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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일본의 영광을 싣고 달릴 뻔했던 한국 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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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일본의 영광을 싣고 달릴 뻔했던 한국 철도

[달리는 철도에서 본 세계] <35> 청일전쟁과 일본의 철도 장악 야심

무능한 왕조 체제와 반인간적 계급 질서를 철폐하고자 일어났던 동학 농민들이 외국 군대의 진출만은 안 된다며 자진 해산한 게 1894년 6월이었다. 파병의 원인이었던 농민들의 항쟁이 끝난 만큼 청나라와 일본의 군대는 본국으로 철수해야만 했다. 그러나 두 나라의 군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조지 부시가 이라크 침공을 감행하면서 존재하지 않았던 대량살상무기의 제거를 내세웠듯, 군대의 침략 행위에 앞서 설정된 명분은 허구에 불과할 뿐이었다.

6월 15일 일본 각료회의는 '조선의 변란에 대한 우리의 태도 및 장래의 행동에 관한 건'을 결정했다. 그 내용은 "첫째, 조선의 내정을 청일이 공동으로 개량하기 위해 양국에서 상설위원을 파견하여 지도한다. 둘째, 청국이 거부한다면 일본이 단독으로 개혁을 지원한다"는 것이었다. 공사관 및 거류민의 보호라는 애초의 파병 목적은 이미 휴지 조각이 되어버렸다. 일본이 청에 함께 조선의 내정을 개혁하자고 제의한 것은, 청이 그것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에 대해서는 그 어느 나라보다 우월적인 영향력을 확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청의 입장에서 일본의 공동 행보 요구는 조선에 대한 독점권을 내놓으라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일본은 청이 요구를 거절하자 곧바로 계획된 행동에 돌입한다. 조선에 일본의 개혁 내용을 즉각 실시하라고 압박하는 것이었다. 청과 일본 사이에서 눈치를 보고 있던 조선 정부는, 시간이 흐를수록 중무장 군대가 경복궁 코앞에 주둔해 있는 것을 거북해 했다. 7월 18일 조선 정부는 대규모 일본군 부대의 주둔이 백성들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으니 일본군이 철수하기 전까지는 일본이 요구한 개혁을 추진할 수 없다고 일본공사 오토리 게이스케에게 통보했다. 오토리 게이스케의 답변은 단호했다. 7월 20일 최후통첩으로 3일의 시간을 줄 터이니 조선정부가 입장을 결정해 달라고 압박했다.

청나라에 기대했던 민 씨 정권은 최후통첩 시간을 하루 앞둔 22일 밤 "청의 군대는 조선의 요청이 없으면 떠나지 않을 것"으로 판단, 일본의 일방적인 내정 간섭에는 응할 수 없음을 밝혔다. 그러자 이날 밤 용산에 진주해 있던 일본군에게는 비밀 긴급 명령이 떨어졌다. 새벽 두 시 심야를 틈타 2개 대대 병력이 중무장하고 용산의 막사를 떠났다. 대대장 모리 소좌와 하시모토 소좌가 자신들의 부대를 이끌고 남영동 쪽으로 이동했다. 원래 이들 부대는 용산 나루터로 향해야 마땅했다. 부대 이동을 공표하며 내세운 이유가 충남 아산에 주둔한 중국군을 몰아내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한강을 등지고 곧바로 왕궁으로 향했다.

선발대가 먼저 한 일은 한성 전신국의 전선을 절단하는 일이었다. 일본군의 공격을 청국 공사가 알지 못하게 하기 위한 조치였다. 1개 대대는 경복궁을 정면으로 치고, 나머지 대대는 왕궁 후위로 돌아가서 치는, 이른바 '양명 공격'을 하는 것으로 작전이 짜였다. 일본군은 건춘문과 춘생문 부근에서 조선군 경비대와 맞부딪쳤고 곧바로 총격전이 벌어졌다. 산발적으로 이어지던 총성이 멎은 것은 오전 7시 반이었다. 조선군은 77명의 사상자를 낸 채 제압당했다. 신식 무기로 무장한 데다, 새벽의 기습작전을 수행했던 일본군을 당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첫 총성이 일어난 시간은 오전 4시 20분, 경복궁 문이 열린 시간은 5시였다. 일본군의 전격 작전은 세 시간 만에 끝이 났다. 치밀하게 준비된 새벽 기습으로 왕을 잡는다는 일본군의 작전목표는 완벽히 실행되었다. 궁을 장악한 일본군은 왕을 사로잡고는 "추악한 도당으로부터 왕을 구출하기 위해 왔다"고 선언했다. 청일전쟁의 시작점은 조선과 일본의 충돌이었다. 도쿄에서 발행된 <국민신문> 25일 자는 "경성 소(小) 전쟁", "한일 군 무력충돌"을 제목으로 해, 한성에서 벌어진 사태를 알렸다.

왕을 포로로 잡은 일본군은 민 씨 일파를 축출하고 정치적 대척점에 섰던 흥선대원군을 권좌에 올려 친일 내각을 구성했다. 조선의 문명개화와 진보를 이루겠다며 내세운 사람이 쇄국의 상징이었던 대원군이라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일본은 다음 단계의 계획을 즉각 실행에 옮겼다. 청나라와의 전쟁 명분을 확보하는 일이 그것이었다. 공사관의 일개 서기관 스기무라 후카시는 "정당한 명분 하에 청국을 토벌하길 바랐는데 드디어 실현되었다"고 비아냥댔다. 대원군을 세워놓은 가운데 조선의 위임장이 양국 외무 당사자의 합의 속에 일본에 전달된다. 조선의 아산에 진주한 청군의 철퇴를 일본군에게 요청하는 문서였다. 일본군은 조선 정부의 간절한 요청을 수락하는 모양새를 갖추어 청일전쟁에 대한 형식상 정당성을 확보했다.

1894년 7월 한성 한복판 왕궁이 외국 군대의 군홧발에 짓밟히는 수난을 당하던 시기, 일본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는 다케노우치 스나라는 인물을 불러 특별임무를 맡긴다. 다케노우치 쓰나가 외무대신 무ㅆ에게 받은 표면적인 임무는 조선 정세 시찰이었다. 다케노우치는 조선에 들어와 조선 정부에 파견되어 있는 오미, 조베 및 오자키 사부로를 만났다. 이들이 한 일은 한양-부산 간 경부 철도 부설 계획을 현실화시키는 일이었다. 이미 노선에 대한 답사는 여러 차례 이루어진 터라, 그들은 조선 정부로부터 철도 부설권을 얻기 위한 전략을 고민했다. 오미와 조베는 조선 정부에 재직 중인 마스다 노부유키와 경인철도 부설을 위한 긴밀한 협의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조선의 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자 청도 조선 파병 전력을 증강했다.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최후통첩을 받은 다음 날인 7월 21일부터 텐진 항은 청나라의 조선 파병군으로 북적였다. 증기선 11척이 급히 닺을 올렸고 8000명의 병력이 조선을 향했다. 왕궁을 장악하고 왕을 포로로 삼아 친일 정권을 세운 마당에, 일본은 청과의 전쟁을 더 이상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8월 1일 일본은 청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에 맞서 청도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다. 이미 7월 25일과 29일, 서해에서의 해전과 아산에서의 육군 간 공방전으로 전야제를 치른 마당에 선전포고는 형식적인 조치였다. 동아시아의 두 강국이 맞붙게 되었는데 전쟁터는 조선 땅이었다.

▲일본과 청이 조선에서 대립하던 당시 모습을 그린 르몽드지의 삽화 ⓒ르몽드

청일전쟁이 조금 더 오래 진행됐다면 철도 역사가 바뀌었다?

지난 역사는 오늘을 사는 이들이 큰 대가 없이 배울 수 있는 좋은 교훈이다. 미국 동아시아 전략의 선봉대 역할을 해오던 일본은 자신들이 주체할 수 없는 무력을 확보한 상황이다. 극우 정권이 꾸준히 시도하던 평화 헌법 개정노력도 결실을 맺기 직전에 놓였다. 일본 전후를 상징하는 평화헌법이 무력화되면, 전쟁은 현실이 될 가능성이 커진다. 몸이 근질거려 주체할 수 없는 거인의 인내력이 바닥나고 있는 시점이다. 아시아에서 새로운 패권을 차지하고자 하는 일본과 무섭게 성장하는 중국 틈바구니에서 지혜로운 대처를 하지 못하면 100여 년 전 그랬던 것처럼 한반도는 비극의 무대로 전락할 수 있다.

한국 철도사(史)에서 철도가 처음 운행된 것은 1899년인데, 만약 청일전쟁이 조금만 더 오래 진행되었다면 그 시기가 더욱 빨라져 1895년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전쟁이 터지자 일본의 대본영은 최우선 순위로 조선에서의 철도 부설을 추진하게 된다. 당시 일본은 조선 정부로부터 부설권을 따내는 형식과 절차를 염두에 두지 않아도 됐다. 철도 부설은 단지 긴박한 전쟁 상황에서의 전략적 작전으로 간주되었다. 대본영은 1894년 10월, 운수통신원 철도기사 겸 공학박사인 센고쿠 미쓰기를 파견하여 경부선과 경인선을 답사하도록 했다. 센코쿠 미쓰기 일행은 인천에 도착하자마자 일본군 병참사령부의 지원을 받아 경부선과 경인선에 대한 조사를 마무리 지었다. 대본영은 최우선적으로 한양-인천 간 군용철도를 부설하기로 결정을 내렸고 건설 책임자로 센코쿠 미쓰기를 지정했다. 공사비 200만 엔은 대본영의 전쟁비용으로 충당하도록 했다. 그러나 청일전쟁이 일본의 일방적인 공세 속에 마무리될 조짐을 보이자 군용철도 건설은 중단된다.

대본영의 청일전쟁 수행용 군용철도 건설이 무산되었다고 일본의 조선철도 장악 야욕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것은 아니었다. 군부와 무관하게 이미 일본 정부 차원에서의 조선철도부설권 확보 노력은 집요하게 진행되었다. 1894년 8월 20일, 한양에 있던 일본공사 오토리 게이스케는 조선의 내정 개혁에 관한 조관 체결을 통해 우선 경부선과 경인선의 철도부설권을 확보했다. 이른바 조일잠정합동조관으로, 이는 대본영이 추진하던 군용철도와 무관한 일이었고, 이것은 일본이 최초로 해외 철도 부설권을 확보하게 되는 순간이 됐다. 8월 20일 오토리 게이스케 공사가 당당하게 조일합동조관 체결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이날 일본군이 청군을 개성 밖으로 물리친 덕분이었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일본의 폭주를 막아 주리라 믿었던 청군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는 상황에서 일본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조일잠정합동조관은 경부·경인철도의 부설권을 일본에 부여하는 것 외에 구체적인 내용을 담지 못한 조약이었다. 어떤 노선을 먼저 건설할지, 노선은 어떻게 결정할지, 자본금은 어떻게 조달할지, 철도부지 수용은 어떤 조건으로 할지, 아무것도 명시되지 않았다. 청일전쟁이 한창인 때여서 급히 부설권만을 확보했던 것이었다.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긴 했지만, 일본 마음대로 조선을 좌지우지할 수는 없었다. 조선과 동아시아를 둘러싼 이해관계 조정은, 청보다 더 큰 힘을 가진 영국, 미국, 독일, 러시아 등 열강 간에 교통정리의 선결을 필요로 했다.

다급해진 일본은 1895년 1월 이노에 가오루 내무대신을 조선 공사로 부임시켜 철도 부설 관련 후속 교섭을 요구한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일본과 교섭에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 조선에서 청이 몰락하는 상황이었지만, 다른 열강들은 여전히 일본의 행동을 제약하고 있었다. 일본은 4월에 새로운 요구안을 조선정부에 보낸다. 노량진-인천 간 철도부설에 대한 '신조약안이 그것이었다. 4월 17일 시모노세키 강화조약으로 청일전쟁 승리를 확정 지은 일본이 자신감 있게 밀어붙인 조치였다. 이에 러시아와 독일, 미국, 영국을 비롯한 열강들은 공개적으로 불만을 토로했다.

청나라의 패퇴를 지켜본 조선 정부는 일본과의 신조약안에 관한 세부 협정에 나섰다. 20여 일의 협상 기간이 끝나고 마침내 조선 철도 최초의 부설계약이 맺어지려는 순간, 국제정세의 큰 변화가 조선에도 파장을 미쳤다. 청일전쟁의 결과를 놓고 벌어진 3국간섭이 그것이었다. 청과 일본의 강화조약인 시모노세키 조약의 내용은 △조선의 독립 승인 △요동반도 및 대만의 할양 △2억 냥의 배상금이었다. 일본 측 협상 대표로 참여했던 전권대표 이토 히로부미와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는 개선장군이 되었다. 그러나 곧바로 열강의 개입이라는 역풍을 맞았다. 여기에 앞장선 것은 러시아였다. 겨울에 얼지 않는 항구를 간절히 바랐던 러시아의 입장에서 요동반도가 일본에 넘어간다는 것은, 러시아의 경제·군사적 이권이 상실됨을 의미했다. 러시아는 동맹국 프랑스를 끌어들이고 중국에서의 이권 확보에 눈독을 들인 독일을 포섭, 일본을 압박했다.

3국이 일본에 요구한 핵심 사안은 청이 양보한 요동 반도를 포기하라는 것이었다. 당장 무쓰 무네미쓰는 반발하고 나섰다. 일본의 피로 얻은 요동을 외국의 압력에 굴복해 내놓을 수 없다는 여론도 일본 내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유럽에 대한 근원적 존경심과 두려움을 갖고 있던 일본은 3국의 요구를 내칠 수 없었다. 3국이 일본에 요동반도의 환급을 제시한 날은 1895년 5월 4일이었다. 일본이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승전 무드를 즐긴 지 불과 20일도 채 지나지 않은 시기였다.

같은 날 조선에서도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다. 러시아, 영국, 미국, 독일 대표가 조선의 외무대신 김윤식을 만났다. 4국 대표는 조선철도부설에 관한 조일잠정합동조관, 그리고 협상이 마무리되던 경인철도 부설에 관한 신조약안에 대해 단도직입적으로 김윤식에게 경고했다. 이들 4국이 공동으로 서명해 전달된 내용에는 "철도·전신 등의 이권을 모두 한 나라에만 준허하는 것은 다른 각국 상민에게 불이익을 주는 행위"라고 명시함으로써 일본의 조선철도 장악에 문제를 제기했다. 4국 대표의 압박 이후 일본과의 철도 협상은 지지부진해졌다.

청을 몰아냄으로써 일본의 위세가 하늘을 찌를 것으로 생각했던 조선 정부는 예상외로 일본이 순순히 요동반도를 내어놓는 모습을 봤다. 구미 열강들의 힘을 실감하게 됐을 것이다. 이때부터 조정에는 친미파, 친러파, 친일파 등 외국에 기댄 파벌들이 조선이 망할 때까지 개인적 경험과 정치적 이해관계를 가지고 이합집산을 거듭하게 된다. 또 서양세력에 대한 호의, 의존도 역시 커지게 된다. 청의 몰락은 이런 경향을 더욱 가속화했다. 집권 세력이 사대주의의 늪에 빠져 백성의 안위를 돌보지 않는 몹쓸 버릇은 그 뿌리가 꽤 깊은 셈이다. 국제 정세의 냉혹함을 인식하지 못한 채 1905년 일본에 의해 강제적으로 체결된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외교 무대에 호소하려 했던 고종황제와 그 주변 책사들이 기댈 언덕도, 더 힘센 외세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조선이 '아름다운 나라'로 이름 붙인 미국조차, 이미 가쓰라-태프트밀약(1905년 일본과 미국이 체결한 밀약. 내용은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확인한다. 한국은 일본이 지배할 것을 승인한다"는 취지였다. 편집자)을 통해 일본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참이었다. 국제 정세에 무지한 이들은 '시련'을 겪게 된다.

아시아의 비극 위에 세워진 일본의 영광

3국 간섭이 일본의 요동반도 획득을 막았다면 한성에서의 4국 간섭은 일본의 조선철도부설을 좌절시켰다. 조선철도 장악에 대한 일본의 집요한 노력이 번번이 실패를 겪은 셈이다. 일본은 조선철도를 쟁취하기 위해 더 신중하고 치밀한 계획을 세우게 된다.

청일전쟁이 끝난 후 일본은 새로운 자신감으로 충만했다. 감히 넘볼 수 없다고 여겼던 거국 중국을 제압했다는 사실은 모든 사람에게 자부심을 느끼게 했고, 그들을 애국심으로 단결하도록 만들었다. 한편으로는 부족한 실력을 키워야 한다는 실력양성론이 탄력을 받았다. 힘들게 얻은 요동반도를 강대국의 압력으로 빼앗긴 만큼, 힘을 더 길러 외국의 강압 때문에 일본이 주권을 포기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분위기가 사회를 강타했다. 특히 군사력의 증강만이 일본의 주권을 지킬 수 있다는 논리가 힘을 얻었다. 부국강병이 최고의 국가적 목표가 되었다. 1895년 8월 재정을 담당하는 마쓰카타 마사요시는 '재정의견서'를 내놓고 청일전쟁 후 국가 재정 목표를 밝혔다. 그중 가장 중요한 내용은 군비 증강과 철도 확장이었다.

재정계획서가 제출한 세출 증가 목적의 첫째는 육군 확대, 둘째는 해군 확대, 셋째는 제강소 건설, 넷째는 철도 및 전화의 확장이었다. 제강소는 군사력 증강과 철도 부설을 위해 꼭 필요한 사회 기반시설이었다. 결국, 군대와 철도로 대일본 제국의 영광을 구현한다는 계획이었다. 이제 일본의 영광은 군대와 철도를 타고 빛날 일만 남았다. 아시아인들의 비극 위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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