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서비스 라두식 수석부지회장은 카카오톡에 50개, 네이버 밴드에 10개의 방이 있었습니다. 이 집, 저 집을 돌아다니며 전자제품을 설치하고 수리하는 조합원들에게 노동조합을 알리고 소통하기 위해서 카톡과 밴드가 꼭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는 얼마 전 카톡방을 모두 탈퇴했습니다. 네이버 밴드도 조합원과 가족, 회사 관리자들까지 4000명이 들어와 있는 밴드 하나를 제외하고 노조 간부들이 논의하던 방은 모두 없앴습니다. 전자기기 사용에 빠른 기사들답게 조합원들도 모두 텔레그램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를 비롯해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은 누구보다 카톡과 밴드를 많이 사용했습니다. 지난해 7월 14일 400여명이 노동조합을 띄우고 전국 서비스센터에 있는 노동자들을 노조에 가입시킬 때 카톡과 밴드가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삼성전자서비스지회를 밴드노조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는 지난 해 10월 31일 삼성전자서비스 천안센터 최종범 씨가 "배고파서 못살았다"며 자결한 후 서초동 삼성 본관 앞에서 두 달 동안 노숙농성을 했습니다. 6개월 뒤인 5월 17일에는 양산센터 염호석 씨가 "더 이상 누구의 희생도 아픔도 보질 못하겠으며 조합원들의 힘든 모습도 보지 못하겠기에 절 바칩니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습니다.
그는 고인을 병원에 안치하고 아버님과 장례 문제를 협의했습니다. 그런데 경찰이 마치 군사작전을 하듯이 병원 장례식장에 난입해 최루액을 쏘며 시신을 탈취하고, 유골마저 빼앗아 갔습니다. 시신안치실 지붕에 올라 항의했던 그는 연행되어 두 달 넘게 감옥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카톡과 밴드를 활용해 만든 삼성전자서비스 노조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이 싸우고 있을 때 라두식 수석부지회장은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노조의 핵심 간부들만 모여 있는 방에서 논의된 내용이 금세 새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마치 내부에 프락치가 있는 것처럼 사측에서 노조의 계획을 생생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도청과 미행도 세계 최고인 삼성인데 오죽하겠나 생각하며 조심했지만 찜찜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서버 용량의 한계가 있는데 그 많은 대화 내용을 다 저장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실시간 대화 내용을 들여다보고 있기는 어렵지 않을까, 그래도 문자보다는 안전하겠지 하며 카톡과 밴드를 떠나지 못했습니다. 무엇보다 편리하고 온 국민이 사용하는 카톡 없이 노조활동을 하기는 힘들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찜찜함'이 무엇인지 드디어 밝혀졌습니다. 지난 10월 1일 노동당 정진우 부대표의 카톡방이 압수수색됐다는 사실을 언론을 통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카카오톡 메시지 내용, 대화 상대방 아이디 및 전화번호, 대화 일시, 수발신 내역 일체, 그림 및 사진 파일 전체가 통째로 넘겨졌습니다.
카톡을 하면서 느꼈던 '찜찜함'의 원인
라두식 수석은 정진우 부대표와 '삼성바로잡기 운동본부' 카톡방, 세월호 카톡방 등 여러 개의 방에서 소식을 함께 주고받았습니다. '삼성바로잡기 운동본부'는 200여 개의 시민사회단체가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을 응원하기 위해 만든 곳입니다.
정진우 부대표와 함께 있던 카톡방은 언론에 알려지는 내용도 논의되지만 공용 이메일 아이디와 비밀번호도 공유하고, 삼성에 항의하는 긴급 행동이나 교섭 내용 등도 주고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내용이 검경의 손아귀로 넘어갔다는 것입니다.
검찰은 정진우 부대표를 기소하면서 카카오톡 압수수색으로 가져간 대화 내용을 증거 제출 목록에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증거로 쓸 만한 것을 건지지 못했는지, 다른 용도로 사용하려고 하는지, 재판에서 불법 시비가 될 것을 우려해서 뺀 건지 알 길이 없습니다.
정진우 부대표와 라두식 수석은 경찰과 검찰이 카카오톡 압수수색 영장의 집행을 통하여 어떤 정보를 얼마나 취득했는지, 그 정보를 아직도 가지고 있는지, 혹시 국정원이나 삼성 등 다른 기관이나 회사에 넘어가지는 않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카톡방 대화록 얼마나 어디까지 유출됐나
지난 10월 2일 다음카카오는 "카카오톡 대화 내용을 평균 5~7일간 카카오톡 서버에 저장하고 있다"며 "당시 법원 영장에서는 40여 일의 대화기간을 요청하였으나 실제 제공된 것은 서버에 남아있던 하루치 미만의 대화내용"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다음카카오는 카톡 대화내용의 실시간 감청은 불가능하다고 강변해오다 실제 감청영장의 집행 사례가 공개되자, 2013년부터 2014년 상반기까지 총 147건의 감청영장을 받아 집행에 협조했다고 밝혔습니다.
다음카카오는 사회적 비난이 고조되고 텔레그램으로 탈출 행렬이 끊이질 않자 10월 13일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법원의 영장을 들고 오더라도 감청에 협조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새누리당과 검찰이 법을 무시한다며 발끈하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고 여깁니다. 다음과 카카오 합병으로 인한 추가 상장을 앞두고 주가 하락을 막아야 하는 다음카카오가 마치 강수를 두는 것처럼 '쇼'를 하고, 여당과 검찰이 반발하는 수순에서 탈출이 마무리되기를 바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음카카오는 메시지가 전송되는 과정에서는 SSL 암호화 방식을 이용하고 있어 감청이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새누리당 이장우 원내대변인도 "다음카카오 측이 밝혔듯이 실시간 감청은 불가능하다"고 맞장구를 쳤습니다.
그런데 10월 15일 열린 '박근혜 정부 사이버 정치사찰, 어디까지 왔고,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토론회에서 나온 얘기는 다릅니다.
서강대 이호중 교수는 "메시지가 서버에 저장되는 순간과 동시에 특정 계정의 메시지를 실시간으로 추출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얼마든지 가능하다"며 "카카오 측이 실제 그러한 기술적 방법으로 수사기관의 감청에 협조해 왔는지 혹은 앞으로 그런 방식으로 협조할 가능성이 있는지는 좀 더 두고 봐야 할 듯하다"고 밝혔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번 카톡 사태의 핵심은 카톡 압수수색입니다. 다음카카오는 서버 저장 기간을 2~3일로 줄이면 해결된다고 주장하지만 검찰이 압수수색 영장을 2~3일 간격으로 연달아 청구하면 앞으로 나누는 모든 대화를 엿볼 수 있습니다. 법원 영장 없이 얼마나 많은 정보가 검찰이나 국정원에 넘어가고 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짜고 치는 고스톱
우리는 일제 식민지배, 군사독재정권을 거치면서 감시와 사찰, 통제가 익숙한 사회에서 살아왔습니다. 학창 시절 책가방 검사에서부터 군대 관물대 검사, 회사의 가방 검사까지 개인의 인권과 프라이버시를 짓밟는 사찰이 아무렇지도 않게 이루어져 왔습니다. 이제는 인터넷 생활이 확산되면서 사이버 사찰도 심각해졌습니다.
주민등록증 지문 날인, 전자여권, 네이스, 이메일 압수수색 등 정보 인권 침해와 사찰이 계속됐지만 소수의 저항에 그쳤습니다. 네이버, 다음의 이메일 사찰 논란이 있었지만 지메일로 옮겨가는 운동은 광범위하게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민족주의와 국가주의 이데올로기가 대단히 강합니다. 현대·기아차 점유율이 70%를 넘고 휴대폰도 삼성과 LG가 거의 대부분일 정도입니다. 구글의 점유율이 세계에서 가장 낮은 나라이기도 합니다.
우리 국민들은 국내 기업이 스마트폰을 미국보다 훨씬 비싸게 팔아도, 자동차 무상수리기간이 외국보다 훨씬 짧아도 '애국'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호주머니를 아낌없이 털어왔습니다. 주민등록번호, 집 주소, 핸드폰 번호를 다 입력해야만 이메일을 만들 수 있고, 개인정보 유출로 온갖 판매 전화에 시달려도 국내 인터넷 회사를 이용해 왔습니다.
그런데 박근혜 정권의 사이버 사찰은 정보 인권 후진국과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라는 거대한 장벽을 단박에 뛰어넘어 '사이버 망명'의 탈출극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텔레그램 이용자가 이미 200만을 넘었고, 국민 메신저로 성장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사찰의 나라에서 벌어지는 탈출
다음카카오의 기자회견에도 탈출 행렬이 줄어들지 않자 10월 15일 대검, 법무부, 미래창조부, 경찰청 관계자들이 긴급회의를 열었습니다. 검찰은 카카오톡 대화내용 압수수색 시 제3자의 개인 사생활이 침해될 수 있다는 우려를 감안, 필요 최소한도의 범위 내에서만 자료를 확보하고, 범죄 혐의와 관련이 없는 부분은 신속하게 폐기하기로 했습니다.
지금까지 최소한의 범위가 아니라 개인 사생활을 침해하는 모든 자료를 다 가져갔다는 것을 검찰 스스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기사에 달린 댓글의 대부분은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밝혀진 압수수색 주요 대상은 민주노총, 철도노조,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에서 활동하는 노동자들이었습니다. 세월호 몰살에 항의하는 청와대 행진, 철도노조 파업을 사찰한 것입니다. 불의하고 부정한 정권의 검은 망원경은 투쟁하는 노동자를 향하고 있습니다.
삼성전자서비스, 통신케이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카톡과 밴드도 뒤지지 않았을까요? 현대차 비정규직, 쌍용차 노동자들의 카톡은 훔쳐보지 않았을까요? 삼성전자서비스지회 라두식 수석부지회장은 메신저 업계에서 최대 재벌 삼성에게 삼성서비스 노동자들의 정보를 갖다 바쳤을 것이라고 의심하고 있습니다. 누가 내 침실을 엿보고 있다는데, 0.1%라도 의심이 된다면 이사를 갈 수밖에 없습니다.
삼성만이 아닙니다.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노조의 주요 간부들 전화 통화는 실시간으로 도청된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통화는 평조합원 핸드폰이나 공중전화를 이용할 지경입니다. 불법 도청과 감청이 얼마나 이루어지고 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삼성, 현대차 노조 간부 전화는 항상 도청?
10월 15일 진보네트워크센터,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 천주교 인권위원회,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 등 노동사회단체는 "정치사찰과 국민감시가 허용되지 않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가칭 '사이버 사찰 국민대책기구' 결성을 제안한다"고 밝혔습니다.
사이버사찰 대책기구에서 할 일은 간단합니다. 지금은 편리한 카톡, 밴드와 안전한 텔레그램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고 있지만 불안해하는 시민들에게 명확한 행동 지침을 내리는 것입니다. 카톡과 밴드가 0.1%라도 의혹을 해소하지 못한다면 국민적 망명을 하는 것입니다.
유신시대가 끝난 10월 26일도 좋습니다. 세계인권기념일인 12월 10일도 괜찮고, 12월 31일로 선포해도 됩니다. 그러나 늦어도 내년부터는 정권의 하녀들이 망원경으로 술자리 대화를 엿보고 침실의 귓속말을 들여다보게 할 수는 없습니다.
국가도 중요하고 국민기업도 소중합니다. 그러나 국민 없는 국가 없고, 국민 없는 국민기업은 없습니다.
다음카카오와 네이버 밴드에게 아직은 시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많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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