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통영과 욕지도를 연결하던 쾌속선의 이름은 샹그릴라호였습니다. 샹그릴라는 제임스 힐튼의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에 등장하는 낙원의 이름인데 ‘푸른 달빛의 골짜기’라는 뜻이지요. 유토피아, 파라다이스 같은 이상향입니다. 옛 사람들은 이상향을 섬에서 찾았습니다. 그 이상향의 여적이 이름에 고스란히 남아 전해지는 곳이 통영의 욕지도입니다.
12월 섬학교(교장 강제윤. 시인, 섬여행가) 제33강은 6(토)〜7(일)일, 1박2일로 통영의 욕지도로 향합니다. 한국에서 가장 푸른 바다를 가진 섬, 욕지도에서는 남태평양이 눈앞입니다. 통영의 환상, 욕지도로 가는 길은 이상향으로 가는 길입니다. 또한 다시 한해를 보내는 마음을 보듬으며 걷기 좋은 섬이기도 합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강제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송년특집> 욕지도에 대해서 들어봅니다.
연화장 세계를 알고자 하는가? 세존께 물어보라
통영은 섬나라다. 그래서 사람들은 통영을 ‘바다의 땅’이라 부른다. 통영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섬들이 모여 연화열도를 이룬다. 연화열도의 중심 섬인 욕지도는 그 중에서도 최고의 비경을 자랑한다. 통영항에서 32km, 한 시간 거리의 뱃길이다. 청보석의 바다와 점점이 떠있는 섬과 여들. 욕지도 바다의 풍경은 한편의 산수화를 방불케 할 정도로 아름답다.
욕지도는 주변에 크고 작은 섬들을 올망졸망 거느리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탁 트인 남태평양 바다와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다. 다도해의 소담함과 대해의 장쾌함을 동시에 맛볼 수 있는 흔치 않은 섬이다. 욕지도를 본섬으로 하는 욕지면은 10개의 유인도와 45개의 무인도를 거느리고 있다. 욕지도에 면소재지와 각종 관공서가 위치해 있다. 욕지도에는 2,000여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각종 욕지도 관광안내서에는 욕지(欲知)의 뜻을 ‘알고자 하는’으로 풀이해 놓고 있다. 무얼 알고자 한다는 말인가? 이것은 그냥 글자 뜻풀이일 뿐 욕지도란 이름의 진짜 의미를 풀이해 주지는 못한다. 욕지도의 뜻은 그 자체로는 결코 풀이될 수 없다. 욕지도 한 섬만으로도 풀이가 되지 않는다. 욕지도의 뜻은 주변의 다른 섬들, 연화도, 두미도, 세존도 등의 섬들과 연계될 때 비로소 실마리가 풀린다.
욕지도를 비롯한 이들 섬의 이름은 “욕지연화장두미문어세존(欲知蓮華藏頭尾問於世尊)”이라는 불경 구절에서 따온 것이기 때문이다. “연화세계(극락세계)를 알고자 하는가? 그 처음과 끝을 부처님께 물어보라.” 옛날 욕지도를 비롯한 연화열도의 섬들은 스스로 이미 연화세계를 이루고 있었다. 이들 이름은 불국토, 이상향을 염원하는 누군가의 기획 하에 지어진 것처럼 아귀가 맞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이름의 섬들이 통영 바다에만 몰려있을까. 근처의 미륵도와 반야도 또한 이 불국토의 자장 안에서 지어진 이름이리라.
아이가 늙도록 섬을 못 떠나고
욕지도 제암마을, 언덕빼기 청보리밭에서 할머니 혼자 보리를 베고 있다. 보리 베는 풍경이 그림 같아 할머니의 뒷모습을 찍었다. 찰칵 소리가 난 것도 아닌데 인기척을 느끼셨는지 할머니가 뒤를 돌아본다.
"저 찍었어요?"
"네, 너무 귀한 모습이라 허락도 없이 찍었습니다."
"못생긴 얼굴을 뭐할라꼬. 예쁜 모습 찍어야 되는데."
"고우신데요 뭘."
"혼자 오셨는가예?"
"예"
"혼자 오면 외로울 낀데."
보리는 아직 익지도 않았는데 어째서 벌써 베는 걸까?
"왜 벌써 보릴 베세요?"
"소 먹일라꼬 그랍니다."
할머니는 소 세 마리를 키우신다. 소먹이로 보리를 심은 것이다. 청보리 순은 연해서 소 먹이로 적당하다. 생으로도 먹이고 말려뒀다 먹이기도 한다. 욕지도에는 고구마가 가장 흔한 작물이다. 그러니 수확이 끝나면 고구마순도 말렸다가 겨울에 소먹이로 쓴다. 할머니는 어제 마을 어른들과 함께 관광을 다녀왔다. 경주에 갔다가 내친 김에 포항까지 들렀다가 왔다.
"시간이 없어서 차만 댓다가 왔어요. 안 가본 데라 한번 갔어요."
경주나 포항 사람들은 욕지도로 관광 오고 욕지 사람들은 경주나 포항으로 구경을 간다. 하지만 별거 있으랴.
"구경이 어디 별거 있습니까. 다 거기가 거기고."
그렇긴 하다. 안 가본 곳을 가면 그것이 여행이고 관광인 것이지. 할머니는 욕지도에서 태어나 욕지도 남자와 결혼해 내내 살았다.
"저 산 너머 덕동마을이 고향입니다. 산 너머 고개 넘어 시집 왔으니 멀리 왔지요."
농담처럼 말씀하시지만 어디 고개 하나만 넘어 왔으랴. 삶이 내내 고갯길이었을 것을. 딸들은 서울에 산다.
"대학교를 거기서 나와서 안 내려와요."
하지만 할머니는 욕지도가 제일 좋다.
"다 다녀 봐도 여가 젤로 좋아요. 제집이 제일이죠."
섬이지만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두 분이서 내내 농사만 짓고 살았다. 농사만 지어 자식들 가르치자니 힘들었다. 이 마을에도 젊은 사람이 없다. 50대가 가장 어리다. 과거 욕지도는 어업전진기지였다. 배를 부리는 사람들은 큰돈을 벌었다. 섬이지만 육지 문물이 일찍부터 들어왔고 상업도 발달했다.
"이 섬이 그냥 웃기는 섬이예요. 사는 것은 그저 그런데 하고 다니는 거보면 입는 거나 먹는 거나 서울사람 못지않아요. 명품을 어찌나 좋아하는지."
지금은 예전만큼 경기가 좋지 않지만 그래도 소비문화의 수준은 그대로다.
"객지 나가서 섬에서 왔다하면 깜짝깜짝 놀래요. 그 정도로 명품을 좋아해요. 옷 같은 거 메이커 고급으로만 입어요."
딸만 다섯을 둔 딸부자. 아들을 못 낳는다고 구박도 많이 받았다.
"그래도 밖에서 낳아 오라고는 안 하데요."
시부모가 아들에게 밖에서 아들을 낳아오란 요구는 하지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이란 말씀. 이제는 성장한 딸들이 다 잘 한다. 아들 있는 집 하나도 부럽지 않다.
"아들도 아들 나름, 딸도 딸 나름이지. 다 좋을 수가 있나요. 현재까지는 잘 하고 있습니다만. 낼은 모르죠. 어짤란지."
임신을 하고서도 밭일을 쉬지 못했다. 평생 밭만 파고 살았다. 섬살이가 하도 고달파 젊어서는 섬을 떠나고 싶은 적도 많았다.
"후회가 왜 없겠어요. 남들처럼 객지 나가서 남편 벌어다 주는 돈 받아 편히 살았으면 좋았겠지. 여서 나서 여서 크고. 평생을 섬에서 갇혀 살았어요."
그래도 나가지 못했다. 그것도 팔자려니 했다.
“요 땅에서 나서 요 땅에서 늙어 죽게 됐지요. 아이가 늙도록 섬을 못 떠났네요. 농사짓고 애 키우고 살다보니 한 평생 잠깐이데요.”
할머니의 말씀이 서글프다. 그렇게 잠깐 사이 한생이 갔다.
산에 올라야 섬의 진면목이 보인다
욕지도에는 신석기 시대 유물인 조개무지(패총)가 있다. 신석기시대부터 이미 욕지도에 사람이 살았다는 증거다. 삼한시대나 가야,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도 사람살이가 이어졌을 것이다. 가야시대에는 6가야 중 수로의 막내 동생인 말로가 지배하던 소가야 소속이었다. <고려사>에는 우왕 4년(1378년) 8월 “배극렴이 욕지도에서 왜적을 물리치다”라는 기사가 등장한다. <조선왕조실록>에 태종9년(1409년)7월15일 기사에도 욕지도란 지명이 등장한다. 욕지도란 이름은 그만큼 오래된 이름이다. 그 이전에는 ‘호주’라 했다고 추정하기도 하지만 사료는 없다.
욕지도에는 고려 말까지도 주민들이 살았지만 조선시대 들어서는 거주가 허가되지 않았다. 왜구들의 노략질 때문에 실시된 공도(空島)정책 때문이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주로 군선들의 정박지로 이용됐다. 통제영 소속이던 욕지도가 조선시대 후기에는 왕실 궁례부의 명례궁 소속으로 바뀌었다. 왕실의 욕심 때문이었다.
욕지도에 공식적인 입주가 다시 허락된 것은 조선시대 말에 와서다. 1887년(고종 24년) 조정에서 욕지도 거주 허락이 떨어졌고 1887년 장수나무 아래서 입도인 4명이 소를 잡아 개척제를 지내며 사람살이를 시작했다. 1988년에는 ‘욕지개척100년기념비’가 세워졌다. 개척 당시에는 사슴이 많아서 ‘녹도’라 불리기도 했다. 개척자들의 구전에 따르면 입도 당시 욕지도에는 전함이 계류하던 곳인 전선소, 관청인 치소, 손님의 숙소로 쓰던 관소가 있었고, 산정에는 위급을 알리는 봉화대도 있었다. 아직껏 남아 있는 조선포나 관청마을, 옥섬 등의 지명이 여기서 유래한 듯 보인다.
욕지도는 일찍부터 어업이 발달했다. 입도 후 욕지도 주민들은 대체로 어업에 종사했다. 워낙 어장이 풍성했다. 욕지도는 특히 멸치의 주산지였다. 솔가지에 불을 켜서 멸치를 유인한 뒤 잡는 챗배 멸치잡이가 주요 어법이었다. 또 김경일과 김홍포 등이 들망을 발명해서 어업기술을 발전시켰다. 일본이 황금어장인 욕지도 바다를 그냥 놔둘 리 없었다. 욕지도는 일제가 식민지 침략의 전초기지로 삼았던 어업 이민지 중 하나가 됐다. 1895년 경부터 도미우라라는 일인이 욕지도를 들락거리며 조업을 하는 동시에 욕지도의 수산물을 매입해 일본에 팔기 시작했고 1900년대 초반에는 아애 욕지도에 정착했다. 선박과 어구, 어업자금을 빌려주고 어민들을 수탈해 갔다. 그가 정착한 곳이 욕지도 고등어 파시가 열렸던 자부포(좌부랑께)였다.
일제 때는 고등어, 전갱이 등으로 풍어를 이루었고 남해안의 어업전진기지였다. 당시 욕지도에서 잡힌 물고기들은 서울, 마산, 일본, 만주 등지로 수출됐다. 1915년경에는 조선인 2만864명, 일본인 2,127명 등 인구가 2만3,000명에 이를 정도로 섬이 번창했다. 지금 욕지도는 잡는 어업보다는 기르는 어업이 중심이다. 욕지 내항은 돔, 우럭 등의 가두리 양식장으로 가득하다. 또 욕지도에서는 처음으로 고등어 양식이 시작되어 성공했다. 서울 등 뭍에서 먹는 고등어회는 거의 욕지도 산이다.
욕지도는 아름다운 해변이 많지만 욕지도의 진면목은 해변에 있지 않다. 해변에 가면 섬의 일부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욕지도만이 아니다. 어느 섬이든 섬을 온전히 보고 싶으면 섬의 산에 올라야 한다. 욕지도를 찾는 사람들은 주봉인 천왕산에 올라야 진짜 욕지도를 봤다 할 것이다. 가장 높다 하지만 정상에 오르는 데는 채 1시간도 걸리지 않는다. 발길이 날렵한 사람은 30분만에도 오를 수 있다. 욕지도에는 천왕봉(392m)을 비롯해 대기봉(355m), 약과봉(315m), 일출봉(190m) 등의 여러 산이 있다. 산에는 등산로가 잘 나 있어서 등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산에 오르지 못할 형편이라면 혼곡마을 등산로 입구에서 노적, 통단마을까지 이어진 해변 트레일을 걷는 것도 좋다. 탁 트인 바다와 오솔길을 번갈아 걸을 수 있는 이 길은 여행자의 넋을 빼놓을 정도로 황홀하다.
천왕봉은 옛날부터 섬사람들이 신성하게 여긴 산이다. 섬사람들은 산기슭의 제당에 천왕신을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동항마을 위 상수원 저수지 기슭에는 아직도 산신당이 있다. 천왕봉은 최근까지도 천황봉이라 불렸다. 본래 천왕봉이었는데 일제 때 천황봉으로 바뀌었다가 제 이름을 되찾은 것이다. 한국의 산 이름은 대부분 불교에서 유래했다. 천왕봉의 천왕은 사천왕의 그 천왕이다.
욕지도 명물 고구마 막걸리와 밀감
섬 전체가 산악지형인 욕지도에는 아름다운 숲도 많다. 그중에서도 단연 손꼽히는 숲은 자부포의 모밀잣밤나무군락지(천연기념물 343호)다. 우리나라 난대림에서 잣밤나무 숲이 이처럼 군락으로 살아남은 경우는 드물다. 그 귀한 잣밤나무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으니 숲은 신령스럽기까지 하다. 면소재지 뒤안 제암마을에서 자부포 대풍바위까지 이어진 임도 또한 한적하고 아름답기 그지없다.
욕지도는 논이 거의 없고 비탈 밭이 많다. 밭은 끈적한 찰황토가 아니라 물이 잘 빠지는 마사토에 가까운 황토밭이다. 그래서 고구마 농사가 잘 된다. 욕지 고구마는 해남 화산 고구마만큼이나 달고 맛있다. 넓적하게 잘라서 말린 고구마인 ‘빼떼기’로 끓인 빼데기죽도 유명하다. 욕지도에서는 고구마를 '고메'라 하는데 욕지도 고메 막걸리는 고구마 케이크 속의 고구마 속살보다 더 달콤하다. 운이 좋으면 욕지도의 할머니가 집에서 직접 담근 고메 막걸리를 맛볼 수도 있다. 욕지항 선창가 붕어빵 수레에서 막걸리를 병에 담아 파신다. 진짜 섬의 전통 막걸리를 맛볼 수 있는 흔치않은 기회다.
또 하나 욕지도의 명물은 밀감이다. 사람들은 제주도에서만 밀감이 나는 줄 알지만 남해안의 거의 모든 섬들에 밀감나무가 자란다. 욕지도의 밀감 재배는 '씨 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우장춘 박사가 토질을 조사한 후 1966년부터 시험재배하면서 시작됐다. 노지에서 나는 욕지도 밀감은 달고 새콤한 맛이 야생의 맛 그대로다. 한 번 맛을 본 사람은 그 맛을 잊지 못해 해마다 찾는다.
욕지 총각한테 발목 잡힌 제주 해녀
욕지도에는 과거 제주에서 물질을 왔다가 욕지도 총각에게 발목이 잡혀 몇 십 년째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사는 해녀들이 여럿이다. 그래서 욕지도 뱃머리에는 해녀가 직접 물질해 온 전복, 해삼, 소라, 합자(조선홍합)들을 맛볼 수 있다. 해녀의 남편인 어부가 낚아온 싱싱한 횟감들은 덤이다. 섬에서는 갓 잡아온 이런 해산물을 먹는 것이야말로 섬 여행 최고의 즐거움이다. 제주에서 물질 왔다가 정착한 어떤 해녀의 집. 해녀는 스무 살 처녀 시절 욕지도에 물질을 왔다가 어부인 사내를 만났다. 벌써 30년도 전이다. 해녀는 한사코 자신이 발목을 잡혔다 하는데 어부는 늘 해녀가 발목을 잡았다고 한단다.
해녀는 자신이 잡아온 성게와 돌멍게, 굴을 까주고 남편인 어부가 잡아온 활 고등어를 회로 떠준다. 성게알의 맛은 달디 달아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다. 돌멍게도 바로 잡아온 것이라 고소하다. 고등어는 너무 작아서 맛이 덜 들었지만 이 또한 달다. 해질녘 욕지도 선창가의 해산물 부페. 서울 어느 특급호텔에서도 결코 맛볼 수 없는 최고의 성찬이다. 술 한잔을 마시자 온몸에 취기가 오른다. 하지만 이런 성찬 앞에서라면 몇 병의 술을 더 마셔도 취기는 처음 그대로일 것이다.
출어를 나갔던 어부가 돌아왔다. 어부는 횟감을 또 잡아왔다. 어부에게 묻는다. 누가 발목을 잡았나요. 어부는 겸연쩍게 웃는다.
"제가 잡았죠."
해녀는 어이가 없는지 푸하핫 웃는다.
"별일이네. 낼은 해가 서쪽에서 뜰 모양이네. 늘 내가 발목을 잡았다더니."
해녀는 마침내 어부의 자백을 받아냈다. 기분이 좋은 걸까, 처녀 적 그 시절로 잠시 돌아간 걸까. 목소리에 설레임이 묻어난다. 어부가 볼락 한 마리를 회 떠서 서비스로 가져다준다. 해녀는 큼직한 전복 하나를 통째로 잘라다 준다. "양식이 아니라 자연산이에요. 자연산." 자백을 받아내 준 보답이리라. 아, 이 정겨운 맛을 평생 어찌 잊을 것인가.
섬학교 제33강, 12월 6(토)〜7(일)일, <욕지도 송년특집>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12월 6일(토)>
07:00 서울 출발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 압구정 지하철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섬학교> 버스 탑승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33강 여는 모임→통영 도착, 점심식사(통영식 해물탕)→통영 삼덕항 출항→욕지도 도착→욕지도 걷기(선착장→혼곡→할매바위→대기봉→태고암→천왕봉(392m)→약과봉→논골→제암마을→면소재지→선착장. 5km. 3시간)→저녁식사 겸 뒤풀이(욕지도 최고의 생선회와 매운탕)→자유시간 및 취침(욕지항 <어원 팬션>. 다인실)
<12월 7일(일)>
06:30 기상→아침식사(성게미역국백반)→욕지도 버스 일주→욕지도 느리게 걷기(선착장→메밀잣밤나무군락지→자부포→대풍암숲길→제암마을→욕지항)→욕지도 출항→통영 삼덕항 도착→점심식사(겨울 최고의 별미 통영 물메기탕)→자유시간, 중앙시장 장보기→제33강 마무리모임→서울 향발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걷기 편한 차림(가볍고 따뜻한 등산복/배낭/등산화), 스틱, 물통, 윈드자켓, 우비(+접이식 우산),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멀미약,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승선용 신분증을 꼭 지참하세요(미지참시 승선 거부당합니다).
섬 여행을 떠나기 전에 강제윤 교장선생님이 쓴,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어머니전> 등 섬 답사기를 참고하면 섬 여행의 의미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섬학교 제33강 답사 참가비는 24만5천원입니다(왕복교통비, 1일 숙박비, 5회 식사비 겸 뒤풀이, 강의비, 운영비 등 포함). 사전예약 관계상 11월 29일까지 참가신청을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 답사는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으며, 기상 악화로 섬 체류가 연장되는 경우 추가비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참가 신청과 문의는 인문학습원 섬학교 www.huschool.com 전화 050-5609-5609 이메일master@huschool.com 으로 해주세요(회원 아니신 분은 회원 가입을 먼저 해주십시오. ☞회원가입 바로가기 ).
섬학교 카페 (http://cafe.naver.com/islandschool) 에도 꼭 놀러오세요. 섬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학습자료>
천왕봉(天王峰) : 욕지도에는 주봉인 천왕봉(392m)을 비롯해 대기봉(355m), 약과봉(315m), 일출봉(190m) 등의 여러 산이 있다. 산에는 등산로가 잘 나 있어서 등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천왕봉은 욕지도의 최고봉이다. 옛부터 섬사람들이 산기슭의 제당에 천왕신을 모시고 제사를 지냈으며 거기서 산의 이름이 유래했다고 전한다. 동항마을 위 상수원 저수지 기슭에는 아직도 산신당이 있다. 천왕봉은 최근까지도 '천황봉'이라 불렸다. 본래 천왕봉이었는데 일제 때 천황봉으로 바뀌었다가 제 이름을 되찾은 것이다. 한국의 산 이름은 대부분 불교에서 유래했다. 천왕봉의 천왕은 사천왕의 그 천왕이다.
자부(自富·自富浦·자부랑깨) : 본 이름 '자부랑깨'를 한자로 표기하면서 '좌부랑포(座富浪浦)'가 됐다가 현재의 자부포가 됐다. 자부랑깨는 욕지항 입구 해협의 좌측에 위치한 마을이다. 천연기념물인 메밀잣밤나무 숲이 있다.
동촌(東村) : 욕지면 소재지인 동항리 욕지항 동쪽 마을.
서촌(西村) : 동항리 서쪽 마을.
상촌(上村·수돗골) : 동항리 서북쪽 마을. 수돗물을 공급했던 골짜기. 지금은 상수원 저수지가 있다.
중촌(中村) : 동촌(東村)과 상촌(上村)의 중간 마을.
제암(濟巖·서짓골·면소땀) : 자연마을인 제곡(濟谷)과 마암(馬巖)을 통합하면서 '제(濟)'와 '암(巖)' 자을 따서 '제암(濟巖)'이라 했다. 옛 지명 '제곡'은 재(고개) 아래에 있는 마을의 토박이 지명인 '재골'에서 유래했다. 욕지면사무소가 위치해 있다 해서 일명 '면소땀'이라고도 한다. '마암'은 마을의 뒤편 바위산 봉우리가 말의 형상을 닮은 것에서 유래.
불곡(佛谷·부첫골·부치꼴) : 옛날 절터에서 부처가 발굴된 골짜기라 해서 부첫골. 불곡은 부첫골의 한자식 표기.
혼곡(昏谷·어둔골) : 산기슭 벼랑 아래에 위치해 있어 해가 빨리 지고 일찍 어두워지는 해안 골짜기다.
혼곡(昏谷)은 '어둔골'의 한자 이름.
입석(立石·선바우·선돌빼기) : 마을 입구 해안에 큰 바위 하나가 우뚝 서 있다 해서 입석마을이다. 입석은 '선바우' '선돌빼기'의 한자 이름.
관청(觀淸·옥섬안) : 욕지도 남쪽의 푸른 바다가 보이는 욕지항의 가장 남쪽에 위치해 있는 것에서 유래했다고 하지만 이는 견강부회식 해석일 것이다. 옥섬[玉島]의 안쪽 해안이라 해서 본래는 '옥섬안'이었다.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임의로 정해졌을 가능성이 크다.
야포(冶浦·불멧개·불묵개) : 옛날 불멧간(불묵간·대장간)이 있었던 마을이다. 야포는 '불멧개' '불묵개'의 한자 이름.
노적(露積·노적구미) : 마을 앞 해안에 곡식을 쌓아 둔 노적가리의 형상의 구미(곶)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 노적은 '노적구미'의 한자 이름.
통단(桶丹) : 통포(桶浦)와 단초포(丹草浦) 두 마을을 통합하면서 머리 글자를 따서 '통단(桶丹)'이라 했다. 통포(桶浦·통개)는 옛날 해안 기슭에 으름덩굴[通草]이 많이 자생한 것에서 유래한 토박이지명 '으름개' '통개'의 한자 지명. 포구의 형세가 통(桶)처럼 둥글게 생긴 것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단초포(丹草浦·단촛개)는 옛날 해안 기슭에 단초(丹草)라는 초목이 많이 자생한 것에서 유래했다.
조선(造船·조선개) : 옛날 선박을 건조했던 해안 마을이다.
목과(木果·모개정·모가지) : 옛날 고을개(谷浦) 마을과 연이어지는 산등성이의 잘록한 모가지에 형성된 마을이라 해서 생긴 이름이다. 목개는 본래 지명 '모가' '모개정'의 한자 이름.
흰작살[白沙場] : 해안에 흰 작살(자갈)이 많이 있어서 생긴 지명.
청사(靑沙·포린작살) : 해안에 검푸른 색의 작살(자갈)이 많이 깔려 있어서 생긴 지명. 청사는 '포린작살'의 한자 지명.
금장골 : 옛날 금을 채굴하던 광산이 있었던 골짜기.
논골[沓谷] : 논이 많이 있는 골짜기이며, '답곡'은 한자 지명.
딱밭골 : 옛날 딱나무(닥나무)가 많이 자생했던 골짜기.
젯고닥 : 재(고개) 아래의 고닥(구덩)처럼 우묵하게 생긴 골짜기.
고올개재 : 상촌 마을길을 지나 서산리 도동(道洞)마을로 넘어가는 고개.
모가지개 : '고올개'에서 '모가지'마을로 넘어가는 고개.
고을개(고올개·邑浦) : 욕지항의 옛 포구와 해안 마을을 칭했던 토박이 지명이었는데, 속칭 '고올개'다. 옛날 욕지도에서 가장 큰 고을과 포구였다. '읍포' '읍동(邑洞)'은 한자 지명.
대풍바우[大風巖] : 태풍과 동남풍이 심하게 닿는 큰 벼랑 바위.
광주여(가동섬, 광주섬) : 섬 모양이 광주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생긴 이름.
삼여(삼례도) : 세 개의 여인 '삼여도(三礖島)'에서 변천된 지명으로 사료된다.
옥섬[玉島] : 욕지항에 떠 있는 둥글게 생긴 작은 섬이 옥같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에서 유래한 섬 이름.펠리칸바위 : 펠리칸처럼 생겼다 해서 근래에 붙여진 바위 이름.
거북바위 : 거북의 발톱처럼 생긴 바위.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로 등단했습니다. 서남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뭍으로 이주해 살다 성인이 된 뒤 다시 고향 섬으로 돌아가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보길도 시절에는 하천 정비를 명목으로 보길도의 숲과 하천을 파괴하려는 시도를 막아냈고,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파괴하고 대형 댐을 건설하려는 토목세력에 맞서 33일간 단식으로 섬을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2005년 보길도를 떠난 뒤에는 한국의 모든 유인도(500여 개)를 걸어서 순례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8년째 섬들을 걷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300여 개의 섬을 걸었고 여전히 섬을 걷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섬을 걷다> <통영은 맛있다>, 한겨레에 <섬에서 만나다>를 연재했습니다. <걷고 싶은 우리 섬> <통영은 맛있다> <어머니전>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자발적 가난의 행복>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섬학교를 열며>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다로부터 왔습니다. 지구 최초의 생명이 바다에서 잉태됐듯이 우리 또한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바다에서 생명활동을 시작합니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 바다를 보면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평온함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바다, 그래서 프랑스어 ‘어머니[m?re]’에는 ‘바다[mer]’가 들어 있고 한자의 ‘바다[海]’에는 ‘어머니[母]’가 들어 있습니다. 원초적 기억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기원을 암시해 줍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바다. 우리가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실상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는지요.
바다나 강, 호수 등의 물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를 섬이라 합니다. 한국에는 4,400여 개의 섬이 있습니다. 그 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500여 개, 나머지는 무인도입니다. 한국은 ‘섬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섬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섬들이 소개되고 몇몇 섬들이 피서지나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섬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섬들은 척박함과 절해고도의 고독과 유배지, 그도 아니면 현실도피적인 낭만의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섬은 여전히 먼 곳으로만 느껴집니다. 수만 리 먼 나라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바로 우리 곁의 섬들을 멀게만 느끼는 것은 왜일까요. 단지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닙니다. 심리적 거리감이 더 큰 요인입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육지 중심의 사고에 기인한 바 큽니다. 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육지 사람들은 섬사람들을 ‘섬놈’이라 부르면서 멸시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조선왕조의 폐쇄적인 해양정책에 잇닿아 있습니다. 본래 우리의 인식은 육지 중심의 편협한 틀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옛날 이 땅의 사람들은 바다를 이용해 세계와 소통했습니다. 세계로 향하는 통로로 기능했던 바다가 단절의 바다로 전락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입니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을 추종해 적극적인 ‘공도(空島)’정책을 폈습니다. 섬과 바다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바다와 섬은 육지보다 더욱 활력 넘치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문명교류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되면서 바다와 섬은 점차 잊혀지고 버림받은 공간이 됐습니다.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이후에도 섬은 유배지로 이용되면서 고립이 심화됐습니다.
해양왕국이었던 백제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바다와 섬을 기반으로 세계와 소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976년 거문도의 장촌마을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외딴 섬처럼 보이는 거문도가 실상은 고대부터 국제해상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2000년에는 흑산도의 읍동마을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국제해양도시의 흔적들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고려시대 예성강 입구에 있던 벽란도는 개경에 출입하는 외국인들이 통관 절차를 밟던 국제무역항이었습니다.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는 바다와 섬을 통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까지 소통했습니다. 이 땅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언제나 그 중심에는 바다와 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이 좁은 것은 알면서도 우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 줄은 잘 모릅니다. 오랫동안 좁은 땅에 갇혀 살면서 몸도 마음도, 시야도 폐쇄적으로 변해버린 까닭입니다. 섬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넓은 바다의 주인공인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섬에서 바라보면 대륙 또한 바다에 둘러싸인 큰 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지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충분히 크고 드넓습니다. 섬은 한없이 넓은 바다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섬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개방성과 열린 사고를 되찾기 위한 최적의 사유공간입니다. 물론 섬은 숙명적으로 외롭습니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이나 슬픔마저도 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해학과 가락이 있습니다. 섬에서는 슬픔도 가락을 타면 흥이 됩니다.
오랜 세월 섬들은 제각각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왔습니다. 곁에 있는 섬도 같은 섬은 없습니다. 하지만 외래문물의 유입으로 많은 섬들이 원형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머지않은 시간에 이 나라 많은 섬들이 사라질 것을 예감합니다. 이미 많은 섬들이 육지와 연결되었거나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리가 놓이면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끝내는 소멸해 버릴 섬들, 섬의 풍경들. 더 늦기 전에 섬으로 가야 할 이유입니다.
몇 년째 걷기 열풍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존재’[動物]인 사람이 걷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걷기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본능의 회복운동입니다. 걷기는 길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바 큽니다. 길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한자 ‘길道(도)’자는 ?(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신영복 선생님은 "?(착)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수)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道)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한 길의 정신을 구현하기에 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섬은 어느 곳보다 걷기 좋은 공간입니다. 아직까지 ‘섬길’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많은 걷기 길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섬은 부러 돈 들여 걷기 길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섬들은 그 자체로 최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섬에서는 사람이 안심하고 걸으며 사유할 수 있습니다. 섬길을 걷는 일은 분명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 될 것입니다. 섬으로 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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