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의 계절에 열린 세계헌법재판회의
가을은 운동의 계절이다. 지난 9월 19일 열린 아시안 게임은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계절에 열렸다. 40억 명 아시아인들의 축제로서 세계적인 이벤트이다. 가을에는 유독 체육대회가 많다. 나도 최근 체육대회에 참여했다. 단풍구경을 이유로 한 산행도 많이 있다. 운동은 가을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인가 보다.
아시안 게임이라는 큰 국제대회와 체육대회, 단풍 구경 등 풍성한 놀거리 중에 생소하지만 중요한 행사가 하나 있었다. 세계헌법재판회의 제3차 총회(The 3rd Congress of the World Conference on Constitution Justice)가 9월 28일부터 10월 1일까지 서울에서 열렸다. 야외 행사가 많은 운동의 계절에 묻힌 감은 있지만 세계헌법재판회의는 제법 중요한 행사이다.
각국의 헌법재판기관 등이 회원으로 있는 이 회의체는 헌법재판 분야의 세계 최고의 회의체이다. 전 세계 86개의 헌법재판소, 대법원 등 헌법재판기관들이 회원으로 가입해 있으니 사실 거의 모든 최고법원이 모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기관이 모인 것 자체만으로도 큰 뉴스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세계적으로 법치주의와 인권 보호가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시점이다.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테러, 인권침해와 갈등, 국가와 시민의 충돌은 헌법재판소가 법치주의와 인권을 보호하기 위하여 더욱 노력할 것을 요구한다. 한국은 특히 법치주의와 인권이 필요하다. 조작간첩 사건, 국정원의 선거개입 사건, 내란음모 사건, 통합진보당 해산청구 사건 등으로 법치주의가 무너지고 있고, 세월호 참사와 최근 카카오톡 사건 등으로 개인의 인권이 침해당하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 열린 제3차 세계헌법재판회의의 주제는 "헌법재판과 사회통합"이었다. 사회통합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우리에게는 특별히 필요한 주제였다.
베니스위원회의 주도로 시작된 세계헌법재판회의
사람들에게 생소한 세계헌법재판회의는 2009년부터 개최되기 시작했다. 유럽평의회는 산하 자문기구로 베니스위원회를 두는데 이 베니스위원회가 세계헌법재판회의를 주도했다. 제1차 총회는 2009년 1월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 열렸다. 과거 인종분리 정책으로 인권후진국이었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이 회의가 처음 열린 것은 역시 넬슨 만델라 대통령의 효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제2차 총회는 2011년 1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개최되었다.
이번 서울에서 열린 회의는 제3차 총회이다. 이번 총회는 세계헌법재판회의 규약을 채택한 이후 정식으로 소집된 회의이다. 이전 총회는 근거 규정 없이 비상설적으로 개최된 회의였다. 따라서 이번 총회가 사실상 창립총회라고 할 수 있다. 그에 걸맞게 전 세계 100여 개국에서 350여 명의 헌법재판기관 대표들과 국제기구 수장들이 참석했다고 한다.
세계헌법재판회의 와중에 열린 NGO의 학술심포지엄
큰 국제회의가 열리면 여러 행사가 같이 열리기 마련이다. 대회를 직접 조직할 힘이 없는 NGO 등 비정부기구는 특히 이런 행사를 계기로 시민의 목소리를 전달하는데 노력한다. NGO가 주최하는 학술심포지엄, 토론회, 전시행사 등이 그것이다.
세계헌법재판회의에서도 사정이 같았다. 세계헌법재판회의 와중에 한국의 NGO들은 9월 28일 학술심포지엄을 개최했다. 그 제목은 "통합진보당 해산청구, 베니스위원회 기준에 비춰본다"였다. 이 심포지엄의 목적은 명백하다. 첫째 목적은 세계헌법재판회의 제3차 총회에 통합진보당 해산청구에 관한 NGO의 의견을 전달하는 것이다.고, 둘째 목적은 우리의 헌법재판소가 통합진보당 해산청구를 국제기준에 따라, 국제적인 감시를 받으면서 신중하게 심리할 것을 요구하기 위한 것이다. 회의는 법과사회이론학회, 민주주의법학연구회,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등 세 단체가 주최했다. 나는 민변의 전 사법위원장 자격으로 토론자로 참여했다.
운동과 나들이의 계절에 열린 때문인지 우리의 법치주의와 인권의 수준 때문인지 세계헌법재판회의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NGO 학술심포지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주목은 받지 못했지만 중요성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베니스위원회의 기준과 상식에 따른 위헌정당해산사건의 심리를 기대한다
이날 심포지엄의 발표자들은 베니스위원회의 정당해산에 관한 지침을 자세히 소개했다. 베니스위원회는 유럽평의회 자문기관으로서 정식명칭은 '법을 통한 민주주의를 위한 유럽위원회'이다. 베니스위원회는 2014년 현재 유럽평의회 회원국 47개국과 기타 비유럽지역의 12개국이 회원국이며 우리나라도 회원국이다.
베니스위원회는 정당해산과 관련한 지침(Guideline)을 채택했다. 정당해산에 관한 가장 권위 있는 문서이다. 지침은 합법성과 비례성을 핵심으로 한다. 구체적인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첫째, 국내 법률만으로는 해산할 수 없고 국제적인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 둘째, 정당해산은 극히 예외적으로만 할 수 있는데 헌법질서의 전복을 목적으로 한 폭력의 사용 또는 사용의 주장이 있어야 한다. 셋째, 정당구성원의 개별 행위로 정당해산을 할 수는 없다. 넷째, 정당해산은 최후의 수단으로 비례성의 원칙에 따라야 한다. 다섯째, 정당해산은 현실적 위협이 존재하는 충분한 증거에 근거를 두고 사법적 판단을 거쳐 이루어져야 한다.
심포지엄의 발표자와 토론자는 베니스위원회의 기준에 따르면, 통합진보당은 해산될 수 없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나도 토론자로서 통합진보당의 해산청구 자체는 국가보안법에 의해서 가능하다며, 헌법은 이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혔다. 다만 국가보안법이 헌법의 역할을 하는 현실이므로 헌법을 국가보안법으로부터 탈출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덧붙였다.
베니스위원회의 기준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통합진보당을 해산하는 것은 비상식적이다. 이미 세계적으로 사회민주주의 정당, 공산당이 수많이 허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주요 교역국인 중국과 유럽, 일본은 모두 사회당과 공산당이 허용되고 있다. 세계헌법재판회의에 참석한 발레리 조르킨 러시아 연방헌법재판소장은 "공산당 일당체제에 반대하되 공산주의자들이 당을 만들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말했다. 이것이 세계헌법재판관들의 상식일 것이다.
헌법재판소는 역사적인 통합진보당 해산청구사건을 심리하고 있다. 세계도 주목하고 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당을 해산하는 것은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헌법재판소가 베니스위원회의 지침과 세계헌법재판관들의 상식에 근거한 결정을 내릴 것을 걱정과 함께 희망한다.
김인회 교수의 <단비칼럼>을 매주 연재합니다. '단비칼럼'은 '단숨에 읽는 비평 칼럼'의 줄임말입니다. 필자인 김인회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참여정부 시민사회비서관, 민주화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사법위원장을 지냈으며 현재 한국미래발전연구원 부원장을 맡고 있습니다. <검찰을 생각한다>(2011) 등의 저서를 낸 김인회 교수는 <단비칼럼>에서 오늘의 한국 사회와 사법제도의 문제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과 올곧은 해법을 전해드립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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