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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를 무릎 꿇린 것은 철도, 그리고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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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를 무릎 꿇린 것은 철도, 그리고 노동자

[달리는 철도에서 본 세계]<42> 러일전쟁, 철도, 그리고 혁명

러일전쟁은 한국전쟁이었으며 세계전쟁이었다. 또 문명 간의 충돌이기도 했다. 고대 페르시아 전쟁과 중세 십자군 전쟁을 비롯해 현재의 중동 전쟁까지, 수천 년간 이어져 온 '동서 전쟁'들이 있었지만, 러일전쟁은 근대에 발생한 대표적인 동서 충돌 중 하나다. 러일전쟁이 끝난 뒤 점령자 프랑스를 몰아내고자 했던 베트남 젊은이들은, 그것이 백인종에 대한 황인종의 승리라고 환호했다.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성을 간파하지 못한 상태에서 서양세력을 이겨낸, 같은 동양 국가라는 동질감이 작용한 결과였다.

또한 전쟁이라는 공간에 근대 산업혁명의 결과가 반영된, 산업 전쟁이었다. 공장에서 생산된 대포와 기관총 앞에서 근육의 강도나 용맹스런 돌격 같은 것들은 더이상 주요한 변수가 되지 못했다. 분당 발사 속도나 포탄의 사정거리, 포신의 구경 등 산업자본주의 시대 공장의 생산력이 보장하는 무기의 성능, 그리고 이런 무기를 수월하게 보급할 수 있는 수단이 전쟁의 성패를 가르게 되었다.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라 수행된 제국주의 전쟁의 특성도 갖고 있다. 이런 복잡한 성격을 갖고 있는 러일전쟁의 우승컵은 바로 조선이었다. 세계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호기심 많은 관전자가 되었다.

구경꾼들은 대체로 러시아의 승리를 예견했다. 외형적으로 갖고 있는 '스펙'에서 두 나라는 큰 차이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유럽과 아시아를 아우르는 넓은 영토를 갖고 있는 제국 러시아, 그 러시아의 산업화 정도, 특히 군사력의 차이는 러일전쟁을 어른과 아이의 싸움으로 보이게 했다. 하지만 러시아가 보여줬던 수치상의 우위는, 오늘날 한국 취업준비생들의 기본 스펙이 되어버린 토익점수처럼 현실에서는 의미가 없었다.

일본은 두 개의 전투를 수행했다. 하나는 러시아와의 전투였고 하나는 철도 건설 전투였다. 뤼순과 제물포에서 발생한 일본 해군의 선제공격에 이어 일본 육군의 진격은 필수적이었다. 그런데 육군의 진격은 보급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전쟁에서는 보급선을 어떻게 확보하느냐가 최고의 관건이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남해와 서해의 제해권을 장악했기에 일본군의 전쟁 수행능력이 고갈될 수 있었다. 또 이 보급선은 당연히 짧으면 짧을수록 유리했다. 일본이 초기의 선제공격 효과를 상실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러시아를 압박할 수 있었던 방법은 조선의 종관철도를 통한 보급로의 확보였다. 그 때문에 일본은 경부선과 경의선 철도의 조기 완공에 사활을 걸었다. 경부선 철도가 기공된 것은 1901년이었고, 1904년 2월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속성공사가 진행됐다.

1905년 1월 1일에는 부산의 초량과 서울 영등포 사이에서 운수 영업이 개시됐다. 경의선의 첫 공사가 시작된 것은 1904년 3월 31일 용산-마포 구간에서였다. 군의 주도하에 속성 건설된 경의선 철도는 정식 완공철도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사 시작 1년도 안 된 1905년 3월부터 일부 단절된 구간을 연결하는 방식을 통해 용산-신의주간 열차는 1일 2왕복으로 운행을 시작했다. 450여 킬로미터(Km) 길이의 경부선 공사 기간이 1901년 9월부터 1905년 1월까지 만 3년 4개월가량이라는 점에 비춰보면, 504킬로미터의 경의선이 얼마나 속성으로 지어졌는지 알 수 있다. 러일전쟁용 임시변통 철도였던 경의선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공사를 지속해 1906년 4월 3일 용산-신의주 간 직통운전을 하게 된다.

러시아의 패배, 1차 패착은 철도, 2차 패착은?

러시아의 황제 니콜라이 2세는 종교적 인간이었다. 크고 작은 이권과 권력을 놓고 암투가 벌어지는 황실은 닫힌 공간이다. 폐쇄성과 종교적 신념이 배합되면 합리적 분석과 이성적 판단은 설 자리를 잃게 된다. 니콜라이 2세는 이교도들의 땅인 아시아 안에서 러시아의 종교적, 민족적 사명을 찾아냈다. 이 사명감은 당시 러시아 황실 주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일본에 대한 과소평가와 만나면서 더욱 커지게 됐다. 러시아 군부는 거의 모든 나라가 그렇듯, 권력자에 대한 아부와 모험주의로 가득 차 있었다. 만일 일본이 오판을 하고 도발을 한다면 초전에 박살을 내겠다는 허풍으로 왕의 비위를 맞췄다.

러시아군이 뤼순 항구에서 아무런 눈치도 못 채고 한 방 얻어맞을 때만 해도 세계는 곧 러시아의 반격으로 일본군이 큰 곤란을 겪을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전투가 계속될수록 거인 러시아는 고개를 숙이고 가드를 올린 채, 그들이 "노란색 원숭이"라고 놀렸던 일본에 소나기 펀치를 연속 허용했다. 세계 각국의 신문 배달 소년들에겐 목소리를 높이며 호외를 뿌리게 하는 이변이었지만, 항시 파란 속에는 필연의 이유들이 녹아있기 마련이다.

여기서 잠시 전문가의 분석을 들어보자. 1923년 중국 하얼빈(이때의 하얼빈은 동방의 모스크바로 불리는 곳으로 러시아의 영향력이 미치던 곳이었다.필자주)에서 태어나 하버드에서 수학하고 옥스퍼드에서 박사학위를 딴 러시아 역사학자 니콜라스 V. 라자놉스키가 자신의 저서 <러시아의 역사>에서 한 말이다.

"이러한 놀라운 결과가 나온 데에는 충분한 원인이 있었다. 일본은 준비가 되어 있었고, 잘 조직되어 있었으며, 실제로 러시아보다 더 근대적이었다. 반면에 러시아는 준비되어 있지 않았고 조직적이지 못했으며, 국내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대중적인 지지의 결여는 물론이고, 패배주의라는 결함도 가지고 있었다. 일본은 영국과 동맹을 맺고 있었고 세계 여론을 등에 업고 있었던 반면, 러시아는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있었다. 일본은 짧은 교통망을 이용했으나 러시아군은 엄청나게 긴 단선 시베리아 횡단 철도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바이칼 호수 부근의 일부 구역은 아직 완공되지도 않았다."(러시아의 역사, 까치)

도쿄 역으로 향하는 일본군의 행렬은 도열한 주민들로부터 열렬한 환송을 받았다. 일본에서는 내셔널리즘의 세례를 받아 국가에 절대복종하는 충성스런 국민이 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반면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니콜라이 2세의 폭압정치에 반대하는 노동자, 지식인들의 수가 늘어났다. 이들은 독일과 프랑스에서 발현된 여러 사상과 사건의 영향을 받았다. 프랑스 혁명의 기운은 아직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이런 가운데 무서운 파괴력을 갖고 있었던 것은 마르크스주의였다. 러시아의 정치, 사회, 문화는 곳곳에 녹이 슬어 있어 지지력을 상실해가고 있었다. 미래는 불확실했고 막 부상하는 자본주의의 굴뚝에서 피워낸 안갯속에서는 형체를 알 수 없는 세력들이 자라났다.

이들은 자유주의 사상을 가진 지식인들이거나 사업가들이었고 전문기술을 가진 직업인들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집단은 자본주의 생산관계가 만들어낸 도시 노동 계급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이들 도시 노동계급을 중심으로 전제 왕정에 도전하겠다고 결성된 그룹이 1895년 이래로 10년 동안 활동을 전개해왔다. 이 그룹은 노동계급해방 투쟁동맹이란 이름으로 불렸는데 주도자는 울리야노프라는 젊은 지식인이었다. 울리야노프는 마르크스주의가 러시아 노동자와 시민을 해방시키는 열쇠가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이 사상을 확산시키는 데 주력했다. 러시아 비밀경찰은 울리야노프를 체포했다. 경찰은 레닌이라는 가명으로 불순한 사상을 전파하고 있는 울리야노프를 노동자들로부터 격리시켜야만 했다. 하지만 레닌과 노동계급해방 투쟁동맹의 가담자를 체포한 뒤에도, 노동자 계급을 앞세워 새 시대를 열겠다는 흐름은 더 크게 일어났다.

1898년 레닌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노동계급해방 투쟁동맹이란 전투적인 이름 대신,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이라는 조직으로 탈바꿈했다. 이 역시 러시아 당국의 대대적인 검거 열풍으로 다수가 체포되었지만, 1903년 또 다른 주도자들이 러시아 정부의 탄압을 피해 벨기에 브뤼셀과 영국 런던에서 전당대회를 개최했다. 러일전쟁이 발발했던 1904년의 러시아는 안팎의 도전에 제대로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조건이었다. 당장이라도 반란에 나설 준비가 된 아사 직전의 농민들, 노예와 다를 바 없는 조건의 노동자들, 정치권력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한다는 불만으로 가득 찬 산업자본가들, 점점 권리가 줄어든다고 여기는 귀족들까지, 모두가 불만을 가득 품고 있었다. 니콜라이 2세 차르 체제의 약점은, 그 체제가 어느 누구의 이익도 대변하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을 수행하는 것은 자폭하는 지름길일 수 있지만, 또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게 만들어주기도 한다. 전쟁이 국내의 위기를 해소할 수 있다는 일반적 믿음이 그것이다. 게다가 상대국을 이길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을 땐 더욱 그렇다.

탐색전도 없이 강펀치를 맞은 러시아는 전쟁의 뚜껑이 열리자 바로 잘못된 길로 들어섰음을 알게 된다. 러시아 군사령관 쿠로파트킨 장군의 증언을 들어보자.

"우리가 어렵게 시작한 전쟁의 문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철도 문제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가 있을 것이다. 기차를 증차시킴으로써 결정적인 전투에서 1개 내지 2개 군단을 우리 측에 배치할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비록 단 하루일지라도 철도의 상태를 개선하는 데 지체한 것은 건설부 장관, 재무장관 그리고 역시 어떤 면에서 국방장관까지도 책임이 있다."(러일전쟁, 러시아 군사령관 쿠로파트킨 장군 회고록, 한국외대 출판부)

쿠로파트킨이 전쟁을 수행하면서 맞닥뜨린 문제는 군의 사기도 전술도 무기의 성능도 아니었다. 이 모든 것을 실현시킬 수 있는 전쟁 인프라인 철도망의 빈곤이었다. 러일전쟁을 염두에 두고 경부선과 경의선 철도 건설에 목을 맸던 일본과는 완전히 다른 상황이었던 것이다. 장군의 말을 더 들어보자.

"불편한 단선 철도를 복선으로 바꾸기 위해서 끊임없이 작업을 하는 동안도 군대는 대규모로 이동하고 있었다. 전쟁 초기부터 좋은 철도를 갖고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러한 불운을 한탄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은 좋은 철도를 통해 군대의 집결이 아주 쉽고 빠르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국경지대를 통하여 10일이나 12일 이내에 200만 명의 군사를 보낼 수 있다. 민첩하게 군사력을 집중시킬 수 있으므로, 전쟁에서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반면에 우리의 부대는 느린 속도로 집결함으로써 물리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다른 한편으로 적국은 기다리지 않았으며, 우리는 손에 든 것만 가지고 전투에 임해야 했다. 이런 연유로 우리가 패배를 당하게 된 것이다."

러시아군의 이동은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시베리아 횡단 철도는 1891년 공사가 시작된 이래 13년이 지나도록 전 구간이 완공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문제가 되는 곳은 바이칼 호수였다. 강의 둘레만 해도 2100킬로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호수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가로막고 있었다. 바이칼 호 주변을 따라 순환 철도를 건설하기 전에는 철도가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었다. 바이칼 호를 마주 보며 중단된 철도를 잇기 위해서는 특별한 대책이 필요했다. 러일전쟁 전에는 바이칼 호를 가로지르는 열차 페리가 운행됐다. 호숫가에 도착한 열차는 선착장에 대기하고 있던 페리 안으로 옮겨졌다. 바이칼과 앙가라라는 이름의 페리가 운행됐는데 이 중에 더 큰 것은 바이칼이었다. 페리 바이칼은 열차 25량과 승객 200명, 750톤의 화물을 싣고 약 세 시간 반에서 네 시간 동안 호수 건너편의 철도 연결 지점을 향해 항해했다.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사람들이 바이칼 호 앞에서 어떤 난관을 겪었는지 직접 경험담을 들려줄 이가 있다. 러일전쟁이 벌어지기 1년 전인 1903년, 영국인 조지 린치는 일본과 조선, 중국과 러시아를 잇는 대장정에 나선다. 타임스와 인디펜던트지의 특파원을 지낸 언론인이었던 조지 린치는 파도로 일렁이는 근대사의 한복판을 여행하면서 기록을 남겼다. 그중 조지 린치가 바이칼과 만난 장면을 보자.

"바이칼 호수를 건너는 일은 태평양 연안에서 모스크바에 이르는 기나긴 여로에서 만나는 가장 큰 난관이다. 새로운 철도노선이 여행자에게 즐거움을 보탤지 의문스럽다. 겨울 여로에서는 썰매를 7시간이나 타야 한다."(제국의 통로, 글항아리)

바이칼 호수의 증기선 선착장은 특이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길게 댐처럼 둑이 쌓여 있고 그 위에 철로가 놓여있었다. 철둑길은 선착장 끝의 바다처럼 보이는 호수와 맞닿은 곳까지 이어졌다. 열차 페리는 갑판을 이 선착장 철둑길에 붙이는데 그 위치가 정확히 맞아야 했다. 그래야만 갑판 아래 설치된 차고의 선로와 선착장의 선로가 이어져 열차를 육지에서 배로 이동시킬 수 있었다.

겨울이 다가와 바이칼 호수가 얼어붙게 되면 열차 페리는 쇄빙선 기능을 가동시켜 얇은 얼음을 깨고 운항했다. 그러나 겨울이 더 깊어져 얼음의 두께가 두꺼워지면 운항은 중단됐다. 대신 말이 끄는 썰매를 타고 이동했는데 여행자들은 혹독한 추위를 견뎌내야만 했다. 얼음 호수 위에는 약 6.5킬로미터마다 몸을 녹일 수 있는 작은 휴게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휴게소에서 몸을 녹인 뒤라도 바이칼 얼음 위에서 강풍을 맞은 사람들은 단 몇 초 만에 몸을 움츠려야 했다.

조지 린치는 초겨울에 바이칼 호수에 도착했다.

"정오에 쇄빙선이 미소바야를 출발했다. 이 배에 열차 3량이 실렸다. 두께가 2피트쯤 되는 얼음이 배가 지나가면서 뒤집히고 잠기고 했는데, 정말이지 대단한 구경거리였다. () 수를 건너는 데는 정확하게 네 시간 걸렸다. 보통은 이보다 좀 더 걸린다고 한다. 강한 바람에 배가 마구 흔들려, 그때마다 러시아인 여객들은 큰 공포감에 질리곤 했다."

러일전쟁으로 철도의 역할이 절박해지자 러시아는 바이칼 호의 얼음 위에 직접 선로를 깔기 시작했다. 얼음이 녹기 전까지 임시로 운용된 바이칼 호수 횡단 철도는 썰매보다는 효율적이었지만 한계가 분명했다. 얼음이 깨지지 않도록 해야 하기 때문에 속도를 내기도 힘들고, 많은 짐을 실을 수도 없었다. 아예 동력을 제거한 채 말로 견인하는 경우도 있었다. 아무리 두껍게 보이는 얼음일지라도 자연의 섭리에 의해 해동의 기운이 전달되면 가차 없이 열차를 집어삼켰다. 얼음이 녹는 시기가 다가오면 호수를 건너는 이들은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쿠로파트킨 장군의 이어지는 증언이다.

"힐코프 왕자는 바이칼 호수의 얼음 위에 철도를 놓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많은 기차들이 지나가게 했다. 그러나 1904년 3월 9일 나에게 연락이 왔다. 잦은 기온의 변화로 인해 큰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얼음은 몇 군데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서 철로가 가라앉을까봐 두렵고, 따라서 항상 안전한 얼음이 있는 장소를 찾아 철로 방향을 바꾸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쿠로파트킨 사령관은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맞보고 싶은 군인다운 유전자를 갖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철도의 정상적 운행을 간절히 원했을 것이다. 장군은 조국의 서쪽 끝 수도에 있는 황제에게 답답함이 가득 담긴 편지를 썼다.

"전하 () 전장에서 우리 군단의 재정비를 위해서는 적어도 매 24시간 마다, 복선 철도를 통해 30대의 군용 기차를 사용하여야 한다고 되어있습니다. 소기의 목표 달성을 위한 일차적 방법으로 본인은 시베리아와 동부 중국의 철도 상태를 가능한 한 빨리 개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11월 8일 접수한 전갈문에서 국방장관은 10월 28일부터 시베리아와 바이칼 횡단 복선철도 운행이 가능하며, 매일 14대의 기차가 복선 철로로 신속히 도착할 수 있도록, 시베리아의 모든 일반 철도가 가동될 것이라고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재무장관 역시 시베리아와의 연결을 위해 동부중국 철도를 가능한 한 조속하고 원활히 운행해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약속에도 불구하고 본인은, 몇 달이 지났으나 약속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을 지적해야만 했고, 지극히 시급한 문제이기 때문에, 다시 한 번 되풀이하여 의견을 표명하건대, 시베리아 복선철도의 매일 14대의 기차 운행과, 하얼빈까지 동부 중국 철도로 18대의 기차 복선철도 운행작업이 시급하다고 생각합니다. 전시에는 군이 필요로 하는 것들은 수없이 많고 또한 다양합니다.()"

러시아 1차 혁명의 열기, 황제를 일본 앞에 무릎꿇게 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니콜라이 2세 전하는, 최전선에서 복무하는 군사령관의 호소 외에도 들어야 할 것이 많았다. 1904년 말 바이칼 호수 위에서 러시아군이 일본군이 아닌 동장군에 맞서 고전하는 동안, 수도에는 정치적 '봄'이 찾아왔다. 자유주의자들이 중심이 되어 민주화를 요구하는 열정적인 연설을 하는 '연회운동'이 시작되었는데 우리나라로 치면 독립협회가 주관한 만민공동회와 비슷한 형식의 대회였다. 여기에 의사노조와 교사노조를 비롯한 전문직 종사자와 산업 노동자들도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새로 밝아오는 1905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전에 볼 수 없었던 이상한 열기로 가득 찼다.

도저히 정상적인 삶을 유지 할 수 없다고 생각한 노동자들은 한 특별한 사건을 계기로 새해부터 거리로 나왔다. 1905년 1월 22일, 러시아력으로는 1월 9일인 이날은 일요일이었다. 1만3000명을 고용하고 있던 상트페테르부르크 최대의 푸틸로프 공장에서 4명의 노동자가 해고되었던 사건 때문이었다. 이들 해고 노동자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노동자조합의 조합원이었기 때문에 노동자조합이 해고를 막기 위해 나선 것이다. 노동자들은 4명의 해고 문제가 공장 전체 노동자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나아가 상트페테르부르크 모든 노동자의 문제라고 여겼다. 시 전체 노동자들은 부당 해고를 막기 위한 방법으로 파업을 결의했다. 자동차 공장에서 수천 명이 강제로 내쫓기는데도 남 일 보듯 한 21세기 (일부) 한국인들에 비하면, 단 4명의 해고자를 위해 기꺼이 소매를 걷은 20세기 초 러시아인들의 기백은 대단했다.

약자가 강자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약자가 단결하여 다수를 이루는 길이다. 노동자들은 자연스럽게 깨달은 바를 실천하고자 나섰다. 이때 해결사를 자처하는 자가 나타났다. 이 해결사는 무력시위나 파업을 하기 전 은혜로운 인민의 아버지, 차르(황제)이신 니콜라이 2세 전하에게 읍소를 하러 가자고 했다. 노동자들이 억울함을 호소하면 자애심이 깊은 황제께서는 은총을 내려 해결책을 주실 것이라고 설득했다. 해결사의 중재에 따라 공장노동자조합은 투쟁의 방법을 변경해 왕궁까지 평화 행진을 하기로 결정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거리를 메운 주최 측 추산 14만8000명의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은 니콜라이 2세에게 청원을 하러 가겠다며 정성스럽게 쓴 청원서를 들고 왕의 거처인 겨울궁전으로 향했다. 이 대열을 이끈 사람은 성직자인 가폰 신부였다. 권력과 결탁한 종교 지도자들이 그렇듯이 가폰을 위선적인 인물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으나, 노동자의 이익과 정권의 의지를 조화시킬 수 있다고 진지하게 믿는 사람이었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위선적이든 허황한 가설을 진지하게 믿든, 그런 상황에서는 노동자들에게 해가 되는 건 마찬가지다. 가폰은 노동자들을 '러시아 공장노동조합'에 가맹시켰다. 러시아 공장노동조합은 정권과 경찰의 호위 속에서 만들어진 어용노조였다. 노동자들을 신의 가호로 구원하고 황제에게 충성을 다하는 인간형으로 만들기 위해 활동하는 조직이었다.

사회주의자들은 청원 따위로는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며 강력한 거리 투쟁과 파업을 호소했지만 귀담아듣는 이는 거의 없었다. 1월 22일 행진 대열에 낀 상당수 노동자는 니콜라이 2세에 대한 충성심을 갖고 있었다. 가폰은 노동자들을 이끌면서 이들의 에너지가 끓어 넘치지 않도록 자제시키는 데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하지만 가폰이 노동자들의 목에 두른 복종의 쇠사슬들은 조금씩 균열을 보이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은 군주의 자식이라는 의미로 황제의 대형 초상화를 들고 있었다. 행진대열이 겨울궁전에 가까워지자 경찰이 저지선을 쳤고 군대는 기관총을 겨눴다. 아버지가 자식을 향해 총구를 들이민 격이었다. 경찰과 군인의 무차별 총격이 벌어졌다. 달아나는 노동자들의 등 뒤로 채찍질을 가하는 기마경찰들과 칼을 휘두르는 카자흐 기병대의 활약도 빼놓을 수 없었다. 아버지이신 황제는 노동자들을 반란자로 다루라고 군대에 명령했다. 반란자에게 돌아갈 몫은 죽음밖에 없었다. 아비규환 속 겨울궁전 앞 광장은 피바다가 되었다. 1905년 러시아 혁명의 도화선이 된, 피의 일요일이라 불리는 날이었다.

겨울 궁전 앞에서의 총격 사태로 노동자들은 황제의 실체를 깨달았다. 황제는 더이상 자애로운 인민의 아버지로 여겨지지 않았다. 시위의 물결은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며 들불처럼 번졌다. 노동자와 학생은 파업을 벌였고 농민이 가세했으며 군까지 반란을 일으켜 인민의 편이 되었다. 1차 혁명이라고도 불리는 1905년의 러시아 혁명은 러일전쟁 후반기 내내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를 비롯한 러시아 곳곳을 흔들었다. 일본은 왕에 대한 충성심과 국가주의로 백성들을 장악해 러시아에 맞섰지만, 러시아에서는 전쟁이 인기가 없었다. 러시아 곳곳에서 반전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한술 더 떠 자국 정부의 패배를 주장했던, 볼셰비키라 불리는 소수의 사람들도 있었다.

"이 전쟁은 러시아와 일본 인민의 이익을 위한 전쟁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차르 전제와 러시아 제국주의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 제국주의와 지배 계급의 이익을 위해 치러지는 전쟁이므로 인민에게 전쟁의 부당성을 설명하고 전제와의 투쟁을 가속화시켜야 한다"고 울리야노프란 본명 보다 레닌이라는 가명이 훨씬 익숙해진 혁명가는 말했다.

러시아의 국가적 에너지는 휴대폰의 배터리 잔량 경고처럼 붉은색으로 반짝이며 곧 소진될 것을 알리고 있었다. 1904년 10월 15일 러시아의 마지막 희망이었던 북유럽의 발트 함대가 이름을 '제2태평양 함대'로 바꾸고 라트비아의 리바우 기지를 떠났다.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이 이끄는 러시아 함대가 유럽과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거쳐 동해에 나타난 것은 항해를 시작한 지 7개월이 지난 5월 26일이었다. 영국의 봉쇄로 수에즈 운하를 통과할 수 없었기에 지구 반 바퀴를 돌아야만 했다. 수병들은 장기간의 항해에 지쳐있었고 당연히 제대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함대 규모는 일본 해군에 비해 훨씬 컸지만 배의 성능은 따라가지 못했다. 결전을 준비하며 기다렸던 일본 연합 함대는 조선의 경상도 진해 해군기지를 출발해 5월 27일 대한해협을 지나 쓰시마 섬 앞바다에서 러시아 함대와 마주 섰다. 일본 해군 사령관 도고 제독이 제국의 운명이 걸렸다는 명령을 함대에 하달하는 것으로 동해해전이 시작됐다. 이미 힘이 방전된 러시아 함대는 궤멸하였고 거인 러시아는 링 바닥에 누워 카운트가 끝나가도록 일어나지 못했다.

이제 일본은 우승컵을 떠안아야 했다. 일본은 우승컵 수여자를 물색하다가 살갑게 접근하는 미국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미국은 일본이 청에 이어 러시아를 굴복시키고 동아시아의 새로운 맹주로 일어서는 모습을 보았다. 이미 일본의 영향 아래 있는 조선을 넘기고 필리핀을 차지하는 게 이익이라는 계산을 끝낸 터였다. 시상식은 1905년 7월 29일 도쿄에서 조용히 열렸다. 미 육군 장관 월리엄 하워드 태프트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일본제국 내각총리대신 가쓰라 다로에게 조선을 수여했다. 손을 마주 잡은 두 사람의 얼굴에는 제국주의의 득의양양한 미소가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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