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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박상표'가 나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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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제2의 박상표'가 나와야 합니다"

[이 주의 조합원] 송기호 변호사

<프레시안>의 오랜 독자라면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는 이름, 송기호 변호사를 만났다. 한미 FTA,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둘러싼 논란, 한EU FTA 협정문 번역 오류 등 다양한 통상 쟁점이 불거질 때마다, 그는 정부 측 논리의 허점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외교통상부 공무원들이 <프레시안>의 꼼꼼한 독자가 된 것도 그의 활약 덕분이다. 송 변호사의 글이 실린 다음날이면, 외교통상부는 이런저런 해명자료를 내놓고는 했다. 지난 26일 만남은 ‘쌀 관세화’ 등 시급한 통상 현안에 대한 생각을 듣는 자리였다. 긴 인터뷰를 마친 뒤, 기자는 새로운 용건을 꺼냈다. 송 변호사는 언론협동조합 프레시안의 조합원이다. ‘농업통상 전문 변호사 송기호’가 아니라 ‘조합원 송기호’의 생각을 듣고 싶다고 했다. 마침 점심시간을 조금 넘겼다. 송 조합원이 일하는 수륜아시아법률사무소 근처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국수를 먹으며 편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프레시안>과의 첫 만남, <프레시안>에 대해 바라는 바 등 다양한 주제를 오가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삶의 모범'은 모두 농촌에 있었다"

금요일 오후, 서울 서초동 법원 거리. 이곳으로 연결되는 지하철 2호선 교대역 출구 계단은 온통 변호사 사무실 광고로 메워져 있다. 이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법률 사무 종사자, 그러니까 법으로 밥을 버는 이들이다. 송 조합원 역시 일상의 많은 부분은 그들과 마찬가지일 게다. 하지만 평범한 변호사들과 겹치지 않는, 나머지 부분. 그건 어떻게 생겨났을까. 그 이야기가 궁금했다. 실은 송 조합원이 쓴 책 <곱창을 위한 변론> (프레시안북 펴냄)의 서문에 어느 정도 소개돼 있다. 조금 길지만 인용해 본다. 

“학교와 군대를 마치자마자, 나는 농촌으로 내려갔었다. 서울에서는 삶과 생명을 느낄 수 없었다. 삶의 모범이 될 만한 사람들로 내가 보았던 분들은 농촌 사람들이었다. 내가 농촌행을 선택하자, 자식들을 위해 평생을 논밭에서 일하신 아버지는 이를 완강히 반대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반대를 피해 고향 대신 객지로 내려갔다. 해남, 나주, 그리고 영암에서 기독교청년회(YMCA) 전국연맹 농촌부 간사로 시작해서 농업노동자로, 임차농으로 살면서 많은 농민들을 만났다. 일손이 부족한 농촌이었기에 일자리는 많았다. 빈집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일주일에 사흘 정도를 논밭에서 일하면 충분했다. 그 품삯으로 혼자 몫의 생계를 해결할 수 있었다. 나머지 시간은 농민회 일을 했다. 농자재 공동 구매, 선진 농업 지역 견학, 수세 폐지 운동 등을 고장의 농민들과 함께했다.”

학교와 군대를 마지자마자, '현장'으로 택한 농촌

이 대목을 떠올리며 송 조합원에게 물었다. “기업 입사, 고시 준비, 대학원 진학…. 대략 이런 게 대학 마치고 흔히 택하는 진로 아닌가요.”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사람들은 꼭 그렇지만은 않았어요. ‘현장’에 들어가는 학생들이 많았죠. 공장 노동자로 취업하거나, 빈민 지역에 들어가거나. 저처럼 농촌 현장에 간 경우도 있고요.”

‘유별난 진로’를 택한 게 아니라는 설명이다. “대학 시절, 운동권 학생이었나요?”

“앞에 나서서 시위를 주동하거나 하는 뜻이라면, 아닐 테고요. ‘운동권 써클’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곳에서 활동을 하긴 했었죠. 시골 학생이 대학 진학하면서 서울에 오면 모든 게 낯설잖아요. 그때 만난 고향 선배 소개로 써클에 가입했죠. 그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써클 활동으로 기억에 남는 일은, ‘농촌 활동’이었어요. 그 전에는 ‘농촌 봉사 활동’이라고 했죠. 그걸 ‘농촌 활동’으로 바꾸는 게 당시 제가 했던 일이었어요.”

"농사짓다 나이든 신입사원 지망생, 큰형의 사고 소식에 주저앉았다"

기층민중과 함께하는 ‘현장’ 가운데 하나로 택한 농촌. 그러나 그는 결국 뿌리를 내리지 못한다. 다시 <곱창을 위한 변론> 서문이다. 

“그러나 나는 끝내 정착하지 못했다. 객지에서 남의 땅을 빌려 지은 농사로 살림 기반을 마련하려면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아버지의 반대는 꺾일 기세가 없이 더욱 강해졌다. 고향으로 갈 수는 없었다. 객지에서 묵묵히 농사를 짓기에는 나의 마음이 애당초 너무 급했다. 과로와 불안정 앞에 스스로 무너졌다. 결국 농촌을 떠났다. 

서울에서 내 몸을 누일 방이라도 마련해야 했을 때, 선친은 천만 원을 송금해주셨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받은 큰돈이었다. 난생처음 토플이란 것을 끼고 취직 공부를 하고 구직 활동을 했다. 수없이 많은 회사에 입사원서를 내고 취직 시험을 보았다. 현대자동차, 한화, 이랜드, 가스공사, 웅진, 교통방송국…. 하지만 그 어떤 곳도 농사짓다가 나이든 신입사원 지망생을 받아주지 않았다. 면접에서 하도 많이 떨어져, 면접이 가장 무서웠다. 

그렇게 실의에 차 있던 겨울, 가장 가까운 사람을 잃었다. 황소처럼 집안을 이끌어오던 큰형이 형수와 어린 아이들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 큰형의 사고 소식을 들었을 때, 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로펌에서 맡은 첫 사건, 삼성 해고자에게 이겼다"

그러다 가까스로 은행에 취업했다. 생활의 안정을 찾았다. 이후 더 안정적인 삶을 찾아 사법시험을 쳤고, 로펌 변호사가 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나의 길을 알지 못했다. 나는 농촌을 다시 쳐다보고 싶지 않았다. 로펌이 내게 처음 배당했던 사건, 그러니까 내가 변호사가 되어 처음 맡은 사건의 의뢰인은 삼성이었다. 반대쪽에 선 상대방은 삼성에서 해고된 근로자였다. 난 열심히 일했고, 삼성은 승소했다.”

농민과 사회적 약자에게 불리하고 대기업에게 유리한 통상협정을 반대하는 싸움에서 선봉에 섰던 송 조합원이 한때는 삼성 측 변호사였다는 이야기다. ‘책이 많이 팔리지 않았으니, 모르는 사람도 많을 텐데….’

“이런 이야기, 독자들에게 소개해도 되나요?”

“물론이죠.”

마늘 농민들과의 만남, 로펌을 관두다

“재벌 편에서 서서 해고 노동자를 상대로 소송을 하려면 마음이 편치 않았을 텐데, 혹시 그게 지금과 같은 길을 걷게 된 계기인가요?”

“꼭 그렇지는 않아요. 그때는 그냥 평범한 변호사였으니까요. 계기는 따로 있죠. 2002년이었어요. 마늘 농사를 짓는 농민들이 로펌 사무실에 찾아왔죠. 당시 중국산 마늘 수입이 갑자기 늘어서 농민들의 피해가 컸거든요. 이런 경우, 국제통상법은 ‘세이프가드(safeguard)’라는 구제수단을 두고 있어요. 긴급수입제한 관세를 중국산 마늘에 매길 수 있는 거죠. 그런데 한국 정부가 이런 조치를 거부했어요. 그러니까 로펌을 찾아 온 거죠. 그들을 뿌리칠 수 없었어요. 참 열심히 일했죠. 그때 농민들과 함께 마늘도 팔았어요. 농민들이 로펌의 고객인데, 로펌에 낼 수임료가 농민들에게는 없잖아요. 그 수임료를 마련하기 위해서였죠. 제가 속한 로펌에 낼 수임료를 마련하려고, 제가 마늘을 판 거죠. 그리고 얼마 뒤에 로펌을 관뒀어요.”

'동학 이후 처음' 급식 조례 제정 운동, 외교 통상부가 칼을 뽑다

본격적인 계기는 그 뒤에 찾아왔다. <프레시안>과의 첫 만남도 함께였다. 노무현 정부 초기였던 2000년대 초중반, 학교급식 조례 제정 운동이 들불처럼 번졌다. 개인법률사무소를 차려서 자유로운 몸이 된 그도 힘을 보탰다. 

“대중이 이렇게 자발적으로 호응하며 전국으로 번져간 운동은, ‘동학 이후 처음’이라고 하더라고요. 조례 제정이 가능한 지자체에선 모두 모임이 생겼어요. 운동을 시작했던 측 역시 그 정도로 폭발력이 있으리라곤 예상하지 못했어요. 열기가 대단했죠. 무상급식, 친환경급식, 우리농산물급식. 이렇게 세 가지가 목표였어요. 전라남도 나주에서 첫 결실이 맺어졌어요. 학교급식에 우리 농산물 사용을 의무화하는 조례가 제정됐죠.”

하지만 반전이 있었다. 당시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곳, 외교통상부가 칼을 뽑았다. 

“싹을 밟으려고 한 거죠. 외교통상부가 공문을 보냈어요. 나주 지역 학교 급식에 나주 산 식재료를 쓰게끔 한 조례가 통상법 위반이라는 거예요. 이후 전라북도 교육청이 조례 제정을 무효화하려는 소송을 제기했고, 대법원까지 올라갔어요. 자국 법령이 통상법 위반이라고, 자국 정부가 제소한 사건은 유례가 없습니다. 대법원은 원고 측 손을 들어줬죠. 학교급식에 우리농산물을 ‘우선적으로 사용하도록 하고’ 이를 지키는 학교를 ‘선별하여 지원하는’ 방식이 가트(GATT) 위반이라는 판결이었죠.”

<프레시안>과의 첫 만남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재료로 지은 밥을 먹여야 할지를, 우리가 정하면 안 된다는 판결. 송 조합원, 그리고 많은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에게 ‘국제통상의 질서’가 우리의 생활 민주주의를 위협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그때 <프레시안>에 기고를 했어요. <프레시안>이라는 매체는 알고 있었지만, 프레시안에 아는 사람이 있었던 것도 아니에요. 그냥 글을 보냈는데, 실렸죠. 제 입으로 하긴 좀 민망한 이야기지만, 그 글이 당시 급식조례 제정 운동을 하는 이들에게 큰 힘이 됐어요. 당시 대법원 판결로 우리가 하던 활동에 제동이 걸리는 건 아니라는 것, 계속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거죠. 또 대법원 판결이 얼마나 엉터리인지도 낱낱이 알게 됐고요. 그 글을 읽고 용기를 냈다는 이들이 많았어요. 저 역시 매체에 쓰는 글이 지닌 힘을 알게 됐죠.”

그게 <프레시안>과의 첫 인연이었다. 이후, 통상법이 민주주의를 짓누르는 무기로 쓰이는 일이 잦아졌다. 일방적으로 추진된 한미자유무역협정(한미FTA)이 대표적이다. 동시에 송 조합원의 지식과 지혜에 손을 내미는 이들도 많아졌다.  

민주주의의 새로운 위기, 우리가 결정할 문제를 나라 밖으로 떠넘긴다

“우리가 결정해야 할 우리 삶의 문제를, 나라 밖으로 떠넘기는 현상이 언제부터인가 두드러졌어요. ‘세계화’, ‘국제 무역’, ‘통상’ 등을 내세워 벌어진 일이죠. FTA가 대표적이고요. 우리 민주주의가 놓인 조건이 달라진 거죠.”

송 조합원이 굳이 통상법을 전문으로 삼은 건 “사법연수원 시절 통상법이 흥미로워서”였다고 한다. 이렇게 택한 전문 지식이 생활 민주주의를 지키는 방패가 됐다. <프레시안> 기고도 한결 활기를 띠었다. 

이명박 정부 초기, ‘광우병 정국’이 시작됐다. <프레시안> 지면을 통해 한미FTA 협정문을 분석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던 송 조합원의 전문성이 폭발적인 힘을 발휘했던 때다. 미국 사료 조치 관보의 오역, 한국 농림수산식품부 고시의 오류 등을 그가 밝혀냈다. <프레시안>뿐 아니라 다양한 매체에서 활약했다. 서울시내 한복판에서 열린 대규모 촛불시위. 우리가 어떤 음식을 먹을지는 우리가 정해야 한다는, 생활 민주주의 요구의 분출이었다. 결국 이명박 대통령이 두 차례나 대국민 사과를 했다. 

“미국 산 쇠고기 수입을 놓고 벌어진 촛불시위에 대해 폄하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보지 않아요. 그때 광장에 모인 시민들이 있었기에, 30개월 이상 쇠고기는 수입하지 않게 됐죠. 미국 역시 한국과 일본으로 수출하는 쇠고기에 대해서는 특별한 조치를 하겠다고 했고요.”

"광우병 촛불시위로 재판 받은 이들, 사면해야"

아울러 그가 꼭 지면에 소개해달라는 주장이 있었다. 당시 촛불시위로 재판을 받게 된 이들에 대한 사면 조치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대통령이 사과했는데, 그 사과를 이끌어낸 시민을 기소하고 탄압하는 건 부당하다고 봅니다. 2008년 촛불시위는 정부가 국민과 내용 있는 대화를 거치지 않고 일방적으로 정책을 강요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거죠. 국민 건강과 직결되는 검역권 확보를 위해, 정당하게 든 촛불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불이익을 겪거나 명예가 훼손된 시민들을 구제해야 합니다. 사면 및 기소 중지가 필요하고요. 대통령이 하지 않는다면, 국회가 특별법을 정해서라도 해야 한다고 봅니다.”

촛불 정국에서 그가 <프레시안>에 쓴 글은, 당시 정부 정책 및 행정의 허점을 콕콕 찌르는 내용이었다. 시민의 삶에 유형, 무형으로 큰 영향을 미치는 통상협정이 실제로는 얼마나 ‘날림’으로 이뤄지는지를 짚는 글이었다. 그래서 통상교섭본부, 농림부 관계자들은 <프레시안>의 가장 꼼꼼한 독자가 됐다. 당시 송 조합원이 보낸 원고를 보면, 빈틈이 없다. 사실관계에 틀림이 없고, 논리 전개에 오류가 없다. 

“이명박 정부 이후 쓴 글에는 특히 더 공을 들었어요. 정부가 눈을 부릅뜨고 보니까 허점이 있으면 안 되잖아요. <프레시안>에 보내는 글은 보통 네다섯 번은 고쳐 썼던 것 같아요. 글을 쓰고 다듬느라 새벽까지 책상을 지키곤 했죠. 제 글을 받은 <프레시안> 기자 역시 꼼꼼히 검토해서 의견을 주곤 했어요. 필자와 기자가 유기적으로 결합했던 거죠. <프레시안>의 안과 밖 사이에 구분이 없었다고 할까요.”

"<프레시안>, 새 필자 더 적극적으로 발굴해야"

송 조합원의 실력, 그리고 그의 꼼꼼함과 성실성에 대해서는 그에게 적대적이었던 정부와 보수 언론도 선선히 인정했다. 그가 <프레시안> 기고를 통해 한EU FTA 협정문의 번역 오류를 밝혀낸 뒤, <조선일보>는 “변호사 1명 못 당하는 외교관 154명”라는 기사를 냈다. <중앙일보>는 “송기호에게 고개 숙인 김종훈(당시 통상교섭본부장)”이라는 기사를 냈다. 

요즘은 <프레시안>에 글을 쓰는 횟수가 뜸해졌다. 그 이유를 물었다. 

“전에는 아주 구체적인 문제에 관심이 집중됐는데, 요즘은 좀 달라졌어요. 문제의 배경에 더 관심이 갑니다. 한미FTA에 그토록 많은 사람이 반대 했는데, 왜 막지 못했을까. 예컨대 이런 질문이죠. 현실에선 통상과 외교안보가 따로 움직이는 게 아니잖아요. 좀 더 복잡하고 큰 배경을 봐야 할 거예요. 그러다 보니, 구체적인 문제에 글을 쓰는 게 점점 더 어려워지고, 안 쓰니까 더 안 쓰게 되기도 하고요. 또 글쓰기 이외의 활동을 더 요구받게 된 면도 있습니다.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들어요. <프레시안> 역시 새로운 필자를 더 적극적으로 발굴해해야 한다는 거죠. 새로운 필자가 나타나서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하고, 거기에 독자들이 반응하고, 이런 식으로 독자와 필자가 더 긴밀한 관계를 맺었으면 해요. 협동조합으로 전환했으니, 조합원들이 쓰는 글도 더 많아졌으면 합니다.”

"사람은 떠날 수 있죠. 그래도 역사는 나아갑니다"

뜨끔한 지적이다. 새로운 시각을 지닌 좋은 필자를 발굴하고 키우는 일 역시 언론이 해야 할 책무다. <프레시안>은 한동안 이런 역할에 소홀했었다. 송 조합원이 기억하는 <프레시안>의 좋은 필자 가운데 한 명이 고(故) 박상표 수의사다. 고인은 국민건강을위한수의사연대 편집국장으로도 활동하며 <프레시안>에 숱한 글을 기고했다. 송 조합원과 함께 광우병 정국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송 조합원은 고인의 유고집을 준비하는 활동에 참가하고 있다. 

“‘제2의 박상표’가 나와야 합니다. 가장 첨예한 현장에 발 딛고 선 필자를 찾아서 글을 쓰게 해야 합니다. 아무래도 좀 젊어야 하겠죠. 나이 든 이들은 넓게 보는 면도 있지만, 자기 이론에 갇히는 경향도 있어요. 좀 더 현장에 맞닿아 있는 새로운 이야기를 소개해야 합니다. 제가 10년쯤 전에 대법원 급식조례 판결의 문제를 지적하는 글을 썼을 당시, 나이 드셨던 분들은 그런 생각을 못했을 거예요. 통상이란 게 좀 낯선 주제니까요. 지금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제가 보지 못하는 현장, 제가 하지 못하는 생각이 많이 있죠. 그걸 다루는 필자를 찾아내야 합니다. 

사람 하나하나는 지칠 수도 있고, 실망해서 떠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숱한 사람이 모여 만들어 낸 역사는 그래도 앞으로 나아갑니다. 다양한 필자를 발굴해서 글을 소개하는 매체의 역할도 여기에 있다고 봐요. 매체가 지닌 기본적인 힘이라는 게 있거든요. <프레시안>도 마찬가지고요. 지금은 상황이 어려우니까, 그 힘이 가리워져 있을 수도 있죠. 하지만 그 힘은 결국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역사를 길게 내다봤으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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