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안 곳곳에는 화산활동의 자취와 바위가 갈라져 부서지고 녹아내린 침식의 역사가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어 마치 제주도를 방불케 합니다. 소금이 깎고 모래가 키워낸 조각품 같은 섬이지요. 한때 핵폐기장 유치로 몸살을 앓았던 섬이기도 하고요. 굴업도에는 전 세계에 1만 마리 정도 남아 있는 멸종위기종 검은머리물떼새와 천연기념물인 매와 황새, 황구렁이, 먹구렁이가 서식하고 있습니다.
(미안합니다.굴업도 숙소 사정으로 참가자 30명으로 마감하겠습니다.▶참가신청 바로가기)
굴업도는 또한 아열대성 식물과 아한대성 식물이 공존하고 있는 특이한 식물군락을 갖고 있지요. 일제 때는 민어파시로 불야성을 이루었던 역사의 고장이기도 합니다. 이 작고 아름다운 섬에 대기업인 CJ가 골프장과 리조트를 건설하려고 대부분의 땅을 사들였습니다. 상위 1%만을 위해 섬이 사유화 되면 일반인들은 출입조차 불가능해집니다. 더 늦기 전에 굴업도에 가야 할 이유입니다. 가서 보고 반드시 지켜내야겠다는 마음을 굳혀야 할 생명의 섬이기도 하지요.
섬학교에서는 2013년에 굴업도 답사를 다녀온 바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함께 했던 여러분들이 또 가고 싶다는 요청을 해와 이번에 다시 답사를 떠나기로 했습니다. 이번 답사에는 굴업도 지킴이이자 음식맛이 뛰어나기로 소문이 자자한 서인수 전 이장님 댁에서 묵을 예정입니다. 굴업도의 숨겨진 이야기들을 들어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입니다.
섬 여행을 떠나기 전에 강제윤 교장선생님이 쓴, 다음의 섬 답사기를 참고하면 섬 여행의 의미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섬을 걷다> 바로가기
섬학교 제37강은 2015년 4월 4(토)∼5(일)일, 1박2일로 서해의 비경 굴업도를 찾아갑니다. 강제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4월 답사지인 굴업도에 대해서 들어봅니다.
자연의 찬미자 선장님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물의 세계이며 대륙은 모든 것을 둘러싸고 있는 바다 수면 위로 잠시 솟아 있는 땅덩어리에 불과하다.”(레이첼 카슨 <우리를 둘러싼 바다>)
덕적도에서 갈아탄 굴업도행 여객선이 굴업도를 코앞에 두고 우회합니다. 직진하지 못하는 것은 바닥에 모래톱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태 혹은 풀등이라고 부르는 긴 모래톱. 이 바다에는 아직도 풀등처럼 드러나는 모래톱만이 아니라 썰물에도 드러나지 않는 숨은 모래톱이 곳곳에 암초처럼 깔려 있습니다. 썰물 때인 지금 저 바다의 깊이가 3m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객선은 가까운 길을 눈앞에 두고 수심이 깊은 곳을 찾아 우회합니다.
바닷길에 위험한 곳은 깊은 바다가 아닙니다. 얕은 바다입니다. 암초와 모래톱은 작은 바람에도 큰 파도를 일으키고 잠시 방심한 틈을 타 배들을 파멸로 이끌곤 합니다. 여객선이 굴업도에 잠시 기항합니다. 여행객들 대부분은 굴업도에서 하선합니다. 이 여객선의 선장님은 바다와 섬과 자연의 찬미자입니다. 선장님은 섬에 내리는 여행객들에게 당부합니다.
“섬에 내리거든 한번 찬찬히 들여다보세요. 곳곳에 수만 년 동안 변하고 변한 모습, 바람이 파도가 안개가 소금기가 깎아놓은 조각품들이 즐비해요. 사람들은 자기들이 만든 것은 겨우 백 년 된 것도 문화재라고 귀하게 여기면서 수만 수억 년 동안 자연이 깎아 만든 조각품은 하찮게 여기거든. 개발 한다고 함부로 뭉개버리고.”
여전히 섬으로의 여행은 제약이 많습니다. 시간과 바닷길 모든 것이 맞아야 가능합니다. 조수간만의 차가 큰 서해 바다의 섬으로 가는 뱃길은 기복이 더욱 심합니다. 거의 매일 매일 시간이 다르지요. 그러므로 서해 섬으로 갈 때는 배 시간을 정확히 확인해야 합니다. 어설프게 알고 떠났다가는 낭패를 보기 일쑤지요. 덕적도 외곽의 섬으로 가는 뱃길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굴업도 부두를 벗어난 여객선은 다음 기항지 백아도를 향해 떠납니다. 나그네는 굴업도 뱃머리에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초입부터 섬의 황홀한 풍경에 넋을 놓고 만 것이지요.
멸종위기 동물들의 천국
인천시 옹진군 덕적면 굴업도(掘業島). 굴업도는 8천만~9천만 년 전 중생대 백악기 말 화산활동의 영향으로 생겨난 응회암 섬입니다. 화산 폭발 후 그 재가 날아와 쌓이고 쌓여서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해변에는 화산활동의 자취가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또 바위가 갈라져 부서지고 녹아내린 침식의 역사도 선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굴업도 해안은 그 자체로 생생한 지리 교과서입니다.
면적 1.71㎢, 해안선 길이 12㎞의 섬입니다. 인천에서 남서쪽으로 90㎞, 덕적도에서는 남서쪽으로 13㎞ 떨어져 있습니다. 주변의 문갑도와 백아도, 울도, 지도 등과 함께 덕적군도의 외곽 섬이다. 섬 전체가 해발 100m 이내의 구릉으로 이루어졌으며, 해안선의 굴곡이 심한 리아스식 지형입니다. 땅은 물이 잘 빠지는 세사토(細沙土)라 한때 땅콩 재배가 많았습니다.
굴업도는 큰 섬과 작은 섬 두 개가 장수리라는 모래밭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큰 섬에는 큰마을과 작은 마을이, 작은 섬에는 목금이 마을이 있었지만 30여 년 전쯤 목금이 마을과 작은 마을은 폐촌이 되어버리고 이제는 큰마을 하나만 남았습니다. 목금이 마을이 있던 작은 섬에는 덕물산(138m)과 연평산(128m)이 각각 덕적도와 연평도를 바라보고 서 있습니다. 지금도 두 섬을 연결하는 장수리 모래톱은 만조 때면 한두 시간씩 잠기곤 합니다.
썰물 때면 연결이 되는 굴업도 바로 앞의 작은 무인도 토끼섬은 문화재청이 “국내 어디서도 보기 힘든 해안지형의 백미”라고 평가했을 정도로 보존 가치가 높은 곳입니다. 토끼섬에는 또 전 세계에 1만 마리 정도만 남아 있는 멸종 위기종 검은머리물떼새와 천연기념물인 황새, 황구렁이, 먹구렁이가 서식하고 있습니다. 천연기념물 323호이자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 야생 동·식물 1급인 매도 매년 5~6월 번식기면 15마리 정도가 관찰되기도 합니다. 굴업도는 또한 아열대성 식물과 아한대성 식물이 공존하고 있는 특이한 식물군락을 갖고 있지요. 섬 전체가 천연기념물의 가치가 있는, 보존이 시급한 섬입니다.
한때 주민들이 토끼를 풀어 키워 토끼섬이라 이름 붙은 토끼섬은 20m 높이의 절벽에 3~5m 깊이로 우묵한 ‘터널’들이 파져 있습니다. 터널을 판 것은 굴삭기가 아닙니다. 염분입니다. 이 터널들을 ‘해식와(海蝕窪)’라 합니다. 한국 최대의 해식와입니다. 해식와는 노치(notch)라고도 하는데 오랜 시간에 걸쳐 바닷물에 섞인 염분이 바위를 녹임으로써 깊고 좁게 침식된 지형을 말합니다.
덕적도 인근 바다 수심은 평균 10~15m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굴업도 동쪽 바다로 가면 수심이 80~90m로 급격하게 깊어집니다. 이 바다에 거대한 해저 골짜기가 지나갑니다. 굴업도 바다에 골짜기가 생긴 것은 이 바다 밑으로 거대한 활성 단층들이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이 지역이 지진 위험지대라는 뜻이지요. 1994년 핵폐기장 후보지로 정했다가 정부가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중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여름철이면 바다 속의 골짜기에는 주변보다 찬 물이 흘러들어오는 통로가 됩니다. 찬 바닷물이 여름철의 더운 공기와 만나 짙은 안개를 발생시킵니다. 여름이면 이 바다에 짙은 안개가 자주 끼어 뱃길이 끊기곤 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이 안개의 염분이 바위에 스며들어 터널을 파낸 것이지요. 바위를 녹일 정도로 염분의 힘은 강합니다.
토끼섬뿐만 아니라 굴업도 해안은 곳곳이 절경입니다. 목기미 해변에는 코끼리바위 같은 기암괴석이 즐비하고 동쪽 해안은 염분에 바위가 부식돼 빵껍질처럼 부풀어 오르고 벌집처럼 구멍이 숭숭 뚫려 해안은 마치 거대한 조각공원 같습니다.
핵폐기장 유치 문제로 몸살을 앓았던 섬이 이제는 CJ라는 거대기업의 리조트로 전락할 처지에 놓여있습니다. CJ그룹이 출자한 회사가 이미 섬의 98%를 사들여 섬을 사유화하다시피 했지요. 거대 기업이 탐하는 이유는 그만큼 굴업도의 자연환경이 아름답다는 반증입니다. 지금은 잠정 보류됐지만 CJ는 굴업도의 상층부를 잘라내고 골프장까지 만들 계획이라 하니 참으로 어처구니없습니다.
문화재청은 2만5785㎡ 규모의 굴업도 토끼섬 일대 해식지형을 천연기념물로 지정 예고했지만 추가 행정절차가 이뤄지지 않아 결국 효력이 소멸되고 말았습니다. 옹진군과 일부 섬 주민들의 반대 때문입니다. 실상 옹진군의 반대는 섬이나 주민들보다 CJ를 위한 것으로 보입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되면 CJ가 굴업도에 추진 중인 골프장 등 관광단지 개발에 규제가 강화될 것을 우려한 때문입니다. 참으로 단견이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랜 옛날에는 굴업도가 구로읍도(鷗鷺泣島)로 불렸다고 합니다. 나라 잃은 고려의 유신들이 이 섬으로 도망가자 갈매기와 백로조차 울고 갔다는 전설에서 나온 지명이라는군요. 또
섬의 형태가 사람이 엎드려서 일하는 것처럼 생겼다 해서 굴업도란 이름을 얻었다고도 전해집니다. <대동여지도(大東與地圖)>와 <청구도(靑邱圖)> 등에 굴업도라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대동지지> 덕적도진조에는 “굴압도는 사야곶 서쪽에 있다”로 기록되어 있기도 합니다. 굽힐 굴(屈), 오리 압(鴨). 지형이 물 위에 구부리고 떠있는 오리의 모양과 비슷하다 하여 굴압도란 이름이 붙여졌다고도 합니다. 1910년경부터는 굴업도(屈業島)로, 1914년에는 팔 굴(掘)자와 일 업(業)자를 써서 굴업도(掘業島)가 됐습니다.
인천 지역의 문화예술단체와 종교단체가 중심이 되서 굴업도 보호운동이 활발합니다. 이들의 노력으로 CJ 골프장 건설 시도는 잠정 보류된 상태지만 언제 다시 시작될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또 건축가 김원 씨를 비롯한 문화예술계 인사 200여 명도 ‘굴업도를 사랑하는 문화예술인 모임’을 발족시켜 활동 중입니다. 건축가 승효상, 소설가 이호철, 화가 임옥상, 사진가 배병우·주명덕, 만화가 박재동·이현세, 무용가 홍신자, 연극인 손숙·박정자, 연출가 표재순, 출판인 이기웅(열화당)씨 등 문화계 주요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 모임의 주도로 ‘굴업도의 바람’이란 사진전이 열리기도 했습니다.
개머리, 폭풍의 언덕
굴업도 개머리 해안, 드넓은 초지는 오래 전 섬의 목장이었습니다. 소떼를 방목하던 초지가 지금은 염소와 사슴들의 터전입니다. 초원의 길을 따라 개머리 끝 절벽으로 갑니다. 인기척에 놀랐는지 풀숲 속에 숨어있던 사슴의 무리가 쏜살같이 달아납니다. 굴업도 전 이장님 집에서 키우던 사슴 한 쌍이 울타리를 탈출한 뒤 번식해서 지금은 대가족을 이루었습니다. 마른 억새가 무성한 풀밭 가운데 아기 염소 한 마리가 처참하게 죽어 있습니다. 아직 여물지 않은 어린 뼈 조각들이 뒹굴고 살점이 떨어져 나간 검은 가죽은 너덜너덜 합니다. 맹금류의 먹잇감이 된 아기염소. 황조롱이 한 마리가 상공을 선회하다 사라집니다. 필시 저 황조롱이의 짓일 겁니다. 섬은 매와 황조롱이, 검독수리, 말똥가리 등 멸종 위기종 맹금류의 서식처입니다.
사나운 날짐승의 한 끼 식량으로 바쳐진 어린 들짐승. 생(生)은 저토록 처참하고 잔혹하기만 합니다. 생은 누구의 편도 아닙니다. 어린 생명이라 해서 봐주는 법이 없습니다. 어쩌면 생이란, 맹수는 어리고 연한 고기를 더 즐기는지도 모릅니다. 한 목숨 죽어야 한 목숨 이어지는 생애의 벌판. 우리는 모두 남의 목숨으로 연명하는 생의 도축자들. 목숨이 주식인 생이여! 나는 육을 먹으나 내 몸을 이루는 것은 고기가 아닙니다. 내 몸은 영혼들의 집합소. 내 몸에 쌓인 영과 혼들. 헤아릴 수 없는 목숨들이 쌓여 한 목숨 이루었습니다. 굴업도 개머리 해안, 폭풍의 언덕에서 나는 내가 아닙니다. 어디에도 나는 없습니다. 나 아닌 것들이 모여 내가 되는 생이여. 목숨이여!
섬학교 2015년 4월 굴업도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배시간의 변경으로 일부 조절될 수 있습니다).
<4월 4일(토요일)>
07:00 서울 출발(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섬 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37강 여는 모임
-인천 연안부두 도착
-출항
-덕적도 도착
-굴업도행 여객선 출항
-굴업도 도착
-숙소 도착 및 점심식사
-굴업도 첫째날 걷기(약 6km)
큰마을→목기미해변→연평산→코끼리바위→큰마을→토끼섬→숙소
-저녁식사 겸 뒤풀이(생선회와 매운탕)
-자유시간 및 취침(다인실)
<4월 5일(일요일)>
07:00 기상, 산책
-아침식사
-개머리 초원 걷기(왕복 4km)
-굴업도 출항
-덕적도 도착
-점심식사(덕적도)
-덕적도 출항
-인천 도착
-인천어시장 장보기. 제37강 마무리모임. 서울 향발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등산복/배낭/등산화, 풀숲에선 긴 바지), 스틱, 무릎보호대, 식수, 윈드재킷, 우의(+접이식 우산),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 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멀미약,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승선용 신분증을 꼭 지참하세요(미지참시 승선할 수 없습니다).
섬학교 제37강 답사 참가비는 24만원입니다(왕복 교통비, 숙박비, 4회 식사와 뒤풀이, 강의비, 운영비 등 포함. 옹진군이 지원하는 배 운임 일부를 지원받은 금액입니다. 지원 예산이 소진되어 지원이 마감되면 추가로 3만원을 더 부담하셔야 하니 가실 분은 서둘러주시기 바랍니다). 이 답사는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으며, 기상 악화로 섬 체류가 연장되는 경우 추가비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참가신청과 문의는 홈페이지 www.huschool.com 이메일 master@huschool.com 으로 해주십시오. 전화 문의(050-5609-5609)는 월∼금요일 09:00∼18:00시를 이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공휴일 제외). 회원 아니신 분은 회원 가입을 먼저 해주십시오(▶회원가입 바로가기). 섬학교 카페(http://cafe.naver.com/islandschool)에도 놀러오세요^^ 섬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학습자료]
[굴업도 민어 파시]
“굴업도 앞 바다가 인천 항구 같았어”
1983년 국립중앙박물관 조사단의 패총 발견으로 굴업도에도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삼국시대, 고려시대에도 굴업도에는 사람이 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굴업도 역시 여말 선초의 공도정책으로 섬은 수백 년 동안 비어 있었습니다. 그러다 본격적으로 굴업도에 사람이 정착해 살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중반부터입니다. 당시 굴업도에 처음 들어간 이들은 덕적도의 벗개(서포리)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래 전부터 벗개 사람들은 어기가 되면 굴업도에 들어가 농막을 치고 어로활동을 하다 어기가 끝나면 철수하곤 했었다 합니다. 그러던 중 1890년경 장수성이란 벗개 사람이 처음 이주해 살기 시작하면서 사람살이가 본격화 됐습니다.
벗개 사람들이 정착하기 전에도 굴업도에 들어온 충청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해적들의 노략질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섬을 떠났습니다. 1864년(고종1년) 덕적진 첨사는 굴업도의 왜구 침탈 사건을 보고서로 남겼습니다.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굴업도에는 6가구가 살고 있었습니다. 주민들은 쌀과 비단, 삼베, 광목, 식기, 유리 항아리, 솜옷, 솥뚜껑까지 왜구들에게 강탈당했습니다. 8.15 해방 때도 굴업도에는 6가구가 살았습니다. 1952년에는 피난민의 유입으로 23가구까지 살았던 적도 있지만 현재는 10여 가구로 줄었습니다.
굴업도 바다는 연평도, 백령도, 팔미도, 남양만, 대청도, 초치도, 만도리 바다와 함께 인천의 대표적인 어장이었습니다. 그래서 덕적군도 최초의 어업 근거지가 굴업도였습니다. 1920년 전후 민어어장이 발견되면서 전국 각지에서 어선들이 몰려들었고 굴업도에도 파시가 섰습니다. 외지 상인들이 들어와 선구점과 술집을 열었습니다. 여름철 민어 파시 때면 사건 사고 처리를 위해 인천에서 순사가 파견되기도 했습니다. 박명숙(84세) 할머니는 13세 때 충청도 태안에서 이사와 내내 굴업도에서만 살았습니다. 어렸을 때 어른들에게서 민어파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때는 작사라 했어. 목금이 너머가 술집이 꽉 찼었어. 화류계라 했었대. 색시들이 많았데. 목금이 마을이나 물 닿는 장수리 위에도 술집들이 아주 꽉 찼었대.”
그때는 큰 마을 섬과 목금이 마을을 연결해 주는 모래톱인 장수리가 지금보다 높아 만조 때도 물이 넘나들지 못했다 합니다. 그 장수리에 파시가 섰습니다. 목금이 마을과 장수리, 작은 마을까지 임시 가옥이 들어섰고 색시 집도 문을 열었습니다. 비좁은 땅에 몇 천 명이 바글거렸습니다. 파시 때는 낙배라 부르던 민어 중선 배들이 많이 들어왔습니다. 돛이 세 개인 낙배는 노를 여섯 개 달고 다니며 연승 낚시로 민어를 잡았습니다.
“목금이 너머 바다에 민어잡이 배들이 까맣게 떴었대”
“목금이 너머 바다에 민어잡이 배들이 까맣게 떴었대. 인천 항구 같았다지.” 어선들이 들어오면 마을 여자들은 김치를 들고 나갔고 어선에서는 대야 가득 민어를 담아줬습니다. 주민들은 또 참외 같은 과일도 심어서 뱃사람들에게 팔았습니다. 파시 때 가장 많은 집은 술집과 요릿집이었습니다. 장사꾼들은 대부분 외지인들이었지요. 굴업도 주민 중에는 덕적도에서 건너와 살던 할머니 한 사람만 막걸리와 소주를 팔았다 합니다. 막걸리는 직접 담그고 소주는 덕적도에서 탄자(옹기)술을 사다가 팔았답니다.
파시 때는 크고 작은 사건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어느 해에는 색주가에서 술을 마시던 선원이 작부를 살해하기도 했습니다. 그 선원이 밤중에 도망을 가서 피 묻은 옷을 빨았던 웅덩이 부근 바위를 굴업도 사람들은 살인바위라 불렀습니다. 1923년 8월 15일자 <동아일보>는 당시 굴업도 민어 파시 소식을 전하는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동아일보 이길용 기자는 8월 19, 20일 두 번의 기사를 통해 당시 태풍으로 인한 참상을 보도했습니다. 이 기자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 주역이기도 합니다.
“작년부터 어장이 생김에 따라 사람들이 모여들어 제법 시가를 이루었다. 여름이면 사람들이 모여들어 영락하던 무인도에 수백 명의 번창한 어촌을 이룬다. 금년에도 인천서에서 주재소를 설치하고 의사도 출장하였다.”
(<동아일보> 1923년 8월 15일자 중에서)
당시 파시에는 조선인만이 아니라 일본, 중국 상인까지 참가했다고 기사는 전하고 있습니다. 1923년 파시에는 인천뿐만 아니라 충청도 서산, 보령, 전라도, 제주 등지에서 온 선박 3백여 척과 선원, 상인 등 2천여 명이 몰려들었습니다. 음식점, 색주가, 선구점 등만 130여 호에 500여 명이 종사했지요. 이때는 인천과 굴업도 간을 임시 왕래하는 발동선도 출항했습니다. 하지만 바로 다음날 <동아일보>는 굴업도에 일어난 참극을 전하고 있습니다. 번성하던 파시가 갑자기 밀어닥친 해일로 초토화된 것입니다.
“굴업도는 정거장이었어. 전국의 배들이 여기서 다 잡아갔지”
“어기 중 굴업도 전면 선박 파괴 200여 척”
<동아일보> 1923년 8월 16일자 기사의 제목입니다. 기사는 해일과 폭풍으로 130호의 가옥이 파괴되고 굴업도 항에 대피했던 100척과 항 밖에 있던 100척 등 모두 200여 척의 민어잡이 어선이 조난당했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바다는 잠잠했고 해일의 조짐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8월 12일 아침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전조라면 전조였을까요. 하루 밤낮을 꼬박 비가 쏟아지더니 8월 13일 아침, 바다는 갑자기 폭풍에 휩싸였습니다. 100여 척의 어선들은 거센 바람과 파도를 피해 굴업도 내항으로 피항했고 나머지 어선들은 항 밖에 닻을 내리고 폭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거센 바람은 그치지 않았고 곧이어 무서운 해일이 밀어닥쳤습니다. 해일은 순식간에 어선들을 뒤집고 휩쓸어버렸습니다. 무서운 해일이 꼭 일본이나 동남아 나라만의 일이 아닌 것이지요.
아비귀환. 내항, 외항 할 것 없이 굴업도는 아수라 지옥으로 변해버렸습니다. 당시 민어잡이 어선 한 척에는 보통 5~6명씩 승선했으니 해일은 200여 척의 배에 승선한 1,200여 선원들을 삼켜버린 것입니다. 파시촌을 형성했던 조선 가옥 120호와 일본사람 상점 6호, 중국사람 상점 2호도 “바람에 날려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취재를 위해 굴업도를 방문했던 <동아일보> 이길용 기자는 “인가는 바람에 날리고 어선은 파도에 잠겼고 사람은 용왕의 밥이 되었다”고 당시의 참상을 기록했습니다. 해일은 굴업도만이 아니라 평안북도 용천군에도 밀어닥쳐 1만 명의 이재민을 냈습니다.
1923년 8월의 해일 사고를 지금 굴업도 주민들은 ‘기미년(1919년) 윤칠월’ 태풍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주민들은 모두가 기미년 태풍 때 ‘장수리 파시촌’이 큰 피해를 입었다고 증언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1923년이라는 다수의 당시 신문 보도 기록들과는 어긋납니다. 아마도 잘못 전해진 집단 기억이 아닐까 싶습니다. 해일 이후 일제는 굴업도의 어업 근거지를 덕적도 북리로 옮기게 했습니다. 그러나 해일 사고 뒤에도 한동안 굴업도에서는 민어 파시가 계속됐던 듯합니다. 이는 주민들의 증언이나 당시 신문기사가 일치합니다.
1925년 6월 25일자 <동아일보> 기사는 굴업도 파시 기사를 전합니다. “3개월 동안 어부와 음식점, 웃음을 파는 매소부 등을 합하면 3천여 명에 달한다. 금년에도 사람이 많아서 인천경찰서에서 순사 2명을 파견했다.” 1927년에도 어부 5~6백 명과 상인 5백여 명 등 모두 1천 명이 파시를 형성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 더 이상 굴업도 파시에 대한 기사는 보이지 않습니다. 아마도 덕적도 북리의 축항 공사가 완료되면서 굴업도 민어 파시는 규모가 작아지고 자연스럽게 종말을 고했을 것입니다.
파시가 소멸되자 굴업도는 다시 한미한 어촌으로 돌아갔습니다. 한동안 굴업도는 소를 기르는 목장이 됐습니다. 집집마다 2~3마리씩의 소를 방목해 키웠습니다. 이기윤 씨 일가가 기르던 방목 소가 가장 많아 한때 97두까지 됐습니다. 1950년대에도 방목 소가 20두 정도 있었습니다. 1959년 굴업도를 방문했던 국립박물관 서해도서조사단은 굴업도가 덕적면에서 가장 빈곤한 섬이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때는 모두 15가구가 살고 있었습니다. 원주민이 6가구, 피난민이 9가구였고 소형 어선이 두 척 있을 뿐이었지요. 피난민들은 일정한 생업 없는 구호대상자들이었고 주민들도 어업 노동자로 품을 팔아 연명했습니다. 그때는 방목 소들도 대부분 외지인이 위탁한 것들이었다 합니다.
햇배에서 뒷통질로 민어 낚시
1950~60년대에도 굴업도 어장에서는 민어가 많이 잡혔습니다. 조기잡이 유자망 어선 선주를 하다 후일 덕적 면장을 지낸 굴업도 작은 마을 출신의 이장용(80세)씨는 아버지, 할아버지까지 3대가 어업에 종사했습니다. 일제 때 굴업도에서는 이 씨의 아버지 이학천 씨와, 김동률, 이재희 씨 세 사람이 각기 한 척씩의 민어잡이 배를 가지고 조업했습니다. 작은 마을에 살던 이 씨의 아버지는 민어 철이면 낚시와 줄 등을 파는 선구점도 했다 합니다.
이 씨에 따르면 한국전쟁 이후에도 조기잡이 철이 끝나면 민어잡이 낙배 수백 척이 굴업도로 몰려들었다 하는군요. 낙배는 충남이나 전북 군산 지방에서 온 배들이 많았습니다. 충남 지역에서 온 낙배는 반드시 ‘낙지배’를 끌고 와서 굴업도 목금이 선착장 부근에 정박시켰다 합니다. 낙지배는 작은 수조였습니다. 충남 배들은 낙지배 가득 낙지를 싣고 와서 살려둔 채 민어의 미끼로 썼습니다. 낙지는 출어 전에 산 채로 자르거나 살짝 데쳐서 쓰기도 했다지요. 민어는 6월부터 초가을까지 잡혔습니다. 어부들은 울대라는 대나무 꼬챙이를 바다에 대고 소리를 들어 민어 떼가 있는 곳을 찾아냈습니다.
굴업도의 민어 어장은 굴업도 북동쪽 청골과 굴업도 개머리 앞 바다, 덕물산 앞의 동뿌리 어장, 굴업도와 문갑도 사이의 굴업골, 백아도와 굴업도 사이의 민어탄 등이었습니다. 똥섬 앞의 준치여에서도 민어가 많이 잡혔습니다. 굴업도 사람들은 낙배와는 다른 ‘햇배’라는 소형어선으로 민어를 잡았습니다. ‘햇배’는 ‘뒷통질’로 민어를 잡는다 해서 뒷통배라고도 합니다. 배의 뒤편에 앉은 어부 두 사람이 봉돌을 하나씩 던져 연승 낚시(주낙)로 민어잡이를 하는 것이 뒷통질이지요. 굴업도 배들은 주로 개머리 앞 바다에서 뒷통질을 했습니다. 작은 돛단배로 하룻밤에 수백 마리씩의 민어도 쉽게 잡았습니다. 어떤 때는 동뿌리에서 선미도까지 옮겨가며 주낙을 놓기도 했습니다.
굴업도에서는 조기도 그물이 아니라 낚시로 잡았습니다. 민어는 소금에 절여 말려 두었다가 충청도 태안, 서산 등지로 나가 팔았습니다. 민어 알을 기름 발라 말린 민어 알포도 유명했습니다. 민어는 배에서도 절이고 집에 돌아와 가마니를 쌓고도 절였습니다. 절인 민어는 주로 바위에 말렸습니다. 민어와 민어 알포 없이는 제사도 못 지낸다 했을 정도로 민어가 귀하게 대접받았습니다. 민어잡이가 한창일 때는 우럭 같은 건 고기로 치지도 않았다 합니다.
이화용(80세) 노인은 굴업도 큰 마을이 고향입니다.
“굴업도는 정거장이었어. 충남이나 전라도, 인천 산지사방 배들이 몰려와 여기서 다 잡아갔지.”
지금 굴업도 선적의 어선은 꽃게잡이 배 한 척뿐입니다. 그나마 오늘은 바람이 불어 어선이 피항을 위해 백아도로 건너가고 없습니다.
“굴업도는 뱃석이 안 좋아 백아도로 배를 대러 갔어”
바람이 불어도 배를 안전하게 정박시킬 수 있는 곳이 ‘뱃석’입니다. 노인은 굴업도 역사의 산증인이기도 합니다. 굴업도는 1년에 한 번씩 당제사를 모셨는데 제주가 정해져 있었다 합니다. 굴업도에 처음 이주해온 벗개의 장씨 할머니가 처음 제사를 모시기 시작했는데 후일 타지로 이사 가고 나서는 가장 연장자인 이 노인의 어머니가 물려받아 해마다 제사를 모셨습니다.
“곡식을 마당에 널면 새떼가 다 물어가곤 했어. 그런데 당제사를 지내고 나면 새떼들이 다 날아가 버리곤 했지.”
노인도 돛을 두 개 단 5톤짜리 햇배로 오랜 세월 민어잡이를 했습니다. 나일론 그물이 생기고 대형 선단이 몰려들면서 민어어장은 고갈되어 갔습니다. 1970년대 들면서 마침내 굴업도 바다에서도 민어의 씨가 아주 말라 버렸습니다. 인천 앞바다처럼 흥청이던 굴업도 파시는 그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지요.
[굴업도 땅콩] 굴업도는 모래땅이 많아 다른 작물은 재배가 여의치 않지만 땅콩 재배에는 적합했다. 그래서 한때는 땅콩 재배로 호황을 누렸고 20가구까지 늘기도 했었다. 굴업도의 땅콩을 사주었던 한 서울 사람의 덕을 기리기 위해 비석이 섬 중간에 세워져 있기도 하다
[덕물산] 덕적도의 옛 지명이 덕물도다. 덕적도 방향에 있는 섬이라 해서 덕물산이다.
[연평도산] 연평도 방향에 있는 산이라 연평도산이다.
[개머리초원] 소를 기르던 목장이었다. 희귀식물 금방망이 군락지다. 대한민국의 최대 15만㎡ 면적에 최대 개체수가 서식한다. 천혜의 식물원인 이곳을 CJ가 골프장으로 만들 계획을 세우고 있다.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로 등단했습니다. 서남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뭍으로 이주해 살다 성인이 된 뒤 다시 고향 섬으로 돌아가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보길도 시절에는 보길도의 숲과 하천,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파괴하고 대형 댐을 건설하려는 토목세력에 맞서 33일간 단식으로 섬을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2005년 보길도를 떠난 뒤에는 한국의 모든 유인도(500여 개)를 걸어서 순례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6년째 섬들을 걷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200여 개의 섬을 걸었고 여전히 섬을 걷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섬을 걷다>, 한겨레에 <섬에서 만나다>를 연재했으며, 현재 프레시안에 <통영은 맛있다>를 연재중입니다. <어머니전>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자발적 가난의 행복>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섬학교를 열며>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다로부터 왔습니다. 지구 최초의 생명이 바다에서 잉태됐듯이 우리 또한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바다에서 생명활동을 시작합니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 바다를 보면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평온함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바다, 그래서 프랑스어 ‘어머니[mère]’에는 ‘바다[mer]’가 들어 있고 한자의 ‘바다[海]’에는 ‘어머니[母]’가 들어있습니다. 원초적 기억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기원을 암시해 줍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바다. 우리가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실상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런지요.
바다나 강, 호수 등의 물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를 섬이라 합니다. 한국에는 4,400여 개의 섬이 있습니다. 그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500여 개, 나머지는 무인도입니다. 한국은 ‘섬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섬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섬들이 소개되고 몇몇 섬들이 피서지나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섬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섬들은 척박함과 절해고도의 고독과 유배지, 그도 아니면 현실도피적인 낭만의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섬은 여전히 먼 곳으로만 느껴집니다. 수만 리 먼 나라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바로 우리 곁의 섬들을 멀게만 느끼는 것은 왜일까요. 단지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닙니다. 심리적 거리감이 더 큰 요인입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육지 중심의 사고에 기인한 바 큽니다. 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육지 사람들은 섬사람들을 ‘섬놈’이라 부르면서 멸시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조선왕조의 폐쇄적인 해양정책에 잇닿아 있습니다. 본래 우리의 인식은 육지 중심의 편협한 틀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옛날 이 땅의 사람들은 바다를 이용해 세계와 소통했습니다. 세계로 향하는 통로로 기능했던 바다가 단절의 바다로 전락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입니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을 추종해 적극적인 ‘공도(空島)’정책을 폈습니다. 섬과 바다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바다와 섬은 육지보다 더욱 활력 넘치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문명교류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되면서 바다와 섬은 점차 잊혀지고 버림받은 공간이 됐습니다.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이후에도 섬은 유배지로 이용되면서 고립이 심화됐습니다.
해양왕국이었던 백제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바다와 섬을 기반으로 세계와 소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976년 거문도의 장촌마을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외딴 섬처럼 보이는 거문도가 실상은 고대부터 국제해상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2000년에는 흑산도의 읍동마을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국제해양도시의 흔적들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고려시대 예성강 입구에 있던 벽란도는 개경에 출입하는 외국인들이 통관 절차를 밟던 국제무역항이었습니다.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는 바다와 섬을 통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까지 소통했습니다. 이 땅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언제나 그 중심에는 바다와 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이 좁은 것은 알면서도 우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 줄은 잘 모릅니다. 오랫동안 좁은 땅에 갇혀 살면서 몸도 마음도, 시야도 폐쇄적으로 변해버린 까닭입니다. 섬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넓은 바다의 주인공인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섬에서 바라보면 대륙 또한 바다에 둘려 쌓인 큰 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지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충분히 크고 드넓습니다. 섬은 한없이 넓은 바다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섬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개방성과 열린 사고를 되찾기 위한 최적의 사유공간입니다. 물론 섬은 숙명적으로 외롭습니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이나 슬픔마저도 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해학과 가락이 있습니다. 섬에서는 슬픔도 가락을 타면 흥이 됩니다.
오랜 세월 섬들은 제각각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 왔습니다. 곁에 있는 섬도 같은 섬은 없습니다. 하지만 외래문물의 유입으로 많은 섬들이 원형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멀지 않은 시간에 이 나라 많은 섬들이 사라질 것을 예감합니다. 이미 많은 섬들이 육지와 연결되었거나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리가 놓이면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끝내는 소멸해 버릴 섬들, 섬의 풍경들. 더 늦기 전에 섬으로 가야 할 이유입니다.
몇 년째 걷기 열풍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존재’[動物]인 사람이 걷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걷기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본능의 회복운동입니다. 걷기는 길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바 큽니다. 길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한자 ‘길道(도)’자는 辵(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신영복 선생님은 "辵(착)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수)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道)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한 길의 정신을 구현하기에 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섬은 어느 곳보다 걷기 좋은 공간입니다. 아직까지 ‘섬길’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많은 걷기 길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섬은 부러 돈 들여 걷기 길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섬들은 그 자체로 최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섬에서는 사람이 안심하고 걸으며 사유할 수 있습니다. 섬길을 걷는 일은 분명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 될 것입니다. 섬으로 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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