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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적십자회담', 앞으로도 가능할까?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정권의 '전리품' 된 대한적십자사, 앞날 걱정된다

1863년 10월에 창설된 국제적십자사는 인도주의 목적으로 설립된 최초의 국제기구다. 어떤 상황에서 이 기구가 설립되었는지 돌이켜보면, 적십자사의 성격만이 아니라 '인도주의'의 의미를 음미할 수 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왜 여기에 '인도주의'란 이름을 붙여 제도적으로 옹호할 필요가 생겼는가?

크리미아전쟁(1854~1856)은 나폴레옹전쟁 이후 40년 만에 유럽에서 일어난 큰 전쟁이었다. 40년간 무기의 기술이 발전해서 전쟁의 파괴력이 커진 데 비해 전쟁 운영의 기술이 뒤처져 있었다. 특히 의료 부문이 미개했다. 영국이 보낸 25만 명의 군대에는 의료진이 없었다. 2만5000명이 전염병으로 죽으면서 여론이 끓어오르자 런던에서 치료소를 운영하던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 정부의 요청에 따라 일군의 간호사와 함께 전쟁터로 가서 구호 활동을 펼쳤다. 이것이 근대적 간호제도의 출발점이었다.

크리미아전쟁을 기점으로 비엔나체제가 무너지고 '전쟁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1859년 6월 이탈리아 북부에서 14만 명의 프랑스-피에드몽 연합군과 13만 명의 오스트리아 군 사이에 벌어져 3만여 명의 사상자를 낸 솔페리노전투는 이 시대의 전쟁 중 특별히 규모가 큰 것도 아니었고 정치적 의미가 큰 것도 아니었다. 앙리 뒤낭(1828~1910)의 역할이 아니었다면 특별히 기억에 남을 이유가 없는 숱한 전투 중 하나였을 뿐이다.

▲앙리 뒤낭이 솔페리노에서 구호활동을 펼치는 모습(1859).

제네바의 사업가 뒤낭은 알제리아의 사업에 관련된 청원을 위해 이탈리아에 출정 중인 나폴레옹 3세를 찾아왔다가 전투 직후의 솔페리노에 도착했다. 2만여 명 부상자가 구호를 받지 못한 채 전쟁터에 버려져 신음하고 있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뒤낭은 볼일을 포기하고 그곳에 남아 구호작업을 펼쳤다. 그가 자금을 대며 앞장서자 인근 주민들도 호응해서 많은 인명을 구할 수 있었다.

솔페리노 주민들처럼 많은 사람들이 착한 마음을 갖고도 펼칠 길을 쉽게 찾지 못하는 데 안타까움을 느낀 뒤낭은 <솔페리노의 기억>을 써서 1862년 자비로 출판, 유럽 각국의 요인들에게 보냈다. 전쟁부상자 구호를 위한 자발적 조직을 각국에 만들 것을 호소한 이 책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는데, 그중 열렬한 반응을 보인 한 사람이 제네바공공복지협회 회장 귀스타브 무와니에(1826~1910)였다. 무와니에가 제네바 유지 몇 사람과 뒤낭을 청해 사업을 의논하기 시작한 모임에 '부상자구호국제위원회'란 이름을 붙인 1863년 2월 17일이 국제적십자사의 창립일이 되었다.

'부상자 구호'라는 첫 이름처럼, "전쟁 속에서도 자비를!"을 구호로 내건 적십자사의 원래 목적은 전쟁터에서의 고통과 희생을 가능한 한 줄이자는 것이었다. 중세의 전쟁에서는 서로 죽이고 죽는 장면에서도 전사와 전사, 즉 사람 사이의 싸움이었다. 그런데 근대 전쟁에서는 사람이 아니라 공간이 공격 대상이 되고, 공격받는 공간 안에 있던 병사들은 공간의 부속물로서 부수적인 희생자가 되었다. 병사는 더 이상 전투의 주역이 아닌 것이다. 그런 병사가 전투력을 잃은 상태에서 다시 사람으로 인정받게 해준다는 것이 적십자의 뜻이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란 말은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 인간의 본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근대 이전에는 전쟁터에서도 이 본성이 어느 정도 지켜졌다. 그런데 근대 전쟁에서 이 본성이 자취를 감추기 시작해, 이제는 모니터 위의 점으로 적군 병사를 인식하고 스위치 하나를 눌러 상대방을 떼거리로 멸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유럽에서 '인도주의' 운동은 18세기 중엽에 나타나 19세기 중에 큰 발전을 보았다. 산업혁명의 진행과 확산에 뒤따른 현상이었다. 적십자사의 부상자 구호사업 외에도 노예제도 철폐, 형벌제도의 합리화, 고문 폐지, 감옥의 환경개선, 정신질환자 보호, 여성차별의 극복, 동물학대 방지 등 여러 방면의 인도주의 운동이 이 시기에 전개되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지 못하는 '근대문명'의 '인간 실종' 현상에 대한 반작용인 셈이다. 이 현상이 19세기 후반에는 전쟁터에서 극명했기 때문에 나이팅게일과 적십자가 나타난 것이다.

군대와 산업조직의 대형화 및 도시화 이전에는 대부분의 사회적 갈등이 지역사회 안에서 관습에 따라 처리되었다. '사람의 도리'에 대한 인식에 큰 편차가 없어서 '공론'이 질서 유지의 기준이 되었던 것이다. 국가는 그 범위를 넘어서는 약간의 문제를 살펴주는 정도의 소극적 역할에 그쳤다. 그런데 지역사회의 역할이 퇴화한 근대적 상황에서는 국가의 역할이 커졌고, 국가의 권력을 아무리 강화해도 감당할 수 없는 문제가 속출하고 있었다. 국가 간의 대립 때문에 국가의 역할이 더욱 한계를 갖는 영역도 있다. 이런 영역을 떠맡기 위해 인도주의 운동이 일어났고, 지금까지도 NGO 활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인도주의 운동을 불러일으킨 여러 방면의 참혹한 상황을 되돌아보면 운동의 필요성과 정당성에 의문을 품기 어렵다. 그러나 시야를 넓게 잡아보면 떠오르는 의문이 있다. 과연 이런 운동이 모순의 척결을 바라보는 것인가, 아니면 모순을 유지하기 위한 것인가? 적십자사가 평화운동의 상징처럼 되어 있지만, 전쟁을 없애자는 목표가 아니다. 전쟁은 계속하되, 그 폐해를 줄이자는 것이다. 인도주의 운동이 큰 성과를 거둔 사례는 모두 근본적 문제보다 지엽적 과제를 추구한 경우였다.

노예제도가 좋은 예다. 바르톨로메 데 라스카사스(1484~1566) 주교는 '인디언의 보호자'란 별명을 얻을 만큼 아메리카대륙 정복기에 원주민의 인권을 위해 애쓴 성직자다. 그런데 그가 노예무역의 길을 연 죄를 묻는 사람들도 있다. 원주민의 참상에 충격을 받은 그가 원주민을 노예로 만들지 말자고 주장한 것까지는 좋다. 그런데 그는 원주민을 대신할 노동력 확보를 위해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들여오자고 제안했던 것이다. 그는 40세 무렵 종래의 활동방향에 회의를 느끼고 수도회에 들어가 10년간 은둔생활을 하면서 비로소 아메리카인이든 아프리카인이든 어느 쪽도 노예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세웠다.

라스카사스는 수사가 되기 전 스페인 조정에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원주민의 인도적 대우를 주장하면서도 아프리카 노예로 노동력을 충당하자는 '대안'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영향력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아무도 노예는 안 돼!" 하는 근본주의자였다면 왕이 불러서 의견을 묻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영국은 노예제를 제일 먼저 철폐한 나라였다. 18세기 후반에 연간 5만 명 전후의 노예를 수출하며 세계 노예시장의 절반을 장악하고 있던 영국이 19세기 들어서자마자 노예제를 철폐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러나 연구자 중에는 영국의 노예제 철폐가 선발주자 입장의 '사다리 걷어차기'였다는 의견도 많다. 19세기 전반기를 통해 영국해군의 중요한 업무 하나가 다른 나라 노예무역선 나포였다는 사실에 비추어 일리 있는 의견이다.

미국의 남북전쟁에서 북부의 노예제 철폐 동기가 산업화에 있었다는 관점은 정설이 되어 있다. <엉클톰스 캐빈>을 쓴 스토우 부인은 물론 투철한 인도주의자였다. 그러나 그의 노예제 철폐 주장이 실제정책에 반영된 것은 노예해방을 통해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확보하는 데 뜻이 있었다고 하는 것이다.

근대문명의 구조적 모순이 널리 지적되고 있는 21세기 상황에서 19세기 인도주의 운동의 위선적 측면을 지적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백인의 짐'은 냉소의 대상이 된 지 오래거니와, 19세기 인도주의 운동 모두가 그와 같은 차원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사고와 행동은 주어진 맥락 안에서 음미하고 평가해야 하는 것이다. 19세기 박애주의자들은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삶을 덜 괴롭게 만들어주고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나은 곳으로 만들려 애쓴 사람들이다.

대한적십자사의 존재도 한국인의 삶에 공헌한 바가 적지 않다. 한국이 국제적 고립상태에 있던 독재정치 시절 국제적십자사연맹의 일원으로서 그 기준을 지켜야 하는 대한적십자사는 이 사회에 작으나마 하나의 숨통 노릇을 했다. 남북한이 서로를 인정하지 않던 1970년대에 적십자회담이 대화의 통로 노릇을 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국제적십자운동의 권위를 배경으로 남북의 적십자사는 국가의 틀을 넘어 서로 마주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전의 '서리풀 논평' "박근혜 정부, 혈액 사업도 민영화 물꼬 트나?"(☞기사 바로 가기)에서 '기업인'의 대한적십자사 총재 등용에 대한 걱정을 읽었다. 그 걱정에 공감하면서, 또한 '사이비 정치인'의 등용이라는 측면에 더 큰 걱정이 든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무절제한 막말로 존재감을 과시한 사람 아닌가. 북한과의 대화에 적십자회담의 역할이 필요할 때 북한의 조선적십자사가 대한적십자사를 대화상대로 인정하는 데 어려움은 없을까? "경륜과 덕망, 사회적 신임을 고루 갖춘 원로"가 총재를 맡을 때에 비해서는 문제가 있을 것 같다.

이 사회에서 신자유주의의 해악이 끝이 없다. 1970년대에 자본주의체제의 한계와 모순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을 때 반동적 대응으로 나타난 것이 신자유주의다. 드러나는 모순을 해소하거나 완화하기보다 거꾸로 더욱 심화한다는 점에서 반동적 노선이다. 신자유주의는 체제의 성공이 아니라 진영의 승리를 추구하는 노선이다. 체제의 모순을 한 귀퉁이에서라도 완화하려는 노력의 가장 상징적 기구인 적십자사마저 정권의 전리품이 되다니, 어떤 안전망이 이 사회에 남아나겠는가?

▲적십자 깃발 아래 펼쳐진 구호활동(18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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