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동차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총 230억 원을 청구하는 손해배상 소송을 걸어 놓고, 노동조합 탈퇴자나 근로자지위확인소송 취하자에게만 선별적으로 소를 취하해주는 방식으로 노동조합을 무력화했다는 사실이 27일 확인됐다.
현대자동차가 323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1심 재판부는 최근 70억 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이 판결 전후로 119명의 비정규직에 대한 소송을 현대차가 취하했다는 것이다. 현대차의 소 취하 대상이 된 119명 가운데 118명이 노조 탈퇴자다.
기업이 노동자의 파업 등 쟁의행위에 대해 천문학적인 액수의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해, 노동조합의 활동을 옥죄는 일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 소송에 조합원 개인까지 대거 끌어들였다가, 노조 탈퇴 등을 조건으로 소를 취하해주는 행태가 구체적인 통계로 확인된 것은 처음이다.
이는 기업이 손해배상 소송을 '이중의 무기'로 활용하고 있음이 드러난 것이다. 노조 활동을 위축시키는 데 사용하고, 나아가 개별 조합원의 노조 가입과 탈퇴라는 선택까지 쥐고 흔들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런 행위가 "헌법과 노동조합및노동관계조정법에서 금지하는 부당노동행위에 해당한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이같은 이유로 전국금속노동조합 현대자동차비정규직지회는 27일 정몽구 현대차 회장과 현대자동차 등을 검찰에 고발했다.
323명 상대로 대규모 손배소 벌였던 현대차, 3분의 1만 골라 취하해준 까닭은?
현대차의 비정규직 불법파견에 대해 법원은 2010년부터 잇따라 제동을 걸고 있다. 현대차 비정규직이 제기했던 불법파견 소송에서 대법원이 최종적으로 노동자의 손을 들어준 이후, 현대차 불법파견 문제는 1000여 명의 집단소송이라는 또 다른 법정 투쟁으로 진행되고 있다.
현대차 비정규직은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2010년 25일 간의 공장 점거 파업을 벌였고, 이와 관련해 현대차가 비정규직지회 등에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은 모두 7건, 청구 액수만 무려 213억 원에 달한다. 이 가운데 1심 판결에서 확정된 손해배상 액수는 184억 원이다.
가장 최근에 나온 판결이 지난 10월 23일 있었던 울산지방법원의 70억 원 선고다. 특히 이 소송은 현대차가 노조 집행부뿐 아니라 일반 조합원까지 대거 청구 대상자에 포함시켜 관련 인원만 323명에 달한다.
그런데 이 소송의 피고로 포함됐다가 현대차의 선별적인 '소 취하'로 제외된 이들이 119명이다. 최초 인원의 무려 3분의 1이나 된다.
현대차는 왜 이들만 '골라서' 소를 취하해줬을까? 금속노조 현대차비정규직지회는 "현대차가 노동조합을 탈퇴하고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을 취하하거나 회사의 신규채용에 응하는 노동자들에 한해 선별적으로 소취하를 했다"고 주장했다.
회사가 소 취하해 준 119명 중 118명이 노조 탈퇴자…"현대차, 하청업체 관리자 동원해 '거래'"
노조가 이날 검찰에 제출한 '정몽구 회장과 현대자동차, 윤갑한 현대차 대표이사에 대한 고소·고발장'을 보면, 현대차가 손해배상소송을 취하해 준 119명 가운데 118명은 모두 노동조합을 탈퇴한 이들이다. 또 이들 중 97명은 노조 탈퇴와 더불어 지난 2010년 1000여 명이 함께 제기한 근로자지위확인 집단소송을 취하했다.
각각의 소 취하 시점을 보면, 현대차의 '대가성'은 보다 뚜렷하게 나타난다. 비정규직 노동자 개인이 먼저 '정규직 인정 소송'을 취하하고 나면, 현대차가 손배소 소송을 취하해준 것이다.
심지어는 지난 10월 나온 1심 판결에서 손해배상 책임이 인정됐지만, 현대차가 관련 소를 취하해 준 인원도 43명이나 된다. 한 마디로, 법원이 회사의 손해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본 이들마저도 노동조합을 탈퇴하는 등 회사의 '조건'을 수용하면 소를 취하해준 것이다. 노조는 이런 '거래'가 "하청업체 관리자들을 회사가 동원해 개별면담을 진행한 결과"라고 주장하고 있다.
금속노조 현대차비정규직지회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손해배상이라는 무기로 노동자의 기본권마저 포기하도록 협박하고 있다"고 비판한 이유다.
천문학적인 액수의 손배해상 소송이 개별 노동자에게 작용하는 압박감은 지난 11월 6일 자살을 시도했던 현대차 울산공장의 성모(38) 씨의 사례에서도 알 수 있다.성 씨는 지난 10월 나온 이른바 '70억 손배 판결'에서 대상자에 포함됐다. 그리고 2주 만에 "저 너무 힘들어 죽을랍니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을 시도했던 것이다.현대차비정규직지회는 "성 씨와 함께 노조 활동을 하고 친하게 지냈던 동료가 얼마 전 노조를 탈퇴하고 신규채용에 응시해 정규직이 됐는데 현대차는 이 동료에게 걸었던 70억 원 손해배상을 취하했다"며 "성 조합원은 손해배상을 무기로 동료 조합원을 이간질하고, 비정규직을 협박해 노조를 탈퇴시킨 현대차에 깊은 배신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관련 기사 보기 : 현대차, '70억 손배'와 '불법 파견' 맞바꾸나?)
"현대차, 손배소로 '파업 피해' 받아낼 목적이 아니라 노조 파괴 수단으로 사용"
이날 노조가 내놓은 분석 자료는 이른바 '70억 손배소'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현대차가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 가운데 단일 사건으로 가장 규모가 큰 것은 90억 소송이다.
이 소송은 지난해 12월 1심 판결이 나왔다. 당시 법원은 현대차의 청구액 90억 원을 모두 인정해 90억의 배상액을 선고했다. 이 재판의 2심 선고가 오는 12월 3일 예정돼 있다. 비정규직지회 외 18명을 상대로 한 이 재판에서도 현대차는 근로자지위확인소송 취하자에 한해 손배소를 취하해준 사례가 있다.
오민규 전국비정규직노조연대회의 정책위원은 "회사의 손배해상 소송이 파업으로 인한 손해를 진짜 받아낼 목적이 아니라 노조 파괴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고 비판했다.
또 이런 행위가 현행 노조법이 금지하고 있는 △불이익 취급의 부당노동행위, △지배·개입의 부당노동행위라는 지적도 제기된다.
노조는 이날 낸 고발장에서 "노동조합원인 것을 이유로 불이익을 주거나 노동조합의 불법파견 정규직화 요구에 따라 이뤄진 집단소송 진행을 부당하게 방해하는 행위는 노조법 제81조 부당노동행위 1호와 5호에 위반된다"고 주장했다.
또 이들은 "천문학적인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고 유지하는 목적이 회사의 영업손실을 보전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노동조합을 무력화하고 근로자의 법적 대응을 방해하기 위한 것"이라며 "이런 악용은 노조법 제81조 4호의 '지배개입' 부당노동행위에 해당한다"고 강조했다.
현대차는 2012년 8월 이후, 현대차비정규직지회에게 또 다시 8건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고, 그 청구 액수는 18억9000만 원이 넘는다. 2010년 파업과 관련해 현대차가 제기한 소송까지 합치면, 현대차가 비정규직지회 등을 상대로 낸 손배소의 총 청구액은 230억 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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