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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는 '외교의 신'…잘못한 건 노무현 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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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는 '외교의 신'…잘못한 건 노무현 탓?

[MB의 시간과 비용] <5> 문정인 연세대 교수

"기록물 자체로 가치는 있다. 그러나 읽는데 곤혹스럽다."


많은 이들이 <대통령의 시간>을 읽으며 내놓은 총평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회고록이 화제다. 퇴임한 지 2년 만에 이런 회고록을 냈다는 것 자체도 놀랍지만, 그 내용이 황당해서 그렇다. 누군가는 이를 '공상과학소설'로, 또 누군가는 이를 '공소장에 앞선 피의자 조서'로 표현하기도 했다.


<프레시안>은 이 회고록이 어느 정도 진실인지, 어디까지 우리가 믿을 수 있는지, 어떤 부분이 잘못됐는지, 조금 더 세밀하게 접근해보기로 했다. 대통령 회고록이 갖는 무게 때문이다. 이 회고록과 무관하게 <프레시안>은 지식협동조합 '좋은나라'와 함께 지난해부터 이명박 정부의 정책에 대한 자체적인 검증 작업을 벌여왔다. 그 작업을 묶어서 낸 책이 <MB의 비용>이다.


'MB의 시간과 비용'이라는 기획은 철저하게 이명박 정부의 정책 평가를 위한 기획이다. 회고록 중 크게 논란이 된 한미 쇠고기 협상, 대북 관계, 외교 안보 문제, 4대강 사업 평가 등에 대해 전문가와 함께 조목조목 따져봤다. 많은 독자들을 대신해 <대통령의 시간>을 낱낱이 해체 재구성해 보고자 한다.


'MB의 시간과 비용' 5~6편에서는 문정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인터뷰를 소개한다. 문 교수는 미국국제정치학회 부회장을 지냈고, 노무현 정부 시절 동북아시대위원장, 외교통상부 국제안보대사를 역임했다. 인터뷰는 프레시안 협동조합 박인규 이사장이 진행했다. 편집자


MB의 시간과 비용


<1> "MB와 임태희, 비밀접촉 팩트가 다르다"

<2> "MB 회고록, 자기 부하들에게 부정당했다"

<3> MB "촛불 때 죽었어봐…'글로벌 코리아' 못 외쳤지"

<4> "MB, 거짓말로 4대강 강행…배후는?"

문정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외교의 '신'이 불편하다"


프레시안 : <대통령의 시간>을 읽어본 총평이 어떤가?

문정인 : 쉽게 잘 쓴 회고록이다. 역대 대통령의 자서전, 회고록과 비교하면, 대외 정책에 대해 할애한 부분이 많았다는 점, 그런 면에서는 획기적이라고 본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외교에 관심이 있었다는 것을 재발견했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그러나 이 대통령의 역할이 과장된 측면이 다소 있어 보인다. 회고록의 진술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이 전 대통령은 완전히 '외교의 신'이다. 다자외교도 그렇고 양자외교도 그렇다. 대통령의 탁월한 영도력으로 다 잘 됐다는 취지로 기술이 이어지니까, 그 점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둘째, 책임 전가는 좀 안했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회고록이라는 게, 본래 본인을 방어하기 위한 기제가 작동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해가 가지만, 이를테면 '쇠고기 파동'은 노무현 탓이고, 남북 관계는 북한 탓이고 하는 식으로 기술을 해 놓았더라. 모든 것을 제 3자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받아 들이기 어려웠다.

셋째, 과대포장의 오류도 범하는 것 같다. G20정상회의를 유치해서 '국제 규칙의 추종자 (rule follower)'에서 '룰 메이커 (rule maker)'가 되었고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는 식의 자찬이 많은데, 이는 문제가 있다. G20 정상회의에서 우리가 만든 '룰 (rule)' 이 어떤 게 있나. 큰 국제회의 한번 한다고 선진국이 되나. 게다가 G20정상회의가 그리 성공적이지는 않았던 것으로 안다. 더구나 경제적 파급 효과도 수십조 원에 달했다고 하는데, 증명할 수가 없다.

▲문정인 연세대 교수 자료사진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회고록은 보통, 알려지지 않았는데 의혹이 있었던 부분에 대해 해명할 기회가 되는 경우가 많다.

문정인 : 그런데 이 책에는 의혹에 대한 해명이 없다. 대표적인 게, 2008년 일본 훗카이도 도야코에서 개최된 G8 확대정상회의에서 있었던 일이다. 당시 <요미우리 신문>은 이명박 대통령의 발언을 보도했다. 독도 문제의 교과서 해설서 기술과 관련해 이른바 "지금은 곤란하다. 기다려 달라"는 말이었다. 그런 부분도 속 시원히 해명이 됐으면 좋았을 텐데 그게 없다. (<요미우리 신문>은 당시 "이명박 대통령이 2008년 7월9일 홋카이도 도야코 주요 8개국(G8) 정상회의에서 후쿠다 야스오 총리로부터 '중학교 사회과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 다케시마를 일본땅이라고 명기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통보받은 뒤 "지금은 곤란하다. 기다려달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다케시마는 독도의 일본식 지명이다. 편집자)


원자바오 전 중국 총리의 발언 관련 이명박 전 대통령의 주장

(…)2012년 1월 10일 원자바오 총리와 회담이 있었다. 회담을 마치고 우리는 조어대 만찬장에 마주 앉았다. 이 자리에서는 북한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가 오갔다.(…) 김정은도 김정일처럼 죽을 때까지 집권할 텐데, 우리에게 참고 인내할 시간이 있겠느냐는 뜻으로 나는 대답했다.

"그렇지만 역사의 이치가 그렇게 되겠습니까?"
원자바오가 의미심장한 답변을 했다. 중국 지도자가 북한의 장래를 두고 '그리 오래 참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의미의 발언을 한 것으로 나는 이해했다.
원자바오와 만찬을 마친 후 나는 중국이 나를 재차 국빈으로 초대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동안 쌓은 신뢰를 바탕으로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자는 의미가 아닌가 생각했다. 더불어 내가 취임한 첫 해에 국빈 초청을 했듯이, 떠나는 마지막 해에도 새해 첫 국빈으로 초청해 그간의 정리를 돈독하게 하고 싶었던 것 같았다. (<대통령의 시간> 297페이지)

프레시안 : 원자바오 전 중국 총리 발언을 인용한 부분이 상당히 문제가 됐다.

문정인 : 2008년 5월 하순 이 대통령이 북경을 국빈 방문했는데, 당시 청와대 측 사람들이 '조선의 과거 왕부터, 대통령 할 것 없이 한중관계 2000년에 이명박 대통령처럼 중국의 지도자 후진타오에게 당당하게 얘기한 사람이 없었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북한의 인권과 민생 문제를 얘기했다고 하는데, 중국 지도자의 반응은 어땠는지도 나왔으면 했다. 너무 일방의 진실만 얘기하는 것 같다. 참회는 아니라도 어려웠고 고뇌하던 이야기도 들어가야 설득력 있는 것 아닌가. 사실 정서상으로는 우리 대통령을 믿고 싶고, 믿어야 할 텐데, 그게 잘 안 된다. 원자바오 전 중국 총리의 발언들이 나오는데, 그 발언들에 대해 원자바오가 아니라고 하면 어쩔 것인가. 그 외에도 여러 기술들을 보면 아전인수적 성격이 굉장히 강해 보인다. 본인 입맛에 맞게 해석하는 듯한 부분도 있다. 296페이지를 보면 '역사의 이치가 그렇게 되겠습니까'라는 원자바오 전 총리의 발언이 나온다. 이게 북한의 붕괴를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비핵·개방·3000, 그랜드 바겐 모두 실패했는데 성공한 정책이라고 기술한다. 이 전 대통령은 현직에 있을 때도 그랬지만, 본인이 희망하는 것과 현실 사이의 경계가 흐릿하다. '희망적 기대'를 하나의 기정사실로 해석하는 경향들이 나타난다.

모순적인 부분도 여러 군데 나온다. 이를테면 이렇다. 본인이 가장 희구한 게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인데, 정작 본인이 아주 가까운 사이인 것으로 소개하는 지도자가 우즈베키스탄의 카리모프, 카자흐스탄의 나자르바예프 대통령 등이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 전 대통령이 자신의 보편적 가치에 충실했다고 하면 이런 지도자들과 연대가 강하다고 언급할 필요가 없는 것 같은데, 모순적이다. 그리고 상당히 비상식적인 게 있다. 양자 정상회담에서 제삼국의 정상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언급하지 않는 게 국제적인 관례인데…. 그리고 본인은 북한의 '갑질' 행태를 바꾸고 싶어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본인이 '갑질하는 것으로 비친다. 잘못된 우월주의다. 이런 것은 아들 부시와 비슷하다. 북한을 실패한 국가, 불량국가로 규정하고 북한을 옳은 길로 이끌겠다고 하는데 이것은 북한에 대한 오만한 '갑질'이 아닌가. 청계천 문제 해결하는데 역지사지 태도가 크게 효과를 보았다고 주장하면서도 북한에 대해서는 역지사지 태도가 없었다.

과거 정부의 업적을 인정하지 않는다. 본인의 큰 업적으로 한중일 3국 정상회담의 제도화를 들고 있는데 여기서도 더 겸손해 질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사실 노무현 정부 때 한국 외교통상부 주도 하에 제주도에서 한중일 3국 외무장관 회담을 했었다. 그때 (정례화를 위해) 사무국을 둔다고 해서 인천 송도와 제주도가 사무국을 유치하려고 경쟁도 했다. 정상회담 제의 자체는 이명박 대통령이 했다고 하더라도, 그 구상은 노무현 정부 때 이미 만들어 졌다. 그런 부분을 인정하고 쓰면 안 되는가. 모든 것을 자기가 했다고 해야 하는가. 미국 비자 면제 문제도 노무현 정부 당시 송민순 전 외교통상부장관이 협상을 시작했고 진전도 보았다. 실무적인 부분에서 시간이 걸리는 것인데, 본인이 부시 전 대통령과 가까워서 됐다고 일방적으로 기술하는 것도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과거 정부에서 한 일을 인정하고 칭찬 해주면 어디가 덧나나.

이명박 전 대통령의 주장

(…)나는 한중일 3국이 협력하여 EU나 NAFTA에 견줄 만한 경제 공동체를 형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만 방법론에 있어 보다 현실적이고도 단계적인 접근이 필요했다. 한중일 3국 정상회의에 그 답이 있다고 보았다. 내가 2008년에 중일 양국에 3국 정상회의를 제안한 것은 그런 뜻이었다.(…) 또한 3국 협력사무국을 서울에 두고 상호 협력 방안을 구체화하자고 제안했다. 내 제안이 받아들여져 3국 정상회의는 2008년부터 일본, 중국, 한국 순으로 순차적으로 5차례 개최됐다.
내 제안이 받아들여져 (2010년 10월 5일 제안) 하노이에서 한일중 정상회의가 열렸다.(…) 나는 이 회의를 주재하며 원자바오 총리와 간 나오토 총리를 화해시키고자 노력했다...나는 가운데 서서 두 사람의 손을 잡아 끌어 서로 맞잡도록 하고 기념 사진을 찍었다.(…)

어떤 경우라도 한일중 정상회의가 정례적으로 열려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이유로 나는 2013년(박근혜 정부 당시) 한국에서의 한일중 정상회의가 열리지 못한데 대해 정말 안타깝게 생각한다. (<대통령의 시간> 412~415페이지)

"이명박 때 한미 관계 좋았다고? 美 측은 '노무현 때가 더 좋았다'"

프레시안 : 저도 읽으면서 제일 눈에 띠었던 게 대외 관계와 관련된 기술이 거의 절반에 가깝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북한 핵문제나, 한미, 한중 관계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 굉장히 엄중한 일인데, 그런 부분에 대한 진지한 인식이 별로 없는 것 같다.

문정인 : '김대중, 노무현 정부 사람들이 북한하고 가까워서 한미동맹을 망쳤다'는 게 이 전 대통령과 측근들의 인식인 것 같다. 김태효 전 대외전략비서관이 <중앙선데이>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논지가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자기들 생각만 옳고 다른 사람의 생각은 틀리다'는 태도는 오만이자 아집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정책이 뭐가 틀렸나. 이명박 정부가 '바로 잡았다'고 내세우는 것의 정체는 무엇인가. 겸손해야 한다. 한 국가의 외교정책은 시대정신과 당대 국익의 반영이다. 이명박 정부는 국가의 대승적 이익을 위해 정책을 폈던 것이 아니라 김대중, 노무현 정부 반대하기 위한 정책만 하려 한 것 같다. 오죽했으면 ABR(Anything But Roh, 노무현식만 빼고 다)라는 말이 나오겠는가. 정치와 정책을 혼동한 그런 정권이었다. 정책이 제대로 될 수가 없었다.

'퍼포먼스 스픽스 (Performance speaks)', 즉 잘 된 결과가 모든 것을 말해주는데, 이명박 정부가 추진한 것 중에, 결과가 잘 된 게 있었나. 이명박 정부 마지막에 한중관계는 상당히 악화됐었다. 그래서 박근혜 정부가 중국과의 관계를 복원하느라 그렇게 노력한 게 아닌가. 이 대통령의 일와 발언과 독도 방문 때문에 한일 관계는 깨졌다. 한미 관계도 평택 미군기지 문제가 진전이 안 되는 등, 여러 가지 상당히 불편한 게 있었다. 또 일본과의 군사비밀보호협정을 이 전 대통령이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서, 한미 관계는 더 불편하게 됐다. 그러니 워싱턴에서 '노무현 정부가 차라리 나았다'는 평이 나온 것 아닌가. '약속을 지킬 것은 지켰다'는 이유였다. 모든 외교가 망가졌다는 게, 이명박 정부 끝날 시점의 전반적인 평가였다. 이것은 팩트다. 결국 박근혜 대통령에게 부담으로 이어진 것이다. 아무리 착각은 자유라고 하더라도 못한 것은 못했다고 인정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프레시안 : 한일관계는 독도를 방문한 게 영향을 크게 미친 것 같은데, 한중 관계가 악화된 계기는 어떤 것이었을까?

문정인 : 중국 정부가 원했던 것은 한반도의 평화안정이다. 북한 비핵화가 전면에 나오긴 했지만, 한반도 평화 안정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중국은 남북관계 개선을 원했다. 남북 관계가 개선되면 한국 정부의 대 미국 의존도가 낮아져서 중국과 좋은 외교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봤다. 그런데 오히려 이명박 정부는 한반도 긴장을 고조시키고, 미국에 대한 의존도를 높였다. 그래서 중국이 한국을 불편하게 봤던 것이다. 정리하면 북한에 대한 이명박 정부의 적대적 태도가 한중 관계 악화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그리고 6자회담에 대한 비협조적 태도, 고강도 한미군사훈련, 그리고 한미일 미사일 방어체계(MD) 참여 가능성 거론 등도 문제가 됐다. '발가벗은 임금님' 동화가 생각난다. 이 전 대통령은 본인이 밝힌 대로, 후진타오 12번, 원자바오 9번 등 총 21회 정상회담을 했다. 본인 재임 5년 간 한중 관계가 진화했고,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고 주장하는데,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것 같다. 참모들이 제대로 보고했는지 의문시 된다.

한중 정상간 만남의 상당 부분이 다자 회담 틀에서였다. 그리고 중국 정부는 계속 불편한 진실을 얘기한 것으로 안다. 후진타오 주석이 이 전 대통령을 만나서 밝게 웃는 것을 거의 본적이 없다. 내가 개인적으로 기억하는 게 있다. 2009년 10월 초순 원자바오 전 총리가 평양을 방문 직후 북경에서 한중일 3국 정상회담이 열렸다. 그 이야기는 회고록에 안 나왔던데, 이 전 대통령이 중국에 따졌다는 것이다. '북한이 저런 식으로 2차 핵실험을 하고 도발적으로 나오는데 중국이 계속 북한을 지원, 비호하면 되느냐. 제재를 가해야 할 중국이 그것을 안 하고 있다'는 취지였다. 원자바오의 답변이 이랬다 한다. '우린 유엔안보리 결의안을 전부 준수한다. 그러나 그 결의안에 중국-북한 간 정상적 통상 관계를 금지하는 것은 없다. 그랬다면 우리는 유엔 결의안에 거부권 행사를 했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중국 친구들에게 들었는데 회고록에는 이 대목이 없다. 결국 좋은 것만 골라서 얘기하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이건 선택적 기억이다.

▲이명박 대통령(가운데)와 원자바오 전 중국 총리(오른쪽) ⓒ 연합뉴스

북한이 정상회담 애걸? 이 전 대통령이 오히려 더 안달!


이명박 전 대통령의 주장


(…)그 무렵인 2009년 10월 24일, 타이 후아힌에서 아세안+3 정상회의가 열렸다. 이날 다시 만난 원자바오 총리와 남북 정상회담에 대한 이야기를 잠시 나눴다. 원자바오는 다시 한 번 김정일의 뜻을 내게 전했다.

"김정일 위원장이 대통령 각하를 진심으로 만나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북한이 제시하는 조건이 너무 까다롭습니다. 나는 조건 없는 남북 정상회담을 바랐는데 김정일 위원장이 왜 그런 식으로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제가 볼 때 그 조건은 김정일 위원장의 생각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각하의 뜻을 잘 알고 있으니 김 위원장과 연락할 기회가 되면 각하의 뜻을 전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원자바오는 자신이 한 말조차 김정일에게 직접 전해지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이야기했다. (<대통령의 시간> 334~335페이지)

(…)그 당시 북한은 '만난다'는 것보다 '만나준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마치 "한반도를 대표하는 북한이 남쪽 대표를 만나준다"는 식의 오만한 태도를 보였다. 따라서 '만나주는' 조건으로 대가를 요구하는 것 같았다. 내 말을 듣고 원자바오가 답변했다.

"저도 2009년의 일에는 이상한 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김정일 위원장은 남북 정상회담 이야기가 나오자 매우 흥분해서 한국의 지난 두 분 대통령과의 회담 내용을 상세하게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김 위원장은 아무런 조건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대통령께서 북한이 남북 정상회담에 여러가지 조건을 제시했다고 제게 알려주셨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김정일 위원장 밑의 사람들의 권력이 매우 크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대통령의 시간> 358페이지)

프레시안 : 이 전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과 관련해 원자바오 전 총리가 중재한 것을 자세하게 다 얘기했다. '김정일이 정상회담을 바라고 있다'는 말까지 소개했다. 그렇게까지 쓰는 게 외교 관례상 어긋나는 것은 아닌가?

문정인 :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는 피하는 것이 국가 이익을 위해 바람직하다. 첫째 원자바오 총리에 대한 예의가 아니고, 둘째 우리 대통령의 격을 낮추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프레시안 : 이 전 대통령의 기술은, 원자바오 전 총리가 애걸하는 듯한 느낌으로 표현이 돼 있다.

문정인 : '애걸'까지야 하겠나. 그래서 더욱 문제라는 것이다. 원자바오 총리가 남북관계 개선을 진심으로 바라는 뜻에 그런 중재 역할을 했을 터인데 거절 한 것을 무용담처럼 이야기하면 중국 정부 입장은 어떻게 되나. 그리고 여기서 모순적인 대목이 있다. 2009년 4월 초, 런던에서 2차 G20정상회의가 있었다. 그 때 이명박 전 대통령이 언론과 인터뷰를 하며, 북한하고 정상회담을 할 것처럼 얘기한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09년 4월 3일 런던 현지에서 가진 영국 로이터, 미국 블룸버그, 프랑스 AFP 통신사와의 합동 인터뷰에서 "(대북) 특사는 우리가 필요하면 보낼 수 있다"며 "내 자신이 북한 사람들이 자립하며 살 수 있도록 하는 경험과 애정을 갖고 있기 때문에 뜻밖에 남북관계를 개선하는 계기가 올 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북특사를 통해 남북정상회담을 이끌어낸 전례가 있어 이 전 대통령의 이같은 발언은 남북 정상회담을 염두해 둔 것이라는 해석이 나왔었다. 편집자)

그리고 이 전 대통령은 2010년 1월, 스위스 다보스에 가서 BBC와 인터뷰했을 때 "연내에 정상회담 가능성이 있다"고 밝힌다. 당시 김은혜 대변인이 인터뷰 내용을 부인하듯 브리핑해, 사표를 냈다. (김은혜 당시 대변인은 실제 인터뷰 내용과 달리 "연내라도 안 만날 이유가 없다"고 전해 논란이 일었다. 김은혜 대변인은 '이 대통령이 피곤한 상황에서 인터뷰가 이뤄져 매끄럽게 진행되지 못했고 파장이 클 수가 있어 이 대통령에게 발언의 진정한 의미를 물어본 것을 토대로 보도자료를 만들었다'고 해명했지만 결국 사표를 냈다. 편집자)

그런 것을 보면, 이 전 대통령이 2008년 취임 직후 촛불 정국으로 상당히 인기가 떨어진 상태에서, 정치적 반전 카드로 정상회담을 생각한 것이 아니었을까. 북한보다 오히려 이 전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더 하고 싶어 했던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런 정황들은 자신의 회고록을 통해 전혀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북한이 일방적으로 구애했다고 표현한다. 더 가관인 것은 김태효 전 비서관의 인터뷰에 따르면 (정상회담 얘기를 북한 측이 비밀 회담 등에서) 수십 차례 제안했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정상회담 개최 실패를 은폐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그런 이야기를 흘리는 것 아닌가 하는 오해도 나올 법하다.

김기남 비서 키가 180, MB는 어떻게 어깨를 쳤나?

프레시안 : 그런 정상회담 요구들이 실제로 있었을까?

문정인 : 글쎄, 북측에서 나온 사람이 정상회담을 운운한다는 것은, 공식 제안으로 보이지 않는다. 고위급회담을 통해 만나서 문제를 풀자고 한다는 의미면 모르겠지만. 정상회담은 마지막 카드로 나오는 것이다. 내가 아는 북한은, 정상회담을 맨 앞에 카드로 들고 나오지 않는다. 이 전 대통령의 아전인수식 해석이 아닌가 한다. 가령 2009년 8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한 후에 북한에서 조문단이 왔다. 당시 나는 김 전 대통령 장례위원으로 있으면서 방문에 관여했었다. 그때 (이명박 정부가) 말이 아니게 대했다. 그 일에 대해서도 사실을 기술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 이 책에는 어떤 식으로 돼 있느냐면, 본인은 안 만나려고 했는데 현인택 당시 통일부 장관 등이 얘기를 해서 일반 조문객 형식으로 만났다고 돼 있다. 대체적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디테일 문제가 있다. 당시에는 국가정보원의 수송 지원 기능이 없어져서, 북한 조문단의 교통편을 황당하게도 렌트카로 제공했다. 그들이 렌트카를 타다가 사고라도 나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조문단이 그랜드힐튼 호텔에 묵었는데, 그들을 5층에 집어넣고 접근을 못하게 했다. 층계를 책, 걸상 등 집기로 완전 봉쇄하고, 전화 끊고, TV를 끊었다. 조문단을 무시하는 정도가 아니라 사실상 연금을 한 것이다. 저녁 식사 할 때 북한 측에서 '이럴 수 있느냐'고 해서 정세현 장관이 정부 측에 전달해 TV만 풀어줬다. 전화기는 불통이었고. 사람 만나는 것도 통제를 했다. 이런 상항을 북측도 감지했을 터인데 정상회담을 공식적으로 제의했을까? 김정일 위원장이 남북관계 개선을 희망한다는 메시지를 전했을 수 있을 것이다.

▲ 이명박 대통령이 북한 노동당 김기남 비사와 악수를 하고 있다. ⓒ청와대

이명박 전 대통령의 주장

김기남 북한 노동당 비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다니 큰 소리로 준비해온 자료를 읽기 시작했다.


"우리 장군님께서는 대통령 각하를 만나게 되면 따뜻한 인사를 전하라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김기남은 90도로 머리를 숙여 내게 인사했다. 2009년 8월 23일 청와대 본관 접견실이었다. 닷새 전 서거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북한 조문단을 접견한 자리였다.(…)나는 (북한 조문단에) 공식 절차를 거쳐 제안하라고 했다. 방문 이틀째에 북한 조문단이 현인택 통일부 장관을 통해 내게 면담을 신청해왔다. 남북 대화의 기회가 왔으니 즉각 만나야 한다는 내부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바로 수락하지 않았다. 북한 조문단은 정식으로 우리 정부와 협의하여 방문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 그들이 불쑥 대통령 면담을 신청했다고 해서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을 만나주는 것은 북한의 착각을 더욱 견고히 할 뿐이라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북한의 잘못된 사고를 바로잡을 필요가 있었다.


결국 북한 조문단은 예정보다 하루 더 체류한 끝에, 예정된 각국의 조문단 면담 일정 중 하나로 나를 만나게 됐다. 청와대를 들어오는 과정에서도 특별 대우 없이 일반 출입자와 같은 절차를 밟았다.(…) 인사가 끝나자 김기남 비서는 남북 정상회담을 언급했다.(…)대남 압박책이 먹혀들지 않고 국제적 고립이 심화되자 결국 북한이 먼저 남북 정상회담을 제의해온 것이다. 북한을 변화시키기 위한 우리 정부의 원칙 있는 대북 정책이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김 비서의 말을 끊고 이야기했다.(…) 나는 다시 한 번 북한 조문단에게 남북 대화가 핵 문제 등의 논의를 제외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예 알겠습니다. 말씀을 그대로 정확하게 모두 전달하여 올리겠습니다."


김 비서가 대답했다. 나는 접견을 마치고 나가는 김 비서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이제 앞으로 좀 잘 하세요." (<대통령의 시간> 327~330페이지)

프레시안 : 이 전 대통령이 기술한 것 중에 2009년 8월 23일 김대중 전 대통령을 조문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한 김기남 당시 북한 노동당 비서 등과 관련한 일화가 있다. 당시 상황을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달라.

문정인 : 북한 조문단 관련해서 장의위원이 박지원 의원, 임동원, 정세현,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그리고 나, 다섯 사람이었다. 당시 정부 담당은 정세현 전 장관이 했다. 국회와 언론은 박지원 의원이 담당하기로 했다. 원래 금요일(8월 21일) 11시 반에 현인택 당시 장관에게 정세현 전 장관이 정식으로 설명하고, 현 장관이 통일부 명의의 언론 브리핑을 하기로 했는데, 그에 앞서 10시 경 박지원 의원이 기자들에게 '북한 조문단이 온다'고 브리핑을 해버렸다. 그래서 (정부가 공식적으로 접수하지 않아 불법이라는 등) 난리가 났다. 이후 조문단이 도착했다. 통일부가 기분이 나빴는지, 원래 (일정 관리를) 정부가 하려는 것을 우리보고 알아서 하라고 하더라. 그래서 그랜드힐튼 호텔을 얻었는데, (정부에서) 그런 식으로 봉쇄하고 몽니를 부린 것이다. 금요일 저녁에 저녁 식사를 했다. 임동원, 정세현 전 장관, 백낙청 교수, 나, 그리고 김연철 교수가 같이 있었다. 북측은 올 때부터 필요하다면 하루 더 체류할 수 있다고 했다. 그것은 '미션'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을 만나고 싶다는 의사도 표했는데, 통일부에서 그런 식으로 나오니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당시 이명박 전 대통령 국민통합 특보를 지냈던 김덕룡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대표상임의장에게 부탁했다. 그날 밤(21일)에 나도 연락했고, 임동원 전 장관도 연락해서 다음날(22일) 조찬 때 김 의장을 오시도록 했다. 정동영, 이종석 전 장관 등과 함께 조찬을 했는데, 그때까지는 통일부 입장은 회고록에 나온 대로 '안 만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조찬 후 노동당 김양건 부장과 원동연 부부장을 김덕룡 의장과 만나게 했다. 김 의장이 계속 묻는 게, '(김정일의) 메시지 갖고 왔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김양건) 본인에 물어보라'고 해서 얘기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했던 것이다. 서서 5분 정도 얘기했는데, 메시지가 있다는 것을 직접 확인했고, 김 의장이 바로 청와대에 전화한 것으로 안다. (정부 측에서) 이 건으로 9시 반부터 회의를 했다고 한다, (이 전 대통령과) 만나는 것으로 11시 경에 결정이 났다. 그 다음에 현인택 장관과 김양건 부장간 점심 세팅이 됐고, 다음날인 일요일(8월 23일) 오전 9시에 이 전 대통령과 만났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김덕룡 의장이 중요한 역할을 한 셈이다. 재미있는 것은 (조문단이 이 전 대통령을 만나러) 갖다 와서 상당히 분위기가 좋았던 것으로 안다. 이 전 대통령이 정말 북측 사람들을 잘 대해줬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런데 그 대목이 나온다. 이 전 대통령이 만남을 끝내고 나오면서 김기남 비서의 어깨를 툭 쳤다는 것이다. 김기남 비서는 키가 크다. 180센티미터 정도 되는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이미 80세가 넘은 사람이다(1929년생). 이 전 대통령이 훨씬 연하이고 키도 작은데, 어떻게 어깨를 치면서 '좀 잘 하세요'라고 말을 했는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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