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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에 뺏긴 조선 철도와 수서발 KTX, 그 묘한 기시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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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에 뺏긴 조선 철도와 수서발 KTX, 그 묘한 기시감

[달리는 철도에서 본 세계] <39> 조선에서 '철도 민영화'를 보다

국토부는 지난해 수서고속철도주식회사(수서발 KTX) 법인을 설립하고 주주 구성, 즉 투자자 모집에 나섰다. 국토부가 민영화는 절대 아니라고 주장해왔기 때문에, 일단은 공적자금인 연기금을 동원한다고 한다. 그러나 연기금 주식이 민간에 넘어가는 순간 한국철도의 주력 고속노선은 경인선 부설권의 꼴을 벗어날 수 없다. 백성들의 뜻과 무관하게 이권을 챙기려는 국내외 주주들의 손아귀에 놀아나게 된다. 소유하지 못하면 통제할 수 없다. 공기업의 주인은 시민이다. 민영화는 시민들로부터 소유권을 빼앗아 수익을 최고의 가치로 하는 민간 기업에 넘기는 일이다. 이렇게 되면 구한말 경인철도처럼 시민들은 아무런 권리도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한다. 국토부 관료들은 민간 기업에 주식을 팔 수 없게 하겠다고 했지만, 현대의 상법 체제와 국제 무역 관계를 무시한 순진한 발상이다.

이사회 결의로 수서발 KTX의 일부 주식 매각을 결정하고 이에 대해 국토부가 불가를 선언한다면 수서발 KTX 주주들은 국토부의 지시가 위법하다며 바로 소송에 돌입할 수 있다. 또 수서발 KTX에 눈독을 들인 외국 투자자들이 FTA 협정 등을 이유로 제소를 하게 되면 상황은 더 심각해진다. 국토부의 수서발 KTX 주식 매각 불가 입장은 언제든지 철회될 수 있다. 이들의 전매특허인, 조건과 상황 변화에 따라 주식 매각을 승인할 수 있다고 하면 그만이다. 말을 바꾼 책임은 전임자의 몫으로 돌리면 된다. 실제로 코레일공항철도(인천공항철도) 민간 매각 결정은 코레일 이사회에서 주식 매각을 의결하면서 결정되었다. 인천공항철도는 수서발 KTX처럼 코레일의 자회사이다.

지난 1월부터 4월까지 국회에서 운영된 철도발전소위에서는 새누리당과 국토부의 반발로 KTX 민영화 방지 법제화가 무산되었다. 그리고 9월, 새누리당이 공기업 혁신 방안이라고 내놓은 안에는 버젓이 고속철도·일반철도·광역철도(수도권 전철)·화물철도 분야의 민간 개방, 즉 민영화 추진을 기본 방향이라고 설정했다. 이런 흐름으로 볼 때 국토부가 주장한 수서발KTX 법인 설립이 절대 민영화로 가지 않는다는 말은, 사실상 시민들을 속이는 것이었다. 현대 사회에서 철도의 역할은 축소되어 왔지만, 이제 전환점을 돌고 있다. 국가의 기간산업으로서 철도의 사회적 역할과 중요성은 점점 커지고 있다. 어리석은 관료들과 집권당의 합작으로 철도 민영화가 성큼 다가오고 있는 현실이 끔찍하다.

일본, 대한제국에 쇠못을 박다

견고하게 보이는 거대한 댐도 작은 균열이 생기고 마침내 구멍이 뚫리면 속절없이 무너진다. 경인선은 조선을 이은 대한제국의 성벽을 뚫었던 쇠못이었다. 일본은 집요한 시도 끝에 드디어 조선 땅에 철길을 깔았다. 물꼬가 터지자 일본 제국의 파도는 조선 땅을 거침없이 뒤덮었다.

경인철도 부설권을 모스로부터 넘겨받은 일본은 곧바로 조선을 압박해 1898년 9월 8일 경부철도합동조약을 체결한다. 일본 입장에서는 다가오는 위협 요소인 러시아가 타고 올 시베리아 횡단철도에 맞설 한반도 종단철도 건설에 애가 타고 있던 실정이었다. 경인철도에 이은 경부철도 부설권 획득은 일본의 숨을 돌리게 했다. 구한말 조선이나 대한제국이 맺은 국제조약 대부분은 불평등조약이었다. 그중에서도 경부철도합동조약은 일본에 대한 특혜로 가득 찼다. 이런 것이 관행이 되어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협상 대표가 상대국의 입장을 헤아리고 자국 백성들을 설득하는 몹쓸 일이 전통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일본이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얻은 특전은 세 가지다. △선로, 정거장, 창고, 공작물 등에 필요한 용지는 조선 정부로부터 대가 없이 빌린다. △철도에 필요한 기계 및 각종 물건을 외국으로부터 수입하는 것의 관세 및 철도 용지에 관계된 세금을 면제하며 철도 영업에 관한 각종 이익에는 징세하지 않는다. △각 지방의 지선 건설은 조선 정부 및 조선 국민이 건설하지 않는 한 외국인에게 허가하지 않는다.

▲<동아일보> 1999년 9월 18일 자 지면 갈무리. 일본의 조선 침략 수단이 됐던 경부철도의 주식을 친일파 이완용도 소유하고 있었다는 문서가 후에 발견됐다. 일본에 철도를 넘기는 과정에서도 친일파들은 자기 잇속을 챙겼다. ⓒ동아일보

특히 선로, 정거장, 창고, 공작물 등에 필요한 용지를 조선 정부로부터 대가 없이 빌린다는 항목은 조선의 몰락을 촉진하는 수렁이 되었다. 철도는 땅을 필요로 하는 장치 산업이다. 선로가 길어질수록 더 많은 땅이 필요하다. 당연히 건설비의 상당 부분은 철도 부설용지 매입을 위해 쓰인다. 이런 실정 속에서 대한제국 정부가 일본 철도회사에 대가 없이 땅을 빌려준다는 것은 자국의 영토를 거저 내주겠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대한제국 정부는 돈이 없었다. 철도 부설 예정지의 토지 주인들로부터 땅을 매입해 일본에 바쳐야 하는 상황에서, 금고가 비어 있는 정부는 곤경에 처했다.

일본은 철도부설 용지 매입에 필요한 자금으로 쓰라며 대한제국 정부에 철도 차관을 제공했다. 조정은 빚을 내어 일본에 땅을 내줬다. 이 과정에서 얻은 빚은 다시 조정의 재정 상황을 악화시켰다. 대한제국은 일본철도회사에 땅을 내주면서, 부채를 떠안고 이자까지 챙겨주는 황당한 상황에 빠져버렸다. 일본이 조선 철도 부설을 추진했던 초기부터 치밀하게 기획된 일이었다. 이미 1894년에 주한 일본공사 이노우에 가오루는 철도 부설 관련 약정 초안을 작성해 본국에 재가를 요청했다. 이 초안에는 경인·경부철도를 반드시 일본 정부나 기업이 건설하고 철도용지의 매입에 필요한 모든 비용은 일본 측이 한국 정부에 부채로 제공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한국 정부가 이 부채를 모두 상환할 때까지는 경인·경부철도의 권한은 일본이 무기한으로 갖는 것까지 포함돼 있었다. 이 초안은 4년 후 경부철도 장악을 위한 시나리오가 된다.

경부철도 건설에 나선 일본이 철도 부설에 필요하다며 터무니없이 많은 땅을 요구한 것도 골칫거리였다. 유교적 전통이 뿌리 깊은 조선에서 묘지가 철도노선 부지로 편입되는 지역의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는 일도 다반사였다. 남대문 일대의 주민들이 남대문역 대신 용산역을 종착점으로 하라는 상소를 정부에 올렸다. 수원에서도 묘지를 통과하는 철도노선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러나 대한제국 정부는 힘도 돈도 없었고 일본은 거침없이 밀어붙였다.

1900년 10월 경부철도회사가 발기인 대회를 열고 출범했다. 초기 발기인은 자본가들로 구성된 190명이었다. 1주당 50엔의 주식 10만 주를 모집하고, 이를 점차 확대하여 50만 주를 최종 목표로 삼았다. 발기인이 우선 인수한 주식은 3만3000주였다. 그러나 한반도 종관철도(縱貫鐵道)의 절반을 잇는 경부철도의 건설을 위해서는 투자자들이 더 모여야 했다. 청일전쟁으로 적지 않은 전쟁 비용을 치렀고, 또 러일전쟁에 대비해야 하는 마당에 일본 정부가 전격적으로 자금을 동원할 수 있는 사정도 아니었다. 단 일본 정부는 경부철도 부설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경부철도회사 설립일부터 15년 동안 회사가 차입한 자금의 이자를 보조하기로 결정했다.

경부철도회사는 새로운 주식 마케팅 방식을 고안해냈다. 막 부상하는 내셔널리즘에 기댄 애국주의가 그것이었다. 대국 중국을 이겼다는 자부심을 부추겼다. 대륙 진출을 위한 조선 철도는 일본 국민이 비로소 세계사의 주역이 되는 길인 것처럼 선전했다. 경부철도회사 주식을 사는 것은 단순한 회사 주식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적 사업이며, 애국의 길로 나서는 길이었다. 조선 철도가 일본의 경제에도 커다란 이익을 주어 투자자에게 큰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선전도 이어졌다. 일본 정부에서도 경부철도 개통 이후 15년간 수익 예상표를 만들어 철도회사를 지원했다. 경부철도 건설을 위한 범국민적 운동이 일어났다. 주식 모집단은 도호쿠, 홋카이도, 주고쿠, 규슈 등 전국 각지를 돌며 주주 모집에 들어갔다. 경부철도 주식은 애국공채주식이 되었다. 이런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경부철도 건설 사업이 국가의 발전을 위한 것이며 매력적인 투자 대상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널리 퍼졌다. 도쿄상업회의소는 "본 철도는 단지 영리상의 목적이 아니라, 일한 무역상 반드시 일본 국민이 경영하지 않으면 안 될 사업이라는 관념으로서 창립된 것으로서 (…) 소수의 대주주보다는 다수의 주주를 널리 전국으로부터 모집하는 정신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선전하며 대대적인 홍보를 벌였다.

경부철도회사 주주 모집단은 신문사와 잡지사를 찾아 애국적 여론 형성에 힘을 쏟아줄 것을 부탁했다. 정부에서도 내무대신이 각 부·현 지사들에게 주식을 할당하는 등 민관이 하나가 되어 주식 모집 사업에 매달렸다. 황실과 귀족, 기업인들, 정치인, 상인, 공무원은 물론 전국의 일반 국민들까지 나섰다. 애국의 깃발 아래 전국에서 주주가 되겠다고 모여들었다. 이렇게 모여든 주식 총수는 20만9000주였다. 이는 1901년 3월, 제1회 주식 모집 마감 결과였는데, 목표로 했던 수치의 두 배를 가뿐히 넘어선 것이었다.

경부철도회사는 반관반민 형태의 회사가 되었다. 민간이 주도했지만, 정부의 지휘와 적극적 후원 아래 설립됐다. 일본에는 지금도 제3섹터라고 불리는 반관반민 형태의 철도회사가 있다. 제3섹터라는 말의 의미에도 담겨 있듯, 이 형태는 민간기업도 국공영기업도 아니다. 자치정부와 민간이 합작해 운영하는 회사다. 비록 제3섹터가 경부철도회사와 형태가 같긴 하지만, 만들어지게 된 이유는 정반대다. 경부철도회사가 막 생성하고 발전하는 철도에 대한 희망에 부푼 사업이었다면, 제3섹터는 일본 국철과 이를 계승한 JR이 운영난으로 포기하도록 압력을 받거나, 포기한 노선들에서 만들어졌다. 지역 주민들의 존속 요구에 따라 해당 지자체가, 이미 손 털고 떠난 JR을 대신해 민간 기업을 영입한 것이었다. 제3섹터는 한국의 국토부에서 철도 발전 방안이라는 이름으로 추진하고 있는 사업이기도 하다.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 민족국가의 기틀을 다진 일본은 놀라운 산업의 부흥을 일궈냈다. 서구에서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온 과학기술과 근대 사상은 자본주의라는 금형 틀 안에서 다양한 모양으로 주조되었다. 이렇게 녹아든 쇳물은 일본 사회라는 공기에 노출되어 굳어지면서, 독특한 일본식 자본주의를 만들어내게 된다. 여기에 자본주의라는 제품에 포함된 민족주의와 애국주의, 제국주의의 성분이 발현됐다. 이에 따라 사무라이 일본은 기지개를 켜게 된다. 민관군이 혼연일체가 되어 국가의 부흥과 대일본 제국의 희망을 그리게 되는 것이다. 이 같은 과업의 첫 번째 결과물인 경부철도회사는 근대 일본 최초의 국민적 기업이었다.

부산과 서울에 검은 철로가 놓이기 시작했다

1901년 6월 25일 도쿄 간다미토시로초(神田美土代町) 청년회관에서 창립총회가 열렸고, 경부철도주식회사는 결국 설립되었다. 이어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은 8월 20일에는 남대문 밖 영등포에서, 그리고 21일에는 부산 초량에서 각각 기공식이 열렸다. 경부선 공사가 시작된 것이다. 경부철도 건설을 앞두고 가장 큰 논란이 되었던 일은 궤간 설정 문제였다. 궤간이란 열차가 달리는 선로의 간격을 말한다.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는 선로의 간격이 큰 문제가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이 궤간이야말로 철도의 모든 것을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다. 궤간 결정에는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지정학적 문제들이 모두 함축되어 있다. 궤간은 컴퓨터를 구동시키는 운영 프로그램과도 같은 것이어서 호환성도 매우 중요하다. 애플의 운영체제에서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윈도용 프로그램을 사용할 수 없는 것처럼, 궤간이 다른 철도는 다른 궤간의 철도와 맞닿은 경계지점을 넘어설 수 없다. 나폴레옹의 침공을 경험한 스페인에서 철도를 건설할 때 프랑스가 채택한 철도 궤간보다 넓은 폭의 궤간을 설정한 것도 같은 이유이다. 철도를 통한 프랑스의 군사적 침략을 막아야 한다는 국가 안보 차원의 결정이었다.

철도 건설을 총괄하는 철도작업국은 궤도 폭을 1000밀리미터(mm)로 하자고 주장했다. 일본 본토의 궤도 폭은 1067밀리미터로, 현재 철도 기준으로 보면 협궤에 속하는데 이보다도 더 좁은 궤도 폭으로 시공하자고 한 것이다. 이유는 단순했다. 궤도 폭이 작을수록 차량의 크기나 무게가 작아지게 된다. 그러면 선로로 쓰이는 철강재도 가볍고 무른 것을 사용할 수 있다. 구매단가도 저렴하고 공사의 수월성에서도 장점이 있다. 소형으로 주문해야 하므로 기관차나 객차의 구입 비용도 그만큼 절약할 수 있다. 철도작업국은 조선의 조건상 여객이나 화물 운송의 빈약함을 지적하고, 이를 무시하는 것은 과도한 투자라고 주장했다.

군부는 일본 철도의 궤간을 그대로 도입하자고 했다. 당장 필요한 작전의 유용성을 따진 결과였다. 일본의 궤도와 차량을 그대로 조선에 전용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비용과 시간 측면에서도 유리했다. 급할 경우에는 일본 내의 자재만으로도 건설을 계속할 수 있다. 러시아와 대결 분위기가 달아오르는 가운데 군용 철도의 완성이 시급한 일본군 참모본부가 선택한 최적의 대안이었다.

경부철도주식회사 측의 입장은 철도작업국과 군부의 생각과 달랐다. 경부철도회사 사장 시부사와 에이이치가 나섰다. 시부사와는 막부 말기부터 메이지 시대를 거치는 일본 자본주의 발전 과정의 산증인이었다. 메이지 시대 대장성(재무부)에 들어가 조세와 화폐 제도를 개혁했다. 대장성을 나온 뒤에는 일본제일국립은행 설립에 나서 총재가 됐다. 시부사와가 세운 오사카 방직회사는 일본 최대의 방직 기업으로 성장했다. 일본 정부와 자본가들은 금융과 기업 경영에서 모두 탁월한 수완을 발휘했던 일본 최고의 기업가에게, 일본을 제국으로 이끌 첨단 산업인 철도를 맡긴 셈이었다. 시부사와는 그 화려한 경력만큼 정치계의 거물 이토 히로부미와도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고 여러 유력자들과도 공·사적 인연을 걸치고 있었다. 경부철도회사에 일본 정부와 자본가들의 야망이 결집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시부사와는 눈앞의 현안보다 10년, 100년 후의 일본을 생각하자고 했다. 당시 중국과 유럽의 대부분 국가는 표준궤라 불리는 1435밀리미터의 궤간을 쓰고 있었다. 시부사와 사장은, 경부철도는 단순한 식민지 철도가 아니라 중국과 유럽을 연결하여 세계 교통의 간선이 되는 대륙 철도의 시발점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어떤 난관이 있더라도 이들 철도의 궤간과 동일한 표준궤를 써야 한다고 군부를 설득했다. 효과적인 침략 수단으로, 대륙 진출의 유용한 발판으로 삼기 위해 조선 종관철도는 반드시 표준궤여야 했다. 결국 경부선의 궤도 간격은 1435밀리미터로 결정됐다. 대륙 진출이 불가능했던 타이페이와 가오슝을 잇는 대만 종관철도는 자연스럽게 협궤로 결정됐다. 한국의 지정학적 조건은 철도를 놓는 과정에서도 크고 작은 충돌과 마찰을 겪어야 했다.

1901년 9월에 경부선 북부 제1공구 영등포-명학동 구간 공사가 시작됐다. 10월, 남부에서는 초량-구포 구간 공사가 본격화됐다. 일본과 가장 가까운 항구도시 부산과 조선 황실이 있는 서울의 양쪽에서 검은 철로는 조금씩 한반도의 남쪽 땅을 얽어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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