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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 삐라' 이민복 "나도 국정원 고문 피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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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 삐라' 이민복 "나도 국정원 고문 피해자"

[다시 '국가폭력'을 말하다] "국정원 탈북자 가혹행위… 좌우 아닌 진실의 문제"

북한 문제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이민복'이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탈북자 출신으로, 현재 북한동포직접돕기운동 대북풍선단장을 맡고 있는 그는 남풍이 부는 날이면 남몰래 풍선에 '삐라'를 실어 북한에 띄운다.

지금은 대북전단 살포가 주력 사업이지만, 남한 정착 초기엔 탈북자 인권 운동에 매진했다. 이 단장은 지난해 국가정보원 합동신문센터 가혹행위 논란을 촉발시킨 유가려 씨와 마찬가지로, 국가 정보기관 폭력 피해자였다. 20년 전 탈북 직후 들어간 '대성공사'에서 언어적 신체적 폭행을 당했다. 이 단장은 대성공사를 나온 뒤 자신과 비슷한 가혹행위를 겪은 탈북자들과 함께 국가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모두 세간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이다. <프레시안> 취재진은 지난 22일 서울 여의도 모처에서 이 단장을 만나 그간 묻혀 있었던 그의 과거 이야기를 들었다. 편집자

▲이민복 북한동포직접돕기운동 대북풍선단장. ⓒ프레시안(서어리)

"군사 정권 끝났어도, 대성공사 폭행 여전했다"

이 단장이 남한에 내려온 건 1995년 2월 18일이었다. 남한 땅을 처음 밟은 바로 그날, 서울 영등포구 소재의 정보기관 대성공사에 입소했다. "남한에 온 걸 환영한다"던 사람들이 대성공사에 들어가자마자 태도가 딱 바뀌었다. 분위기가 아주 딱딱하고 살벌했다. 인사부터 시켰다. 조사관들에게 '선생님'이라고 부르도록 했다. 기부터 죽이고 보는 방식이 북한이랑 똑같았다.

본격적으로 조사가 시작되자 폭언, 폭행이 쉼 없이 이어졌다. 이것저것 캐묻던 조사관은 "인간쓰레기" 등의 욕설을 퍼부었다. 대차게 항의하자 곤봉, 주먹질 세례가 날아들었다. 그렇게 한동안 전신을 두들겨 맞았다. 폭행은 물론 성적 모욕도 받았다. 마구잡이로 맞는 통에 바지가 벗겨져 드러난 그의 성기를 보고 조사관은 조롱했다.

<프레시안>이 지난 19일부터 보도한 대성공사 고문 피해자 김관섭 씨가 귀순했던 해는 1974년이었다. 워낙 엄혹했던 시절이었다. 이민복 씨가 귀순한 건 그로부터 21년 후였다. 시간이 흘러도 대성공사 내 가혹행위는 그대로였다. 20년 넘도록 끔찍한 관행이 이어져 왔던 셈이다.(관련기사 : "'자유 대한'이 나를 고문했다")

"(대성공사) 밖에서는 민주화가 이뤄지고 있었지만, 안은 바뀐 게 없던 모양이었어요. 군사 정권 때 습성이 그대로 남은 거죠. 정보기관 안을 감시할 사람이 없으니 폭력이 아주 비일비재했죠."

입소 후 6개월 만에야 지옥 같던 대성공사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나가서도 자유롭지 않았다. 1997년 2월 12일, 이번엔 국정원 청사로 끌려갔다. 그를 본 조사관은 주먹으로 뺨, 가슴 등을 때렸다. 국정원 승인 없이 신문사에 정부에 불리한 내용의 기고를 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민복 씨, 김관섭 씨 등이 고문 받았던 서울시 영등포구 소재의 탈북자 조사기관 '대성공사'. ⓒ프레시안(최형락)

탈북자 최초로 국정원 상대 법정 싸움 벌이다

'이건 아니다' 싶었다. 대성공사 안에서나 밖에서나 감옥이 따로 없었다. 아무리 간첩 의심이 든다 해도, 인격체를 대하는 방식이 아니었다. 다른 탈북자들을 찾아다녔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가혹행위를 당한 이들이 많았다. '북한에 있는 가족을 버리고 도망친 인간쓰레기', '국적이 없으니 화장하면 아무 문제 없다'는 등 폭언은 기본이었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다며 조사관에게 구둣발로 채인 사람, 북한에서 배운 격술 시범을 시켜 동작을 했다가 '시키는 대로 했다'는 이유로 몽둥이찜질을 당한 사람, 안마 요구와 같은 모욕적인 행위를 강요당한 이도 있었다.

이들과 함께 1998년 12월 탈북자 인권단체 '자유북한인협회'를 꾸렸다. 그리고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을 찾았다. 이 단장을 포함해 9명이 원고가 되어 국가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하기로 했다. 소장을 제출하기 전에 기자들을 불러 모았다. 1999년 1월 15일 서울 카톨릭회관에서 '자유북한인(탈북자) 인권침해 방지 및 생활 정착을 위한 공동 기자회견'을 열고 국정원, 당시 안기부의 탈북자 인권침해 사례를 공개했다.

▲1999년 1월 16일 <한겨레> 19면.

탈북자들이 자발적으로 안기부의 행태를 언론에 공개하고, 국가배상소송을 낸 것은 처음이었다. 안기부는 "탈북자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반말을 하는 등 거친 행동이 있을 수는 있지만 구타 등 가혹행위는 하지 않았다"며 "정착지원금을 적게 받은 일부 탈북자들이 불만을 터뜨리는 것"이라며 사건을 축소하려 들었다.

안타깝게도 소송은 실패로 끝났다. 2심까지 갔지만 법원은 결국 '증거 부족'으로 소를 기각했다. 법정 싸움에선 졌어도 여론전을 통해 성과를 얻었다. 탈북자 정착지원시설인 '하나원'이 그해 7월 개원했다. 하나원 체제로 전환되면서 지하실, 독방이었던 대성공사 수용 기간은 예전에 비해 줄어들었다.

"국정원의 탈북자 가혹행위 좌우 문제 아닌 진실의 문제"

ⓒ프레시안(서어리)
탈북자 처지에 국가, 특히나 정보기관을 상대로 벌이는 투쟁은 쉽지 않았다.

"탈북자들은 남한에 와서 부당한 일을 겪어도 감히 말을 못했습니다. 국정원이 굉장히 힘이 있었거든요. 직업을 쥐어주고 외국 보내는 걸 국정원이 다 통제를 했어요. 여권 발급을 잘 안 해주는데, 해준다 해도 단수 여권만 줬어요. 그러니 다들 얻어터지고도 눈치만 보고 있었죠."

용감한 사람 몇 명만 나섰다. 그러나 같이 단체를 꾸리고 탈북자 인권운동 전면에 나섰던 이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다 떨어져 나갔다. 특히 공사에 다니거나 공직에 있던 사람들은 "국가 녹 먹는 사람이 국가를 공격하느냐"는 압박을 받았다. 한때 동지였던 탈북자들은 어느새 적으로 돌아섰다.

활동가 수가 줄어들면서 탈북자 인권 운동은 예전과 같은 활기를 잃었다. 이제 이들의 활동을 기억하는 이도 많지 않다.

"남한 사람들은 국가가 탈북자들을 때린 건 몰라요. 환영만 한 줄 알지."

이 단장은 "사람들이 저를 대북 삐라 날리는 사람으로만 알지만 탈북자 인권 문제를 들고 최초로 싸운 사람"이라고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그러나 대북 전단 살포 활동과 탈북자 인권 운동이 서로 충돌하는 지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풍선 날리는 일은 '우쪽'이 좋아하고, 인권 운동은 '좌쪽'이 좋아하는 일"이다. 그는 모든 문제를 '진실'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저는 좌우를 떠나서 진실 그 자체를 존중하는 사람입니다. 세상 모든 문제를 그렇게 보려고 합니다. 북한이 싫어 남한에 왔지만, 여기서도 북한 같은 일이 일어났어요. 제가 당했지 않습니까. 사실은 사실대로 말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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