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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 된 '공무원연금 포럼', 영국 모델 본받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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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 된 '공무원연금 포럼', 영국 모델 본받자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참여와 토론, 합의에 의한 공무원 연금개혁을

공무원 연금 개혁이 온 나라를 달구는 뜨거운 쟁점으로 부상했다. 당사자인 공무원들은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차분한 논의 대신 피상적이고 감정적인 찬반격론이 이어지는 가운데, 정부는 '공무원연금 개혁 국민포럼'을 개최한다고 발표했다. 순회 포럼 형식으로 서울·세종·전주·부산·춘천·광주·대구 등 7개 거점 도시를 돌며 안전행정부 담당자 및 공무원·시민단체·언론인·전문가와 일반인이 참여하는 포럼을 열고, 공무원 연금 개혁에 대한 여론을 수렴하겠다는 것이었다.

코미디가 돼버린 '공무원연금 포럼'

포럼은 지난달 24일 서울에서 시작돼 세 개 도시에서 이미 개최되었다. 그러나 포럼은 거의 사전 준비가 없는 상태에서 짧은 시간 안에 진행되도록 계획되었고, 당사자들의 반발과 일반인들의 무관심 속에 유명무실하게 치러졌다.

더욱 황당한 것은 포럼이 시작되고 얼마 되지도 않아, 정부와 여당이 개정안을 확정하고 조속 처리를 밀어붙이고 있다는 것이다. 포럼이 사회적 합의의 장이라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거기서 분출되는 각계의 여론을 경청하고 수렴하여 개정안을 마련해야 한다. 또 개혁 일정 역시 이 합의에 기초에 정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첫 포럼이 있은 지 나흘 뒤인 지난 10월 28일 새누리당은 김무성 의원이 대표발의하고 소속 의원 전원이 서명해 공무원연금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점입가경, 다음 날 대통령은 국회 시정연설에서 공무원연금법 개정안의 연내 처리를 요청했다. 명색이 여당이라는 정당과 대통령이, 안행부가 여론수렴과 사회적 합의를 명분으로 진행하고 있는 국민포럼에서 무슨 얘기가 나오든 개의치 않겠다고, 그저 자신의 안을 속도전식으로 밀어붙이겠다고 선언한 셈이다. 앞으로 지역포럼이 네 번이나 남았는데 이런 허수아비 행사에 누가 모이겠는가. 안행부만 우스운 꼴이 되었으나, 시작한 걸 중도에 그만둘 수도 없을 테고,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다.

ⓒ연합뉴스

공무원 연금 개혁은 국민 모두가 이해당사자가 되는, 절대적으로 사회적 합의를 필요로 하는 사안이다. 각계각층의 여론이 제대로 수렴되고 적절한 타협의 과정을 밟을 때 희생이 불가피한 당사자도 설득되고 승복할 수 있다. 이 과정이 아무리 시끄럽고 시간이 걸린다 해도 이런 소통과 합의의 절차는 민주주의의 불가피한 비용이다. 이를 건너뛰려 한다면 법의 통과는 가능해도 제도에 대한 순응은 확보하기 어려우며 다른 부작용들이 불거질 수 있다.

연금 개혁 과정, 영국 모델 주목하자

그렇다면 사회적 합의 과정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까? 2002년 시작해 2011년에야 마무리된 영국의 연금 개혁은 적어도 제대로 된 사회적 합의를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라는 면에서 우리에게 귀중한 시사점들은 던져준다.

첫째, 영국의 연금 개혁은 단기간에 서둘러 진행되지 않았다. 2002년 토니 블레어 총리는 반대하는 재무부를 겨우 설득해 연금위원회를 구성하고 연금 개혁에 시동을 걸었다. 연금위원회의 꼼꼼한 조사와 연구를 거쳐 개혁의 밑그림인 위원회 권고안이 마련된 것은 2006년 5월이었다. 밑그림이 그려지기 전 비공식적으로 행해졌던 여론수렴은 개정안 마련 후 더욱 활발해져 2007년, 2008년 입법 전까지 진행되었다. 무려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여론수렴과 여론을 반영한 개정안 수정 및 정교화 작업이 이루어진 것이다. 연금개혁이 최종 마무리된 것은 2011년 입법을 통해서였다.
이에 비하면 우리의 공무원 연금 개혁은 몇 달 만에 그야말로 군사작전 하듯 밀어붙이려 하고 있다. 무리하게 연내 개혁을 추진하지 않겠다던 여당대표가 개헌 발언 파동 후 청와대의 대변자로 나서면서 개혁 드라이브는 급물살을 타고 있다. 거대한 사회계약인 연금제도를 고치는 일이 이렇게 급히, 졸속으로 이루어져선 곤란하다.

▲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 ⓒAP=연합뉴스

"사실, 사실, 사실"(Fact, fact, fact!)
둘째, 영국의 연금 개혁은 모두가 신뢰할 수 있는 자료를 기반으로 이루어졌다. 전 고용주조직 대표, 전 노총 대표, 그리고 독립적 학자 등 세 명으로 단출하게 구성되었던 영국의 연금위원회가 초기 작업에서 가장 주력했던 것은 객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자료를 구축하고 이를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형태로 만드는 것이었다. 위원회는 이런 객관적 자료가 개혁의 필요성을 누구도 부정하기 어렵게 하고, 막무가내로 자기이익만을 고집하기 어렵게 하며, 반대자들의 고충과 정당성을 이해하게 하는 데 무엇보다 필요한 작업이라고 생각했다. 표와 그래프로 가득한 위원회의 첫 번째 보고서는 이런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사실, 사실, 사실"(Fact, fact, fact!)이라는 구호로 대변된 위원회의 이런 작업은 이해당사자들의 동의를 끌어내고 여론을 개혁지지 쪽으로 돌려세우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알기 쉽게 가공된 자료들은 시민들의 연금개혁에 대한 이해를 도왔고, 대중적 토론을 가능하게 했으며, 이해당사자들로 하여금 어떤 부분에서는 희생과 양보가 불가피하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이에 비하면 현재 진행되고 있는 한국의 공무원 연금 개혁은 깜깜이 개혁에 가깝다. 공무원 연금이 과다하다고만 외칠 뿐, 정부는 수령자 유형과 직급이 다양해 평균액을 산출할 수 없다는 황당한 답변을 계속하며 공무원의 직급별, 직종별, 재직기간별 연금액이 얼마인지조차도 밝히지 못했다. 최근에 국회가 다그친 뒤에야 겨우 그 일부가 제시됐을 뿐이다.

또한 새누리당이 개정안을 발의하며 제시했던 개혁 시 '재정 절감 효과'가 크게 부풀려졌다는 지적이 10월 30일 새누리당에서 나왔다. 당연히 연내 처리를 위해 졸속 추계를 제시했다는 비판이 터져 나왔다. 이러니 이해당사자들이 정부 발표와 개혁안에 불신을 거둘 수 없으며, 합리적 토론이 아닌 각자 자신의 주장을 감정적으로 고집하는 싸움이 계속되는 것이다.

'전 국민 연금의 날'

ⓒ연합뉴스
셋째, 영국의 연금 개혁은 다중적인 여론수렴과 사회적 합의 과정을 밟았다. 연금위원회와 정부 주무부서인 노동연금부는 이해당사자의 의견을 광범위하게 청취하고 공식적, 비공식적 협의를 행했다. 개혁안 윤곽이 제시된 두 번째 보고서 출판 이후 의회와 노동연금부는 이해당사자들에게 메모랜덤 제출을 요구해 의견을 수렴했다. 또 야당인 보수당과 자민당과도 긴밀한 협의를 통해 초당적 합의를 구축했다.

또한 노동연금부와 연금위원회는 광범위한 대중적 협의를 진행했다. 2005년 2월 <개혁의 원칙들: 전 국민 연금토론>이란 문건 간행 후 노동연금부 국무상들(ministers)은 6월부터 11월까지 영국의 8개 지역에서 지역 이해당사자들 및 일반대중과 '전 국민 연금 토론'(National Pension Debate)을 개최했다(아마도 한국의 국민포럼은 이를 본 뜬 것이 아닌가 싶다).

이어 2006년 3월18일 노동연금부는 영국의 여섯 개 지역 거점도시에서 1000여 명의 시민들이 동시에 참여하는 '전 국민 연금의 날(National Pensions Day)이라는 숙의적 협의와 여론조사를 겸한 행사를 개최했다. 전국 각지에서 참여한 시민들은 여러 지역에서 동시에 하루 온종일 연금에 대해 토론한다는 아이디어에 놀라움과 열정을 가지고 반응했다.
시민들은 먼저 연금 개혁의 핵심 사안에 대한 설문조사에 응했다. 다음으로 인구고령화 추세, 노후를 위한 연금과 사적저축 실태, 노년빈곤 전망에 관해 명확하고 쉽게 가공된 정보들을 제공받았다. 그리고 이로써 자신의 노후에 대한 막연한 생각에서 벗어나 무엇이 문제고 어떤 선택지가 있는지, 어떤 혜택을 원한다면 어떤 걸 감수해야 하는지 알게 됐다. 그런 다음은 여러 개혁대안들에 대해 활발한 토론을 벌이고, 다시 처음에 실시했던 것과 동일한 설문조사에 응했다(비슷한 과정이 온라인에서도 진행되었다.)

결과는 놀라웠다. 연금수령 연령의 상향 조정(이는 현실적으로 몇 년 간의 연금 삭감을 의미한다), 연금 재원을 위한 조세 인상 등 거의 대중의 지지를 받기 어려운 항목들에 첫 설문조사보다 훨씬 많은 비율의 사람들이 동의하게 되었던 것이다.

영국 정부는 이런 사회적 합의에 입각해 연금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는 정권이 바뀌어도 개혁이 뒤집어지지 않을 수 있는 안전판이 되었다. 2010년 노동당은 선거에서 패배했으나, 권력을 장악한 보수-자민연립정부는 약간의 수정만 거친 채 노동당 정부가 입안했던 연금 개혁을 마무리했다.

사회적 합의 개혁, 가능하다

너무 꿈같은 얘기인가? 그렇지만도 않다. 영국은 원래 이런 나라는 아니었다. 영국은 가장 대표적인 다수제 모델의 정치제도를 가진, 일방주의적 정치의 나라이다. 실제로 1960-70년대 동안 보수당과 노동당은 번갈아 집권하면서 이전 정부가 통과시킨 연금 개혁을 뒤집고 자신의 연금법을 통과시켰었다.

이런 영국의 경험은 우리의 경우도 사회적 합의에 입각한 개혁이 아주 불가능하지 않음을 얘기해 준다. 전 국민에 해당하는 연금 개혁과 공무원 연금 개혁이란 차이, 1980년대 이후 노동당의 보수화로 보수-노동 양당 간의 정책적 격차가 좁아져 합의가 쉬웠던 점 등등, 우리와의 차이점도 물론 적지 않다. 그러나 합의에 입각한 개혁의 필요성과 그것을 위해 최대한 노력할 때 의외로 합의가 가능하다는 점만은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한국의 경우 공무원 연금개혁이 끝이 아니라, 국민연금과 기초연금 등 다른 연금개혁의 시작일 수 있기에, 영국의 교훈들은 깊이 새겨볼 가치가 있다.

* 내만복 칼럼은 필자가 참여하는 팟캐스트 <만복라디오>에서 상세히 논의됩니다. 지난 번 칼럼을 들으세요. (☞바로 가기 : http://mywelfare.or.kr/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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