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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주 "언론 자유는 싸워서 쟁취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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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주 "언론 자유는 싸워서 쟁취하는 것"

[박인규의 inter-view] 정연주 KBS 전 사장

스물아홉 살, 4년 차 기자는 어느 날 시위 현장에서 '개와 기자는 접근 금지'라는 푯말을 마주했다. '정말 벼랑 끝까지 몰렸구나.' 참담했다. '기자가 개와 동급으로 취급되다니….' 분노했다.

예순아홉 살, 기자는 방송사 사장을 끝으로 현직에서 은퇴했다. "공영 방송인데 6년 동안 사장만 네 번, 보도본부장만 여섯 번 바뀌었다." 탄식했다. "그 동네는 잊고 살아야지." 서글펐다.

박정희 유신 정권은 '긴급조치'로 언론 통제에 나섰고, 이명박-박근혜 정권은 권력기관을 동원해 언론의 손발을 묶었다. 1974년 '자유언론실천선언'이 2014년 현재도 유효한 이유다.

10.24 선언 당시 <동아일보> 막내 기자였던 정연주 KBS 전 사장은 "언론 자유는 싸워서 쟁취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여전히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안타깝지만, "그래도 희망은 있다"며 웃었다. SNS와 유투브 등 혁명에 가까운 디지털 변화로 '언로'(言路)가 늘 보장되어 있다는 점, 또 5년에 한 번 선거를 통해 국민이 직접 정권을 교체할 수 있다는 점 등. 내일이면 일흔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반짝였다.

다음은 지난 20일 정연주 전 사장과 프레시안 박인규 발행인이 만나 나눈 대화다.

▲ 정연주 KBS 전 사장은 "위(정권)에서 시혜처럼 주는 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싸워서 얻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 언론(언론 자유화)'"이라고 말했다. ⓒ프레시안(최형락)

언론 자유, '투쟁'으로 얻다

박인규 :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한 1974년 10월 24일은 우리나라 언론사에서 굉장히 빛나는 순간이다. 이듬해 해직된 113명의 기자와 PD가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를 결성해 언론 민주화 운동에 투신한지도 40년이 됐다.

정연주 : 1970년대는 신문이 유일한 언론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이를 통제하고자, 1972년 개헌된 유신 헌법 53조에 의거해 74년 긴급조치 1,2호를 공포했다. 완전히 암흑시대였다. 당시 대학생들은 박정희 정권에 반대하며 연일 데모를 벌였고, 노동자·농민들의 생존권 싸움도 치열했다. 특히 성직자와 지식인을 중심으로 한 '민주화' 움직임이 컸다.

그러나 '유신 헌법을 철폐하라', '구속자를 석방하라'고 외치는 등 민주화를 열망하는 행위 일체를 보도하지 못했다. 어쩌다 일부가 보도되면, 관련자들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맞았다. 이 같은 일이 반복되다 보니, 기자들도 알아서 기었다. '자기 검열'이 언론인의 영혼을 죽이는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를 포함한 기자들은 철저하게 자기 검열을 했다. 그렇게 '사실 보도'조차도 못하는 언론인이 돼 개와 같은 취급을 당하는 신세가 됐다.

굴욕과 굴종 속에 <동아일보>가 10월 23일 '서울대 농대생 300명 데모' 기사를 보도했다. 정보부는 즉각 송건호 편집국장과 한우석 지방부장, 박중길 방송뉴스쇼 담당부장을 연행했다.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은 다음 날, "민주사회 유지와 자유국가 발전을 위해 자유언론은 어느 누구도 간섭할 수 없다"는 내용의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했다. △ 외부 간섭 배제, △ 기관원 출입 거부, △언론인 불법 연행 거부 등 구체적인 행동지침도 밝혔다. 특히 기자들은 경영진에게 "우리 선언과 요구를 다룬 기사를 1면에 세 단 이상 실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제작 거부에 들어가겠다"고도 했다.

석간이었던 <동아일보>는 오전 11시에 기사를 마감했다. 경영진은 그러나 마감 때까지도 '자유언론실천선언' 내용을 기사화하지 않았다. 기자들은 곧바로 제작 거부에 들어갔다. 점심시간이 이후 늘 볼 수 있었던 <동아일보>가 나오지 않자, 시민과 독자들의 전화가 편집국에 빗발쳤다. 전화를 받아 "유신 정권의 언론 통제에 맞서 지금 제작 거부에 들어갔다"고 알렸더니, "신문 안 나와도 괜찮으니까 끝까지 싸우라"며 응원해줬다. 얼마나 뜨거웠는지 모른다. 당시 <동아일보>는 지금 <조선일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최고의 영향력을 가진 '1등 신문'이었다.

▲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와 동아방송 언론인들이 편집국에 모여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하고 있다. ⓒ프레시안 자료 사진

'육전·공전·해전' 끝에 얻은 '자유'

박인규 : 당시 인상적인 보도가 유신 정권 대표 용공조작 사건인 '민청학련사건 피해자' 인터뷰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을 '반(反)체제운동'을 벌인 불법단체로 낙인찍고, 그해 4월 긴급조치 4호를 발동해 180명을 비상보통군법회의에 구속·기소했다. 이후 5월 27일 비상군법회의 검찰부는 인민혁명당 재건위가 민청학련사건을 배후했다며, 1차 인혁당사건 관련자 23명을 추가 기소해 8명은 사형·7명은 무기징역·나머지는 20년 형을 선고했다. 이후 민청학련사건 피해자들은 다음해 2월 15일 대통령 특별조치로 대부분 석방됐다. 문제는 사형을 선고 받은 8명이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4월 8일 상고를 기각, 이들의 형량을 확정했다. 그러나 8명은 서울구치소에서 선고통지서가 도착하기 전, 형장의 이슬이 되고 말았다. 편집자)

정연주 : 민청학련사건 수감자를 일시에 석방한 것은 박정희 정권의 유화책이었다. 사회적 불만을 뚜껑을 열어 김을 좀 빼는 식이었다. 민청학련사건 피해자를 만난 1975년 2월 16일은 평생 잊지 못한다. 동기인 조영호 기자와 둘이서 피해자 두 명을 각각 인터뷰했는데, 정말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우리는 인터뷰 기사 외 고문 관련만 모아 스트레이트로 쓰자고 얘기했다. 고문 기사는 다음날 1면 톱에, 인터뷰 기사는 지면 하나에 걸쳐 모두 보도됐다. 고문 시 '육전·공전·해전'이라는 표현이 보도된 건 처음이다. 육전(陸戰)은 땅에 밀쳐놓고 패는 것, 공전(空戰)은 공중에 매달아 놓고 패는 것, 해전(海戰)은 물속에 넣어놓고 패는 것이다.

기자 생활을 시작한 이후, 그렇게 환희를 느껴본 적이 없다. 10.24 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기사였다. 사실을 사실대로 전함으로써 유신시대 고문과 폭압 정치의 실태를 드러나게 했다. 불과 몇 달 사이에 상상을 초월하는 '언론의 자유'를 직접적으로 경험했다.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인간에게 '자유'(말하고 밝힐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도 새삼 깨달았다.

언론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사실 보도'와 '권력에 대한 비판·감시·견제'다. 그래서 이 두 가지가 모두 실현됐을 때 언론인은 온몸으로 기쁨과 보람을 느낀다. 당시 <동아일보>뿐 아니라, 타사 기자들도 유신 정권에 굴종돼 사는 것을 부끄러워했다. 고문 관련 보도 직후, 해직됐을 때 함께하지 못한데 대한 미안함이 컸다(당시 강제 해고된 동아 출신 언론인들은 '동아자유언론투쟁위원회'를 결성해 유신 정권의 언론 통제에 정면으로 맞섰다. 편집자).

'밤의 대통령'이라는 수구 언론의 오만

▲ 정연주 전 사장은 "조·중·동이 민주 정부 당시만 해도 '사실 보도'나 '권력 견제'를 못하는 것에 대해 부끄러워했으나, 지금은 그런 모습이 없다"며 "오히려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데만 집중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프레시안(최형락)
박인규
: 70년대 언론과 지금의 언론을 비교하자면?

정연주 : 지금 언론은 모양은 회사지만, 정권에 호의적이거나 밀착된 인물들이 상층부에 포진해 있다. 그런 면에서 70년대 권력지향적이고 기회주의적이었던 경영진 일부와 비슷하다. 다른 것이 있다면, 언론이 다양화됐다는 것이다.

그때는 신문 목만 쥐면, 사실(진실)이 감춰지는 그야말로 암흑 시대였다. 하지만 지금은 어느 한 쪽만 누른다고 해서 사실이 가려지지 않는다. KBS·MBC·SBS 방송사에서 보도하지 않아도 <프레시안>, <오마이뉴스>, <뉴스타파>와 같은 매체들이 있고, 특히 SNS가 있어 전국적으로 빠르게 알려진다.

주류 언론이라고 불리는 몇몇은 '자본-관료-공안세력-고소득 전문 직군' 사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들은 사회 기득권과 적극적으로 결탁해 '친일-냉전 대결 세력'의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기득권 세력의 카르텔을 극복하려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비판한다. 심지어는 증오하고 분열시키는 적극적인 역할까지 한다. 완전히 '권력 언론'이 된 것이다. '밤의 대통령이다'라는 오만까지 겹쳐 있다.

조·중·동 수구 언론은 말할 것도 없고, 경제지 등 일간지 대부분이 그렇다. 그리고 이미 정부 지배에 들어간 방송, 특히 종편은 방송 생태계를 황폐하게 만들었다. 편향된 패널을 출연시켜 증오심을 양산하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는 현재 언론 토양이 과거 40년 전보다는 훨씬 악화됐다.

40년 전에 비해 황폐해진 언론, 그래도 희망은 있다?

박인규 : 87년 민주화 이후 정치 민주화가 지상파 방송의 공정성에 상당히 기여했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 들어 확실히 달라졌다.

정연주 : 80년대 이후 조·중·동을 비롯한 수구 언론이 신문 시장의 80퍼센트(%)를 장악했다. 이쪽은 <한겨레>와 <경향신문> 정도다. 8대 2의 시장이다. 그나마 이를 균형 있게 해 준 것은 상대적으로 언론의 역할을 한 KBS와 MBC가 있었기 때문이다. 방송이 갖는 영향력을 바탕으로, 수구 언론과 민주 언론(열린 사회를 지향하는 사람)의 힘에 균형을 맞췄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이 등장하면서 KBS와 MBC가 정권에 완전히 장악됐다. 이후 종편까지 생기면서 8대 2이던 시장이 9대 1이 됐다.

40년 전에 비해 토양이나 환경은 악화됐지만, 그래도 희망적인 것은 디지털 혁명으로 새로운 플랫폼이 많이 생겼다는 점이다. 지금은 SNS나 유투브를 통해 큰돈을 들이지 않고도 방송을 할 수 있다. 또 하나 희망적인 것은 5년마다 선택하기에 따라 기득권 정치 세력에 타격을 가할 수 있다는 점이다. 유신 정권 당시 박정희는 종신체제였다. 10.24 선언을 할 때만 해도 박정희 시대가 언제 끝날지 예측조차 안 됐다. 지금 박근혜 정권이 SNS를 뒤지고 카카오톡으로 사생활까지 들여다보는 감시체제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3년 후면 물러난다.

현재 언론인들이 잘해야 한다. 민주주의, 자유, 인권, 평등, 평화, 열린사회, 역사에 대한 진보를 믿는 사람들이 잘해야 한다. '사실 보도'와 '권력 감시' 등을 잘하면, 정권에 얼마든지 정치적 타격을 가할 수 있다. 다만, 5년 후 정치적 기득권-카르텔 세력에게 타격을 제대로 입힐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박인규 : 2008년 미디어법 개혁이나 방송사 파업 당시 야당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정치를 제대로 작동시키기 위해서라도 '언론 자유화'는 굉장히 중요한데, 정치인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 것 아닌가.

정연주 : 새누리당(구(舊)한나라당)은 방송을 장악하지 않으면, 권력을 다시 찾는 것도 유지하는 것도 어렵다는 인식이 뿌리박혀 있다. 그래서 한나라당은 노무현 정권과 이명박 정권 초기 국정조사에서 개인적인 공격뿐 아니라 프로그램에 대해서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특히 <미디어 포커스>, <인물 현대사>에 대한 시비가 끝이 없었다.

당시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이었던 민주노동당 천영세 의원이 한 번은 "문광위가 평소에는 평화로운데, 별로 싸울 일이 없는데, KBS만 나오면 전쟁터로 바뀐다"고 말하더라. 그만큼 한나라당은 치열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이런 새누리당과 조·중·동이 맞물려 기막힌 공조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 정연주 전 사장은 "요즘 언론은 전파(온라인) 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그 책임이 더욱 막중해졌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기본 책무마저 져버린 종편에 대해 "엄중하게 경고하려면, 우리가 정치적으로 옳은 선택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프레시안(최형락)

새정치민주연합(구(舊)민주당)을 어떤가. 미디어법 통과 이후, 방송위원회와 정보통신부가 합쳐져 2008년 엄청난 권한을 가진 방송통신위원회가 탄생했다. 그리고 MB의 멘토라고 하는 최시중 씨가 제1대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2008년~2012년)을 지냈다. 그런데 민주당 추천 인사로 방통위 위원이 된 이병기 서울대 교수는 2012년 박근혜 싱크탱크인 '국가미래연구원'에 이름을 올렸다. 민주당이 치열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야당 몫으로 갈 수 있는 자리가 얼마나 많은가. 방송통신위원회, 방송통신심의위원회, KBS 이사, MBC 방송문화진흥회 이사, 연합통신 이사 등 정말 전투력 있고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이 자리해 있는지에 대해 회의적이다.

"역사는 진보한다, 싸움은 즐겁게…"

박인규 : 권력 독재에서 벗어나고자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했지만, 40년이 지난 지금은 자본 독재가 너무 강하다. 특히 박근혜 정권 들어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는 생각에 힘이 빠진 것 같다.

정연주 : 10.24 선언 전, 기자의 삶은 '노예의 굴종된 삶'이었다. 그런데 10.24 후에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자유인이 됐고, 언론인의 역할을 정상적으로 했다. 하지만 이듬해 '자유언론실천선언'에 앞장섰던 사람들이 대량 해고돼 일시적으로 패배한 것처럼 생각됐다.

그런데 그게 씨앗이 되더라. '자유언론'을 위한 씨앗이 돼서 나중에 <한겨레>로도 태어나고, 독립 언론으로도 태어나고…. 지금은 KBS 새노조 같은 젊고 건강한 후배들에 의해서 그 정신이 이어지고 있다. 일시적 패배로 보일 수 있지만, 결코 패배가 아니라는 사실이 굉장히 중요하다.

유신 정권 이후 40년을 되돌아보면, 그래도 역사는 진보하더라. 역사에 대한 낙관을 가질 필요가 있다. 우리 대에 열매를 못 맺으면 어떤가. 다음 세대에서 열매를 맺으면 된다. <PD저널> 특별기고에도 "우리는 늘 강건하게 버티면서 연대에 힘써야 하며, 늘 깨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좀 긴 호흡으로 내다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언제든지 즐겁게 싸울 수 있다. 싸움은 즐겁게 해야 한다.

▲ 정연주 전 사장은 "마감에 쫓기는 게 싫어 글쓰기는 안 한다"면서도 중·고등학교 학생을 상대로 한 강연 초청에는 흔쾌히 응한다고. "한 명이라도 내 애길 듣고 희망을 가졌으면 좋겠어." ⓒ프레시안(최형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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