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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초 철도 개통식에 일장기 나부끼고…

[달리는 철도에서 본 세계]<38> 경인철도 개통되던 날

1896년 3월, 미국인 모스가 경인철도 부설권을 획득하자 열강의 조선철도 부설권 쟁탈전에 불이 붙었다. 모스에 이어 그릴르(Grille)를 대표로 하는 프랑스의 피브릴르(Fives Lile) 회사가 7월에 경의선 부설권을 따냈다. 프랑스는 청일전쟁 이후 러시아와 함께 일본을 압박한 3국 간섭의 당사자였다. 시베리아횡단철도에 차관을 제공하고 러시아와 긴밀한 협조 체제를 유지했던 프랑스가 러시아 세력이 힘을 발휘하는 조선에서 철도 부설권을 얻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프랑스는 내친김에 서울-공주, 서울-목포 철도 부설권을 요구했다. 러시아는 서울-원산 간 부설권을 요구했다. 시베리아횡단철도의 종단점인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반도로 내려오는 철도를 건설해 원산을 최종 목적지로 하려는 러시아의 의도에 따른 것이었다. 열강들의 요구에 시달리던 조선정부는 강경책을 선택했다. 고종은 11월 칙령을 내려 향후 1년 동안은 그 어떤 나라에게도 조선에서의 철도 부설권을 양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고종의 칙령 이후 한국에서의 철도 부설권 쟁탈전은 수그러들었지만 물밑에서 진행되는 음모들은 더 긴박하게 돌아갔다.

일본은 경인철도 부설권을 따낸 모스가 자금난에 허덕이고 있다는 정보를 얻고 경인철도 장악을 위한 우회 전략을 세운다. 모스가 주도하는 경인 철도 건설 사업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이런 가운데 모스는 자금난을 이유로 고무라 외무차관, 시부사와 에이이치 경부철도 발기위원 등에 경인철도 부설권의 양도 의사를 흘리고 다녔다.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 일본이 아니었다. 1897년 4월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모스를 도쿄로 불러들여 부설권 양도 동의를 얻었다. 이어 외무대신과 도쿄, 요코하마의 유력인사들을 만나 정재계의 의견을 모아 모스로부터 경인철도 부설권을 확보하기로 결정했다. 이렇게 5월 4일 경인철도인수조합이 설립되고 경인철도는 모스의 손에서 일본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겪게 된다.

모스는 고민이 많았다. 조선 정부로부터 부설권을 얻자마자 곧바로 경인철도 기공식을 열고 공사를 시작했으나 바로 벽에 부딪혔다. 철도는 예나 지금이나 거대 토목공사로, 물먹는 하마처럼 돈을 필요로 했다. 개점휴업 상태에서 공사비를 마련하기 위해 투자자들을 모으러 다니던 모스는 점점 지쳐갔다. 미국의 자본가들은 어디 붙어있는지도 모르는 머나먼 동방의 나라에 건설되는 철도에 투자하길 꺼렸다. 그렇다고 부설권 경쟁에 나섰던 나라들에게 손을 벌릴 수도 없었다. 모스 입장에서는 조선 정부로부터 얻은 부설 특허권을 비싼 값에 제삼자에 넘기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었다. 모스가 조선과 일본을 넘나들며 사업을 벌인 목적은 돈이었기 때문에 경인철도 운영을 통해 얻을 이익은 포기하더라도 부설권에 대한 시세차익만큼은 확실하게 챙기려고 했다. 이런 모스에게 드리워진 돈다발 미끼는 달콤한 유혹이었다. 낚싯대 주인 일본은 찌가 움직이자 힘차게 들어올렸다.

1987년 5월 12일, 외무성에서 경인철도인수조합의 일본 측 인사들과 양도 계약을 체결한 모스는, 다음날 아침 부리나케 인수조합 사무실을 찾았다. 모스는 자신이 양도 계약 대가로 받은 5만 달러가 너무 적다며 30만 달러로 올려달라고 떼를 썼다. 만약 일본이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이미 받은 돈, 계약 위반에 따른 위약금과 배상금을 지불하고라도 계약을 해지하겠다고 통보했다. 인수조합 측은 이미 끝난 계약이라며 거절하고 모스를 돌려보냈다. 5만 달러를 받고 계약서에 사인을 한 뒤 호텔로 돌아온 모스는 계약 여부를 궁금해하는 여러 사람들에 둘러싸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5만 달러라는 헐값에 조선 최초의 철도 부설권을 넘기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라고 한 마디씩 거들었을 것이다. 모스는 호텔 방에서 밤새워 뒤척이며 왠지 속은 것 같다는 느낌에, 계약을 뒤집기 위한 묘책을 생각했음이 분명하다. 일본 측에 새로 제시할 금액을 어느 선으로 할 것인지도 밤샘 고민거리 중 하나였을 것이다. 만약 당시에도 CCTV가 존재했다면 해가 뜨자마자 30만 달러를 입에 되뇌며 호텔 현관을 밀치고 달려나가는 모스의 모습이 선명하게 찍히지 않았을까?

모스의 급작스런 태도 변화에 당황한 경인철도인수조합은 외무성을 찾아 모스와의 계약 철회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한다. 인수조합 측의 입장에서 이미 끝난 계약에 대해 6배의 돈을 더 지불하라는 모스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억지였다. 그러나 인수조합 대표의 보고를 받은 오쿠마 외무대신은 모스의 제안을 거절할 경우 프랑스나, 러시아, 영국 등의 자본이 모스를 회유할 위험이 있다고 판단했다. 외무성은 경인철도를 담보로 요코하마정금은행으로부터 100만 달러를 빌려 조합 측에 전달했다. 모스와 인수조합 측의 줄다리기는 계속 이어졌다. 모스는 한 푼이라도 더 받아내야 했고 인수조합은 부설권을 빼앗기지 않는 선에서 모스를 만족시켜야 했다.

해가 바뀐 1898년 3월 5일 모스가 다시 인수조합의 문을 열어젖혔다. 모스는 경의선 부설권을 따낸 프랑스의 그릴르로부터 300만 엔에 경인철도를 넘기라는 제안을 받았다며 인수조합과의 계약해지를 요청했다. 모스는 인수조합 측으로부터 받은 돈을 반환하고 이미 지출된 경비를 모두 배상하며, 그릴르에게서 받은 양수 대금 중 일부를 배분하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모스의 강공이 인수조합 측에 먹혔는지, 인수조합 대표들은 모스와의 협상을 미루고 대책 마련에 들어갔다. 인수조합의 시부사와 위원이 이토 히로부미 총리대신에게 달려가 모스의 입장을 전달했다. 이토는 한 번 확보한 권리는 잃어서는 안 된다며 다른 열강들에게 부설권 매각을 하지 못하도록 모스를 설득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경인철도 인수조합 대표가 총리대신인 이토를 찾아갈 정도로 모스의 태도가 강경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그릴르가 모스에게 경인철도 매수 제의를 했는지는 의문이다. 경의철도 부설권을 확보했지만 자금난으로 공사를 제대로 진척시키지 못하던 그릴르가 경인철도 매수에 나설 여유가 있었을 리 만무하다. 모스는 매각 대금을 높이기 위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거짓 시나리오를 만들었을 것이다. 매각 관련 줄다리기는 12월까지 이어진다. 모스는 꼭 받아야겠다고 주장한 300만 엔에 훨씬 못 미치는 170만2000엔에 경인선에 대한 모든 권한을 일본에 넘겼다. 그러나 모스는 충분히 깎일 걸 생각하고 부른 가격이었기에 별 불만 없이 현찰을 챙겼다. 조선 정부로부터 얻은 경인철도 부설권 하나로 한 몫 단단히 쓸어 담은 것이다. 국가의 자산이 일단 넘어가고 나면 노골적인 흥정의 대상밖엔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역사는 잘 보여준다.

조선 최초 철도 개통식에는 일장기가 나부끼고…

드디어 일본은 조선을 차지하는 데 필요한 가장 핵심적인 장치인 철도를 손에 넣었다. 경인철도에 대한 모든 권리를 인수한 일본은 숨도 고르지 않고 다음 행보를 이어갔다. 경인철도인수조합을 경인철도합자회사로 바꿔 제대로 된 철도회사의 모양을 갖추었다. 1898년 4월 23일에는 새 회사의 이름으로 인천에서 기공식을 다시 했다. 철도 부설공사에 박차를 가한 결과, 1899년 9월 18일 인천(제물포)-노량진 간 33.8킬로미터(Km) 구간에서 철도 운행을 시작한다. 조선 땅에 최초로 열차의 기적 소리가 울려 퍼지게 되었다.

인천, 축현, 우각동, 부평, 소사, 오류동, 영등포, 노량진으로 연결된 경인선은 다음 해 한강 철교가 완성되면서 서울로 진입, 1900년대에는 용산, 남대문, 경성을 달리게 된다. 경인선의 등장은 조선 사람들에게 세상이 천지개벽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일부 귀족들이 사용하는 가마나 공용 연락 수단인 파발마, 우마차가 전부였던 세상에서 대다수 백성들이 이용하는 이동 수단은 자신들의 두 다리처럼 여겨졌다. 이런 현실에서 굉음을 내뿜으며 달리는 기차는 이질적이면서도 신기한 새 문명이었다.

개통식이 있었던 다음 날인 1899년 9월 19일 독립신문에 실린 기사를 보자.

"'철도개업례식' 경인철도회샤에서 어저께 개업 례식을 거행 하는데 인쳔셔 화륜거가 떠나 영등포로 와셔 경성에 내외국 빈객들을 슈레에 영접하여 안치고 오전 구시에 떠나 인천으로 향하는데 화륜거 구난 쇼리는 우레 같아야 천지가 진동하고 기관거에 굴뚝연기는 반공에 솟아 오르더라. 수레를 각기 방 한 칸씩 되게 만드러 여러 수레를 철구로 연하야 수미상졉하게 이였는데 수례 속은 상즁하 3등으로 수쟝하야 그 안에 배포 한 것과 그 밖에 치장한 것은 이로 다 형언 할 수 없더라. 수레 속에 안져 영창으로 내다 보니 산천 초목이 모도 활동하야 닷는 것 같고 나는 새도 미쳐 따르지 못하더라. 대한 리수로 팔십리 되는 인쳔을 순식간에 당도 하얏는데 꼿 정거장에 배포한 범절은 형형색색 황홀찬란 하야 진실로 대한 사람의 눈을 놀리더라. 정거장에 당도 하야 일제히 나려셔 각기 유람하다가 오정에 정거장으로 들어가셔 하고 다과 례를 향하는데(…)그 중에 더욱 가관되는 것은 인천항에 거류하는 일인들이 각기 집에 국기를 세웠으며(…)례식을 다하고 오후 1시에 셔울 빈객들과 인쳔 빈객들이 도로 화륜거에 올라 두시 반에 영등포에 당도하야 셔울 빈객들은 셔울로 들어오고 인쳔 빈객들은 도로 고타 4시 반에 인쳔에 당도하였다더라."

위의 기사에 따르면 경인철도 개업식에 운행된 열차는 영등포-인천을 1시간 30분 만에 주파했다. 현재 영등포에서 인천까지 전철 운행 시간은 51분이다. 115년 전의 6개 역에 비하면 세 배가 넘는 22개역이 있는데도 시간은 40분이 덜 걸린다. 마력수가 비교가 안 되는 최신 전동차 덕분이다. 요즘 기준으로 보면 1시간 30분에 33킬로미터를 간다는 건 자전거 동호회에서조차 화젯거리가 안 될 일이다. 하지만 대한제국시대는 달랐다. 33킬로미터를 1시간 30분에 주파했다는 것은 당시 경인철도의 표정속도가 시속 20여 킬로미터 남짓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운송수단의 속도에는 최고속도, 평균속도, 순항속도 등 여러 개념이 있지만, 철도에서 의미 있는 속도는 표정속도다.

표정속도란 열차가 출발해서 도착할 때까지 걸리는 모든 시간(제한속도를 지키거나 역에 정차하기 위해 속도를 감속하고 승객을 태우거나 마주 오는 열차와의 충돌을 피해 교행 대기를 하는 등의 모든 운행과정. 필자.)을 거리의 비로 나타낸 것을 말한다. 최고속도가 높은 철도 보다 표정속도가 높은 철도가 훨씬 효율적인 철도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겨우 시속 20킬로미터 정도의 표정속도를 내는 열차라면 최고 속도라야 시속 40~50킬로미터 정도를 냈을 것이고 시속 15킬로미터 이하의 속도로도 상당 구간을 달렸을 것이다. 시속 10~20킬로미터 정도의 속도라면 젊은 남자가 맘먹고 뛰면 따라 잡거나 잠깐은 같이 달릴 수 있는 속도다. 이런 열차를 보고 기자는 나는 새도 미처 따라오지 못할 지경이라고 감탄하고 있다.

19세기 말 영등포에서 인천을 가는 데 도보로 12시간 정도 걸렸다. 한양 도성에서 출발한다면, 마포나루에서 배를 기다렸다 타는 시간까지 포함해 서너 시간이 더 추가된다. 요즘같이 포장된 도로에 마찰력이 우수한 밑창을 댄 고어텍스 워킹화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시절이었다. 비포장도로에서 짚신을 신고 12시간에서 15시간 걷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아침 일찍 출발하지 않으면 하루를 넘겨야 도달할 수 있다. 등짐이라도 졌으면 꼬박 이틀을 걸어야 했다. 이런 현실에서 한 시간 반 만에 서울과 인천을 주파한다는 것은 TV나 스마트 폰의 등장에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충격이었다.

게다가 기관차는 가마나 우마차와 체급부터가 완전히 달랐다. 재질 또한 철이어서 그 위용을 용에 비유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열차는 소리에서도 새로운 장을 열었다. 증기엔진 소리, 바퀴 소리, 기적 소리 모두 사람들을 주눅이 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독립신문>에 기사를 쓴 기자는 우레와 같은 소리를 내 뿜었다며 기관차에서 나는 소리를 천둥소리에 비유했다. 인간 세상의 소리가 아닌, 하늘이 내린 소리였다. 그만큼 인간은 철도 앞에서 왜소해졌다. 차창에서 본 풍경은 "산천초목이 모도 활동하야(…)"라고 표현했다. 열차가 달리게 되면 당연히 풍경은 같은 속도로 반대편으로 사라지게 된다. 물리학적으로 보면 상대속도를 체감하는 것이고 생물학적으로는 착시 현상을 겪게 된다. 이전까지의 여행에서 인간은 자연의 시공간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었다. 걸으면서 보게 되는 풍경은 정지 화면과 다를 바 없는 프레임으로 뇌에 각인됐다. 마차를 탄다 해도 인체가 자연의 시공간을 거스르는 속도에는 이르지 못했다.

철도는 인간의 속도를 자연의 시공간으로부터 물리적으로 분리했다. 풍경을 대상화하고, 공간을 돌파하는 인간을 만들어낸 것이다. 갑자기 새로운 속도를 접한 사람들은 혼란을 겪었다. 시신경으로 들어오는 정보를 뇌가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멀미의 탄생이다. 멀미란 파도에 몸을 맡긴 이들이 수직 운동을 겪으며 느끼는 뱃사람들의 전유물이었는데 고속 수평 이동의 시대를 맞아 육지에서도 멀미를 경험하게 되었다. 1862년 런던에서 발간된 의학 잡지 랜싯(Lancet)에는 "철도 여행이 사람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이란 논문이 실렸다. 이 논문의 일부를 소개한다.

"속도의 변화나 다양한 인상들은 불가피하게 눈과 뇌를 피로하게 한다.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대상과의 거리는 그것을 통해 망막에 뚜렷한 상을 맺게 하는 기관에 끊임없는 적응 작업을 요구한다. 그리고 이것을 받아들이는 뇌의 정신적인 노력은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하여 결코 덜 피로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심리학의 영역에서, 지나치게 작동하는 활동성은 지속적으로 물질적인 와해와 물체의 유기적인 변화를 결과한다는 사실은 틀림없기 때문이다."(철도여행의 역사. 볼프강 쉬벨부쉬)

편하게 좌석에 앉아 열차 여행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몇 시간이 지나 목적지 역에 내리면, 몸에 상당한 피로가 느껴지게 된다. 지속되는 진동과 속도를 등에 업은 열차 여행이 인간에게 주는 선물이다. 자동차 운전석 옆 차체에 달린 사이드미러에 "사물이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이란 권고문이 달려있듯이 초기 열차 여행자들에게는 "사물을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관찰하라"는 권고가 주어졌다.

기자의 눈에 엄청난 속도로 순식간에 인천까지 달려온 화륜거는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당시의 열차 속도에 비추어 봤을 때, '나는 새도 따라오지 못한다'는 말은 과장된 표현일 뿐이지만, 당시 기자가 체감하는 정도는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영등포에서 귀빈을 태우고 인천에 도착한 열차를 맞은 것은 성대한 경인철도 개업식장이었다. 당시 제물포를 비롯한 인천항 곳곳에는 외지인 구역과 조선인 구역이 나뉘어 있었다. 이들 구역은 멀리서 보더라도 어느 쪽이 조선인 구역인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얽히고설킨 골목들을 과 허름한 초가집으로 이루어진 구역, 그리고 잘 구획된 도로 사이에 일본과 서양식 건물들이 들어선 구역은 뚜렷하게 구분됐다. 외지인 구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일본인들이었다.

"더욱 가관되는 것은 인천항에 거류하는 일인들이 각기 집에 국기를 세웠으며(…)"

<독립신문> 기자가 보기에도 개업식장과 주변 마을을 뒤덮은 일장기들은 못내 꺼림칙 했나 보다. 일장기 휘날리는 경인철도 개업식의 모습. 앞으로 대한제국과 그 백성들이 겪게 될 운명을 예고하는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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