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냉각기다. 연초 신년사와 신년 기자회견을 통해 남북관계 개선 의지를 밝혔던 남북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이내 대화의 문을 닫아버렸다. 이제 3월 한미 연합군사훈련이 시작되면 한반도를 둘러싼 긴장은 더욱 고조될 가능성이 높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한 달 반 만에 대화 분위기가 식어버린 이유로 우선 대북 전단 살포에 대한 정부의 소극적인 대응을 꼽았다. '표현의 자유'를 중시한다는 명분 아래 남한 정부가 너무 경직된 태도를 보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있다. 광복 70년, 분단 70년을 바라보는 남북의 시각에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박근혜 정부는 70주년을 맞이한 8.15를 기념하기 위해 다양한 행사를 기획했지만, 정작 상대인 북한은 올해를 '조선노동당 창건 70주년'에 방점을 찍고 있다는 분석이다.
정 전 장관은 "북한은 1945년 10월 10일 조선노동당 창건일을 기념해 올해 10월 10일을 성대하게 맞이하는 것으로 계획하고 한 해 사업들을 끌고 갈 가능성이 높다"면서 "3월부터 한미연합군사훈련이 진행될 때 긴장 분위기를 조성하고, 4월 15일 김일성의 생일인 태양절에 맞춰 창건 70주년 분위기를 끌어올리면서 자기들 내부의 결속을 다지는 방향으로 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북한이 노동당 창건 7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의 일환으로 4차 핵실험이나 미사일 발사 등을 감행할 가능성이 있다"며 "북쪽 표현으로 이른바 '축포'를 쏘아 올리는 것인데, 이런 방향으로 올해를 끌고 가려면 어설픈 남북대화, 북·미 대화는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했을 것"이라고 관측했다.
문제는 북한의 이러한 군사적 도발이 미국의 중국 견제에 더없이 좋은 구실이 된다는 점이다. 정 전 장관은 특히 "(북한이) 핵실험이나 미사일 발사를 하면 한반도 내 사드 배치는 정당화되는 것"이라며 "미국은 이를 핑계 삼아 사드 배치 분위기를 만들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 전 장관은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면 당장 한중관계가 파국으로 치닫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시진핑(習近平)중국 국가 주석을 비롯해 추궈홍(邱國洪) 주한 중국대사, 창완취안(常萬全) 중국 국방부장 등 중국의 고위 관리들이 잇따라 사드에 대한 우려를 공개적으로 밝히고 있기 때문에 한반도 내 사드 배치가 현실화되면 중국이 어떤 식으로든 이에 대응하는 조치를 취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시나리오가 현실화되지 않으려면 우선 북한을 관리해야 할 필요가 있다"며 "단순히 남북관계 문제가 아니라 미국의 대중국 압박 정책에 (남한이) 편입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남북관계를 잘 관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인터뷰는 지난 16일 서울 서교동에 위치한 김대중도서관에서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 박인규 이사장과 대담 형식으로 진행됐다. 다음은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편집자.
프레시안 : 올해 초 다소 풀릴 듯한 기미를 보였던 남북관계는 결국 3월 한미연합군사훈련이 시작될 때까지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한 채 주도권 싸움만 벌이다가 끝나는 모양새가 됐습니다. 남측은 설 이전 이산가족 상봉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이후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다른 카드를 준비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북한 역시 신년사에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밝힌 것과는 달리 남북관계 개선에 경직된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향후 북한은 어떤 움직임을 취하게 될까요?
정세현 : 남북관계에서 주도권을 잡는 문제와 관련해서 생각해보면, 북한으로서는 사실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는 여지가 거의 없습니다. 국제적 위상이나 내부경제적, 사회·문화적인 상황으로 보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동력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결국 남측이 상황을 주도해 나가야 하는데, 문제는 박근혜 정부의 입장이 '기계적 상호주의'도 아닌 것 같다는 데 있습니다. 기계적 상호주의는 북쪽이 좀 움직이면 우리가 거기에 따라 움직이고, 우리가 움직이면 북한이 반응을 보여서 이러한 과정들이 쌓여 단계적으로 남북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는 것인데, 이명박 정부 때부터 박근혜 정부에 이르기까지 남한 정부는 지속적으로 '북한의 선(先)행동주의'를 강조했습니다. '북한이 뭔가를 하면 우리도 그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할 수 있다' 또는 '북한이 어떤 조치를 취하는 것을 확인한 뒤에 뭘 할 수 있다'는 입장인 겁니다. 그래서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 지난 2년 동안 남북관계에서 아무런 진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사실 국내총생산(GDP) 총액으로 보면 북한은 우리와 경쟁이 안 됩니다. 2014년 말 기준으로 국제통화기금(IMF)이 산출한 GDP 자료를 근거로 보면 남한이 1조 4494억 달러로 세계 13위입니다. 이에 비해 북한 GDP는 400억 달러로 92위입니다. 남한 대 북한의 GDP 규모가 36 대 1 정도죠.
경제적 차이뿐만 아니라 인구도 우리가 두 배가 더 많고 국제적 위상은 계산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차이가 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북한의 선(先)행동만을 요구하고 있다면, 올해뿐만 아니라 앞으로 박근혜 정부의 남은 3년 동안에도 남북관계 변화는 기대할 수 없다고 봅니다.
여기에 통일 준비를 본격적으로 하겠다는 박근혜 정부의 구상도 남북관계 개선에 장애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봅니다. 사실 우리가 약간의 여유를 두면 북한이 적극적으로 나올 여지도 없지 않습니다만, 지난해 초에 나왔던 통일대박론과 통일준비, 그리고 올해 등장한 통일 기반조성 등이 북한에게는 체제 통일의 준비 과정으로 보였을 겁니다.
북한은 체제통일을 흡수통일의 동의어로 간주합니다. 북한은 박근혜 정부의 정책 발표를 보면서 '이 사람들 잘못 상대했다가는 완전히 먹히는 수가 있겠구나' 라는 불안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러다보니 북한이 남북관계 개선은 포기하고 올해 국정 방향을 대내 결속으로 아예 틀어버린 부분도 있다고 봅니다.
일례로 지난 11일 대한적십자사에서 북한에 분유 25톤을 지원하겠다고 했는데 북한이 거절하지 않았습니까? 북한은 적십자가 전면에 나서는 것이 불편했을 수 있습니다. 이를 보고 북한은 남한 정부가 이산가족 상봉만 밀어붙이려고 한다고 인식했을 수 있습니다. 지원하는 양이 많았다면 북한에서 다른 반응이 나왔을 수도 있지만요.
또 북한은 올해를 조선노동당 창건 70주년이라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을 것입니다. 박근혜 정부가 올해를 광복 70주년, 분단 70주년에 방점을 찍은 것과는 다른 방향입니다. 북한은 1945년 10월 10일 조선노동당 창건일을 기념해 올해 10월 10일을 성대하게 맞이하는 것으로 계획하고 한 해 사업들을 끌고 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3월부터 한미연합군사훈련인 키리졸브와 폴이글(독수리훈련)이 진행될 때 긴장 분위기를 조성하고, 4월 15일 김일성의 생일인 태양절에 맞춰 창건 70주년 분위기를 끌어올리면서 자기들 내부의 결속을 다지는 방향으로 가는 겁니다.
북한이 이날을 겨냥해서 분위기를 몰아간다면 그 과정에서 노동당 창건 7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의 일환으로 4차 핵실험이나 미사일 발사 등을 감행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북쪽 표현으로 이른바 '축포'를 쏘아 올리는 것이죠. 이런 방향으로 올해를 끌고 가려면 자기들 기준에서 어설픈 남북, 북·미 대화는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했을 겁니다. 게다가 북·미 대화 가능성은 사실상 닫힌 상황입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1월 2일(현지시각) 휴가 중에 대북 금융제재를 내렸고 1월 22일에는 유튜브와 인터뷰하면서 북한에 외부의 정보를 유입시켜서 붕괴를 유도하겠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거기서 북·미 대화 가능성은 막혀버린 겁니다.
사실 북한에게는 금융제재가 총이나 칼보다 훨씬 위협적입니다. 지난 2005년 9.19 공동성명 합의 발표 직후 그다음날 미국 재무부가 BDA(방코델타아시아)의 북한 계좌를 동결했고 여기에 반발한 북한이 결국 1차 핵실험을 감행하지 않았습니까? 그만큼 금융제재가 북한에게는 아프다는 겁니다. 따라서 이번 1월 2일에 시작된 제재가 북한이 군사적 차원에서 대미, 대남 위협 또는 도발적 행위를 하게 만드는 원인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물론 중간에 혼선이 있긴 했습니다. 미국 측 6자회담 수석대표인 성 김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가 지난달 말에 베이징에 가서 북한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에게 회담에 나오라고 했었죠. 그랬더니 북한이 성김이 북한으로 들어오라고 화답했습니다. 결국 접촉은 이뤄지지 않았는데 북한 입장에서는 미국의 본심이 금융제재와 유튜브 인터뷰에서 다 나왔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성김의 제안에 응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프레시안 : 구체적으로 보자면 현재 남북관계를 막고 있는 사안은 대북 전단 문제인데요. 이것만 풀렸어도 남북 고위급접촉, 이산가족 상봉까지는 가능하지 않았을까요? 박근혜 정부는 전단 문제를 두고 왜 이렇게 경직된 자세로 나왔을까요?
정세현 : 국내 정치문제 때문에 북한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고 봅니다. 박근혜 정부 내에서 떨어지는 지지율을 만회해보겠다고 갑자기 진보적인 색채를 띤 대북 기조로 전환한다면 '산토끼 쫓으려다가 집토끼도 잃어버린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판단에서 북한과 대화를 할 것처럼 해놓고 결국은 하지 않으면서 그 책임을 북한에 돌리는 식으로 방향을 잡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끌고 가야 대통령의 국정 장악력을 그나마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사실 정부가 대북 전단 살포를 막지 않은 이유가 다소 궁색한 측면이 있습니다. '표현의 자유'가 때문에 막지 못했다는 것인데, SNS에서 돌아다니는 메시지도 검열하면서 표현의 자유 때문에 못 막는다는 것이 앞뒤가 안 맞는 부분이 있습니다.
오히려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이 높았으면 북한에 유연한 자세를 취했을 것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북한도 실책을 한 것인데요. 남한 내부에서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가 내려가고 있기 때문에 그만큼 북한에 대해 적극적으로 나올 수 없다는 것이죠. 이런 점을 북한이 읽지 못한 측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프레시안 : 그럼 올 한해도 남북관계에는 아무런 진전이 없을까요?
정세현 : 일단 3~4월은 군사훈련기간이기 때문에 특별히 남북 간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겁니다. 그나마 5월 러시아에서 열리는 세계 2차 대전 승전 70주년 기념행사에 기대를 걸어볼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미국이 공식적으로 참석하지 않는다고 밝힌 이상 박근혜 대통령이 미국의 의사를 무시하고 참석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올 한 해를 펼쳐놓고 봤을 때 남북관계에서 진전을 보려고 했다면 1~2월에 대북 전단 문제를 해결하고 고위급접촉과 이산가족 상봉을 한 뒤 3~4월은 잠시 소강상태로 가다가 5월 이후 본격적인 남북 교류 사업을 진행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첫 단추를 잘 끼우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올 한 해가 흐트러지게 된 셈입니다.
또 북한이 군사적 행위를 실제로 감행한다면 박근혜 정부는 남북관계를 더 이상 진행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는 그런 일이 있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논리로 남북관계 개선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끈을 놓으면 북핵문제 해결에 있어서 발언권도 없고 우리가 외교를 풀어나가는데 있어서 주도권을 행사할 수도 없다는 논리였습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는 그런 일이 생기면 그날로, 남북 간 있었던 교류와 협력도 끊어버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점에서도 향후 남북관계는 어두워 보입니다.
북한의 체제 결속, 한반도 사드 배치로 이어지나
프레시안 : 북한이 올 한해를 체제 결속에 방점을 찍고 무력시위를 하게 된다면 한국에서는 한국형미사일방어체계(KAMD)와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가 현실화되지 않을까요? 악순환이 되는 것 같은데요.
정세현 : 북한이 대내 결속과 노동당 창건 70주년을 기념하는 축포를 쏘아 올린답시고 핵실험이나 미사일 발사를 하면 한반도 내 사드 배치는 정당화되는 겁니다. 미국은 이를 핑계 삼아 사드의 한반도 내 배치로 분위기를 몰고 갈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 끌려 들어가면 한중관계가 파탄 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미 사드 배치를 놓고 중국 국가 주석부터 국방부장까지 경고 메시지를 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최근에 한국을 방문한 창완취안(常萬全) 중국 국방부장은 4일 한민구 국방부 장관과 회담에서 의제에도 없던 사드 이야기를 꺼내며 "우려스럽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난해 11월 국회 남북관계 및 교류협력발전 특별위원회와 간담회를 가졌던 추궈홍(邱國洪) 주한 중국대사는 사드의 사거리가 2000킬로미터인데 이게 어떻게 대북용이냐며, 이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라고 불편한 기색을 여과 없이 드러냈습니다. 한국에 있는 미군기지 내에 사드 배치를 허용한다면 한중관계가 어려워질 수 있다고도 했습니다. 지난해 7월 3일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박근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을 때 사드 배치에 대해 경고했다는 것도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 아닙니까.
국가주석을 포함해 중국의 고위 관리들이 공개된 자리에서 이 정도까지 이야기를 한 것이라면 중국은 한반도 내 사드 배치를 기정사실로 간주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존 커비 미국 국방부 대변인은 사드 배치 문제와 관련해 한국과 논의하고 있다고 말했다가 이를 번복하느라 진땀을 흘리기도 했었죠. 어쨌든 올해 북한의 도발, 그리고 여기에 대해 한미가 발끈해서 사드배치와 KAMD 개발을 가속화하면 한중관계는 끝장날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이렇게 되면 중국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는데, 우리에게 쓸 수 있는 가장 무서운 카드는 경제 보복 조치입니다. 우리는 현재 경제의 상당 부분을 중국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무역 비중도 중국이 가장 높고 경제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대중 무역흑자로 외환 보유고도 올라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이 수입 금지조치라도 내리면 어떻게 될까요? 한중 FTA가 있어서 중국이 그런 조치를 쉽게 내리지는 못할 것이라는 관측도 있습니다만, 국제적인 조약이나 약속이라는 것은 서로가 좋을 때, 즉 '누이 좋고 매부 좋을' 때 지켜지는 것이지 한쪽이 불편하다고 하면 언제든지 깨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나리오가 현실화되지 않으려면 우선 북한을 관리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히 남북관계 문제가 아니라 미국의 대중국 압박 정책에 편입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남북관계를 잘 관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남북관계가 엉망이 되고 미국의 전략에 끌려 들어가면 한중관계가 어려워지고, 그러면 경제적 어려움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안보위기보다 경제위기가 정권에 더 위험하다는 것을 박근혜 정부가 알아야 합니다.
프레시안 : 그런데 박근혜 정부가 이 상황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 역시 회고록인 <대통령의 시간>을 살펴보니 미·중 간 균형을 잡는 것과 관련해 문제의식이나 위기의식이 결여된 것으로 보입니다.
정세현 : 이명박 전 대통령이 박근혜 대통령보다 10년 정도 연배가 높습니다. 이 전 대통령의 세계관과 대외관이 형성되던 시기와 박 대통령의 시기는 좀 차이가 있죠. 특히 우리나라의 발전 속도로 봐서는 굉장히 차이가 있습니다.
이 전 대통령이 막 성인이 됐을 때를 생각해보면 우리나라는 미국이 아니면 죽는 줄 알고 살았었습니다. 반면 박 대통령이 성인이 됐을 때는 우리 경제가 북한도 따돌리고 고속 성장을 시작할 때이기 때문에 미국에 대한 관점이 바뀌기 시작했을 시기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이 전 대통령 생각은 어떻게 보면 태생적인 측면에 기인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칠흑 같던 망망대해에 미국만이 유일한 등대같이 보이던 시절 아니었습니까.
하지만 박 대통령은 이런 태생적인 측면으로 보자면 이 전 대통령과는 좀 다릅니다. 취임 초에 한중관계를 잘하겠다고 했고 실제로 그런 액션을 취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대통령 본인에게 문제가 있는지 참모에게 문제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요즘 정부가 하는 조치를 보면 대통령이 '언행일치'가 안 되는 것 같습니다.
북한,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 결국 남한 찾을 것?
프레시안 : 박근혜 정부가 북한에 대해 자신들의 입장을 굽히지 않고 밀어붙이는 이유가 북한이 우리와 손을 잡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깔려있기 때문은 아닌가 싶은데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제재 때문에 북한 경제가 대단히 어렵고, 그래서 결국 북한이 손을 내밀 곳은 우리밖에 없으므로 '아쉬운 것은 북한이지 우리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실제 북한의 경제 상황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것 같은데요. 베이징대학교의 진징이(金景一) 교수는 북한이 지난해 5.30조치를 시행한 이후 북한 경제가 시장경제로 나아가고 있다는 진단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정세현 : WFP(세계식량계획)나 FAO(유엔 식량농업기구)의 통계를 보면 지난해 북한의 식량 생산량이 많게는 495만 톤 정도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북한에 필요한 식량을 550만 톤 정도로 본다면 여전히 모자라긴 하지만 예년에 비해서는 식량을 많이 확보한 겁니다. 예전에 북한이 외국에 식량을 원조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그해 식량 생산량이 350만 톤까지 내려간 적도 있습니다.
또 하나는 북한이 일종의 농가책임생산제와 같은 분조관리방식을 농업에 적용했는데 이것이 영향을 준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도 단위로 생산 할당량을 내려보내고 이를 아래에 있는 협동농장 단위별로 생산량을 할당했습니다.
그러던 것을 20~30명 단위로 쪼개서 이 면적에서 3년 평균 어느 정도의 소출이 있었는지 계산한 다음, 그만큼만 국가에 내고 나머지는 알아서 처리하라는 식으로 바뀐 겁니다. 이렇게 되면 남은 수확량은 이른바 '장마당'에 내다 팔 수 있습니다. 도시에서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들이 이를 사 먹을 수 있게 됐습니다.
이러한 조치가 생산량을 늘리는 기제로 작용했을 것입니다. 이전 방식에서는 수백 명이 하나의 협동농장에서 함께 일을 하는데, '내 것도 네 것도' 아닌 상황에서 굳이 열심히 일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사회주의가 가지고 있는 부작용이 나타났습니다. 하지만 물건을 내다 팔 수 있게 되면서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내 것'이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프레시안 : 북한의 식량 생산이 늘어나고 경제 사정이 나아졌다는 이야기는 결국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로 가해진 유엔 안보리의 대북제재가 별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정세현 : 그렇습니다. 그동안 미국과 이명박 정부가 안보리 제재가 성과를 내고 있었다고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했었는데 이것이 모두 무효였다는 뜻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중국도 상당한 역할을 했습니다. 중국은 대북제재 결의안에 동참하면서 실질적으로 북한에 줄 것은 다 줬습니다. 여기에 미국이 문제제기하면 중국은 "우리(북·중)는 특수관계"라고 설명합니다.
2009년 다이빙궈(戴秉國) 중국 외교담당 국무위원과 힐러리 미국 국무장관이 미국에서 만났습니다. 미·중 간 경제·전략대화 자리였는데요. 힐러리 장관이 다이빙궈 위원에게 대북 제제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라고 하니까, 다이빙궈 위원이 "우리는 인도적 지원은 해야 한다"고 받아쳤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그런 관계"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인도적 지원이라는 것이 품목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주는 사람의 마음에 달려있기 때문에 사실상 대북제재에 동참하지 않겠다는 뜻을 표출한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결국 대북제재가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한 것이죠.
프레시안 : 하지만 최근에는 북·중 관계가 좋지 않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북한이 핵실험이나 미사일 발사를 감행하지 힘들 것이라는 관측도 있습니다. 중국이 매우 싫어하니까요.
정세현 : 물론 현재 북·중 관계가 1950~60년대 같을 수는 없습니다. 당시는 중·소 갈등이 극심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북한이 조금 도발적인 행동을 하더라도 전략적 필요 때문에 양국은 각자 나름대로 북한을 끌어안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를 간파한 북한은 양다리 외교로 상당히 재미를 봤구요. 또 당시 등거리외교를 하면서 중·소로부터 경쟁적인 지원을 받아내기도 했습니다.
중국, 러시아가 북한을 끌어안아야 할 이유가 당시보다 줄어들었기 때문에 북·중 관계 역시 예전보다 소원해졌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북한이 최근에는 미·중 갈등 상황에서 자신들의 몸값을 높이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이는 소기의 성과를 거둘 가능성이 높습니다.
중국은 미국의 '아시아로의 회귀'를 견제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북한을 완전히 놓을 수가 없습니다. 물론 중국이 북한에 "더 이상 핵실험하면 안 된다, 우리 곤란하게 만들지 마라"라는 경고는 합니다. 하지만 막상 북한이 일을 벌이면 중국은 정말 북한을 버릴 수 있을까요?
만약 중국이 북한을 버리면 미·중 사이에서 중국의 레버리지 하나가 없어지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이 북한을 손에서 놓아버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북·중 관계가 예전 같지 않은 것은 틀림없지만 중국이 북한을 버릴만한 상황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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