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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년 만에 끝나고 있는 '서세동점'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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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200년 만에 끝나고 있는 '서세동점'의 시대

[김기협의 자본주의 이후]<3> 이젠 '자본주의 이후'를 고민할 때

농업문명 발생 이후 유라시아 대륙 중위도지대가 문명 발전의 주무대가 되었다. 기술 수준이 유치한 단계에 있던 초기 농업에는 자연 식생이 너무 왕성한 아열대 지역도, 태양광이 적은 고위도 지역도 적합하지 않았다. 중위도의 온대 지역을 따라 대륙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지형 조건이 적합한 곳에 여러 초기 문명이 자리 잡았다.

초기에는 문명 간 접촉이 원활하지 않았지만, 대륙 안에서는 자연의 절대적 장벽이 없었기 때문에 천천히 조금씩이라도 교류가 이뤄졌다. 중요한 기술 발전은 얼마간 시차를 두고라도 대륙 전체에 퍼지게 되어 있었다. 문명 발전에 따라 접촉이 늘어나고 기술 전파의 속도도 빨라지게 된다. 역사학계에서 통상 '중세'라 부르는 시대에는 한자권-힌두권-이슬람권-기독교권의 몇 개 문명권이 형성되어 있어서 같은 문명권 안에서는 지속적 교류가 진행되고 인접한 문명권 사이에는 간헐적 접촉이 이뤄지는 반면 멀리 떨어진 문명권 사이에는 접촉이 거의 없는 상태가 꽤 오래 계속되었다.

문명권 사이의 이 평형 상태가 13세기에 크게 깨어졌다. 이슬람 통치자들이 힌두권의 중심부를 다스리는 델리 술탄국이 자리 잡았고, 몽골인의 정복 사업이 유라시아 대륙의 태반을 휩쓸었다. 한자 문명권과 이슬람 문명권에서 중세체제를 뛰어넘는 기술 발전이 이뤄진 결과 나타난 현상이었다. 이 거대한 정복 사업을 통해 문명권 간의 기술 전파가 전례 없이 활발하게 진행되기 시작했다.

13-14세기의 격동기가 지난 후 한자권과 이슬람권은 명-청 제국과 오스만 제국을 중심으로 한 비교적 안정된 체제로 돌아갔다. 반면 서쪽 끝의 기독교권은 14-15세기 흑사병으로 인한 인구 격감 후 더 근본적인 사회경제적 변화를 겪은 끝에 산업혁명에 이르게 된다. 그 결과 빚어진 '근대 문명'이 19세기 이후 세계를 휩쓸게 된 현상을 '서세동점'이라 한다.

이슬람 선진 문명 앞에 수백 년간 위축되어 있던 유럽인이 외부로 활동을 넓히기 시작한 것이 15세기 말 이후의 '대항해 시대'였다. 항해술을 포함한 유럽인의 기술은 아직까지 유치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아프리카대륙 남부와 아메리카대륙의 기술 수준이 낮은 사회들을 정복하면서 확보한 자원을 발판으로 인도양에 진출, 세계를 일주하는 항로를 확보했다.

16세기 중에 세계 일주 항로를 확보하기는 했지만 유럽인의 힘이 다른 기존 문명권에 정면으로 도전할 단계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 기존 문명권의 주변부에 조그마한 거점들을 만들고 그 사이의 항로를 확보하는 '점(點)과 선(線)'의 해상 제국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무기와 항해술의 집중적 개발이 해상 제국을 겨우 뒷받침해 주었을 뿐이었다.

산업 혁명으로 무기와 상품의 대량 생산에 따라 기존 문명권과 정면 대결이 가능하게 된 것은 19세기 들어서의 일이었다. 19세기 중엽까지 힌두권이 제일 먼저 유럽인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19세기 후반에는 한자권과 이슬람권의 공략이 계속되었다. 20세기로 넘어올 무렵에는 전 세계가 유럽 열강들의 식민지나 영향권으로 편성된 결과 열강들 사이의 상호쟁탈전이 벌어지는 제국주의 시대가 펼쳐지게 되었다.

정복자들의 첫 번째 요구 : '개항'

동아시아 한자 문명권은 근대 문명을 일으킨 유럽으로부터 가장 먼 곳에 있었고, 또한 기존 문명권 중 가장 강고한 체제를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 19세기 중엽 산업혁명을 통한 부국강병의 효과가 충분히 자라난 뒤에야 한자권에 대한 공략이 시작되었다. 한자권의 끄트머리로 유럽인의 활동영역에 제일 가까이 있던 코친차이나(베트남 남부)에 프랑스의 통치가 시작된 것이 1859년의 일이었다. 그 밖의 한자권 지역에 대해서는 '개항' 요구 수준의 공략이 19세기 말까지 계속되었다.

'개항' 요구는 경제적 공략을 위한 것이었다. 유럽인은 대항해 시대 이래 중국과의 무역 역조에 내내 시달려 왔다. 비단, 차, 도자기 등 중국의 고급 상품에 대한 유럽인의 수요는 경제발전과 함께 꾸준히 자라난 반면 중국인에게는 유럽 상품에 대한 수요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신대륙에서 캐낸 막대한 분량의 은이 중국으로 흘러들어가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아편전쟁은 이 무역 역조를 줄이려는 영국의 노력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

▲아편전쟁.
두 차례 아편전쟁(1839-1842, 1856-1860)으로 중국의 완전한 개항이 이뤄졌다. 이에 따라 유럽 상품이 쏟아져 들어오며 중국 시장의 모습을 바꿔 나가는 가운데 가장 앞장선 품목은 전함과 대포 등 군사장비였다. 제2차 아편전쟁 후 시작된 양무운동은 '군사 현대화'를 중심으로 펼쳐졌다. 비슷한 시기에 메이지유신으로 근대화를 시작한(1868년부터) 일본과 중국 사이에 군사력을 중심으로 근대화 경쟁이 벌어졌고, 일본의 청일전쟁(1894-1895) 승리로 '근대화'가 동아시아지역에서 절대적 과제로 확립되기에 이르렀다.

동아시아의 이웃들보다 자발적으로 근대화에 나선 일본은 청일전쟁 승리를 계기로 열강 대열의 끄트머리에 합류하고 제국주의 경쟁에 나섰다. 당시 제국주의 경쟁의 최대 표적은 중국이었고, 일본은 중국에 가까운 위치 덕분에 이 경쟁에서 상당한 이점을 누릴 수 있었다. 승리에 도취한 일본인에게 근대화의 과제는 종래의 '화혼양재(和魂洋才)'에서 '탈아입구(脫亞入歐)'의 단계로 넘어가기에 이른다.

패자인 중국이 받은 충격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청일전쟁 직후에 일어난 변법운동에서 시작해 1900년대의 공화제운동과 1910년대의 신문화운동으로 나아가는 동안 전통문명을 부정하고 서양 근대문명을 받드는 분위기가 갈수록 심화되었다. 1920년대에 시작된 공산주의운동도 그 연장선을 벗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중국과 일본의 영향력이 엇갈리는 위치에 있던 조선은 이웃 두 나라의 사정을 살피며 간접적으로 개화, 즉 근대화의 필요성을 감지하게 되지만 국가체제가 심하게 이완되어 있어서 능동적 대응에 실패하고 청일전쟁 후 일본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아관파천(1896) 이후 러시아의 힘으로 일본을 견제하며 대한제국을 선포하기도 했지만 사회경제적 변화는 일본이 이끄는 방향으로 계속 진행되다가 러일전쟁(1904-1905) 이후에는 일본의 전면적 통제 아래 들어가고 뒤이어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유럽인이 이룩한 근대 문명의 본질은 산업혁명의 성과를 자본주의 체제를 통해 확장해 나가는 데 있었다. 자본주의 체제의 확장은 미개발 자원(인력과 물자)의 편입을 필요로 했다. 산업화에 먼저 성공한 나라들은 산업화를 이루지 못한 지역의 미개발 자원을 놓고 경쟁을 벌였고, 이 경쟁이 지구 전체로 확대되면서 경쟁의 구조가 입체화되었다. 착취당하는 입장에서 세계 시장에 편입된 일부 지역이 근대 문명을 내재화하면서 2류 열강의 대열을 형성한 것이다. 19세기 말까지 일본이 미국, 러시아와 함께 이 대열에 합류했다.

유럽에서 형성된 근대 문명은 산업화와 자본주의 체제 외에도 많은 요소들을 품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 지구적 확장과 서세동점 현상의 추동력은 바로 이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의 원리에 있었다. 이 원리가 근대 문명의 다른 요소(민주주의와 인권사상 등)에도 큰 영향을 끼쳤으므로 이것을 근대 문명의 가장 본질적 요소로 볼 수 있다.

'근대화'에도 상류가 있고 하류가 있다

2류 열강의 대열에도 들지 못한 사회에서는 주변에 있는 2류 열강의 상대적 성공에 대한 선망이 크게 일어났다. 중국과 한국의 많은 지식인이 일본을 모델로 한 근대화를 추구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이 추세에 겹쳐진 것이 매판세력의 발흥이었다. 자본주의 열강은 효율적 착취를 위해 자기네가 원하는 방식의 근대화를 선전하면서 이에 호응하는 매판세력을 착취 대상 사회 안에서 육성했다. 식민지시대 한국의 친일파가 이런 매판세력이었다.

매판세력을 중심으로 한 식민지사회의 재편도 넓은 의미에서 자본주의 체제의 내재화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2류 열강, 즉 일본의 자본주의 체제 내재화에 비해 낮은 층위의 것이었다. 일본은 선진 열강에게 이용당하는 입장이면서도 주변의 저개발 사회에 대해서는 착취하는 입장에 섰는데, 한국의 식민지 자본주의는 철저히 착취당하는 입장이었다. 뉴라이트가 주장하는 '식민지 근대화'의 한계가 여기에 있다. 자본주의 세계 체제에 편입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착취 대상인 하부구조에 들어가 '개발 없는 성장'에 그친 것이다.

일본은 1904년 한국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한 후 '문명화'란 이름으로 자기네가 원하는 방식의 근대화를 한국에 추진했다. 초기에는 종래 조선(대한제국) 정부의 무능과 혼란에 대비되어 환영받는 면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착취의 속마음이 드러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결과 1919년 식민통치에 대한 거족적 저항이 일어났다. 그 후에는 매판세력 육성 정책이 강화되어 재계에서 학계에 이르기까지 친일파 조선인의 역할이 늘어났다.

제1차 세계대전 종료는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 각지 식민지인의 제국주의 세계체제에 대한 저항 운동의 계기가 되었다. 각지의 저항 운동은 두 개 방향으로 갈라졌다. 하나는 민족모순에 치중하여 이민족 지배를 벗어나는 데 주력하는 우익 민족주의 운동이었고 또 하나는 계급 모순에 착안하여 사회주의 혁명을 추구하는 좌익 공산주의 운동이었다. 좌익의 운동이 기존 체제에 대한 더 근본적인 저항을 바라본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냉전체제가 들어섰다. 주변부의 2류 열강으로 20세기를 시작한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1류 열강의 자리로 올라섰고, 제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패권을 장악했다. 한편 소련은 자본주의체제에 저항하는 좌익 운동을 규합하여 미국의 패권에 40여 년간 맞섰다.

냉전체제를 흔히 양극체제로 인식하지만 실제로는 단극체제의 성격이었다. 미국의 패권은 산업혁명 이래 근대 세계의 주축이 된 자본주의 체제를 통해 세계를 움직이는 힘을 가진 반면 공산권에서 소련의 패권은 방어적 성격을 가진 것으로서 그 통제력이 동유럽 공산권을 넘어서지 못했다. 소련의 역할은 미국의 '주적'이라기보다 '스파링 파트너'에 가까운 것이었다. (통일 전의 진나라가 패권 확장에 유리한 조건을 조성하기 위해 중원의 반대편에 있던 제나라를 설득해 동-서제(東-西帝)를 나란히 칭하던 상황이 냉전체제와 비슷한 것이었을지?)

남한은 식민지를 벗어난 직후 미국의 통제를 가장 엄격하게 받는 나라의 하나가 되어 반공을 '국시(國是)'처럼 여기며 냉전시대를 지냈다.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받든다는 점에서 '서세동점'의 논리에 세계 어느 사회보다 강하게 매여 있었던 것이다. 1987년 '민주화'를 성취하고 곧이어 세계적 냉전이 해소되면서 자본주의 논리가 한국 사회에 얼마나 깊고 강하게 내재화되어 있는지 전보다도 더 분명하게 확인되고 있다.

근대문명의 근본 모순은 '역사의 단절'에서

10-11세기의 중국과 12-13세기의 이슬람세계에서 자본의 역할이 크고 활발했던 사실이 확인되어 왔다. '탈(脫) 중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19세기 유럽의 자본주의와 비교해 보면 자본의 권력화 수준에 차이가 있었다. 자본이 일종의 권력으로 자라나기는 했어도 지배 권력이 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반면 19세기 유럽에서는 자본이 국가권력과 대등한 관계를 맺었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 국가의 첫째 의무가 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국가권력을 능가하는 수준으로까지 발전했다.

자본이 권력의 주인이 될 때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지, 고등문명을 가진 사회에서는 경험을 통해 이해하고 있었다. 중국의 경우 <사기> "식화지(食貨志)"나 <한서> "화식열전(貨殖列傳)"에 거부(巨富)의 권력화 사례들이 실려 있다. 진시황의 집권을 도와준 여불위(呂不韋)도 그런 예의 하나다. 산업 발전에 따라 자본의 역할이 아무리 커져도 자본의 힘이 국가권력을 벗어나지 않도록 끊임없이 주의를 기울인 것은 자본 권력화의 폐단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반면 근대 유럽에서는 그런 견제가 없었다.

자본 권력화는 어떤 문제를 가진 것인가? 돈의 힘에 억제가 없을 때 일어나는 현상은 주먹의 힘이 억제 받지 않는 상황과 비슷하다. 벌거벗은 힘이 날뛰는 '정글' 상태는 인간의 이성을 위축시킨다. 문명사회의 항상성(homeostasis)을 유지하는 지혜가 작동하지 못하면서 머지않아 파국을 맞게 된다. 진화의 법칙으로 보면 도태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19세기 유럽의 근대 문명은 어째서 도태되기는커녕 세계를 휩쓸고 2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 것일까? 기술의 획기적 발전 덕분이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기술 만능주의가 '테일러리즘(Taylorism)'이란 이름으로 세상을 풍미한 것이 그 까닭이다. 그러나 20세기 전반부에 양차 세계대전과 대공황을 겪으면서 기술 만능주의의 기세가 꺾였다. 그리고 20세기 후반 자원과 환경 문제가 전면적으로 제기되면서 역사의 무한한 진보에 대한 근대 문명의 믿음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1980년대 이후 미국이 주도한 신자유주의 노선은 자본주의 체제의 타당성에 대한 회의론을 물리치기 위한 정면돌파 전략이었다. 공산권과의 승부를 자본주의 체제 성공의 시금석처럼 부각시키는 한편 공산권의 '미개발' 자원(인적-물적)을 자본주의 시장에 추가함으로써 모순을 이어갈 여지를 늘린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자본주의 체제의 수명을 연장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2008년의 미국 발 금융 공황은 체제의 한계를 다시 알려주었다.

20세기 초에 닥친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는 제대로 극복되지 않은 채 미봉책으로 넘어갔다. 미봉책의 핵심이 저유가 체제였고, 무리한 저유가 체제는 냉전 체제의 압력으로 유지되었다. 20세기 말에 다시 닥친 위기는 앞서의 미봉책이 한계에 부딪친 결과였고, 이번에는 전번만큼 효과적인 대응책도 찾지 못하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는 19세기에 자리 잡은 이래 어느 때보다도 큰 조정을 하든가, 아니면 다른 체제에 자리를 내어줘야 할 단계에 이르렀다. '자본주의 이후'를 고민해야 할 때다.

'근대 이후(postmodernism)'에 관한 이야기가 그 동안 많이 펼쳐져 왔다. 나는 그 까닭이 산업혁명에 의해 규정된 이른바 '근대'의 모순이 한계에 이른 데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포스트모던 담론은 '역사의 연속성'을 포괄해야 제 궤도에 오를 것이다. 근대는 역사의 연속성을 경시하는 경향을 보였다. 자본주의정신에 투철한 어떤 사람은 근대 이후의 이야기가 확산되는 한쪽에서 "역사의 종말"을 말하고 있지 않았던가.

19세기 유럽의 근대는 중세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멋진 신세계"를 찾았다. 근대의 모순을 심화시킨 하나의 큰 요인이 역사의 단절이었다. 전 세계가 산업화를 진행해 온 이제 중세 농업사회로 돌아갈 길은 없다. 하지만 중세, 특히 그 말기를 돌아볼 필요는 있다. '중세 이후'를 모색하던 당시 사람들의 노력 중 중요한 의미들을 근대의 풍요와 격변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이 있다. 그 의미들이 '근대 이후'의 길을 찾는 데 중요한 참고가 될 것이다.

'중세 이후'의 모색에 가장 많은 노력이 쌓여있는 곳이 중국이다. 중국에서는 2000여 년 전 전국시대부터 자본주의적 경향에 대한 경계심이 나타났고, 1000여 년 전 당나라 말기부터 자본의 권력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21세기 들어 자본주의 체제가 말기적 증세를 일으키는 한쪽에서 진행되고 있는 중국의 '굴기(崛起)'의 바닥에는 이 지적 자산이 깔려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것을 '동세서점(東勢西漸)' 현상의 회복이라고 할 수 있을까?

중국 굴기의 의미에 대해서는 중국 밖에서 뿐 아니라 중국 안에서도 많은 해석이 엇갈리고 있다. 새로 일어나기 시작한 큰 현상이라서 인식의 혼란이 아직 가라앉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도 있겠지만, 다양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는 점이 더 기본적인 이유일 것 같다. 중세 말기에 '중세 이후'를 모색한 풍부한 지적 자산이 아마 중요한 요인의 하나일 텐데, 근대인의 눈으로는 제대로 살피기 어려운 것이므로 각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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