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盧가 정연주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던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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盧가 정연주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던 이유는?

[프레시안 books] <정연주의 기록 : 동아투위에서 노무현까지>

이 책을 읽으며 생각했다. 정연주가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의 막내가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정연주가 동아일보사 해직 사태 당시 '5년째 막내' 기자가 아니었더라면. 1946년에 태어난 그는 1970년 12월 동아일보에 입사하고 1975년 봄 해고됐다. 그는 "대량 해고 사태가 있을 때까지 후배를 맞지 못하고 만년 막내로 남았다. 동아일보사 해직 뒤 구성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에서도 우리는 늘 막내로 남았다"고 말했다.

'막내가 아니었다면' 하고 생각한 까닭은 이 책에서, 그리고 현실에서 보는 정연주가 시종일관 젊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젊음은 동아투위 막내라는 것보다 그의 성품에서 기인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가 동아투위의 막내라는 것이 1970년대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를 언론 자유의 전선의 맨 앞에 '계속' 서 있게 만든 요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이 책 중 "생애 최초 필화 사건"에는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다. 고등학교 때 다니던 경주제일교회에서 주보 <광야>의 필경 작업을 맡고 있던 정연주는 '필화 사건'을 터뜨리고 교회 학생회 부회장 자리에서 쫓겨났다.

"당시 교회는 부속 건물을 짓기 위해 특별 헌금을 모으고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교회가 건물을 증축 혹은 신출할 때 무리하게 헌금을 모은다. (…) 우리 교회도 그랬다. 친구와 내 눈에 비친 이런 행태는 성경의 가르침에 크게 어긋나는 것이었다. (…) 친구는 특별 헌금을 내는 사람들의 이름과 액수를 광고 시간에 발표하고, 그 내용을 다음 주보에 싣는 행태가 면죄부를 팔던 중세 암흑기의 기독교 행태와 무엇이 다르냐며 특별 헌금 모금 방식을 비판하는 글을 실었다.

(…) 교회가 발칵 뒤집힐 정도로 소란했다. 특히 나의 아버지는 그 교회의 장로였다. 교회의 큰 기둥이던 아버지의 아들이자, 일요일과 수요일 저녁 예배에도 빠짐없이 맨 앞자리에 앉아있던 두 녀석이 이렇게 무시무시한 일을 저지르다니…. 나는 그때 교회 어른들이 왜 그렇게 화를 내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51~52쪽)

▲ <정연주의 기록 : 동아투위에서 노무현까지>(정연주 지음, 유리창 펴냄). ⓒ유리창
정연주는 "그때 필화 사건으로 제명된 것은 어쩌면 언론인으로서 나의 삶에 운명적 사건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1975년 3월 17일 동아일보사에서 쫓겨났고, 2008년 8월 11일 한국방송공사(KBS) 사장 자리에서 다시 강제로 '해임'되었으니 말이다"라고 회고했다. 그렇다. 둥글둥글한 얼굴의 그는 원래 '새파란 모난 돌'이었던 것이다.

한국방송공사(KBS) 사장 시절의 정연주를 두고는 여전히 평가는 갈린다. 2008년 당시 감사원은 '부실 경영·인사 전횡·사업 위법' 등의 이유로 정연주의 해임을 요구했고, 이명박 대통령은 곧바로 응했다. 1, 2심 법원이 "부당하다"며 해임 취소 판결을 내렸지만 여전히 보수적인 KBS 노동조합 등에서는 정연주에게 "경영 부실", "무능" 등의 비난을 서슴지 않는다.

정연주가 사장 시절 추진했던 대팀제 도입 등의 개혁, <인물 현대사>, <미디어 포커스> 등의 프로그램, 탐사 보도팀의 신설 등의 성과는 내부의 극심한 반발 속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특히 2006년 연임 전후로는 논란이 더욱 커졌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KBS 사장으로서의 정연주는 이명박 정부의 '코드 인사'로 사장이 된 이병순, 김인규 등과 비교되면서 재평가를 받고 있다.

정연주는 현재 노무현재단의 이사를 맡고 있다. 이 책에서 그는 노무현을 "나의 좋은 친구"라고 표현하는 등 각별한 정을 나타냈다.

정연주는 노무현이 "제가 앞으로 대통령을 하면서 절대 전화하지 않을 사람이 두 분 있다"며 "검찰총장과 KBS 사장입니다. 정치적 중립과 독립이 가장 중요한 기관 아니냐"고 말했다고 전하면서 "그는 그 약속을 지켰다. 전화를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런 종류의 '개입'이나 '간섭'도 없었다"고 고마워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봉하 마을 부엉이 바위에서 처참한 죽음을 맞았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내 머리에 먼저 떠오른 것은 '제가 앞으로 대통령 하면서 절대 전화하지 않을 사람이 두 분 있습니다'라는 그 말이었다. 역설적이게도 그는 정치적 중립과 독립을 위해 전화할 수 없다고 한 두 집단, 검찰과 언론에 의해 죽음의 길로 갔다. 그가 죽은 뒤 나는 그것이 너무나 억울했다." (398쪽)

정연주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우리) 둘 사이에 일종의 '연결 고리' 같은 게 있었다.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우리나라 '조폭 언론'의 반 언론적 행태에 느끼고 공유하는 강렬한 문제의식이었다"고 회상한다. 이 연결 고리는 오늘날 이른바 '민주·개혁 진영'을 강조하며 통합의 지향하는 이들의 정체성과 맞닿는다.

그러나 진보 진영이 모두 정연주에게 호의적이지는 않다. 김규항은 그를 '개혁적인 중산층 인텔리'라고 부르며 날을 세운다. 그는 지난 2009년 <한겨레>에 기고한 글에서 "그들이 언론을 장악했던 지난 10년 동안 그들은 정말 인민의 편이었던가? 그들은 줄기차게 진행된 신자유주의 개혁을 반대하고 저항했던가?"라고 따졌다.

또 김규항은 지난 5월에 낸 글에서 "정연주 씨에게 노무현은 좋은 대통령이다. 그러나 노동 운동을 하다 노무현 정권에서 탄압받고 구속된 전 이랜드노조 위원장 김경욱 씨에게 노무현은 나쁜 대통령이다"라고 일갈했다. 김규항에게 혹은 그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는 좌파에게 정연주는 연대가 아닌 극복의 대상이다.

김규항의 지적은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복지 담론'이 강조되는 지금 시점에 귀 기울일 만하다. 그의 말대로 국민이 '복지'를 열망하게끔 만든 신자유주의는 이명박 정부만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거치며 무럭무럭 자라났다. 지금 '함께 사는 사회'를 말하려면, 정연주를 비롯한 이른바 '민주·개혁 진영'의 자신의 행보에 대한 자기성찰과 자기 극복이 필요하다.

바로 그런 성찰과 극복의 과정에서 정연주는 무엇을 할 것인가? 그의 미래는 열렸다. KBS 사장 이후 글 쓰는 사람으로 돌아왔고 '출마는 없다'고 연거푸 밝혔지만 여전히 '정치인 정연주'의 가능성을 언급하는 이들이 많다. 실제로 '출마'는 않더라도 '언론 정책' 등에서 그가 적잖은 활동을 벌이며 사실상 정치인의 역할을 하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 가능하다.

여전히 젊은 이 언론계 대선배가 또 어떻게 변신해서 새로운 길을 개척할지, 많은 후배 언론인들이 지금 이 순간도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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