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로라하는 신문들이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세월호 정국에 관한 박근혜 대통령의 대응, 여야의 입장, 세월호 특별법 내용 등에 대한 찬반을 물었습니다. 굳이 수치를 다시 소개하지는 않겠습니다. 대체로 세월호 유가족과 야당에게 불리한 결과여서가 아닙니다. 세월호 참사를 갈등 이슈로 접근하는 그 시각에 동의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세월호 참사가 벌어진 뒤 한동안, 박근혜 대통령과 여야 정치권은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나라를 책임지겠다는 위정자들은 '이게 나라인가'라는 절망적인 물음에 답할 길이 없었을 겁니다. 나라를 탓한 국민도 한 사람의 개인으로 반성하고 참회했습니다. 아이들의 죽음 앞에 그 누구도 떳떳할 수 없었으니까요. 불과 넉 달 전, 우린 그랬습니다. 생때같은 자식 잃고 바다만 쳐다보는 부모의 등 뒤에서 그 누구도 보수와 진보를, 여와 야를 가르지 않았습니다.
어디서부터 틀어졌는지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세월호 참사가 6.4 지방선거와 7.30 재보궐선거와 결부돼 흘러온 탓만은 아니겠지만, 그런 정치 일정이 반성의 본질을 왜곡하는 데 일조한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선거에 이긴 쪽은 마치 면죄부라도 받은 듯 득의양양합니다. 삼권분립과 입법질서를 운운하며 참사의 진상규명을 회피합니다. '일반 국민'의 정서를 거슬러 행패를 부리는 난동꾼인 양 유가족을 유리(遊離)시킵니다. SNS에는 유가족을 보상금에 눈이 먼 집단으로 매도하는 글들이 넘쳐납니다.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자'는 언론의 여론조사는 객관을 가장해 세월호 유가족을 고립시키는 방편이었을 겁니다. 그렇게 세월호 참사는 어느새 이념과 세대, 여야의 갈등 쟁점으로 고착돼버렸습니다.
정치의 무능을 절감한 유가족은 "도대체 그 '정치'가 뭐냐"고 묻습니다. "정치인들은 이해하는 척 의도를 숨기고 앞에서 하는 말과 뒤에서 하는 말들이 다른 데에 익숙해져 있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리곤 박 대통령에게 묻습니다. "왜 안갯속에 유독 세월호를 출항시켰습니까? 왜 세월호가 침몰할 때 선장과 선원들만 구조했습니까? 왜 침몰한 소식을 듣고 구조에 총력을 기울이지 않은 채 거짓말만 해댔습니까? 아이들에게 이 진실을 밝히는 떳떳한 부모가 되고 싶은 마음이 과욕입니까?"라고.
청와대 코앞에서 묻고 또 물어도 박 대통령은 대답이 없습니다. "세월호 특별법을 만들 주체는 국회"라는 대변인의 매몰찬 답변만 반복됩니다. 부산 자갈치 시장을 찾아 상인들을 격려하고, 태릉선수촌을 방문하고, 뮤지컬 공연을 관람한 박 대통령의 '민생 돌보기'에 유독 세월호 유가족이 빠져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시시콜콜 '깨알 지시'로 유명한 청와대 회의에서 왜 '세월호'라는 단어 자체가 언급조차 되지 않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박 대통령이 경제 법안 처리를 채근하자, 최경환 부총리를 비롯한 경제부처 장관들이 예정에도 없던 경제·민생 법안 관련 대국민담화를 발표한 것도 세월호 국면을 탈피하려는 청와대의 의중이 반영된 듯합니다. 세월호 정국이 우리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투입니다. 야당과 유가족들을 비난하는 단골 메뉴로 세월호 사건의 '정치적 이용'이 등장하는데, 이쯤 되면 세월호 참사를 지렛대로 경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쪽은 청와대와 정부가 아닌가 싶습니다.
박 대통령이 공을 떠넘긴 국회 상황도 암담합니다. 유가족은 이렇게 토로합니다.
"새정치민주연합은 가족의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듣는 듯하더니, 가족의 요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새누리당은 가족의 목소리를 들으려고도 하지 않더니 이제야 가족들과 만나겠다고 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특별법이 어떤 것인지 말하기 위해 만나자는 요청이 오면 나가보기도 하지만, 우리의 진심은 왜곡되고 언론은 뭔가 물밑에서 다른 협상을 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곤 합니다. 지금까지 정치가 그런 식으로 굴러 왔나 봅니다. (…) 국회의원들이 장외다, 원내다 하는 걸 두고 다투는 소리도 들립니다. 어디가 안이고 어디가 밖인지 보다 중요한 것은 국민의 목소리가 어디에서 울려 퍼지고 있는지 입니다."
유가족이 직접 법을 만드는 정치 협상에 임해야 하는 현실은 우리 정치의 무능을 그대로 드러내는 장면입니다. 유가족과 두 차례 만난 새누리당은 소통과 교감을 강조합니다.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고 합니다. 카메라 앞에선 새누리당 협상단이 유족을 얼싸안는 장면도 연출했습니다. 하지만 내용상의 진전은 아직까지 없습니다. '비공개' 면담에선 진상조사위원회든 특검이든, 참사의 제대로 된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실질적인 강제력을 부여해달라는 유가족의 바람을 수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새누리당이 정말 정확한 진상규명과 책임소재를 밝히고 재발방지 대책을 마련하자는 세월호 특별법의 목적에 충실하다면, 진상조사위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주거나 특별검사를 야당과 가족이 추천하는 방안에 '법체계'를 내세워 반대만 할 일은 아닙니다. 새누리당이 정치력을 발휘해 전향적인 결단을 한다면 특별법도 풀리고 막혀 있는 민생 법안도 순조로운 처리가 가능합니다.
그럼에도 청와대와 새누리당이 세월호 특별법의 문턱을 한참 높여놓고 과민 반응하는 까닭은 박 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경호 말고는 이유를 찾기 어렵습니다. 지난해를 지배한 국정원의 대선개입 사건으로 '정권의 정통성'에 금이 간 마당에, 세월호 참사로 '무능한 정권'의 실상이 만천하게 공개되는 것이 두려운 탓이겠지요. 세월호 참사 당일 박 대통령의 묘연한 행적을 다룬 일본 <산케이 신문>의 보도에 법적 대응까지 하는 걸 보면, 그런 의심은 더욱 짙어집니다. 진실과 책임을 회피한 채 세월호 참사와 경제 살리기를 대립항에 놓고 사회 갈등을 조장하는 여권의 '출구전략'은 비겁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여권이 이처럼 속 보이는 미봉책을 쓸 수 있는 것은 야당의 무능 때문입니다. 새정치민주연합 박영선 원내대표가 8월 7일 새누리당 이완구 대표와 세월호 특별법 관련 1차 합의안을 발표하며 환하게 웃었을 때, 유가족은 새정치민주연합에 대한 신뢰를 거뒀습니다. 열이틀 뒤인 19일 재협상을 타결했지만, 세월호 유가족은 가족 총회를 거쳐 이조차도 부결했습니다. 박영선 대표가 궁지에 몰리고 당내 입지조차 휘청거렸음은 물론입니다. 유가족으로서는 합의안의 내용도 문제지만, 지방선거와 재보선을 세월호 이슈로 타고 넘은 야당의 표변(豹變)도 야속했을 겁니다. 유가족들은 물론이고 협상의 상대방인 새누리당에게도 배척된 야당은, 그저 새누리당과 유가족들의 협상 상황을 지켜볼 뿐입니다.
협상의 실패 이후에도 새정치민주연합은 좌충우돌입니다. 문재인 의원은 광화문에서 단식 농성을 했지만, 그 진정성이 알려지기보다는 계파적 이해와 개인 정치를 하고 있다는 비난이 먼저 쏟아졌습니다. 문 의원과 전혀 다른 방향에서, 15명의 의원이 집단으로 강경 투쟁을 선언한 당의 방침에 반발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중심을 잡아야 할 지도부는 원내도 장외도 아닌 어정쩡한 국회 내 철야농성을 하며, 이렇다 할 방침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선후보급 인사와 당 지도부, 의원들이 모두 제각각인 분열상입니다. 싸워야 할 때와 물러서야 할 때를 판단하지 못하는 야당, 국가정보원 등 국가기관의 대선개입 사건이 이슈였던 지난해에 이미 보았던 모습입니다.
이런 식으로는 야당의 선의조차 국민적 동의를 얻기가 어려워집니다. 일부 여론조사에서 새정치민주연합 지지율이 10퍼센트(%)대로 떨어진 지표가 이를 반증합니다. 박영선 원내대표의 거취 문제를 놓고도 계파별로 아웅다웅하고 있습니다. 박 원내대표의 미숙한 지도력이 원인을 제공한 건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지금 같아선 비상대책위 체제 이후에도 정상적인 리더십이 작동할 가능성은 없어 보입니다.
이처럼 대통령과 집권여당이 책임을 회피하고 야당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사이 세월호 정국은 장기화될 조짐입니다. '유민 아빠' 김영오 씨는 46일간의 단식을 풀었습니다. 둘째 딸과 노모의 걱정과 간곡한 만류를 모른 척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갖은 수모와 돌팔매를 맞으면서도 견뎌온 그가 단식을 푼 중요한 이유는 역시 정치의 실패 때문입니다. 새누리당과의 협상이 진전도 없이 장기화될 전망을 보이자 "더 긴 싸움"을 채비한 겁니다. 그럼에도 새누리당은 김 씨의 단식 중단을 '협상의 성과'라며 아전인수 해석을 합니다. 매몰찬 대통령과 오만한 여당, 무능한 야당이 합작해 유가족들을 외딴 섬에 가둔 정치의 실패가 야속한 하루하루입니다.
<주간 프레시안 뷰>는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만의 차별화된 고급 칼럼지입니다. <프레시안 뷰>는 한 주간의 이슈를 정치/경제/국제/생태/세월호 등으로 나눠 각 분야 전문 필진들의 칼럼을 담고 있습니다.
정치는 임경구 프레시안 기자 및 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가 번갈아 담당하며, 경제는 정태인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원장, 국제는 박인규 프레시안 편집인이 맡고 있습니다. 생태와 세월호는 각각 하승수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과 김익한 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원장이 격주로 진행합니다.
이 중 매주 한두 편의 칼럼을 공개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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