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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중에 골대 옮겨버린 한미···뛰쳐나간 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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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중에 골대 옮겨버린 한미···뛰쳐나간 북한

[제네바 합의 20주년 특별기획] 북핵, 역사에 길을 묻다(4)

네오콘들의 기세에 눌려 숨조차 쉬기 힘들었던 대북 협상파들이 기지개를 켠 시점은 2006년 10월 북한의 최초 핵실험 직후부터였다. 이보다 1년여 앞선 2005년 9월 19일에 6자회담 9.19 공동성명이 채택되기도 했다.

그러나 방코델타아시아(BDA)를 이용한 미국의 대북 금융제재로 성명은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사문화될 위기에 처했다. 북한은 금융 제재를 9.19 공동성명의 위반이라며 즉각적인 해제를 요구했고, 미국은 "법 집행"의 문제라고 맞섰다. 결국 북한이 탄도미사일 시험발사와 핵실험을 연이어 강행하면서 북핵 협상은 파국을 맞이하는 듯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핵실험은 '창조적 파괴'로 이어졌다. 북핵 실험은 북한이 기술적으로 핵보유의 문턱을 넘어서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만큼 사태는 심각해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시에 북핵 실험은 "북한의 핵보유를 절대로 용납하지 않겠다"던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이 총체적으로 실패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그러자 국무장관으로 자리를 옮긴 콘돌리자 라이스는 스스로 "전략적 도약"(strategic leap)이라고 명명한 새로운 대북정책에 시동을 걸었다. 전략적 도약이란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미국은 북한과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관계 개선에 나설 것이라는 의지를 분명히 하는 것이었다. 라이스의 권고를 수용한 부시 대통령은 2006년 4월 후진타오(胡錦濤) 주석과의 정상회담에서 이러한 방침을 전달했었다.

3자 회담이 양자 회담이 된 사연

달라진 풍경은 10월 말 베이징 회동부터 펼쳐졌다. 라이스는 중국의 리자오싱(李肇星) 외무장관과 긴밀한 협의 끝에 '묘안'을 만들었다. 당시 백악관은 북·미 양자대화를 불허하고 있었고 북한은 미국과의 직접대화를 선호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라이스-리자오싱은 중국이 3자 대화를 주선하고 빠진 다음에 북·미 양자 대화를 하는 것으로 절충안을 만들어냈다. 이렇게 하면 백악관에는 다자회담이라고 보고할 수 있고, 북한에게는 양자회담으로 간주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3자 회담장에 중국 대표가 나타나지 않았다. 어색했지만 자연스럽게 북·미 양자회담이 이뤄진 것이다. 이건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북·미 간의 첫 대면이었다.

▲ 북한 김계관(왼쪽) 외무부 부상과 미국 크리스토퍼 힐(오른쪽) 차관보의 손을 잡아주는 중국 우다웨이 외교부 부부장 ⓒ연합뉴스

사실 이 장면은 얼마 전까지 상상하기 힘든 것이었다. 앞선 글에서 밝힌 것처럼, 도날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은 미국 대표가 북한 대표와 밥 먹는 것조차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런데 럼스펠드는 2006년 10월에 이라크 사태 악화의 여파로 경질론에 시달리고 있었다. 딕 체니 부통령은 심장병이 악화돼 병원 신세를 지고 있었다. 이처럼 북·미 직접대화는 네오콘이 혼수상태에 빠진 상태에서 극적으로 이뤄진 것이다.

라이스와 힐은 중국의 결례를 외교적 압박 카드로 사용했다. 북한에게 6자회담 복귀 약속을 받아내라는 것이었다. 다행히 북한이 미국과의 양자 접촉에 이은 북-미-중 3자 회동에서 회담 복귀를 약속했다. 라이스는 이걸 가지고 부시를 설득했다. "독재자가 핵을 포기할 수 있을지를 (정권교체가 아니라) 협상을 통해 확인해보자"고 말이다.

이후 북·미 대화와 6자회담은 선순환을 그리기 시작했다. 힐과 김계관 라인에서 합의한 내용을 6자회담에서 추인하는 방식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9.19 공동성명의 1단계와 2단계 이행조치인 2.13 합의와 10.3 합의도 나왔다.

백화원 초대소와 백악관

제네바 합의 20년을 돌아볼 때, 가장 극적인, 그러자 국내엔 잘 알려지지 않은 장면이 하나 있다. 2007년 10월 초 평양의 백화원 초대소와 워싱턴의 백악관에서 거의 동시에 연출된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백화원에서 있었던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의 정상회담 내용은 국가정보원이 전문을 공개하면서 이미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거의 같은 시점에 백악관에서도 중요한 회동이 있었다. 라이스-힐 라인이 네오콘과 건곤일척의 승부를 벌이는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김계관 외무성 부상은 남북정상회담 중간에 들어와 6자회담에 대해 보고를 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9월 30일 6자회담 폐막회의에서 문건에 합의를 했는데, "조금 특이한 일이 벌어졌습니다"라고 말한다. 힐이 "라이스 국무장관하고 부시 대통령한테 보고하고 승인을 받겠다"며 워싱턴에 다녀와야 한다고 요청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10.3 합의 초안에 대한 미국 내 반발이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힐은 워싱턴에 가서 무슨 얘기를 나눈 것일까? 그 생생한 장면이 <뉴욕타임스>의 백악관 담당 선임기자인 피터 베이커가 쓴 <불의 나날>(Days of Fire)에 생생히 묘사되어 있다.

미국 시간으로 10월 1일 이른 아침, 그러니까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기 이틀 전의 일이다. 부시는 힐을 집무실로 불러 6자회담 결과를 듣고 있었다. 밥 먹을 시간이 되자 부시는 체니와 라이스, 스테판 해들리 국가안보보좌관 등 외교안보 수뇌부를 불러 함께 식사하면서 회담 결과를 논의했다. 힐은 주요 합의 사항을 설명했다. 그러자 체니의 최측근인 에릭 에델만(Eric Edelman) 국방부 차관이 "북한이 이미 무기로 만든 핵은 어떻게 되는 거죠?"라고 물었다. 이와 관련해 김계관은 노무현-김정일 정상회담에 배석해 이렇게 말했다.

"핵물질 신고에서는 무기화된 정형은 신고 안 합니다. 왜? 미국하고 우리하고는 교전상황에 있기 때문에 적대상황에 있는 미국에다가 무기 상황을 신고하는 것이 어디 있갔는가. 우리 안 한다"

에델만의 질문은 이걸 노린 것이었다. 정작 중요한 핵무기가 신고 대상에 빠졌다는 걸 지적한 것이다. 그러자 노련한 협상가이자 체니 진영과 일전불퇴를 결심한 힐이 흥분하면서 반격을 가했다. "당신은 느슨한 플루토늄을 걱정해야 합니다. 테러리스트가 이걸 가지고 우리를 날려버릴 수 있으니까요" 북한에게 핵물질인 플루토늄 신고를 받기로 한 것만도 큰 진전이라는 의미였다. 힐이 분을 삭이지 못했는지, 부시는 힐에게 "진정하세요"라고 말하면서 체니에게 시선을 돌렸다. "질문 없나요?"

과묵하기로 소문난 체니는 라이스와 힐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 "글쎄요. 저는 여기에 있는 몇몇 사람들만큼 들뜬 기분은 아닙니다" 그러자 힐이 또 응수했다. "분명히 해두고 싶은 게 있는데요. 저 역시 이 합의에 들떠 있는 건 아닙니다. 단지 제가 해야 할 일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분위기가 더 냉랭해지자 부시가 또 끼어들었다. "체니가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니에요. 그는 단지 북한이 정말 핵 신고서를 제출할지에 대해 걱정하고 있는 겁니다"

라이스가 나서서 "우리에겐 대안이 많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여전히 마뜩하지 않은 체니는 퉁명스럽게 묻는다. "북한이 미사일은 포기한다고 하던가요? 북한이 또 다른 플루토늄 원자로를 갖고 있지 않다고 우리가 어떻게 아나요?" 이쯤되면 막가자는 것이었다. 미사일은 6자회담 의제가 아니었고 원자로는 미국의 정보자산으로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열 받은 힐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려고 하자 라이스가 가까스로 진정시켰다. 부시는 힐의 노고를 격려하는 것으로 조찬 모임을 끝냈다. 그러나 체니 진영과 라이스-힐 팀 사이의 앙금마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집무실에서 나오면서 에델만이 투덜거렸다. "대통령이 속고 있다"

워싱턴에서 6자회담 못지않게 힘겨운 내부 협상을 벌였던 힐은 베이징에 있던 김계관에게 여러 차례 전화를 걸었다. 김계관이 노무현-김정일 회담에서 보고한 내용이다. "(힐이) 한 자만 고치자. 우리는 동의할 때 한 자도 고치지 못한다는 전제하에서 동의했는데, 고치면 수습 못한다, 그렇게 했는데. 한 자만 고치자. 뭔가 하면 '2007년 12월 31일까지 신고한다' 이렇게 고치자는 내용을 보내왔습니다"

힐이 고치자고 한 건 북한의 핵 신고서 제출의 시한을 못 박자는 것이었다. 그래야 체니의 불만을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리고 부시의 최종적인 재가를 받을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결국 북한은 힐의 요구를 수용했다. 그러나 '말 대 말', '행동 대 행동'을 협상의 원칙으로 삼은 북한은 테러지원국 해제 및 적성국 교역법 종료도 핵 신고서 제출과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고 요구했고 미국은 이를 수용했다. 9.19 공동성명의 2단계 이행조치인 10.3 합의는 이렇게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나온 것이다.

'경기 중에 골대를 옮기다'

어렵게 10.3 합의에 도달하면서, 또한 2차 남북정상회담도 성공적으로 이뤄지면서 한반도 비핵평화프로세스는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다. 그러나 2008년 12월 이후 6자회담은 장기간 휴업 상태에 빠져들고 만다. 그로부터 6년 가까이 한 차례도 열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 직접적인 요인은 2008년 '검증 파동'에 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을 입증하듯, 당시 검증을 둘러싼 첨예한 논란은 결국 6자회담을 좌초 직전까지 몰고 간 핵심적인 요인이었다.

그런데 당시 6자회담이 파탄 난 데에는 북한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인식이 팽배하다. 국내외 일반인들은 물론이고, 전문가들과 정부 관료들도 이렇게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정말 잘 몰라서 그런 것인지, 무슨 의도를 갖고 그러는 것인지는 추측의 영역에 있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있다. 당시 약속을 지키지 않은 쪽은 한미 양국이었다는 것이다. 불편한 진실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진실을 직시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질 때, 비로소 문제 해결의 문을 열 수 있다.

북한은 2007년 12월 31일까지 핵 신고서를 제출키로 했지만, 계속 지연되고 있었다. 핵심적인 사유는 핵 신고서에 북한의 우라늄 농축 의혹 및 시리아 핵개발 지원설까지 포함시킬 것인가의 여부였다. 또한 체니 등 네오콘은 북한의 플루토늄 신고도 강력한 사찰을 통해 검증되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북한은 2008년 5월에 1만 8000쪽이 넘는 원자로 가동 일지를 미국에게 넘겼다. 6월에는 핵 신고서를 제출했다. 임기는 끝나가고 마땅한 업적은 없었던 부시는 평양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2008년 6월 27일(미국시각) 텔레비전을 틀자 기쁜 소식을 접했다. 북한이 핵 신고서를 제출하고 영변 냉각탑까지 폭파한 것이다. 부시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래 저건 검증 가능하군!" 부시가 검증을 앞세운 네오콘의 반발에 얼마나 시달렸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이에 앞선 6월 18일, 라이스 국무장관은 검증 문제와 관련해 의미심장한 발언을 했다. "우리는 3단계에서 다루기로 했던 검증과 원자로 접근 등의 문제들을 2단계로 가져왔다" 라이스가 말한 2단계는 10.3 합의이고, 이 합의에는 검증에 대한 내용은 포함되지 않았던 점을 지적한 발언이었다. 그런데 한미 양국은 검증을 들고 나왔다. '경기 중에 골대를 옮긴 셈'이다.

2008년 여름 들어 6자회담은 검증 문제로 좌초될 위기에 처했다. 북한은 미국이 약속한 테러지원국 해제를 주저하자 영변 핵시설 불능화를 중단하겠다고 위협했다. 그 해 8월에는 김정일이 뇌 관련 질환으로 쓰러진 것으로 알려지면서 북핵 협상은 더더욱 불확실해지는 듯했다.

바로 이 시기에 부시는 용단을 내리게 된다. 체니는 "북한이 제출한 핵 신고서에는 우라늄 농축 활동도, 핵확산 내역도, 심지어 플루토늄 활동에 대한 완전한 내용도 담겨 있지 않았다"며 테러지원국 해제를 강력히 반대했다. 반면 라이스는 북한이 핵 신고서를 제출한 것을 긍정적인 진전으로 판단했다. 그리고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북한을 제외하더라도 우리가 부과한 제재에는 거의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며 부시의 결단을 촉구했다. 체니와 라이스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부시는 결국 라이스의 손을 들어줬다. 그러자 체니는 이렇게 분개했다.

"(테러지원국 해제) 절차와 결정을 보고 있노라니, 부시 대통령이 과거에 보여줬던 냉철한 결정에서 이탈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대통령의 연설을 들으면서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잘못된 신고를 검증할 수 있을지 의아해졌다. 이에 앞서 나는 하나의 대안으로 힐을 평양에 보내 (검증 문제에 관한) 문서화된 확인을 받아올 것을 제안했다....그러나 라이스는 그걸 원하지 않았고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참으로 슬프다. 테러지원국 해제는 부시 독트린을 포기하는 것이자 1기 때 이룩한 비확산 업적을 훼손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클린턴 시대의 실패한 접근을 폐기한다고 했을 때에는 옳았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걸 반복하고 있다"

결국 부시는 체니의 만류를 뚫고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한다고 발표했고 북한도 즉시 불능화 작업을 재개했다.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12월에 열린 6자회담에서 검증 의정서 채택이 불발되자 부시 행정부와 이명박 정부는 에너지 지원을 중단키로 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북핵 검증은 3단계에서 논의키로 한 것이었다. 만약 그때 골대를 옮기지 않고 2단계 경기를 끝냈다면, 결승전이라고 할 수 있는 3단계 협상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3단계 협상 테이블에는 검증과 핵무기를 포함한 북핵 폐기,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북미 수교, 경수로 등이 올려졌을 것이다. 그러나 한미가 검증을 들고 나와 골대를 옮기자 북한은 경기장을 뛰쳐나가 버렸다.

<뉴욕타임스>는 12월 28일 사설에서 핵협상 게임을 이렇게 평했다. "부시 대통령이 오바마 대통령에게 북핵 협상에는 단호하고 참을성 있게 임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좋은 충고다. 이런 처방은 맞는데 정작 부시 행정부는 이를 따르지 않고 있다" 이렇게 지적한 이유는 이렇다. 북핵 검증은 필수적이지만, "합의에 따르면, 나중에 다뤄야 할 사안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부시 행정부는 강경파에 밀려 무리하게 검증의정서 채택을 추진했고, 이에 실패하자 대북 에너지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신문은 이렇게 되면 "북한은 영변 핵시설 불능화를 중단하고 무기급 플루토늄을 다시 생산할 수 있는 권리가 있게 된다"며, "이러한 상황 전개는 오바마에게 긴박한 위기를 줄 수 있다"고 우려했다. <뉴욕타임스>의 경고성 예언이 현실로 나타는 데에는 반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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