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와 통일, 시민의 힘으로
한국의 정치지도자는 한반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자유와 권리, 평화와 안전을 보장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리고 시민들에게는 정치 지도자들에게 이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 평화와 안전을 보장받고 또 요구할 수 있는 시민에는 군 장병이 포함된다. 군인도 제복을 입은 시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북한의 주민을 포함한 동아시아의 시민들도 포함된다. 지도자와 시민이 함께 열어가는 평화와 안전은 개인의 삶의 질도 바꾼다. 이러한 당연한 진리를 깨닫는 행사가 최근 있었다.
지난 10월 3일에 열린 10.4 남북정상선언 7주년 토론회와 기념식이 그것이다. 이날 토론회는 「평화와 통일, 시민의 힘으로」라는 제목 아래 두 가지 문제를 논의했다. 제1주제는 자주국방과 한반도 평화의 길이었다. 전시작전권 전환을 둘러싼 논쟁과 동북아 위기와 한반도 평화의 문제가 주제였다. 제2주제는 시민의 참여로 바꾸는 병영문화였다. 최근 임병장, 윤일병 사건으로 드러난 병영문화를 진단하고 개선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두 주제 모두 중요한 쟁점이다. 그리고 최근의 상황을 반영한 적절한 주제이다. 그런데 이 중 병영문화 문제는 약간 생소하다. 자주국방, 전시작전권 전환, 한반도 평화, 동북아시아 신질서 구축 등은 오랜 기간 계속하여 논의해 온 전통적인 주제이다. 우리의 운명을 좌우하는 큰 주제로서 매년 논의하지 않을 수 없는 담론이다.
이에 비해 병영문화는 조금 작은 주제이다. 지금까지 군 생활이라는 문제는 항상 한반도 평화라는 거대 담론의 하위 주제, 부차적인 문제였다. 병영 생활은 국방의 하위개념이었고 군 인권은 국방개혁의 종속변수였다. 논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국가적 과제로 부상하지는 못했다. 이번 토론회에서는 이러한 상태를 벗어나 병영문화가 정식 주제가 되었다. 국가적 과제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현상이다. 표면적인 이유는 우리에게 충격을 준 임병장, 윤일병 사건 때문이다.
63만의 병력을 유지할 수 없는 구조의 변화
표면적인 현상 뒤에는 항상 거대한 구조가 있다. 군의 사고 이면에는 군의 구조적인 변화가 있다. 시대의 변화에 따른 군의 구조적인 변화가 군의 사건, 사고의 근본원인이다. 그리고 병영문화를 국가적 관심사로 만드는 이유이다.
김종대 디펜스 21+ 편집장의 이날 발표에 따르면 2014년 기준으로 8만 6천명의 군대 내 관심병사, 연간 2만명의 입실환자, 연간 7천명의 범죄자, 연간 6백명의 근무이탈자, 연간 1백여명의 자살자, 연간 400명의 자살우려자가 있다고 한다.
이러한 심각한 상태는 교육이나 처우의 개선으로 완화될 것인가? 불행하게도 그렇지 않다. 다시 김종대 편집장이 소개한 통계를 보자. 징집대상인 18살 남성인구는 2010년 36만명 수준에서 2020년 26만5천명으로 대폭 줄어든다. 63만명의 한국군 병력을 유지하려면 2022년이면 징집대상자의 98%가 군에 입대해야 한다. 이를 김종대 편집장은 외형적으로 구분되는 장애인을 제외하고는 저학력자, 정신이상자, 신체허약자, 전과자, 동성애자까지 모두 군에 가야 한다는 뜻이라고 해석했다. 이 정도면 군 조직 유지 자체가 목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 군 사고가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어들지는 않을 것임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세계 최고의 군 병력 인구밀도
우리 군 병력은 너무 많다. 참여정부의 국방개혁정책보고서(2007년)에 의하면 미군은 147만명(인구 3억1천만명), 중국군은 225만명(인구 13억6천만명), 러시아군은 103만명(인구 1억4천만명), 일본 자위대는 24만명(인구 1억2천만명), 영국군은 28만 5천명(인구6천3백만명) 수준이다. 이에 비해 한반도는 남한 63만, 북한 120만의 군인이 있다. 남북한을 합치면 중국 다음 세계 2위이다. 미군과 러시아군을 가볍게 넘는다. 군 병력 인구밀도를 계산하면 세계 최고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정도의 병력을 유지해 왔다는 것, 그리고 유지하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
앞으로 줄어드는 인구를 생각하면 이 정도의 병력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양적으로 풍부하고 질적으로 뛰어난 군은 과거에도 희귀했지만 앞으로는 존재할 수 없다. 양은 선택하려고 해도 선택할 수 없다. 줄어드는 양은 질로 보충해야 한다. 세계 최고의 대우를 한다는 미군도 병사들의 모집에 어려움을 겪는다.
국방개혁을 통한 적정 규모의 선진정예강군 구축
이러한 변환기에는 청사진이 필요하다. 향후 10년, 20년을 내다보는 철학과 전망이 필요하다. 그 청사진은 국방개혁과 평화체제 구축이다.
먼저 선진정예강군이 되기 위한 국방개혁을 단행해야 한다. 이를 위한 계획은 이미 법률로 마련되어 있다. 2006년에 제정된 「국방개혁에 관한 법률」이 그것이다. 국방개혁에 관한 법률은 국방개혁의 방향으로 ①국방정책을 추진함에 있어서 문민기반의 확대, ②미래전의 양상을 고려한 합동참모본부의 기능 강화 및 육군·해군·공군의 균형있는 발전, ③군구조의 기술집약형으로의 개선, ④저비용·고효율의 국방관리체제로의 혁신, ⑤사회변화에 부합하는 새로운 병영문화의 정착을 기본이념으로 하고 있다.
국방개혁에 관한 법률은 2020년까지 50만명 수준의 상비병력 규모를 목표로 하고 있다(제25조). 이를 반영하여 2014년의 국방계획은 2022년까지 군 병력을 현재 63만3천명에서 52만2천명으로 줄이는 국방개혁 기본계획을 수립했다. 참여정부의 애초 계획인 2020년 50만명 보다는 적은 감축이지만 추세는 거스를 수 없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아무래도 숫자가 줄면 장병의 기본권이 보장될 가능성은 조금 높아진다. 이런 면에서도 군 병력 감축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군 병력 감축과 함께 가야하는 정책은 국방예산의 증가이다.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 평화체제가 안정되지 못한 지금 군 병력 감축에 따른 국방예산 증가는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 그런데 국방예산 증가율은 참여정부 이후 계속 하락하고 있다. 2005년의 국방예산 증가율은 11.4%였으나 2014년의 증가율은 3.5%에 지나지 않는다. 국방개혁 기본계획은 연평균 7.2%를 제시하고 있다. 필요한 재원의 절반도 투자되고 있지 않은 것이다.
한반도 평화체제는 국방개혁의 기초이자 기본 방향
국방예산의 증가 없이 국방개혁을 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있다. 한반도 평화체제를 만드는 것이다. 군은 전시를 대비하는 것이지만 항구적인 평화체제는 군 병력을 적정수준으로 유지하게 만든다. 세계 그 어떤 나라에 비하여 많은 한반도의 군 병력을 줄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남북한 사이에 교류와 협력이 활발하게 되면 군축은 따라오기 마련이다. 역사적인 「남북기본합의서」(1992년 발효)는 남북군사공동위원회에서 대량살상무기와 공격능력 제거를 비롯한 단계적 군축 실현문제를 협의․추진하기로 합의한 바 있다(제12조). 당장 남북 사이의 대화로도 군축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에 더해 미국과 중국, 일본과 러시아 등 한반도를 둘러싼 강대국들이 남북한과 함께 평화체제를 만든다고 상상해 보자. 남북한의 군축에 더해 동아시아 차원의 군축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때가 되면 우리는 과도한 안보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또한 과도한 국방비도 다른 예산으로 활용할 수 있다. 지금보다 훨씬 적은 군 병력으로 훨씬 평화롭고 안전하며 윤택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 그리고 군인은 훨씬 안전하고 행복하게 군 생활을 할 수 있다.
시민과 군인의 안전을 위한 남북대화
한국 정부와 정치인은 북한만을 상대해서는 안된다.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의 평화체제를 제창하고 이를 실현하여야 하는 책무가 있다. 평화만이 안전을 가져올 수 있고 평화가 정착되어야 통일도 가능하다. 한반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안전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주위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여기에는 당연히 군 장병과 북한 주민도 포함된다. 나아가 동북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포함된다. 그리고 정치지도자들은 시민들과 함께 해야 한다. 결국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은 이들 시민들이기 때문이다.
토론회 다음 날인 10월 4일, 10.4 남북정상선언이 있은 날 북한 고위급 인사들이 인천아시안 게임 폐막식에 참석했다. 국무총리와 통일부장관을 비롯한 우리측 고위급 인사들을 만났다. 남북관계의 발전을 기대할 만한 사건이다. 정부가 지금까지의 적대적인 정책을 버릴 기회가 찾아왔다. 우리측이 먼저 대범한 제안과 접근을 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상관없다. 이번 기회를 살려 남북대화를 진행하고 신뢰를 쌓기를 바란다. 평화체제가 가시화되면 군축도 논의하기 바란다. 좁은 한반도에 180만이 넘는 군 병력을 유지하는 것은 누구도 원하지 않을 것이다. 많은 군 병력으로 계속 사고가 발생하는 것도 원하지 않을 것이다. 당장 군 장병의 안전을 위해서도 남북대화에 적극 나서기를 희망한다.
김인회 교수의 <단비칼럼>을 매주 연재합니다. '단비칼럼'은 '단숨에 읽는 비평 칼럼'의 줄임말입니다. 필자인 김인회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참여정부 시민사회비서관, 민주화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사법위원장을 지냈으며 현재 한국미래발전연구원 부원장을 맡고 있습니다. <검찰을 생각한다>(2011) 등의 저서를 낸 김인회 교수는 <단비칼럼>에서 오늘의 한국 사회와 사법제도의 문제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과 올곧은 해법을 전해드립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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