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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박경리·윤이상·이중섭·백석·법정과 만나다

12월 통영학교

깊은 멋과 맛의 본향(本鄕) 통영(統營).
통영은 박경리, 윤이상, 유치환, 전혁림 선생 등 예술계의 거목들이 나고 자란 땅입니다. 또 이중섭 화백이 그의 대표작인 소 연작을 창작한 곳이기도 하며 백석 시인이 애틋한 연시를 쓴 곳이기도 합니다. 가히 ‘예술의 도시’라 이를 만합니다.

게다가 통영은 맛있기까지 합니다. 특히 겨울 통영이야말로 가장 뛰어난 맛을 자랑합니다. 맛에 관한 한 통영은 경상도가 아닙니다. ‘경상도의 전주’입니다. 자다가도 일어나 떠나고 싶은, 여행자들을 한없이 유혹하는 도시 통영. 통영학교(교장 강제윤, 시인·여행자)의 12월, 제8강은 예술가들의 자취를 따라가 보는 예술기행인 동시에 겨울 통영의 맛을 느껴보는 맛기행으로 준비합니다. 답사는 12월 13(토)∼14(일)일 1박2일로 통영 일대에서 열립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해무에 쌓인 통영 바다가 선경을 방불케 한다. Ⓒ이상희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시인, 에세이스트, 여행자이며 인문학습원 섬학교 교장선생님이기도 합니다.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에 등단했으며, 문화일보 평화인물 100인에 선정되었습니다. 2006년부터 사람 사는 한국의 모든 섬(500여개)을 걷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그동안 300여 개의 섬을 걸었습니다. 지금도 섬들을 걸으며 섬의 문화와 풍속, 사람 사는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2011년 3월부터는 통영 동피랑 마을에 거주하며 통영의 숨겨진 이야기들을 기록하는 일도 병행해 왔고, 결과물인 <통영은 맛있다>를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저서로 <통영은 맛있다> <걷고싶은 우리 섬- 통영의 섬들> <여행의 목적지는 여행이다> <바다의 황금시대, 파시> <어머니전>(문광부 우수문학도서) <섬을 걷다> <그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자발적 가난의 행복>(문광부 우수문학도서) <보길도에서 온 편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등 다수가 있습니다.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통영학교를 열며>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변방의 소도시지만 통영(統營) 사람들의 통영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합니다. 사람들은 통영을 ‘동양의 나폴리’라 부르기도 합니다. 그만큼 아름다운 풍경을 가진 항구란 뜻이지요.

통영은 예향(藝鄕)입니다. 박경리, 윤이상, 유치환, 김상옥, 전혁림, 김춘수 등 수많은 예술가들을 배출한 곳이지요.

통영은 또 이순신 장군이 한산해전을 승리로 이끈 구국의 땅이기도 합니다. 통영은 300여 년간 삼도수군통제영의 사령부가 있던 군사도시였지요. 통영이란 이름도 삼도수군통제영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런 역사, 문화적 전통이 통영 사람들의 자부심을 키운 자양분이었을 것입니다. 박경리의 <토지>에도 꼬마 아이의 입을 통해 그 자부심이 표출됩니다.

“갯가라 카지마는 옛날에는 사또보다 높은 수군통제사가 있었던 곳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명정리에는 이순신 장군을 모시놓은 사당도 있고요. 저어기 저, 왜놈들을 몰살시킨 판데목도 있고 통영 사람들 콧대가 얼마나 높으다고요? 그래서 왜놈 서장도 보통내기가 와서는 맥도 못춘다 안캅니까?”

아직도 통영과 충무를 별개의 도시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하지만 통영과 충무는 다르면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통영의 일부가 한때 충무였던 때가 있었지요. 본래 통영은 하나였으나 1955년 통영군 통영읍이 충무시로 승격되면서 통영은 충무시와 통영군 둘로 나뉘어졌습니다.

1995년 충무시와 통영군의 통합으로 충무란 이름은 사라지고 통영시만 남았습니다. 통영이 다시 하나가 된 것이지요. 면적 234.8㎢, 인구 14만. 바다의 땅, 통영은 250여 개(최근에는 바위섬들까지 포함해 500여 개라고도 합니다)의 섬이 있는 ‘섬나라’이기도 합니다.

1603년 제6대 이경준 삼도수군통제사가 두룡포란 작은 포구에 터를 닦고 1605년 세병관, 백화당 등 삼도수군통제영 건물을 지으면서 통영의 역사가 시작됐습니다. 군사도시 통영이 생기면서 살림을 뒷받침 해주는 12공방도 함께 들어왔습니다. 통제영은 이경준 통제사부터 208대 홍남주 통제사까지 300여 년간 존재했지요.

최고의 풍광을 자랑하는 통영은 예향인 동시에 맛의 고장이기도 합니다. 멋은 맛에서 왔다 합니다. 맛이란 물산이 풍부할 때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배를 채우기에도 급급하다면 맛 같은 거 따질 여력이 없습니다. 척박한 지역일수록 음식이 맛 없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풍요로워야 맛이 생기고 마침내는 음식에 멋까지 부리게 됩니다. 그렇게 문화가 시작되는 것이지요. 통영은 풍요로운 땅입니다. 그래서 통영의 음식은 각별히 맛있습니다.

통영의 바다는 사철 풍성합니다. 계절을 타는 동해나 서해와 달리 남해바다는 어느 계절이나 다양한 해산물이 넘쳐납니다. 동서남해 모든 바다의 해산물들이 모여드는 까닭입니다. 그 남해에서도 통영은 가장 많은 해산물들의 집산지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통영을 걸으며 통영의 맛있는 해산물 음식과 역사와 문화를 맛보고 느낄 것입니다. 통영학교는 그 길라잡이가 될 것입니다. 맛있는 통영, 멋있는 통영. 여행자라면 누구나 통영의 맛과 멋에 깊이 중독되고 말 것입니다.

▲통영 미륵산 정상에서 본 야소골 풍광 ⓒ이상희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이번 답사지에 대한 설명을 듣습니다.

백석과 이중섭, 윤이상이 거닐던 강구안 골목

이중섭의 <소> 그림 연작이 탄생한 곳은 어딜까요. 통영입니다. 이중섭은 피난 시절인 1952년 늦봄에 통영에 와서 1954년 봄까지 2년여 동안 통영에 머물렀습니다. 이중섭의 대표작 <흰소>와 <황소> <달과 까마귀> <부부> <가족> <도원> 등이 모두 이때 탄생했지요. 통영시절은 이중섭의 르네상스였습니다. 통영의 성림다방에서는 개인전을, 호심다방에서는 전혁림 등과 함께 4인전을 열기도 했습니다.

이중섭은 '복자네집'이란 술집에서 청마 유치환을 비롯한 통영의 벗들과 자주 어울려 술을 마셨고 ‘샘이집’이라는 술집에서는 다다미 방바닥에 잉크를 부어 손으로 그림을 그리다 주인 할머니의 타박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중섭이 청마와 어울려 술을 마셨던 동네가 바로 통영의 항남동 강구안 골목이었지요. 지금도 이 골목에는 이중섭이 기거하며 학생들에게 데생을 가르쳤던 경남도립나전칠기기술원양성소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이 골목에서는 백석 시인도 술을 마시며 청춘의 한때를 방황했습니다.

“녯날에 통제사가 있었다는 낡은 항구의 처녀들에겐 녯날이 가지 않은 천희라는 이름이 많다/미역오리 같이 말라서 굴껍지처럼 말없이 사랑하다 죽는다는/이 천희의 하나를 나는 어늬 오랜 객주집의 생선가시가 있는 마루방에서 만났다/”

백석은 사랑하는 통영 천희(처녀) ‘난’을 만나러왔다가 허탕치고 항남동 골목 대포집에서 술에 취했습니다. 부인 몰래 연인에게 연서를 쓰던 청마 유치환이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다”고 노래했던 곳도 이 골목이었습니다. 세계적인 음악가 윤이상과 박경리도 이 골목을 드나들며 영감을 얻었습니다.

예술가들을 키운 이 골목이 오랫동안 침체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골목이 최근 다시 살아나고 있습니다. <강구안 골목 만들기 프로젝트> 덕입니다. 하지만 강구안 골목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골목은 문화가 흐르는 강입니다. 강구안 골목의 재생으로 통영에 새로운 문화의 강물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골목 곳곳에는 다양한 예술 작품들과 시화들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나들가게 옆의 물고기 조형물과 세광한의원 옆 골목 윤이상의 달무리 악보는 프랑스에서 온 조형예술집단 ‘아트북콜렉티브’가 만든 것입니다. 물고기는 이중섭의 그림에서 튀어나온 고등어고 달무리 악보는 윤이상의 가곡 ‘달무리’의 음표를 자전거를 이용해 조형화한 것이지요. 골목의 벽면에는 백석의 시들이 걸려있어 시를 감상하며 거니는 기쁨도 큽니다.

예술가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이 골목은 또한 맛의 골목이기도 합니다. 진짜 통영의 맛들이 탄생한 원조 맛집 골목이지요. 흔히 경상도 음식은 맛없다는 속설이 있지만 통영만은 예외입니다. 나는 <통영은 맛있다>라는 책에서 그 이유를 논증한 바 있습니다. 지금이야 경상도 소속이지만 오랜 세월 통영은 경상도가 아니었습니다. 통영은 이순신 장군이 창설한 삼도수군통제영의 본영이 있던 곳입니다.

통영은 삼도수군통제영의 줄임말입니다. 1604년, 작은 포구에 100여 채의 건물이 생기면서 신도시가 들어섰습니다. 구성원들은 경상, 전라, 충청 삼도의 수군들과 통제영 산하 12공방에서 물품을 만드는 8도의 장인들이었습니다. 경상감사가 아니라 동급의 통제사가 수장인 통영은 출발부터 조선8도 사람들이 뒤섞여 만들어진 전국구 도시였던 것이지요. 그 시절은 바다가 고속도로였는데 편리한 수로교통을 통해 전국 각 지역과 활발하게 교류했습니다. 그렇게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면서 3백 년이 이어졌습니다. 통영이 경상도가 아닌 이유입니다. 통영 음식 또한 전라도를 비롯한 전국의 맛이 융합되어 새롭게 탄생했습니다. 통영이 맛있는 이유입니다. 그 맛의 전통을 이어온 곳이 바로 이 강구안 골목입니다.

이 골목에서 충무김밥과 다찌문화도 탄생했습니다. 이 골목에서는 30년쯤 된 식당은 명함도 못 내밀지요. 40년 이상 된 맛집들이 즐비한 까닭입니다. 여객터미널이 옮겨가며 식당들이 하나 둘 문을 닫았지만 단골이 꾸준히 찾아오는 집들은 끝내 살아남았습니다. 적게는 40년에서 70년까지 검증받은 집들입니다. 단골손님들이야말로 냉혹한 판관이니 일단 맛은 보장이 된다는 이야기지요.

1인 1만원짜리 밥상에 생선회와 장어구이, 매운탕과 해물된장이 나오는 40년 된 통영전통 한정식집과 24시간 가마솥에서 끓이는 70년 전통의 돼지국밥집도 이 골목에 있습니다. 박경리 선생이 그토록 좋아했던 가자미찜을 잘하는 어떤 찜집은 45년, 해물탕과 물회로 유명한 식당은 44년을 이어왔습니다. 통영에서는 대장간을 성냥간 혹은 공작소라 칭하는데 55년 된 대장장이 이평갑 선생의 대장간도 아직 건재합니다. 이 골목을 나서면 바로 강구안 바다입니다. 가만히 앉아서도 여행을 하고, 술을 마시지 않고도 취하게 만드는 곳, 통영. 그곳에는 강구안 골목이 있습니다.

▲강구안 골목길 입구의 물고기 조형물 ⓒ통영학교

백석 시인과 통영, 그 죽일 놈의 사랑

이순신 장군의 사당인 통영 충렬사 건너 쌈지공원에는 백석의 시비가 서 있습니다. 시비에 새겨진 시가 <통영2>입니다. 저 머나먼 북쪽 땅 정주가 고향인 백석의 시비가 남쪽 끝자락 통영에 서 있는 이유는 무얼까요. 그 죽일 놈의 사랑 때문입니다. 백석은 생애를 통해 참으로 많은 여인들의 애간장을 태우고 다닌 사내였지만 통영의 여자 '난'에게는 도리어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통영2>는 서울 살던 백석이 난이란 여자를 만나러 통영까지 왔다가 못 만나고 그녀가 살던 집과 동네만 하릴없이 기웃거리다 충렬사 입구 돌계단에 쪼그려 앉아 서글픈 심사로 쓴 것입니다. 백석은 <통영>이란 제목의 세 시편을 남겼습니다. 백석이 남쪽 끝 항구도시 통영에 대해 시를 세 편이나 남긴 것은 그만큼 그 여자 난에 대한 그리움이 컸던 때문일까요.

조선일보 기자였던 백석은 1935년 절친한 친구 허준의 결혼식 축하모임에서 같은 신문사 동료인 신현중의 소개로 당시 이화고녀 학생이던 통영 여자 난(박경련)을 만나 사랑에 빠집니다. 백석은 스물넷, 난은 열여덟 꽃다운 나이였지요. 백석은 후일 그의 산문 <편지>에서 난의 모습을 이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남쪽 바닷가 어떤 낡은 항구의 처녀 하나를 나는 좋아하였습니다. 머리가 까맣고 눈이 크고 코가 높고 목이 패고 키가 호리낭창 하였습니다.”(산문 <편지>)

난은 신현중의 누나 제자였던 터라 신현중과는 잘 아는 사이였지요. 백석은 내친 김에 신현중과 함께 허준의 통영 신행길을 따라나섰습니다. 사랑하게 된 여인의 고향과 집을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때 쓴 시가 1935년 12월 <조광>에 발표된 <통영>입니다. 1936년 1월 백석은 난을 만나기 위해 다시 통영을 방문합니다. 하지만 난은 겨울방학이 끝나가자 서울로 상경해버린 탓에 서로 길이 엇갈리고 맙니다. 이때 상실감을 안고 쓴 시가 <통영2>입니다.

백석은 3월에도 다시 통영을 방문하지만 이때도 결국 난을 만나지 못해 또 한번의 엇갈림, 하지만 사랑의 엇박자는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1936년 12월 백석은 친구 신현중과 함께 다시 통영을 방문해 난의 어머니에게 난과 혼인할 뜻이 있음을 전합니다. 이때의 상황은 2010년 통영시에서 발간한 <예향 통영>에 세밀히 나와 있어 인용합니다.

“1937년 난의 어머니 서씨는 서울에 사는 오빠 서상호를 만나 난의 혼사문제를 상의하고 백석에 대해 알아봐 줄 것을 청한다. 서상호는 통영 출신의 독립운동가였고 해방 후 2대 국회의원을 지낸 통영의 유력자였다. 난은 외삼촌 서상호의 집에서 돌봄을 받으며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서상호는 아끼는 고향 후배 신현중에게 백석에 대해 묻는다. 그때 신현중은 숨겨주어야 할 친구 백석의 비밀을 발설하고 만다. 그것은 백석의 어머니가 기생 출신이라는 소문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때문에 백석과 난의 혼사는 깨져버린다. 대신 그 자리에서 신현중은 서상호에게 자신이 난과 혼인할 뜻이 있음을 밝히고 단번에 승낙을 받는다. 1937년 4월 7일 신현중과 난은 혼인을 한다.”(2010년 통영시 발간 <예향 통영>에서 발췌 인용)

백석은 믿는 도끼에 발등이 제대로 찍힌 셈이지요. 백석의 입장에서는 친구의 배신입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백석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백석은 후일 여러 글에서 믿었던 친구에게 버림받은 아픔을 토로합니다. 그 와중에도 백석은 통영에 왔을 때 먹었던 그 시원한 대구국 생각이 났던 모양입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지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 앉아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 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흰 바람벽이 있어> 중에서)

▲충렬사 건너편 백석의 시비 ⓒ통영학교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은 법! 충렬사 건너 백석의 시비 앞에서 나그네는 드라마보다 더 극적인 엇갈린 사랑과 우정의 드라마를 봅니다. 하긴 언제나 현실은 삶을 배신하기 일쑤입니다. 현실보다 더한 막장드라마가 어디 있을까요. 사랑 앞에서는 국경이 없다지만 사랑 앞에서는 우정 또한 없습니다. 고금에 사랑 때문에 친구끼리 등을 돌리는 것은 흔한 일이지요. 백석의 친구 신현중 또한 난을 연모했으니 어찌 그만을 탓하겠습니까. 친구는 사랑의 전쟁터에서 승리한 것뿐인 것을요!

백석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사랑의 실패 덕분에 우리는 백석의 그 아름다운 시편들을 얻게 됐습니다. 난과의 사랑에 성공했다면 백석은 아마 통영에 정착해 살았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렇다면 시인이 아니라 혹 선원이나 선주가 되지는 않았을까요. 우리는 빛나는 시인 한 사람을 잃을 뻔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상이 정작 백석 자신에게는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할 것은 자명합니다. 계관시인의 명성을 잃을지언정 연모하는 여인의 사랑을 얻고 싶은 것이 남자의 마음이니까요.

윤이상을 윤이상이라 부르지 못하는 통영

윤이상 선생은 1917년 9월 17일 경남 산청군 덕산면에서 부친 윤기현과 모친 김순달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1920년 가족들과 함께 통영으로 이주해서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통영은 윤이상의 선조들이 통제영이 시작될 때부터 대대로 살았던 땅입니다. 윤이상 의 선조는 세병관을 세우는데 공헌한 사람 중 한 분이었고 증조부까지 선조들은 대부분 수군 장교로 통제영에 복무했었다 합니다. 출생지는 산청이지만 삶의 자양분을 얻고 그를 키운 고향은 통영이었습니다. 윤이상은 그의 자서전격인, 루이제 린저와의 대화 <상처 입은 용>에서 고향 통영에 돌아가 노년을 보내다 그곳에 묻히고 싶다고 소망했습니다.
"어느 날 은퇴해 고향으로 돌아가 그저 조용한 바닷가에 앉아 물고기를 낚고 마음속으로 음악을 들으면서 위대한 고요함 속에 내 몸을 뉘였으면 합니다. 또 나는 그 땅에 묻히고 싶습니다. 내 고향 땅의 온기 속에 말입니다."

하지만 그의 소박한 꿈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도천테마파크에는 윤이상의 동상이 있고 2층 전시실에는 윤이상의 흉상이 있습니다. 살아 생전 그토록 고향에 오고 싶어 했으나 조국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그는 회한을 품고 이승을 하직했겠지요. 그 대신 그의 동상이 고향 통영으로 왔습니다. 2층 전시실의 흉상은 평양 윤이상연구소에 있는 흉상을 만수대창작사에서 복제해 준 것입니다. 윤이상평화재단의 의뢰로 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흉상 또한 2009년 6월 인천항으로 반입됐으나 북한의 핵실험 후 정부의 반입보류 조치로 오랫동안 인천세관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가 통영예총의 탄원으로 어렵사리 통영으로 왔습니다.

윤이상의 흉상 또한 생전의 윤이상처럼 고초를 겪었으니 그는 분단의 비극을 사후에까지 온몸으로 체현하고 있는 셈입니다. 윤이상은 생존 당시 현존하는 유럽 5대 작곡가에 선정됐고 뉴욕 브루클린음악원의 교수들에 의해 사상 최고의 음악가 44명 중 한명으로 뽑혀 이름이 동판에 새겨지기도 했습니다. 20세기 작곡가로는 윤이상과 스트라빈스키 등 네 명뿐입니다.

서호시장 뒤편, 도천동 윤이상 생가 터에 윤이상기념관이 있습니다. 그런데 밖에서는 윤이상기념관이란 사실을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건물 외부에는 기념관 간판이 없기 때문입니다. 공원 입구 표지석에는 도천테마파크란 이름만 눈에 띌 뿐이지요. 도천테마파크는 원래 윤이상기념공원으로 계획되었었는데 색안경을 끼고 보는 일부 사람들의 반대로 이름이 바뀌게 된 것입니다.

윤이상은 동백림사건으로 간첩 누명을 쓰고 투옥생활을 했지만 후일 고문에 의해 조작됐다는 사실이 밝혀져 누명을 벗었습니다. 그럼에도 아직껏 근거없는 주장으로 선생을 비난하고 욕되게 하는 이들이 있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윤이상기념관은 유품 전시실과 실내 공연장과 실외 공연장인 경사광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공원에는 윤이상이 살던 독일의 집 정원에서 가져온 가문비나무가 기념 식수되어 있습니다. 전시관은 2층입니다. 전시관 안에는 윤이상의 어머니가 쓰던 함지박과 호리병, 독일유학 시절 쓰던 바이올린, 친필악보, 그가 입던 옷들과 중절모, 그가 어린 시절 썼던 요강까지 전시되어 있습니다.

▲고향 통영은 박경리에게 아픔과 위로를 함께 준 곳이다. ⓒ강제윤

박경리와 통영 그 애증의 세월

박경리는 왜 50년 동안 고향을 찾지 않았던 것일까?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1926.10.28.~2008.5.5.) 선생은 살아생전 고향 통영을 떠난 뒤 50년 동안이나 고향을 찾지 않았습니다. 외국에 나가 살았던 것도 아니고 수몰민이나 실향민처럼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처지도 아니었는데 선생은 어째서 50년 세월, 단 한번도 고향을 방문하지 않았던 것일까요? <토지>나 <김약국의 딸들> <파시> 같은 선생의 소설 속에는 통영을 끊임없이 등장시켰으면서도. 혹 고향에 돌아갈 수 없는 말 못할 사정이라도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2004년 11월 5일, 박경리 선생은 떠난 지 50년 만에 처음으로 고향 통영을 찾았고, 남망산의 시민문화회관 강연을 통해 고향 사람들과 다시 만났습니다. 거리 곳곳에는 선생을 환영하는 현수막들이 내걸렸고 800석의 문화회관 대극장은 ‘송곳 세울’(立錐) 틈도 없이 꽉 들어찼습니다. 무명의 여인 ‘박금이’로 떠났던 고향을 대작가 박경리가 되어 돌아왔으니 가히 금의환향이라 할 만했습니다.

이날 강연에서 선생은 통영을 떠나 산 지난 세월이 ‘생존투쟁’의 나날이었고, 25년간은 소설 <토지>를 쓰느라, 또 10년간은 원주의 ‘토지문화관’을 꾸리느라 힘들어서 고향뿐만 아니라 다른 어디도 못 가봤다고 말했습니다. 또 ‘기질 탓’에 고향을 찾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덧붙였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사이 한 번도 못 왔느냐고 물으시면 변명인지는 모르겠으나 제 기질 탓도 있습니다. 어릴 적 저는 방안에만 있는 ‘구멍지기’라고 어머니한테 야단맞곤 했지요. 결혼 때는 이웃에서 이 집에 처녀가 있는 줄 몰랐다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수줍음이 많아서 지금도 낯선 사람 만나는 게 힘들어요. 잘 나고 도도해서가 아니라 제가 워낙 그래요.” (<한국일보> 2004.11.5.)

선생이 50년이나 고향 땅 통영을 찾지 않았던 것이 과연 그 이유만이었을까요? 선생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기는 어렵습니다. 이날 강연에서 선생은 그 “세월 동안 고향뿐만 아니라 다른 어디에도 못 가봤다”고 했지만 1989년 여름에는 중국 각지를 여행한 뒤 이듬해 <만리장성의 나라>라는 중국 기행문집까지 펴낸 바 있습니다. 또 2002년에는 10년 만에 하동을 다시 찾아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고향뿐만이 아니라 아무데도 못 갔다는 말씀은 그저 ‘변명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대체 중국 여행도 하고 10년 사이 하동에는 두 번씩이나 갔으면서 하동과 지척의 고향 통영을 찾지 않았던 것은 왜였을까요?

나그네는 지금 통영시 산양읍 신전리 박경리기념관 전시실 벽 앞에 서 있습니다. 벽에는 박경리 선생이 남긴 어록이 새겨져 있습니다.
"문학이라는 것은 '왜'라는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우리는 왜라는 질문을 멈출 수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문학의 골자입니다."(박경리)

선생은 왜라는 질문을 던지며 창작을 했지만 나그네는 박경리 선생이 50년 동안이나 고향을 찾지 않았던 그 이유를 알기 위해 왜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박경리 선생의 본명은 금이입니다. 통영에서 태어나 국민학교에 다녔던 소녀 금이는 수업시간에도 소설책을 볼 정도로 책을 좋아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국민학교 시절 공부는 겨우 중간쯤밖에 못했다지요.

"집이 가난해 엄마가 바느질 등으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갔지만, 어린 금이는 언제나 당당하고 궁색한 법이 없었다. 그리고 자립심이 강하고 무슨 일이던 최선을 다했지. 평생 그랬던 것 같아. 지금 생각해 보면..." (<한산신문> 2008.5.9.)

<한산신문> 김영화 기자가 소녀 금이와 어린 시절 친구였던 홍봉연 할머니에게 들은 증언입니다. 박경리는 1945년 진주여고를 졸업한 뒤 1946년 1월30일 김행도와 결혼했습니다. 하지만 남편 김행도는 한국전쟁 중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사망했습니다. 혼자가 된 박경리는 아들, 딸 둘을 데리고 고향 통영으로 내려왔습니다. 항남동 오거리 부근에서 수예점을 열었습니다. 당시 친구들이 수예점을 드나들며 물건을 많이 팔아주었습니다. 자존심 상하지 않게 도와준 것이었다고 홍봉연 할머니는 전합니다.

그러나 돌아온 고향에서 박경리는 안식을 찾지 못했습니다. 고향은 그녀를 품어주지 않았습니다. 어느 해 박경리 선생은 쫓기듯이 통영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 날 이후 박경리는 평생 동안 통영 사람들에게 섭섭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합니다. 박경리 선생이 평생 동안 통영 사람들에게 섭섭한 마음을 갖게 한 그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혹 그 일 때문에 선생은 50년 동안이나 고향 통영을 찾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요? 통영을 떠나기 전인 삼십대 초반, 박경리는 돌아온 고향 통영에서 일련의 사건을 만납니다. 어떤 사건이냐고요? 통영에 오시면 그 궁금증을 풀 수 있습니다.^^

그 사건 이후 박경리는 통영을 떠났고 50년 동안 단 한번도 통영을 찾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녀가 그 오랜 세월 고향을 등진 것은 그러한 일련의 사건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50년 만에 돌아온 고향 통영에서 그녀는 그 당시 일의 섭섭함에 대해 일체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고향에 돌아왔고 고향에 묻히길 원했고 고향에 묻혔습니다. 고향이란 그런 곳입니다. 50년 동안이나 간직한 원망도 설움도 한순간에 녹여버리지요.

통영대교 건너 박경리기념관으로 갑니다. 기념관 뒷산 중턱 양지 바른 곳에는 선생의 묘지도 있습니다. 바다가 환히 내려다보이는 해변의 묘지. 고향은 그녀에게 상처를 입혔지만 그녀는 끝내 고향으로 와 잠들었습니다. 고향도 끝내는 그녀를 품었습니다. 기념관 전시실에는 <토지> 친필 원고와 여권, 편지 등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나그네는 다시 기념관 전시실 벽 앞에 서 있습니다. 그녀가 가졌던 약한 것들에 대한 연민이 가슴을 파고듭니다. 약자들에 대한 연민이야말로 그녀가 소설을 통해 세상에 널리 전하고자 하는 ‘복음’이 아니었을까요.

"사랑이라는 것이 가장 순수하고 밀도도 짙은 것은 연민이다. 연민, 연민은 불쌍한 것에 대한 말하자면 허덕이고 못 먹는 것에 대한 것, 생명이 가려고 하는 것에 대한 것에 대한 설명이 없는 아픔이거든요, 그것에 대해 아파하는 마음, 이것이 사랑이에요. 가장 숭고한 사랑이에요."(박경리 2004년 마산mbc 특집대담에서)

유마거사는 세상이 아프니 나도 아프다 했습니다. 그가 진정한 보살인 이유입니다. 박경리 선생도 세상의 아픔을 같이 아파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문학은 세상의 약한 것들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녀가 위대한 예술가인 이유입니다.

▲통영다찌 상차림. 다찌는 다양한 해산물 음식을 모두 맛볼 수 있는 통영의 보물이다. ⓒ이상희

해산물 요리의 알파와 오메가, 다찌

싱싱한 제철 해산물은 발품만 팔면 어느 바닷가에서든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딜 가든 우리가 맛볼 수 있는 요리는 제한적입니다. 봄이면 쭈꾸미나 도다리회 한 가지만 수북하게 쌓아놓고 배가 터지도록 먹어야 하고 가을이면 대하만 질리도록 먹어야 합니다. 아무리 맛난 음식도 물리도록 한 가지만 먹어야 하는 것은 고역입니다.

맛있는 해산물을 조금씩 다양하게 맛 볼 수는 없을까요. 생선회도 조금, 생선구이도 조금, 쭈꾸미도 조금, 꽃게도 조금, 멍게도, 굴도, 도다리도, 물메기도 조금씩 다 맛볼 수는 없는 걸까요. 통영에서는 가능합니다. 다찌집이 있기 때문입니다.

통영의 다찌집에서는 계절마다 제철 생선회와 해산물들이 다 있습니다. 싱싱함과 맛깔스러움, 무엇하나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 경상도 음식은 맛없다는 편견을 보기 좋게 깨주는 곳이 통영의 다찌집입니다. 술을 시키면 안주는 주인이 주는 대로 먹는 술집이 다찌입니다. 다찌집에서는 그날그날 시장에 나온 식재료에 따라 메뉴가 바뀌고 계절마다 제철 음식이 나옵니다.

전주의 막걸리 골목처럼 다찌는 본래 술값만 받고 안주값은 안 받는 술집문화입니다. 대신 술값이 좀 비쌉니다. 술값에 안주값이 포함되니 그렇습니다. 하지만 안주를 생각하면 결코 비싼 것이 아닙니다. 음식만으로도 충분한 값어치를 하고도 남지요. 요즘은 다찌에서도 수지타산을 맞추기 어려워 기본요금을 받기도 합니다.

대체로 통영 사람들은 다양한 해산물 안주를 원하지만 안주를 많이 먹는 편이 아닙니다. 맛있는 안주를 고루고루 조금씩 먹는 것을 즐깁니다. 다찌 문화가 유행할 수 있는 배경이지요. 통영 사람들도 다찌의 어원은 잘 모릅니다. 통영문화원 김일룡 향토사연구소장은 다찌가 “일본 선술집을 뜻하는 다찌노미(立(ち)飲み)에서 왔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이름의 유래야 어떻든 겨울 다찌집은 통영 해산물요리의 알파요 오메가입니다.

겨울철 최고의 별미, 타락죽처럼 부드러운 물메기탕

통영 여행의 절반은 음식입니다. 통영은 시작부터 끝까지 맛있습니다. 통영은 어느 계절이나 맛있지만 겨울이야말로 가장 뛰어난 맛을 자랑합니다. 겨울 통영은 굴과 대구와 물메기와 복어의 계절입니다. 시원한 복국과 물메기탕, 진한 생대구탕은 잃었던 입맛을 되돌아오게 하는 묘약입니다. 통영 음식문화의 대명사 다찌도 겨울이 가장 풍성하고 맛있습니다. 굴의 산지답게 어느 식당을 가나 생굴은 밑반찬으로 거저 나옵니다.

통영 사람들은 계절마다 통과의례처럼 꼭 먹어야 하는 제철 음식이 있습니다. 봄은 도다리쑥국이고 여름은 하모회나 장어구이, 겨울은 단연 물메기탕과 대구탕입니다. 서울 사람들이 보신탕이나 삼계탕을 먹어야 여름을 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통영 사람들은 마치 물메기탕이나 대구탕을 챙겨먹지 못하면 겨울을 날 수 없기라도 할 것처럼 안달입니다.

특히 물메기탕은 통영의 겨울 별미 중 으뜸입니다. 물메기는 지역마다 그 이름도 각각인데, 동해에서는 곰치나 물곰이라고 하지만 통영에서는 물메기나 '미기'라 합니다. 물메기는 동중국해에서 여름을 나고 겨울이면 산란을 위해 한국의 연안으로 올라오는데 이때가 산란철이라 살이 올라 가장 맛이 있습니다. 통영에서는 마른 메기도 잔치음식의 대표입니다. 전라도 잔치상에 홍어가 빠지면 차린 것 없단 소리를 듣듯이 통영의 잔치집에서는 마른 메기찜이 빠지면 '안꼬 없는 찐빵'이지요.

나는 맑게 끓여내는 통영의 물메기탕보다 더 부드럽고 속을 편하게 달래주는 해장국을 먹어본 적이 없습니다. 물론 대구나 복국이 있지만 시원하고 담백하기로는 물메기탕을 따라가기 힘들 것입니다. 그러니 정약전의 <자산어보(玆山魚譜)>에도 “곧잘 술병을 고친다”고 했겠지요.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는 “살이 타락죽(駝酪粥, 우유죽) 같아 양로(養老)에 가장 좋다”고 한 것처럼 살이 살살 녹습니다.

▲통영의 보물 편백나무 숲 ⓒ이상희

법정스님이 출가했던 미래사와 치유의 숲, 편백숲

용화사 입구에서 출발하는 둘레길을 따라 미륵산 중턱 미래사까지 갑니다. 미륵을 기다리는 절, 미래사. 미륵산 미래사는 법정스님이 출가한 절입니다. 대학생 박재철은 전남대 상대를 다니던 중 한국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으며 고뇌하다가 1954년 서울 안국동 선학원에서 당대의 고승 효봉스님을 만나 그 자리에서 머리를 깎고 출가합니다. 그는 다음날 바로 통영 미래사로 내려와 부목(땔깜 담당 나무꾼)이 되어 행자생활을 시작했지요.

법정스님의 스승인 효봉스님(1888~1966)은 통합종단 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낸 고승입니다. 일제 치하에서 판사 생활을 하다 법복을 벗고 스님이 된 당대의 고승이지요. 미래사는 오래된 절은 아니지만 산속에 푹 파묻힌 모습이 더없이 고즈넉합니다. 절 주변에는 효봉암과 구산대 등이 있습니다.

미래사를 잠깐 둘러보고 이제 치유의 숲, 편백숲으로 갑시다. 나그네가 보기에 미래사의 가장 큰 보물은 건물들이 아니라 절 주변의 편백나무 숲입니다. 일제 강점기 일인들이 심었던 편백숲을 후일 미래사에서 매입했다 합니다. 편백숲이 암을 비롯한 난치병 환자들에게 좋다는 소문이 나 많은 환자들이 찾고 있습니다. 일반인들도 건강을 위해 찾아듭니다.

모든 나무는 상처를 입을 경우 병균이 침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피톤치트라는 물질을 뿜어내는데 편백의 경우 소나무 등 다른 침엽수보다 세배 이상의 피톤치트를 뿜어낸다 합니다. 그래서 편백숲의 치유효과가 뛰어나다지요. 편백나무에서 나오는 피톤치트는 수령 60∼100년 사이가 가장 많다 하는데 일제 때 조성한 미래사 편백숲의 수령이 그 정도 됩니다. 편백숲은 모두 5만여 평. 통영의 숨겨진 보물입니다. 곧게 뻗은 편백숲을 걸으면 움츠러들었던 정신의 갈기가 곧추 서고 피가 맑아지는 느낌이 들 겁니다.

왜구들의 영혼을 떠받들기 위해 팠다? 해저터널

해저터널 위를 흐르는 좁은 해협은 통영운하입니다. 통영의 야경은 어느 항구도시보다 아름다운데 그 아름다운 야경은 상당부분 통영운하에서 비롯됩니다. 미륵도와 통영을 잇는 통영대교와 충무교 두 다리 아래 바다가 통영운하입니다. 오랜 옛날 통영반도와 미륵도는 하나로 이어진 땅이었습니다. 미륵도는 섬이 아니라 육지였는데 뱃길을 단축시키기 위해 미륵도와 통영 사이의 좁은 목을 파 운하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미륵도는 섬이 되었습니다. 충남 안면도와 같은 경우입니다.

통영운하 아래에 뚫린 해저터널은 1931년 7월 26일 착공하여 1년 4개월만인 1932년 11월20일 완공됐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일제는 해저터널을 파기로 한 것일까요. 그 당시에도 미륵도와 통영 사이에는 나무나 돌로 된 다리가 있었습니다. 그것들을 대체하고 새 다리를 건설하면 될 터인데 굳이 해저터널을 판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기에도 야담이 전해집니다. 해저터널 부근 바다는 임진왜란 당시 왜적들이 수없이 빠져 죽은 곳입니다. 일제는 이곳에 다리를 놓게 되면 그들 조상들의 영혼을 밟고 다니게 되는 형국이기 때문에 터널을 팠다고 합니다. 터널을 파고 바다 밑으로 다니면 오히려 자기 조상들의 영혼을 받들고 다니는 모양새가 되기 때문에 다리를 놓지 않고 해저터널을 팠다는 것이지요. 기록이 없으니 확인할 수 없지만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마을공동체의 ‘오래된 미래’, 동피랑 벽화마을

동피랑 마을은 가파른 비탈에 들어선 통영의 대표적인 달동네였습니다. 용역들에 의해 철거될 뻔했던 낡은 집과 오래된 골목에 벽화가 그려지면서 관광객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동피랑 마을은 다시 살아났습니다. 2013년 10월 26일, 동피랑 마을에 당시 안철수 대통령 후보가 다녀갔습니다. 경남 순방 길에 들른 통영에서 오로지 동피랑 마을만을 방문한 것은 상징하는 바가 큽니다. 안 후보는 주민들과 간담회에서 동피랑을 “공동체 복원의 모범사례”로 꼽으며 “진즉부터 꼭 방문하고 싶었던 곳”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또 “우리들에게는 앞이 아니라 옆과 뒤를 돌아보는 공동체 삶이 더 시급하다”며 “동피랑 마을가꾸기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라고 평가했습니다. 개발의 바람 앞에 흔적도 없이 사라질 뻔했던 통영의 대표적인 달동네 동피랑이 이제는 대선 후보들에게도 마을 만들기와 공동체 복원의 대표적인 사례로 거론되고 있습니다. 이미 동피랑은 이 나라 마을공동체의 ‘오래된 미래’가 된 것이지요.

▲동쪽 벼랑에 있는 달동네 동피랑이 이제는 통영보다 더 유명해졌다. ⓒ이상희

동피랑은 본래 산이었습니다. 48.5m의 야산에 불과하지만 동암산(東岩山)이라는 번듯한 이름까지 가지고 있었지요. 동피랑. 통영말로 ‘피랑’은 벼랑 혹은 비탈을 뜻합니다. 동쪽 벼랑이 곧 동피랑입니다. 동피랑은 오랜 세월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온 동네입니다. 지금이라고 다를까요. 동피랑의 집들은 대부분 10평 내외의 작은 주택들입니다. 골목의 어떤 집에서는 아직도 저녁마다 군불을 지펴 난방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동피랑은 이제 더 이상 달동네가 아닙니다. 누구나 오르고 싶어하는 꿈의 언덕입니다. 파괴를 통한 개발이 아니라 낡고 오래된 것의 보존을 통해 이루어낸 작은 기적입니다.

은하수 물을 끌어와 병장기를 씻다, 세병관

국보 제305호 세병관은 통영의 상징입니다. 세병관은 통제영의 객사였습니다. 객사란 본래 고려, 조선시대 관아의 중심 건물이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객사의 형태가 표준화되었으며 전국에 360여 개의 객사가 설치됐었지요. 현재는 그중 10여 곳만이 남아 있습니다.

지방관청에서 수령이 집무를 보는 동헌이 높은 건물인 줄 알지만 실상 가장 격이 높은 건물은 객사였습니다. 국왕을 상징하는 건물이기 때문이지요. 동헌은 객사 동쪽에 있다 해서 동헌입니다. 객사에는 국왕의 전패를 모셨습니다. 그래서 지방관으로 부임하는 관리들은 가장 먼저 객사를 찾아 예를 올려야 했습니다.

세병관 현판은 36대 통제사 서유대의 글씨입니다. 세병관의 세병은 두보의 시 <세병마행(洗兵馬行)>의 ‘만하세병’이란 구절에서 따왔습니다. 만하세병은 ‘은하수를 끌어와 병장기를 씻는다’는 뜻입니다. 시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습니다.
安得壯士挽天河(안득장사만천하) 淨洗兵甲長不用(정세병갑장불용)
“어떻게 하면 힘센 장사를 얻어 하늘의 은하수를 끌어다가, 병기를 씻어내어 길이 사용하지 못하게 한단 말인가.”

두보는 안녹산의 난(755∼763) 때 포로가 되는 등 숱한 전쟁의 참혹함을 직접 겪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평화에 대한 바람이 그토록 간절했던 것이지요. 은하수 물로 무기를 씻는 뜻은 전쟁을 준비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전쟁을 영원히 끝내기 위함입니다. 임진왜란이란 참혹한 전쟁을 겪었던 이 땅의 평화를 바라는 열망이 이 건물의 현판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습니다.

▲세병관. 통제영 건물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물이다. ⓒ이상희

▲수백년 세월의 손때가 묻은 세병관 마루 ⓒ통영학교

이순신공원, 평화의 의미를 묻다

이순신공원은 한산해전의 현장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만들어진 공원입니다. 한산 바다의 전망이 그림처럼 아름답습니다. 선조 25년(1592) 7월 8일,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이억기, 경상우수사 원균 등과 연합하여 왜군과 일전을 치릅니다. 이순신은 거제와 통영 사이의 바다 견내량해협은 좁고 얕아 전투가 용이하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왜적을 큰 바다로 유인해 격파할 작전을 수립하지요. 조선 수군은 견내량을 빠져나와 도망치는 척하다가 왜군 함대가 한산도 앞바다까지 쫓아오자 갑자기 학익진을 펼치고 대포와 화살을 쏘아대며 왜적을 초토화시키는 대승을 거둡니다.

한산도 전투에서 왜군의 총대장은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라는 장수였습니다. 육전에서 그는 3천 병사로 조선군 5만 명을 혼비백산하게 만든 자였지요. 당시 함포는 조선이 절대적인 우세였지만 화약에 불을 붙여 철환을 날리는 함포 공격은 사이 간격이 너무 길었습니다. 배 숫자가 적은 조선으로는 불리한 조건이었지요. 와키사카는 조선수군이 배 숫자를 많게 보이게 하기 위해 일자진을 펼칠 거라 예상했습니다. 숫자가 월등한 자신들이 일자진을 깨버리고 포위해 들어가면 절대적으로 우세할거라 확신했다는군요.

그러나 이순신은 일자진이 아니라 학익진을 펼쳤습니다. 조선의 주력선은 판옥선이었습니다. 판옥선은 직사각형 모양의 평저선(바닥이 평평한 배)인데 앞뒤로 2문, 옆으로는 8문씩, 모두 20문의 포를 장착하고 있었습니다. 판옥선은 속도가 느린 대신에 360도 회전이 가능합니다. 앞쪽에서 포를 쏘면 배가 바로 돌면서 옆쪽 포문에서 연달아 포탄을 쏟아냈고 다시 뒤쪽, 옆쪽으로 쉬지 않고 이어집니다. 1척이 앞쪽에서만 포를 쏘는 전함 10척의 몫을 해냈지요.

그런 전함들이 학날개처럼 펼쳐져서 왜선을 향해 연달아 포를 쏘아대니 왜선은 감당해낼 도리가 없었습니다. 1592년 7월 8일 조선군 연합함대 55척이 거의 손실이 없이 왜군 전함 73척 중 46척을 부수고 12척을 나포하는 대승을 거둔 것은 전적으로 이순신의 학익진 전법에 힘입은 바 크다 합니다.

학익진 전법은 함대함 진법의 전형이고 근대적 전법의 시작이라 합니다. 한산대첩의 또 하나 의미는 전면전 최초의 승리라는 점입니다. 한산대첩 전에도 전투에서 연승했지만 그것은 기습전이었지요. 전면전을 통한 한산대첩 승리로 조선군은 자신감을 완전히 회복했으니 한산대첩은 임진왜란의 전세를 뒤집은 아주 중요한 전투였습니다. 이순신공원 앞 한산 바다는 비할 데 없이 평화롭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이순신공원에서 한산해전의 승리에 도취하기보다는 이 바다의 평화가 영원히 지속되길 기원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통영운하 야경.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 ⓒ이상희

통영학교 제8강의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통영학교 제8강 답사로 ⓒ통영학교
<12월 13일(토)>

07:00 서울 출발(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 압구정 지하철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통영학교> 버스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 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8강 여는 모임→통영 도착→점심식사(싱싱한 생물 생선구이)→윤이상기념관 탐방→통영 미륵산 둘레길과 편백숲 걷기(용화사→띠밭등 약수터→미래사→편백숲→오솔길→용화사, 4km)→박경리기념관 및 묘소 탐방→해저터널 걸어서 건너기→숙소 도착 및 방 배정(<캘리포니아호텔>, 다인실)→이중섭 화백 살던 집 탐방→저녁식사 겸 뒤풀이(통영 최고의 다찌집에서 제철 해산물 요리의 향연)→자유시간 및 취침

<12월 14일(일)>

07:00 기상→아침식사(통영 최고의 물메기탕)→가볍게 통영 걷기(동피랑 마을탐방→청마거리→세병관→백석시비)→이순신공원 산책→강구안 골목길 탐방→점심식사(제철 생선회와 장어구이, 해물뚝배기 등 통영식 한정식)→중앙시장에서 장보기 혹은 강구안 거북선 산책→제8강 마무리모임. 서울 향발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 따뜻한 여벌옷, 윈드재킷, 장갑, 우의(+접이식 우산), 스틱, 물통, 간식, 자외선 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강제윤 글, 이상희 사진 <통영은 맛있다>를 참고하시면 통영 답사의 의미가 더욱 깊을 것입니다. ☞<통영은 맛있다> 바로가기

▲숨막히게 아름다운 통영의 일몰 ⓒ이상희

통영학교 제8강 참가비는 왕복 교통비, 숙박비, 4회 식사비 겸 뒤풀이, 강의비, 운영비 등 포함, 23만5천원입니다(사전예약 관계로 12월 5일까지 참가접수를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좌석은 접수순으로 지정해 드립니다. 이 답사는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으며, 참가 신청과 문의는 인문학습원 통영학교
www.huschool.com 전화 050-5609-5609 이메일 master@huschool.com으로 해주세요(회원 아니신 분은 회원 가입을 먼저 해주십시오. ☞회원가입 바로가기). 통영학교 카페에도 놀러오세요(통영학교카페 바로가기)^^ 통영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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