알아서들 자기 신앙으로 보씨오.”

안내원의 말씀은 종교의 본질을 파악한 선지식의 법어다. 같은 바위도 불자가 보면 부처님이고 가톨릭 신자가 보면 성모상이다. 홍도에 처음으로 사람이 들어와 살았던 대풍금 부근 해상. 어디선가 작은 어선 한 척이 유람선 곁으로 쏜살같이 달려와 밧줄을 던진다. 두 배는 하나로 엮였다. 순간 어선은 선상 횟집이 된다. 바다의 노점. 바다의 포장마차다. 선상 횟집의 일꾼은 넷. 아비와 아들들일까. 노인은 부지런히 배를 가르고 청년 하나는 포를 뜨고 또 한 청년은 회를 썰어 도시락에 담고 마지막 청년은 초장과 함께 회도시락을 판매한다.

유람선 선장은 흥겨운 음악을 틀어 판매를 돕는다. 졸거나 잠에 취해 있던 사람들까지 눈을 번쩍 뜨고 회를 사러 몰려든다. 도깨비시장 같은 선상 횟집의 도시락은 순식간에 동이 나고 어선은 멀어져 간다. 유람선은 홍도 1구 주민들이 공동 출자해서 만든 배다. 선상 횟집은 섬의 어선 15척이 순번을 정해서 돌아가며 판매에 나선 것이다. 어부들은 생선을 횟집에 넘기는 것보다 값을 더 받아서 좋고 유람객들은 싼 값에 싱싱한 회를 먹어서 좋다.

▲홍도는 작은 섬이지만 결코 작지 않다. 하나의 해상도시다. ⓒ섬학교

선상 횟집


이제 유람선 승객들은 더 이상 풍경에는 관심이 없다. 일행들끼리 모여 회를 안주 삼아 소주를 마시고 웃고 떠드느라 유람선은 어느새 활기를 되찾았다. 더 이상 졸거나 잠을 자는 사람도 없다. 늙은 안내원의 설명에도 무심하다. 유람선은 어느덧 해상관광의 끝자락에 도달했다. 유람선을 붙든 것은 슬픈여바위다. 일곱 개의 크고 작은 바위섬이 나란하다. 자연은 저토록 아름다운 풍경으로 서 있지만 사람은 거기서 자신의 슬픔을 읽는다.

또 얼마나 오랜 날들의 저편일까. 홍도에 7남매와 함께 행복한 삶을 누리던 부부가 있었다. 설이 다가올 무렵 부부는 차례 음식과 아이들의 설빔을 사기위해 뭍으로 떠났다. 7남매는 날마다 산에 올라 부모의 무사귀환을 기원했다. 어느 날 우후 수평선 너머로 부모가 탄 범선이 모습을 드러냈다. 7남매는 기뻐하며 부모를 마중나갔다. 그런데 갑자기 돌풍이 일어나 부모가 탄 배를 삼켜버렸다. 7남매는 슬픔에 빠져 애타게 부모를 부르며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 아이들은 모두 바위가 되었다. 비통한 슬픔으로 빚어진 슬픈여바위.

어찌 저 바위의 전설이 다만 전설일까. 부부는 해산물을 싣고 목포나 영암으로 나갔을 것이다. 과거 돛단배로 육지에 나다니던 시절 홍도에서 육지까지 오가는 데는 보름 이상이 걸렸다. 날씨가 사나우면 더러 한 달이 넘게 걸리기도 했다. 육지에 다녀오는 한 번의 항해에도 목숨을 걸어야 했었다. 그 시절 이 멀고 외딴 섬 거친 바다에서 풍랑에 휩쓸려가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한 둘일까. 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건너온 섬에서도 삶은 늘 위태로웠다. 그래도 결코 벗어날 수 없었던 생사의 바다. 섬사람들에게 바다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칠성판이기도 했다. 그토록 모진 세월을 살아낸 사람들의 후예들이니 홍도 사람들은 누구보다 강인하다.

마침내 짧은 유람의 시간이 끝나간다. 잔잔하던 바다에 물결이 일렁이고 먹구름이 몰려온다. 나는 이 순간이 영원같다. 순간이면서 영원인 삶. 삶은 무한하지 않으나 유한하지도 않다. 삶은 순간이 곧 영원이다. 영원은 순간을 통해서만 그 실체를 드러낸다. 우리는 순간을 살지만 순간이 아니다. 영원을 사는 것이다. 그래서 순간인줄 알면서도 영원처럼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삶이다. 티끌 같은 시간, 티끌 같은 삶이 덧없으나 더없이 소중한 것은 그 때문이다. 유람선이 홍도 포구로 입항한다. 이제 돌아갈 때가 온 것이다.

▲홍도의 기암괴석은 마치 신들의 정원처럼 기기묘묘하다. ⓒ섬학교

섬학교 2015년 5월 홍도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배시간의 변경으로 일부 조절될 수 있습니다).

<5월 3일(일요일)>

07:00 서울 출발(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섬 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37강 여는 모임
-목포 도착
-점심식사(남도식 바다장어탕)
-목포 출항
-홍도 도착
-깃대봉 걷기(4km)
홍도분교-제1전망대-제2전망대-숯가마터-깃대봉(2km)-(유턴)-홍도분교
-저녁식사 겸 뒤풀이(생선회와 매운탕)
-휴식 및 취침(다인실)

<5월 4일(월요일)>

06:00 기상, 아침산책(홍도 당숲 산책 권장)
-아침식사(미역국, 생선찜정식)
-유람선 해상관광(홍도33경 감상)
-홍도 출항
-목포 도착
-점심식사(서대탕정식)
-목포 어시장 장보기
-서울 향발. 제38강 마무리모임

▲섬학교 제38강 홍도 답사로 Ⓒ섬학교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등산복/배낭/등산화, 풀숲에선 긴 바지), 스틱, 무릎보호대, 식수, 윈드재킷, 우의(+접이식 우산),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 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멀미약,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승선용 신분증을 꼭 지참하세요(미지참시 승선할 수 없습니다).

섬학교 제38강 답사 참가비는 30만원입니다(왕복교통비, 선상관광비, 숙박비, 5회 식사와 뒤풀이, 강의비, 운영비 등 포함). 이 답사는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으며, 기상 악화로 섬 체류가 연장되는 경우 추가비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참가신청과 문의는 홈페이지 www.huschool.com 이메일 master@huschool.com 으로 해주십시오. 전화 문의(050-5609-5609)는 월∼금요일 09:00∼18:00시를 이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공휴일 제외). 회원 아니신 분은 회원 가입을 먼저 해주십시오(▶회원가입 바로가기). 섬학교 카페(http://cafe.naver.com/islandschool)에도 놀러오세요^^ 섬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섬 여행을 떠나기 전에 강제윤 교장선생님이 쓴, 다음의 섬 답사기를 참고하면 섬 여행의 의미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섬을 걷다>
http://www.yes24.com/24/goods/3261557?scode=032&OzSrank=1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http://www.yes24.com/24/goods/5185914?scode=032&OzSrank=1

▲영원은 순간을 통해서만 그 실체를 드러낸다. ⓒ섬학교

[학습자료]
[정숙숯가마터]
홍도는 섬이면서 그 자체로 하나의 산이기에 동백나무가 많다. 홍도의 깃대봉은 한국의 100대 명산으로 꼽힌다. 산은 가팔라 보이지만 오르막은 잠깐이다. 마을에서 1시간이면 산정에 이를 수 있다. 봄날 깃대봉 산정에 이르는 길은 그대로 동백터널이다. 동백의 화원, 동백의 전시장이다. 큰 바다 한가운데 있어 어느 섬보다 산자수명하다. 동백의 터널을 지나다보면 숯 가마터가 나온다. 정숙숯굴. 한때 정숙이란 사람이 운영하던 숯가마터다. 과거 섬에서는 수산물보다 나무가 더 큰 가치를 지녔다. 화석연료가 보급되기 전까지는 난방과 취사에 나무는 절대적인 연료였다. 섬사람들은 산판에서 땔감을 구했고 더러는 숯을 구워 팔아 식량과 소금 등 생필품을 사왔다. 홍도는 고대부터 서해 횡단항로의 중간 기착지였다. 그래서 홍도 숯가마의 역사는 천년을 훌쩍 넘는다. 신라와 당나라간의 무역선들도 홍도에 들러 연료용 숯을 샀다. 어선들도 취사용으로 숯을 사갔다. 일제강점기에는 참나무가 많은 홍도가 숯의 강제 공출에 시달렸다. 기차와 무기의 연료로 쓰기 위해서였다. 그때는 홍도에만 30곳이 넘는 숯가마가 있었다. 천년을 이어오던 숯가마의 역사는 석유와 연탄이 보급되기 시작한 1970년대 초에 끝이 났다. 숯가마가 있어도 이제 더 이상 숯을 만들 수는 없다. 한 그루의 나무도 베어내면 안 되는 천연기념물이고 국립공원이기 때문이다.

[홍도당숲] 홍도에는 깃대봉 말고도 또 하나 아름다운 숲이 있다. 홍도1구 죽항마을 당숲이다. 깃대봉 산행과 유람선을 타느라 바쁜 여행자들은 대부분 이 숲을 놓치기 쉽다. 당숲에는 제당과 신당이 있다. 천년을 이어온 당숲은 홍도 사람들의 성지다. 마을 공동체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며 제사를 모시던 당숲. 당숲에서는 3백년이 넘는 동백나무 고목들과 잣밤나무 등의 상록수가 신령스러운 기운을 뿜어낸다. 과거 홍도 사람들은 매년 정월 초사흘이면 당숲으로 와서 제를 올렸다. 위쪽의 동백나무 신목 아래서 산신제를 모시고 아래쪽의 잣밤나무 신목 아래서는 당할아버지 신에게 제를 올렸다. 늘 위태로운 멀고 큰 바다를 건너야 했으니 그 정성이 지극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천년을 넘게 이어오던 당제는 1970년대 초 미신타파를 내세우면 전통문화를 말살했던 새마을 운동 여파로 사라졌다. 신당도 허물어졌다가 2007년에 이르러서야 다시 복원됐다. 늦었지만 다행이다.

▲순간인 줄 알면서도 영원처럼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삶이다. ⓒ섬학교

[섬학교]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로 등단했습니다. 서남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뭍으로 이주해 살다 성인이 된 뒤 다시 고향 섬으로 돌아가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보길도 시절에는 보길도의 숲과 하천,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파괴하고 대형 댐을 건설하려는 토목세력에 맞서 33일간 단식으로 섬을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2005년 보길도를 떠난 뒤에는 한국의 모든 유인도(500여 개)를 걸어서 순례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6년째 섬들을 걷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200여 개의 섬을 걸었고 여전히 섬을 걷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섬을 걷다>, 한겨레에 <섬에서 만나다>를 연재했습니다. <섬택리지><걷고싶은 우리섬><어머니전>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자발적 가난의 행복>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섬학교를 열며>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다로부터 왔습니다. 지구 최초의 생명이 바다에서 잉태됐듯이 우리 또한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바다에서 생명활동을 시작합니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 바다를 보면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평온함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바다, 그래서 프랑스어 ‘어머니[mère]’에는 ‘바다[mer]’가 들어 있고 한자의 ‘바다[海]’에는 ‘어머니[母]’가 들어있습니다. 원초적 기억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기원을 암시해 줍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바다. 우리가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실상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런지요.

바다나 강, 호수 등의 물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를 섬이라 합니다. 한국에는 4,400여 개의 섬이 있습니다. 그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500여 개, 나머지는 무인도입니다. 한국은 ‘섬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섬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섬들이 소개되고 몇몇 섬들이 피서지나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섬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섬들은 척박함과 절해고도의 고독과 유배지, 그도 아니면 현실도피적인 낭만의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섬은 여전히 먼 곳으로만 느껴집니다. 수만 리 먼 나라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바로 우리 곁의 섬들을 멀게만 느끼는 것은 왜일까요. 단지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닙니다. 심리적 거리감이 더 큰 요인입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육지 중심의 사고에 기인한 바 큽니다. 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육지 사람들은 섬사람들을 ‘섬놈’이라 부르면서 멸시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조선왕조의 폐쇄적인 해양정책에 잇닿아 있습니다. 본래 우리의 인식은 육지 중심의 편협한 틀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옛날 이 땅의 사람들은 바다를 이용해 세계와 소통했습니다. 세계로 향하는 통로로 기능했던 바다가 단절의 바다로 전락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입니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을 추종해 적극적인 ‘공도(空島)’정책을 폈습니다. 섬과 바다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바다와 섬은 육지보다 더욱 활력 넘치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문명교류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되면서 바다와 섬은 점차 잊혀지고 버림받은 공간이 됐습니다.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이후에도 섬은 유배지로 이용되면서 고립이 심화됐습니다.

해양왕국이었던 백제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바다와 섬을 기반으로 세계와 소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976년 거문도의 장촌마을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외딴 섬처럼 보이는 거문도가 실상은 고대부터 국제해상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2000년에는 흑산도의 읍동마을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국제해양도시의 흔적들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고려시대 예성강 입구에 있던 벽란도는 개경에 출입하는 외국인들이 통관 절차를 밟던 국제무역항이었습니다.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는 바다와 섬을 통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까지 소통했습니다. 이 땅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언제나 그 중심에는 바다와 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이 좁은 것은 알면서도 우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 줄은 잘 모릅니다. 오랫동안 좁은 땅에 갇혀 살면서 몸도 마음도, 시야도 폐쇄적으로 변해버린 까닭입니다. 섬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넓은 바다의 주인공인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섬에서 바라보면 대륙 또한 바다에 둘려 쌓인 큰 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지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충분히 크고 드넓습니다. 섬은 한없이 넓은 바다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섬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개방성과 열린 사고를 되찾기 위한 최적의 사유공간입니다. 물론 섬은 숙명적으로 외롭습니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이나 슬픔마저도 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해학과 가락이 있습니다. 섬에서는 슬픔도 가락을 타면 흥이 됩니다.

오랜 세월 섬들은 제각각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 왔습니다. 곁에 있는 섬도 같은 섬은 없습니다. 하지만 외래문물의 유입으로 많은 섬들이 원형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멀지 않은 시간에 이 나라 많은 섬들이 사라질 것을 예감합니다. 이미 많은 섬들이 육지와 연결되었거나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리가 놓이면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끝내는 소멸해 버릴 섬들, 섬의 풍경들. 더 늦기 전에 섬으로 가야 할 이유입니다.

몇 년째 걷기 열풍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존재’[動物]인 사람이 걷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걷기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본능의 회복운동입니다. 걷기는 길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바 큽니다. 길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한자 ‘길道(도)’자는 辵(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신영복 선생님은 "辵(착)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수)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道)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한 길의 정신을 구현하기에 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섬은 어느 곳보다 걷기 좋은 공간입니다. 아직까지 ‘섬길’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많은 걷기 길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섬은 부러 돈 들여 걷기 길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섬들은 그 자체로 최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섬에서는 사람이 안심하고 걸으며 사유할 수 있습니다. 섬길을 걷는 일은 분명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 될 것입니다. 섬으로 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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