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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중국의 역할은 무엇인가?

[김기협의 냉전 이후]<68>남북관계란 '변수', 북중관계 '상수' 맞춰 조율?

김일성이 마지막으로 중국을 방문한 것은 1991년 11월의 일이었고 김정일이 권력승계 후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한 것은 2000년 5월의 일이었다. 그 사이에 북한과 중국의 관계는 불편한 상태를 많이 겪었다. 북한은 1992년 8월의 한-중 수교와 1995년 장쩌민 주석의 남한 방문에 분노했고, 아시안게임의 타이완 개최를 지지하는 등 타이완에 접근하는 움직임으로 중국 지도부의 심기를 건드리기도 했다.

1998년까지 김정일 후계체제가 안정된 후 북한이 중국과의 관계 회복을 시작했다. 1999년 6월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방중에 이어 2000년 3월에는 김정일이 방중을 두 달 앞두고 평양 주재 중국 대사관을 방문하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김정일은 이듬해 1월에도 중국을 거듭 방문, 상하이의 푸둥 지구를 시찰하면서 개혁개방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 해 9월 장쩌민의 평양 방문으로 양국 관계는 완전히 회복되었다.

겉보기로는 예전의 밀접한 관계가 회복된 것이지만, 관계의 실질적 내용에는 큰 변화가 있었다. 1992년까지는 두 나라 모두 새로운 세계 정세에 적응하기 위해 각자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미국 주도의 봉쇄 정책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던 북한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도 톈안먼 사태(1989)의 타격 아래 전망이 밝지 못했다. 

1998년 여름 클린턴 미 대통령의 중국 방문을 둘러싼 미국 정계의 논란에서 중국의 장래 전망이 불확실하던 상황을 알아볼 수 있다. 공화당 우파와 민주당 좌파가 이례적으로 손잡고 이 방문에 반대했다. 우파의 주장은 미국에 대한 잠재적 도전자인 중국의 성장에 도움이 될 행동을 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고, 좌파의 주장은 인권 기준이 열악한 중국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양쪽 주장 모두 약소국에 대한 강압 정책의 틀에 따른 것으로 그 시점까지 중국을 깔보던 미국인의 시각이 비쳐 보인다. 그런데 이를 물리치고 방문을 강행한 클린턴의 입장은 향후 중국의 위상 변화를 내다본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좌파에 대해서는 방문하는 편이 안 하는 편보다 중국의 인권 수준 향상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응수하고, 우파에 대해서는 중국을 미국에게 우호적인 태도로 끌어들이는 것이 미국 국익에 유리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1997년 여름 홍콩을 무난하게 영국으로부터 반환 받고 그 후 관리도 무난했던 데서 중국에 대한 국제적 신뢰가 급속히 높아졌다. 개혁개방 정책의 큰 고비를 넘긴 셈이다. 이 무렵 후계 체제 정비를 마무리한 북한과의 관계에서 중국은 '후견자(patron)' 역할을 맡을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국제 관계에서 '후견자'는 곧 '종주국'이라고 볼 수 있지만 북한의 주체사상으로 용납할 수 없는 개념이고 중국 입장에서도 대외적으로 그런 책임을 떠맡을 뜻이 없었다. 따라서 두 나라 관계는 일시적 필요에 따라 보호-지원과 주도권 존중을 교환하는 잠정적 '주객' 관계로 상정할 수 있다. 국제적 고립 상태에서 벗어날 때까지는 중국의 주도권을 존중하겠다는 북한 측의 승복을 바탕으로 1998년 이후의 북-중 관계가 전개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명백한 조약의 형태로 나타나는 관계는 아니다. 두 나라가 각자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한 인식을 공유하는 데 따라 협력의 범위가 자발적으로 형성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예컨대 2001년 1월 김정일의 푸둥 지구 시찰은 개혁개방 노선의 모델로 중국의 경험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을 보여준 것이었고, 이것이 중국의 경제 지원을 원활하게 하는 조건이 되었다.

이런 막연한 협력관계는 쉽게 교란될 수 있다. 신의주 경제특구나 핵 실험을 둘러싸고는 만만치 않은 갈등이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98년경 궤도에 오른 이래 중국의 경제발전이 힘차게 계속되면서 국제적 위상이 강화되어 온 상황에 비추어보면 중국의 후견에 대한 북한의 의존도는 꾸준히 확대되어 왔을 것 같다.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으로 남한과의 관계에 획기적 변화를 맞는 단계에서도 북한은 중국과의 관계를 대외관계의 기본 축으로 보는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정상회담 한 달 전과 반 년 후 김정일의 중국 방문은 남북관계라는 '변수'를 북-중 관계라는 '상수'에 맞춰 조율하는 목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그 후 남북관계가 큰 굴곡을 겪어온 데 반해 북-중 관계에는 큰 변화가 일어난 흔적이 없다. '후견'의 성격을 띤 북-중 관계는 북한이 국제사회에 진입하여 적응할 때까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북한의 향후 진로에는 중국의 국제적 위상이 큰 작용을 할 것으로 예상된다. 장래의 남북관계를 내다보기 위해서도 중국의 역할에 대한 판단이 중요하다. 연재 초기에(13회) 중국 '굴기'의 의미에 대한 생각을 이렇게 적은 일이 있다.

중국이 일어선다면 (1) 과거 미-소 양극체제를 복원하며 소련의 위치를 대신하겠다는 것일까? 아니면, (2) 1990년대 이래 미국이 맡아 온 위치를 빼앗겠다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3) 전통시대 천하체제를 복원하려는 것일까?

내게는 (3)이 가장 그럴싸한데, 내가 생각해도 동의할 이들이 많지 않을 것 같다. 그런데도 이쪽으로 끌리는 것은 40여 년 전부터 중국사를 공부하고 20여 년 전부터 문명의 성격을 궁리해 온 이력 때문일 것이다. 이 생각은 관계된 조사를 더 해서 나중에 정리할 것으로 남겨두고, 우선 여기서는 (1)과 (2)를 그럴싸하게 보지 않는다는 사실만 밝혀둔다.

이매뉴얼 월러스틴을 위시한 역사사회학계에서 제시한 '세계체제론'이 사회과학자들 사이에서 확산되어 왔다. 최근에 이 방면에서 나온 책 <자본주의는 미래가 있는가(Does Capitalism Have a Future)> 제목에서 보듯 자본주의 체제의 한계에 대한 논의가 구체화되고 있다. (☞관련 기사 : 소련 몰락 예측한 거장들의 자본주의 진단, 들어맞을까?)

나는 이들과 다른 경로를 통해 자본주의체제의 한계를 생각하면서 <프레시안>에 "자본주의 이후"를 연재했고, 중국에서도 이 주제의 고찰이 확산되고 있다.

역사사회학계의 세계체제론 가운데 중국의 위상과 관련, 주목을 끄는 것이 조반니 아리기의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강진아 옮김, 도서출판 길 펴냄)다. 2007년에 나온 이 책은(번역판은 2009년) 이듬해 미국 금융공황의 예언처럼 받아들여졌다. 강진아는 이 책의 "역자후기"에 이렇게 적었다.

미국과 서구는 당황스러워하고 있다. 중국의 부상, 예견되는 국제 역관계의 재편, 근대 문명이 맞닥뜨린 생태적 위기에 적절한 해답을 학문적으로 열심히 구하려 한다. 그런 상황에서 아리기의 주장은 과격하지만 개연성 있는 돌파구를 제시한 듯하다. 더구나 2008년 미국 발 금융위기가 일파만파로 번져나가면서, 미국 헤게모니의 최종적 신호가 바로 과도한 금융화로 인한 금융위기라는 아리기의 말은 마치 예언처럼 미국 출판시장을 폭격했다. 아리기가 위기를 단언하며 이 책을 출간한 것은 금융위기가 터지기 몇 달 전 아직은 미국 경제가 거품으로 호황을 구가하던 무렵이기 때문이다. (569쪽)

아리기 학설의 중심은 자본주의 위기론에 있고 중국 대안론은 부차적 요소다. 그러나 그의 자본주의 위기론이 1994년에 낸 <장기 20세기>(백승욱 옮김, 그린비 펴냄)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2007년 책의 큰 의미는 중국 대안론에 있는 것이었다. 여기에 치중한 제4부의 내용을 아리기는 "서론"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제4부는 구체적으로 중국 부상의 동학(dynamics)을 다룬다. 먼저 미국이 중국의 경제 팽창이라는 지니[genie]를 미국 지배라는 병 속에 다시 집어넣으려는 시도에서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음을 지적할 것이다. 그런 뒤에 나는 서구적 국가 체계의 과거 경험을 토대로 중국이 미래에 미국, 그 이웃들과 세계를 상대로 어떻게 행동할지 예측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결함이 있다는 점을 강조할 것이다. 그 하나로, 서구적 체계는 세계적으로 확대되면서 그 작동 방식이 변환되어버려, 과거의 경험 중 많은 것이 현재의 여러 변환을 이해하는 데 적합하지 않게 되었다. 더 중요하게는 서구적 국가 체계라는 역사적 유산이 덜 중요하게 된 대신에, 예전의 중국 중심 체계가 더욱 적합하게 되었다. (25쪽)

중국의 부상이 미국이나 소련의 위치를 본받는 방향이 아닐 것이라는, 위에 적은 내 생각과 같은 것이다. 같은 생각이지만 그 생각에 이른 경로는 다르다. 나는 아리기의 이 책을 최근에야 읽었고 아래 글도 그 전에 쓴 것이다.

19세기 유럽의 근대는 중세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멋진 신세계"를 찾았다. 근대의 모순을 심화시킨 하나의 큰 요인이 역사의 단절이었다. 전 세계가 산업화를 진행해 온 이제 중세 농업사회로 돌아갈 길은 없다. 하지만 중세, 특히 그 말기를 돌아볼 필요는 있다. '중세 이후'를 모색하던 당시 사람들의 노력 중 중요한 의미들을 근대의 풍요와 격변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이 있다. 그 의미들이 '근대 이후'의 길을 찾는 데 중요한 참고가 될 것이다.

'중세 이후'의 모색에 가장 많은 노력이 쌓여있는 곳이 중국이다. 중국에서는 2천여 년 전 전국시대부터 자본주의적 요소에 대한 경계심이 나타났고, 1천여 년 전 당나라 말기부터 자본의 권력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21세기 들어 자본주의체제가 말기적 증세를 일으키는 한쪽에서 진행되고 있는 중국의 '굴기(崛起)'의 바닥에는 이 지적 자산이 깔려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것을 '동세서점(東勢西漸)' 현상의 회복이라고 할 수 있을까? (☞관련 기사 : 200년 만에 끝나고 있는 '서세동점'의 시대)

아리기의 중국 대안론은 '서구적 체계'의 유효성 상실을 지적할 뿐, 독자적 발전을 위한 중국 고유의 조건에 대해서는 '비서구적'이란 애매한 표현에 그친다. 중국의 전통문명에 관한 연구 성과가 서양어로 정리된 것이 많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생각한 중국 대안론의 핵심은 유기론적 세계관과 그에 입각한 유기론적 질서 원리에 있다. 유럽 발 근대문명의 구조적 문제가 원자론적 세계관과 원자론적 질서 원리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일찍부터 농업문명이 완숙한 단계에 이르러 상공업의 비중이 커짐에 따라 농업 중심의 중세체제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유기론적 세계관과 질서 원리를 버리지 않고 점진적 변화를 모색했다. 유럽식 근대문명의 모순이 원자론적 세계관에 집약되어 있다고 나는 보기 때문에 유기론적 세계관을 가장 높은 수준까지 발전시켰던 중국 전통문명에 대안으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중국의 전통문명에 대한 이해가 제한되어 있는 서양 학자들까지 중국 대안론을 진지하게 떠올리고 있는 것을 보면 중국의 부상이 기존 세계체계 내에서의 위치 상승에 그치지 않고 세계체계 자체에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 분명하게 느껴진다. 그 과정에서는 중국의 진로 선택이 세계정세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이다. 하물며 가까운 거리의 한반도에 끼치는 영향은 특히 클 것이다. (앞 회에서 말한 '제곱반비례의 법칙'을 잊지 말자.) 무엇보다 남북관계의 전개와 관련해 종래 미국의 역할보다 더 큰 역할을 중국이 맡게 될 것이 예상된다.

그리고 2000년 이후 북한과 중국의 관계는 중국 대외정책의 특성을 살피는 데도 중요한 참고가 된다. 중국은 '화평발전'이니 '책임대국'이니 하는 구호를 내세워 중국의 성장-발전이 대결을 지양하고 협력을 추구함으로써 세계평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주장을 펴 왔다. 그런 구호가 외부의 견제를 완화하려는 선전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새로운 원리를 국제관계에 도입하려는 의지를 담은 것인지, 중국에게 의존도가 높은 북한과의 관계를 통해 제일 먼저 판별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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