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6일 정오, 서울 광화문의 세종대왕상 앞에선 웃지 못할 행사가 열렸습니다. 정의당의 천호선 대표 등 당직자들이 '삐라'를 살포하겠다고 거리로 나선 겁니다. 보수 단체의 대북 전단 살포 행위는 막지 않으면서 카카오톡 등 사이버 공간의 사적 대화까지 사찰하는 정부의 이중적 행태를 비꼬는 행사였습니다. 물론 이 행사는 퍼포먼스에 그쳐 실제로 삐라가 뿌려지는 사태는 없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달 16일 국무회의에서 "사이버 상에서 국론을 분열시키는 아니면 말고 식의 폭로성 발언이 도를 넘어서고 있어 사회분열을 가져오고 있다. 이런 상태를 더 이상 방치하면 국민 불안이 쌓이게 돼 걷잡을 수 없게 된다"고 말한 지 꼭 한 달째 된 날의 풍경입니다. 박 대통령이 "대통령에 대한 모독 발언이 도를 넘고 있다"며 이 같은 '사이버 명예훼손 엄단 지침'을 공개 하달한 직후 우리 사회엔 '경찰국가'의 광풍이 몰아쳤습니다.
대통령의 발언이 나온 지 이틀 만에 검찰은 '허위사실 유포 사범 실태 및 대응 방안'을 주제로 긴급 대책회의를 열었습니다. 이 회의는 대검찰청이 미래창조과학부와 안전행정부 등 정부부처와 네이버·다음·카카오(합병 전)·SK커뮤니케이션즈 등 포털업계 관계자들을 불러 모은 자리였습니다.
업체 관계자들에게 배포된 문건에는 '전담 수사팀과 포털업체 간에 핫라인을 구축해 유언비어·명예훼손 범죄에 대한 정보를 실시간으로 공유한다', '전담 수사팀에서 해당 글에 대한 법리 판단을 해 포털사에 삭제를 요청한다' 등의 내용도 담겼습니다. 수사기관의 압박을 거부하기 힘든 민간 업체들을 핫라인으로 엮어 입맛대로 이용하겠다는 발상이죠.
논란이 커지자 검찰은 뒤늦게 "실시간 검열은 법률적, 기술적으로 불가능하고 그럴 권한도 없다"고 해명합니다. 맞습니다. 회의에서 검찰은 문제가 되는 글의 삭제를 포털에 직접 요청하겠다고 했지만, 정보통신망법은 불법 정보를 삭제·차단하려면 방송통신위원회가 심의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시정 요구를 하거나 법원의 판결이 있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업체 관계자들이 회의에서 반발했음에도 대통령의 '심기 경호'에 집착한 검찰이 초법적 대책을 밀어붙인 겁니다. 게다가 회의 문건에는 대통령의 발언이 '9.16 국무회의 대통령 말씀'으로 명시되어 있습니다. 검찰의 조치가 박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서둘러 추진됐음이 분명하게 드러난 셈이죠.
여기에 90퍼센트(%)를 웃도는 법원의 감청영장 발부율이 공개되고, 노동당 정진우 부대표, 대학생 용혜인 씨 등의 카카오톡 대화 내용이 실제로 '털린' 것으로 드러나면서 검찰의 '사이버 사찰'과 검찰을 배후조종한 권력의 사생활 통제 시도는 확증의 단계로 접어들었습니다. 카톡 이용자들은 시시콜콜한 사적 대화에 장난삼아 한 말까지 범죄 수사의 증거물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경악했습니다.
물론 카카오 측의 대응이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도록 부채질을 한 측면도 있습니다. 수사당국의 전화 한 통화에 회사 법무팀이 '알아서' 서버에 보관된 대화 내용을 건네줬으니 '한통속'이란 비판을 자초한 거죠. 게다가 회사 대주주인 이재웅 씨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국가권력의 남용을 탓해야지 저항하지 못하는 기업을 탓하나요"라며 "그러려면 이민 가셔야죠"라는 글을 올렸습니다. 회사 법률자문을 맡은 변호사라는 사람은 "뭘 사과해야 하는 건지. 자신의 집에 영장이 들어와도 거부할 용기가 없는 중생들이면서"라고 했습니다. 회사 고위급들의 이런 발언이 알려지면서 카톡 이용자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박 대통령은 자신이 주창한 '창조경제'를 스스로 파괴하는 역설적인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박 대통령은 창조경제의 축이 인터넷 산업이 될 것이라고 수차례 강조했고, 대선후보 시절엔 카카오 사옥을 방문해 "과감하게 지원할 생각"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사이버 여론 단속 지침 한마디에 성공적인 모델로 정착해가던 다음카카오는 회사 설립 이후 최대의 위기에 봉착한 겁니다.
사이버 사찰 파문은 이처럼 이용자들의 사생활 보호에 안이한 기업과 정권 차원의 반민주적 시도가 맞물려 벌어진 일입니다. 카톡 이용자들이 해외 메신저로 옮겨가는 '사이버 망명' 사태는 업체에 대한 불신과 함께 정권에 대한 불신이 증폭됐기 때문이죠. 주민등록번호가 개인정보 축에도 끼지 못할 정도로 사적 정보가 빈번하게 털리는 한국 사회에 대한 절망감이 '망명'이란 표현에 담겨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보안이 철저하다는 독일 업체의 메신저로 갈아탄다고 해도 우린 여전히 한국사회에서 살아가야 하는 운명이기에, 국민의 사생활에 대한 권력의 사찰은 간단한 문제로 넘길 수 없습니다.
미국의 사회비평가 나오미 울프는 <미국의 종말>(김민웅 옮김, 프레시안북 펴냄)이라는 책에서 민주주의의 본산이라는 미국에서 돋아난 파시즘의 징후를 예리하게 파헤쳤습니다. 10가지로 정리된 파시즘으로의 이행 징후 가운데에는 '일반 시민들을 사찰하라', '언론 자유를 봉쇄하라', '비판은 간첩행위로, 비판하는 자는 국가반역죄로 몰아라', '비판적 검사(판사)를 해임하는 등 법의 지배 방식을 뒤엎어라' 등이 포함돼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현실과 놀랍도록 일치합니다. 검찰과 경찰은 국민들의 사적 대화까지 들여다보며 대통령 모독 행위를 적발합니다. 검찰이 대통령의 사생활에 관한 의문을 던진 <산케이 신문>을 기소해 세계적인 망신을 자초한 건 프리덤 하우스가 매년 발표하는 언론자유 순위에서 지난해보다 4계단이나 떨어진 68위를 기록한 것과 무관해 보이지 않습니다. 간첩 소동을 벌이며 선거를 통해 국회의원을 배출한 정당을 해산시키겠다고 법석을 떠는가 하면, 무고한 사람을 간첩으로 만들려다 발각돼 조롱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공권력을 수족처럼 부려야 하니 권력에 고분고분하지 않은 검사들을 찍어내기도 했죠.
나오미 울프가 '파시즘 이행기'라고 표현했듯이, 위에서 나열한 일들을 근거로 박근혜 정부를 단박에 파시즘으로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박 대통령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정치적 공격을 위해 파시즘을 들이대는 행위는 더더욱 자제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럼에도 최근의 사회 분위기가 억압적 국가권력의 그림자를 짙게 드리운 것만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나오미 울프가 통찰한 핵심 역시 "파시스트 체제로 옮아가는 것은 여러 행위들이 합쳐져 민주주의를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하는 형태를 취한다. 그로 인해 어느 순간 민주주의가 급작스럽게 퇴보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특히 공권력을 앞세운 반민주적 징후들이 박 대통령이 그토록 강조하는 '법치'의 탈을 쓰고 자행된 점에 주목합니다. 법치를 도구화해 진정한 의미의 법치를 억누르는 권력의 시도는 사이버 사찰이 '합법적'으로 진행됐다는 검찰의 항변과 궤를 같이 합니다. 새누리당 주호영 정책위의장이 "민주주의 국가에서 법원의 압수수색 영장에 따라 대화 내용을 보지 않는 나라가 어디 있느냐"며 검찰을 감싼 대목도 집권세력에게 뿌리박힌 '전도된 법치'를 웅변합니다. 법에 따르기만 하면 국민 사찰은 너무도 당연하다는 태도가 놀랍기만 합니다.
법의 지배란 국가권력이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지 못하도록 방어하기 위해 생성된 개념임에도 이 정부는 국가권력 자체를 보존하기 위한 수단으로 법치를 신념화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더욱 우려스러운 점은, 박근혜 정부의 '법치 오독'이 무엇이 잘못됐는지조차 각성하지 못한 무의식의 발로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자정 기능이 작동을 멈춘 만큼, 앞으로도 국민의 기본권 침해는 계속되겠지요.
나오미 울프는 파시즘이 소리 없이 진행된다고 지적했습니다. 법이 국민이 아닌 국가와 '최고 존엄'을 위해 존재하는 토양에서 파시즘은 창궐합니다. 민주주의의 기본적 요소들이 하나하나 해체되어가는 시절을 살아가다 보니, "독재체제 없이도 파시즘이 도래할 수 있다"는 나오미 울프의 무서운 경고를 떠올리게 되는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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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임경구 프레시안 기자 및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가 번갈아 담당하며, 경제는 정태인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원장, 국제는 박인규 프레시안 편집인이 맡고 있습니다. 생태와 세월호는 각각 하승수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과 김익한 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원장이 격주로 진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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